멜라지는 마음 현대문학 핀 시리즈 에세이 3
김멜라 지음 / 현대문학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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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유. 나에게는 이것이 글을 쓰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다. 나는 그 자유를 확인받기 위해 책을 읽고, 나처럼 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누군가를 떠올리며 글을 쓴다. 한편으론 좋아하는 마음을 말할 수 없어 다른 것으로 빗대어 말하고, 말할 수 없다며 숨어버린 시간들이 내가 소설을 읽고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으로 펼치고 싶다. 그리 대단한 취향이 아닐지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기록해나가고 싶다.               p.39~41


김희선 작가의 <밤의 약국>, 송승언 작가의 <덕후일기>에 이은 핀에세이 세 번째 작품이다. <제 꿈 꾸세요>, <없는 층의 하이쎈스> 등의 작품을 발표했던 김멜라 작가의 첫 에세이로 '월간 현대문학'에 연재한 글과 미발표된 원고를 묶었다. '열심히 읽지 말아주세요'라는 제목의 글로 에세이 연재를 시작했다는 작가의 글은 굉장히 솔직하고, 내밀한 내용들로 가득 차 있다. 에세이가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하는 거라면 자신은 그런 쪽으로 영 소질이 없다고, 그래서 자신은 에세이를 쓰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서 쉽게 시작할 수 없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에세이라는 그 어려운 산을 향해 걸음을 뗄 수 있도록 해준 건 곁에 있는 오랜 연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유년 시절부터 가장 원하는 유일한 하나에 모든 힘을 쏟았다는 작가에게 유일한 하나는 엄마였다가 친구였다가 지금은 연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오랜 연인 안온과의 일상 이야기가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글을 읽다 보면 안온이라는 사려 깊고, 다정한 인물이 마치 소설 속 캐릭터인 것처럼 매혹적으로 느껴졌다. 그만큼 소중한 대상을 대하는 서로의 태도에 담긴 마음이 와 닿았고, 충만한 행복과 따스한 안도같은 감정들이 손에 잡힐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글을 읽어 주고, 그 글에 마침표를 찍어주는 존재가 있다는 건 작가로서 매우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작가로서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든든한 지원군이자 가족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그만큼 작가와 연인의 관계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어떤 기대나 포부를 담는 대신 그런 기대를 내려놓는 가벼움으로, 명사보다는 동사로, 문지르고 비비는 접촉으로, 긴장이 풀린 휴식, 몸과 몸이 닿았을 때 저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으로, 내가 뿌리내릴 수 있는 땅과 뻗어가고 싶은 하늘을 이름에 담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충만한 순간을 글로 쓸 수 있기를 바랐다. 그것이 세상에 내어 보일 수 있는 내 안의 사랑이니까. 내가 받은 선물이니까. 괜찮아, 멜라져도 돼. 그렇게 편한 얼굴로 말하고 싶었다. 부디 그 이름이 세상에서 마음껏 멜라지기를 바라며.                 p.305


젊은 작가상, 문지 문학상, 이효석 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가장 주목받는 작가가 되었지만, 서른둘 겨울에 처음 소설을 발표한 이후 6년 동안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생활이 이어졌다. 미발표 원고까지 긁어모아 겨우 첫 소설집을 냈지만, 인터넷 서점 판매 지수가 도무지 오르지 않아 초조하고, 서글퍼하던 불면의 밤이 있었다. 그렇게 ‘안절부절못하던’ 그 시간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내고 있는 지금은, 지난 6년간 발표한 소설을 합하고 곱한 것보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있다. 좋았어, 잘했어, 잘하고 있어,와 같은 말이 더 나아갈 힘을 얻게 한다. 작가 역시 좋아요, 라는 말을 직접 하는 건 잘못하지만, 그런 말들로 용기를 얻고,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헤매던 시절을 거쳐, 지금은 삶에서도, 글에서도 안정을 찾은 작가의 일상을 응원해주고 싶어졌다. 


누군가는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왜 좋은지, 무엇이 좋은지, 그 이유를 자세히 밝히면 환상이나 신비감이 사라진다고도 하지만, 작가는 좋은 이유를 하나하나 떠올리며 그 마음을 되새기는 게 좋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자신에게 '마땅히 좋아할 만하다'라고 말하며 그 마음을 지지해주고 싶다는 말이 참 예쁘고도, 사랑스러웠다. 이 책 속에는 그렇게 작가가 좋아하는 것들에 관한 고백과 기록들이 가득하다. 비, 수박, 클래식 협주고, 남산도서관 4층 자연과학실, 그리고 온점. 그렇게 쓰인 글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담긴 어떤 정서와 반짝거리는 감정들로부터 보편성을 뛰어 넘는 진실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핀 에세이> 시리즈는 텀이 긴 편이라, 더 기다리며 읽는 맛이 있는 것 같다. 내년에는 또 어떤 작가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을지 기대가 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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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마법사
해도연 지음 / 구픽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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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나가 마법을 눈앞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다. 어떻게 마법이 이 세상에 나타났는지에 대한 얘기도 많이 보고 들었다. 15년 전, 폭발의 중심지에서 발견된 신원미상의 시체.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폭심지에 그 시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어 처음엔 아무도 접근하지 못했다. 시체는 많이 훼손되었지만, 전신을 덮은 망토 같은 로브는 멀쩡했고, 시체의 손에는 기다란 막대기가 쥐여 있었다. 누가 처음 그 시체를 '마법사'라고 불렀는지는 알려지지 않지만, 소문 속 모습을 생각하면 제법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세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시체는 사라졌다.            p.32


2008년 서울, 크리스마스 저녁에 세나는 남자 친구와 함께 광화문 광장을 걷는 중이다.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골목마다 캐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영화에서나 봤던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한 참이다. 세나는 이보다 더 완벽한 크리스마스는 다시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이 일어나고, 크리스마스는 재앙이 된다. 폭발로 인해 수많은 피해자가 발생했고, 도시의 지형 또한 완전히 바뀌어 버린다. 그리고 15년 뒤, 2023년의 크리스마스 세나는 한 카페에서 기사를 작성하다 범죄 현장을 목격한다. 목격자들이 아무도 보지 못한 붉은 빛을 보았다는 이유로 ‘재난후대책위원회’ 요원들은 세나를 찾아와 도움을 요청한다. 최근 구도심에서 살인 사건과 실종 사건이 있었는데, 범인이 마법사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다는 거였다. 


사실 마법은 15년 전 의문의 폭발 사건 이후에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당시 폭발의 중심지에서 발견된 마법사의 시체가 인간을 초월한 존재의 것이라는 소문이 나면서, 상당 부분이 사람들에 의해 훼손되거나 유실이 되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시체를 먹거나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상한 힘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말을 거역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건물의 벽과 바닥이 갈라지게 하고, 칼과 총알을 막는다거나, 무엇이든 부술 수 있는 능력 등을 사람들은 '마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신체가 얼마나 많이 퍼져 있고, 얼마나 많은 마법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점차 마법사의 신체가 범죄에 사용되기 시작했고, 수습을 위해 재난대책위원회가 독립적인 수사권을 부여 받아 활동하게 된 것이다. 세나는 그들과 함께 범인을 쫓으며 15년 전 서울의 중심에 추락하며 모두의 인생을 바꾸어 버린 충격적인 ‘그것’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다. 





"네. 며칠 뒤 용이 알에서 깨어났고, 말을 했어요."

"웃기지 마요. 판타지 영화도 아니고. 그런 주둥이와 구강 구조로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어요. 영화를 볼 때마다 얼마나 웃기던지."

세나는 웃지 않았다.

"당신이 생각하는 용과는 달라요. 그리고 굳이 입으로 말할 필요도 없고."

페이가 통로 벽을 두드리자 벽이 갈라지더니 양옆으로 움직였다. 통로는 곧 넓은 공간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용이 있었다.               p.118~119


범인은 마법사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노리고 있는 중이었다. 그들을 죽여서 마법사의 몸을 회수하고 있는 것이죠. 범인도 역시 마법을 사용하고 있기에, 그를 쫓는 쪽에서도 마법사의 신체를 활용해야 했다. 세나는 마법사의 각막을 이식해, 마법사의 눈을 가지게 된다. 마법사의 시선을 가지고 있으면 마법을 볼 수 있고, 마법을 사용한 사람과 사용된 곳에 남겨진 흔적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추적 능력을 사용해 살인 사건과 실종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수만 명이 밀집해 있는 종교 시설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무사히 빠져 나오게 되지만 또 다시 벌어진 참사의 용의자가 되어 버리고, 그 와중에 만난 대형 버스 크기 정도의 용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용에 의해 마법사와 용의 대결에 대해, 15년 전 발생했던 폭발에 대해 듣게 된다. 용은 마법사의 부활을 막고 세상의 균형을 이루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데, 과연 마법사를 부활시키려는 세력과 맞서 이길 수 있을지 이야기는 끝을 향해 거침없이 달려간다. 


이 작품은 용과 마법사가 뒤엉킨 도시라는 판타지 세계를 그리고 있는 해도연 작가의 신작이다. 마법사와 용의 처절한 사투라는 비현실적인 배경에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과거의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 담백하면서도 따스하게 그려져 있다. 단 한 사람을 지키지 못했던 주인공에게 모두를 구할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지켜낼 수 있을까. 자, 이 세계의 처음이자 마지막 마법사를 만나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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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 숲속의 우드 와이드 웹
수잔 시마드 지음, 김다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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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우리랑 비슷하다고? 그리고 나무가 선생님이라고?" 나는 물어보았다. 진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일까?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트 세일리시 사람들은 나무들이 공생 본능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다고 해. 숲 바닥 아래에 나무들의 연대와 강인함을 지켜 주는 진균이 있다고."

얼마나 놀랐는지는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진균에 대해 추측했던 바가 이미 자연계와의 인연이 깊은 선주민들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보다 더 마법 같은 생일 선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p.118


삼림 생태 학자인 수잔 시마드는 2005년, 다가올 300년 동안의 어머니 나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는 900킬로미터에 걸친 기후 구배를 포괄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9개 기후 지역에서 어머니 나무를 모두 절단하는 대신 보전하면 탄소 저장량, 생물 다양성, 삼림 재생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아보려는 연구이다. 이 프로젝트는 숲의 구조와 기능을 조사하는데, 관계의 망이 실제 환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계망이 벌채 방식, 보존하는 어머니 나무 수, 수종이 다양한 방식으로 섞인 조림지 환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머니 나무를 많이 보존할수록 숲 바닥의 취약성이 지켜질 뿐만 아니라 지상과 지하의 탄소 저장고도 보호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 나무'란 무엇을 말할까.


이 책에 의하면, 나이든 나무는 어떤 묘목이 자신의 친족인지 아닌지 구별할 줄 안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들은 어린 나무들을 양육하고, 음식과 물을 준다. 마치 인간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처럼 말이다. 숲속에서 늙은 나무와 젊은 나무가 화학적 신호를 내보내며 서로를 인지하고, 소통하고, 반응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나무들은 인간의 신경 전달 물질과 똑같은 화학 물질을 사용하고, 이온이 연쇄적으로 진균의 막을 통과해 만들어 내는 신호를 통해서 서로 이어져 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자식 나무들을 엄마처럼 보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어머니 나무'라는 표현이 만들어 진 것이다. 





내게는 나무가 엄마 노릇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들이 어린 나무들을 돌보는 만큼. 맞다, 바로 그거다. 어머니 나무들. 어머니 나무들은 숲을 연결한다. 이 어머니 나무는 주변에 자리한 모종과 묘목의 중심 허브였고, 다양한 진균 종에서 뻗어 나온 갖가지 색과 무게의 실이 나무들을 겹겹이 튼튼하고 복잡한 망으로 연결했다. 나는 연필과 공책을 꺼내 지도를 만들었다. 어머니 나무, 묘목, 모종. 나무들 사이에 선을 그려 보았다. 그림에서 신경 연결망 같은 모양이 떠올랐다. 우리 뇌의 뉴런들처럼 일부 노드가 다른 노드보다 더 많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p.382~383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작품을 참 좋아한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나무는 사랑하는 소년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행복해하다, 더 이상 줄 게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뒤 자신의 나무 밑동울 내어 주며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실제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나무는 인간과 늘 공존해왔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왔다. 인류 문화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무와 숲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왔다. 이번에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나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햇빛과 물, 이산화탄소만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만들어내고, 이를 뿌리에서 잎사귀까지 자유자재로 이동시킨다. 가시를 돋우고 나무껍질을 벗겨내어 천적에 대항하기도 하고, 뿌리에 공생하는 균을 통해 동료 나무들에게 비상경보를 울리기도 한다. 인간이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인터넷망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듯이 나무들은 뿌리와 진균 등의 균사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탄소를 주고받으며 서로 속삭인다. 저자는 이러한 나무들의 네트워크를 "우드 와이드 웹(The Wood-Wide-Web)"이라고 부른다. 인류가 1989년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들기 수억 년 전부터 나무들은 자신들만의 WWW(우드 와이드 웹)을 만들어 운영해 왔다고 생각하면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수잔 시마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을 관찰하고, 꾸준한 실험을 통해 나무의 비밀들을 밝혀 왔다. 연구와 결혼 생활을 어렵게 병행해 가다가 유방암과 투병하기도 했던 평범한 한 여성의 삶과 과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게다가 수잔 시마드의 연구는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영혼의 나무’의 핵심적 모티프가 되었다고 하니,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지구의 또 다른 지적 생명체인 '나무'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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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로의 소원해결소
요코제키 다이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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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제가 범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중요한 문제라고 먼저 말씀드린 겁니다. 한 지자체의 수장이 용의자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저희로서도 아무래도 그만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수사에 협조해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뺏는 겁니다."

어젯밤 시시도 시장 외에 아무도 타누마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경찰의 눈이 시장을 향하는 것은 당연하다. 히나코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유력한 용의자는 시장뿐이다.          p.55


"소원을 하나 말해 보세요." 얼굴에 하얀 분을 칠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거의 귀까지 이어 그린 삐에로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소품용 빨간 코에 뽀글뽀글한 가발까지, 어떻게 봐도 삐에로의 모습을 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거리에서, 포장마차에서, 일상의 어디서든 나타나 말을 건네는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슬글슬금 피하거나, 무시하거나, 화를 낼 뿐 누구도 삐에로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누구든 자신의 소원을 말하면, 실제로 그들의 고민이나 바라는 바를 도와주고, 현실로 구현시킨다. 대체 삐에로의 정체는 뭘까. 


료는 도쿄에 있는 사립 대학교에 다니는 4학년 학생으로, 6월부터 취업 준비를 해왔지만 아직 한 군데에도 합격하지 못한 상태였다. 도쿄에서 취업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지난달부터는 고향인 시즈오카현 카부토시로 돌아와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 앉아 있는데 삐에로를 만나게 된다. '소원을 하나 말해 보세요.'라며 말을 건넨 삐에로는 자신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삐에로라고 소개하며 어떤 소원이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한다. 신종 사기인가 싶어 대충 대답하는 그에게 삐에로는 자신만만하게 밑져야 본전이니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말해보라고 말하고, 료는 그에게 '취직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삐에로는 료의 이력서를 받고는 한 달 월급이라며 돈을 뽑아 오더니, 그 자리에서 료를 자신의 조수로 고용한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지만, 그렇게 료는 삐에로를 도와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일을 하게 된다. 





"타인과의 만남은 중요해. 어쩌면 너도 삐에로 씨를 만난 게 어떤 발단이 될지 몰라."

타인과 만나는 것의 중요성. 전에 삐에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기업 설명회에 가도 만남은 있다. 기업 담당자나 취업 준비생을 만난다. 하지만 삐에로와 어울리며 만난 사람들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인연, 같은 것일까.         p.163


사실 카부토시는 현지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상태였다. 2년 전 카부토시에서 가장 큰 공장이 다른 나라로 옮기면서 폐쇄되는 바람에 직원 천오백여 명이 직업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가족을 데리고 도시를 떠났기 때문이다. 해당 회사의 하청 기업들도 수익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도산한 중소기업은 스무 곳을 넘어섰다. 그 속에서 ‘열린 시정, 만나러 가는 시장’을 슬로건으로 내건 시시도 시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어떤 시민이라도 직접 만나 응대하며 도시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업무 처리 능력은 뛰어났지만 예민한 성격에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편이라, 직원들은 좀처럼 그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시장과 다툼이 있었던 후원회장이 살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가 죽기 전 만났던 유일한 사람이 시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시장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만들어 진다. 우연히 삐에로의 조수가 된 료와 정체 불명의 삐에로, 그리고 좌천된 신문 기자가 함께 시장이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데, 그들은 시장의 무죄를 밝혀내고,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재회>, <악연>, 그리고 <루팡의 딸> 시리즈로 국내 독자들을 만나온 요코제키 다이의 신작이다.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요코제키 다이는 주로 범죄 미스터리를 써왔다. 그의 작품들은 불필요한 수식이 많지 않고, 선정적인 사건이 없어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스토리가 묘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많았고 말이다. 이번 작품은 연말에 읽기 딱 좋은 감동 미스터리이다. 평범한 한 사람의 작은 선의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그 기적 같은 순간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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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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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가로등, 작은 물웅덩이, 다리, 교회, 1층에 난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광경들에 자신이 녹아서 스며드는 느낌 말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이국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개를 퍼덕이는 평범한 비둘기마저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리를 걷는다. 어딘가 시적이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거리를 누비면 마법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p.38~39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매년 700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책의 저자인 패트릭 브링리는 어느 날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이곳에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암으로 투병하던 친형이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공간 중 가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상실감과 슬픔 속에서 도피하듯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그는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온종일 걸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이면들을 관찰하며 멈췄던 인생의 걸음을 다시 내딛기 시작한다. 


플립북을 넘기듯 그림들을 스쳐 지나가며 수세기를 넘나드는 경험은 오직 미술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에서 프랑스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였다가 다시 이탈리아가 되며, 신성과 세속을 오가는 그림 여행을 매일 할 수 있다니 관람객으로 몇 시간 잠깐 구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미술 애호가들, 관광객들, 뉴요커들은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더 이상 짧은 시간에 구애 받을 필요 없이 마음껏 작품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뉴욕 평균 크기 아파트 약 3천 개를 합친 면적의 미술관은 너무도 장황하게 펼쳐져 있지만,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수 시간씩 존재하며 저자는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점차 깨닫게 된다. 





양탄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보니 수만 개의 매듭과 실이 마치 현재와 과거, 현실의 엄청난 밀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때는 이 네 귀퉁이 너머로 펼쳐졌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테일로 가득한, 모든 찬란하고 평범한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양탄자를 내려다보자니 초월적인 질문들에 추상적인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더 많이 탐구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테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 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p.216~217


예술 작품, 그 중에서도 명화에 대한 책은 정말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다. 나 역시 미술사, 그림 읽기, 명화 감상, 미술관 등 여러 주제를 다룬 많은 종류의 책들을 만나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자가 쓴 이 책을 통해 예술을 감상하는 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게 된 것 같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는 그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작품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예술은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는 것 혹은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하려는 시도와 달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책으로 읽는 것과 예술품을 직접 보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 느끼고, 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을 배우게 된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미술관 곳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으며, 관람객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구석구석을 다니며 작품을 바라보면 그 시간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체감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날이면 날마다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한다는 것부터 이 빠른 세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선택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랬다. 그렇게 상실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이 여정은 일상과 예술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내밀한 고백이자 예술에 대한 지적인 통찰들을 보여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더라도, 책을 읽는 내내 마치 가본 것처럼 경험하게 해주는 경이로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위로와 감동, 그리고 예술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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