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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고 온 Go On 1~2 세트 - 전2권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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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전부야. 그러니까 가족이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나는 부모형제로부터 물려받거나 내 스스로 만든 잡동사니들로 어지러운 지난 40년 동안의 생을 돌아보았다. 오빠를 면회하고 나서 며칠 동안 우리가 공모하게 된 그 얘기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낸 직후였다. 슬픔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지? 우리는 언제부터 슬픔에 익숙해지게 되었지?  나는 원고를 다시 보며 아직 꺼지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셔 마음을 가라앉히고 펜을 집어 들었다. '각각의 가족은 하나의 비밀 사회다.'    1, p.19~20

더글라스 케네디의 2019년 신작이다. <비트레이얼> 2015년 작품이었으니, 꽤 오랜 만에 나온 소설이기도 하다. 사백 페이지 짜리 두 권 분량이라는 꽤 방대한 이야기는 아래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세상은 돌아간다.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하루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숨어 있다.' 라는 책 속 문구는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동력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의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는 삶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어야 하는 반항심 같은 것 말이다. 모든 걸 다 잃더라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 가고, 생은 또다시 미래를 향해 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 우리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누구도 절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순간을 살아내고, 버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책의 제목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중산층 가정인 번스 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생에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위기와 불행들을 극복하고 살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열다섯 소녀 앨리스의 엄마와 아빠는  매일 다투며 20년을 살아왔다. 앨리스의 큰오빠 피터는 예일대 신학대학 신입생이었고, 학교의 스타였다. 작은 오빠인 아담은 아이스하키 선수로 성공하는 게 꿈이었는데, 2년 전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친 후 아빠의 권유로 뉴 팔츠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큰오빠는 부모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했고, 작은오빠는 마치 부모에게 인정받는 게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무조건 순응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엄마는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전업가정주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를 남편과 자식 탓으로 돌렸고, 전쟁터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을 안고 있는 아빠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권위적이기만 하다. 그 속에서 앨리스는 피터 오빠처럼 자유롭고 싶었고,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었으며, 그러면서도 부모의 애정을 갈구했다.

 

 

“누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아. 이제 더블린에서 일어난 사고도 당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그 일 때문에 당신은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 거야. 변화를 자신의 세계관과 통합하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야.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만 살아남았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당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생명이야. 하느님이나 신이 결정했다는 뜻이 아니야. 나 역시 무신론자라 신의 보호 운운하는 말은 안 믿어. 다만 나는 운명을 믿지. 우주의 기운이라고 할까? 앨리스, 당신은 운명적으로 살아난 거야. 내 말이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운명의 힘이 당신을 살리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 ‘앨리스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생존의 시간을 더 부여해줘야 해.’라고 말이야.”    2, p.68

여느 때처럼 엉망이 된 추수감사절 아침, 앨리스는 생각한다. 왜 우리 가족은 서로 돈독하게 지내지 못할까? 왜 끊임없이 서로를 도발하며 힘들게 할까? 그날은 개학 첫날이었고, 등교를 서두르던 앨리스는 현관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는 모르몬교 선교사 두 사람을 만난다. '가족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복음입니다. 엄마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어요' 라는 그들의 말에 대한 앨리스의 대답은 바로 "그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죠." 였다. 가족들끼리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날선 공방을 주고받고, 험악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고, 끊임없이 언쟁을 벌이는 가족의 모습은 사실 그다지 낯설지 않다. 사실 이러한 막장 가족들의 모습은 티비만 켜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니 말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가해자들은 권력의 힘으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앨리스의 친구 칼리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앨리스는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집단 괴롭힘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회 문제 역시 작금의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에 만나왔던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들이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만큼 엄청난 어드벤처를 느끼게 만들어준 화려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했었더라면, 이번 작품은 두툼한 분량에 비해 플롯 자체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물론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주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장에 이르면 내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내가 과거에 했던 선택들은 옳았던 건지,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내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건지 말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개인적인 삶과 이야기에 집중해왔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페미니즘부터 냉전시대의 국제정치, 테러, 대통령의 사임, 경제 불황, 정체불명으로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던 에이즈의 비극, 그리고 레이건 신보수주의 정부 이야기까지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현대 미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원제는 '그레이트 와이드 오픈'이다. 극중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는 텅 빈 공간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삶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며, 미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의 끝에 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도, 그것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거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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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보다 민감한 사람의 사랑 - 더 아프고 더 사랑하는 당신을 위한 단단한 심리 상담
일레인 N. 아론 지음, 정지현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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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한 인간이나 동물이나 사회적인 판단과 거절을 두려워하는 부끄러움 많은 성격을 타고난다는 증거는 없다. 부끄러움 많은 성격은 내향성과 마찬가지로 살면서 겪는 상황에 적응하면서 발달하지, 유전적인 특성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물론 민감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느끼기가 쉽지만 특정한 상황에서만 그렇다. 민감함은 좀 더 근본적인 특성이다. 민감함은 새로운 상황에서 잠시 멈추어 미묘한 점을 알아차리고 그 영향을 신중하게 고려하고 확인하도록 만든다. 다른 사람은 이 '잠시 멈춤'이 두려움이라고, 혹은 여차하는 순간 두려움으로 변하리라고 착각한다.    p.66

남의 생각에 일일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다수는 눈치 채지 못하는 부분까지 날카롭게 대응하는 예민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전체 인구의 약 15~20퍼센트에 해당하는 HSP(Highly Sensitive Person)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HSP는 매우 예민한 사람, 민감한 사람을 뜻한다. 최근에 이러한 HSP를 다루고 있는 책을 몇 권 읽었는데, 이들 책에서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약점이나 마음의 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기존에 읽었던 그 책들은 예민해서 힘든 사람들이 좀 더 편안하게 살아갈 방법을 알려주고, 예민함이 약점이 아니라 소중한 선물이라는 것을 알려 주며, 자기다운 모습을 찾는 방법을 담고 있었다.

이번에 만난 책은 이렇게 타인보다 민감한 사람들의 기질이 관계에 있어서 사랑에 끼치는 영향에 대해 주목한다. 민감성 연구의 권위자 일레인 아론 박사는 남들과 다른 예민함과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상처받고 고민해왔다. 그러다 중년의 위기가 찾아와 부부 관계 회복을 위한 상담 치료를 받던 중 자신과 같은 민감한 사람들의 사랑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민감한 사람이 사랑할 때 마주하는 남다른 고민과 예기치 못한 갈등, 그리고 깊숙한 상처의 비밀을 이 책에 풀어 내게 된다.

 

 

'바로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상대가 나타나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가장 일반적인 관점이다. 아트와 나는 연구의 일부분으로 참가자들에게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다. 당연히 모두가 처음에 연인에게 큰 동경심을 보였다. "아름다웠어요.", "미남이었죠.", "성격이 무척 특별했어요" 처럼 상대방의 별나거나 구체적인 특징을 매우 사랑스럽게 여겼다. 상대방이 자신을 사랑하거나 동경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사랑을 느꼈다는 사람도 많았다. 친밀한 관계에서 감정에 솔직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p.197

이 책은 내가 민감한 사람인지에 대한 간단한 자가 테스트를 비롯해서 민감성을 이해해야 하는 이유와 민감하나 사람들이 이성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 이유를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조언들이 담겨 있다. 민감한 사람들은 미세한 변화를 잘 포착하고, 깊이 사고하는 정교한 신경 체계를 타고났다. 이런 특성을 잘만 이해한다면, 민감성은 로맨틱한 관계를 이루는 데 이상적인 선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에 빠지면 상대방의 작은 감정의 움직임까지 알아차리고, 상대의 매력에 깊이 심취하며, 친밀한 관계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바로 이 민감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민감한 기질을 타고난 사람은 연애나 결혼 생활에 있어 만족을 느끼지 못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기 전에 깊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사랑을 시작할 때 더 망설이는 것도 특징이다. 그 외에도 민감한 사람들이 이성을 어색해하고, 어렵게 느끼도록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하지만 비단 민감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사랑에서 생기는 많은 문제는 결국 상대방의 기질을 수용하는 방법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러니 과학적인 연구와 심층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케이스 분석의 사례, 민감한 혹은 그렇지 않은 커플들의 성격 조합에 따른 친절한 조언은 매우 현실적인 도움이 될 것 같다. 사랑으로 인해 고민하는 민감한 사람들뿐 아니라 민감한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거나 혹은 주변의 그들을 이해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유용할 것이고 말이다. 그로 인해 사랑을 근본적으로 새로운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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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아파트 웅진 우리그림책 52
백은하 지음 / 웅진주니어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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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 아파트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돼지는 과자를 잔뜩 먹으면서 여기저기 부스러기를 흘리고 다닌다. 캥거루는 신나게 뛰면서 집 안에서 운동을 하느라 시끄럽다. 낙서를 좋아하는 원숭이는 놀이터를 엉망으로 만든다. 강아지는 화단에 들어가 뛰어 놀며 예쁜 꽃들을 망쳐 놓고, 공작은 분리 수거를 하지 않고 쓰레기를 한꺼번에 버리는 등.. 모두들 틈만 나면 싸우는 중이다. 너 때문이야!!!! 그러던 어느 날, 새 이웃이 이사를 오게 된다. 소녀는 작은 씨를 뿌리고 꽃을 심었으며, 매일매일 물을 주고 가꾸기 시작한다.

별 생각 없이 책장을 넘기다가, 꽃잎 아파트에 새로운 이웃이 이사 오는 장면에서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 이게 뭐지? 새로운 그림 기법인가? 수채화랑 함께 있는 이 꽃들은 대체 어떻게 표현한 거지? 싶었던 것이다.

선명한 핑크색 꽃잎들에서 묻어나는 화사함이 페이지 가득 묻어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내 마음도 설레는 핑크빛 물이 드는 그런 기분도 들었다.

‘꽃 그림 작가라고 불리는 백은하 작가는 곱게 말린 꽃잎 위에 연필이나 펜으로 그림을 그린다. 푸른 제비꽃, 붉은 양귀비, 노란 민들레, 진분홍 철쭉 등 여러 꽃잎들이 만들어내는 팔레트의 빛깔들도 아름답고, 인위적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자연의 색감이 주는 분위기가 너무도 환상적이다. 

꽃잎들은 동물 친구들의 모자도 되고, 옷으로도 변신하며, 공작의 화려한 깃털로도 만들어 진다. 꽃향기가 되어 공기 중을 가득 채워주기도 하고, 알록달록한 색채로 짧은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공동 주택에 모여 사는 동물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그리며 이웃 간 갈등 문제를 날카롭게 꼬집고 있는 이야기도 층간 소음을 비롯한 이웃간의 갈등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는 요즘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인상적이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잊어 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시선으로 배려의 가치를 전해주는 그림책이었다.

'너 때문이야!!!'에서 '네 덕분이야!'로 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어 이야기 자체도 따뜻했지만, 무엇보다 책 자체가 너무 예뻐서 소장용으로도, 힐링용으로도 너무 좋은 그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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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고 상처를 허락하지 마라 -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에 단호해지는 심리 수업
배르벨 바르데츠키 지음, 한윤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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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맛있는 음식과 와인 한 잔을 함께 즐기며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둘만의 시간을 간절히 원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남편과 대화 한마디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누구와도 내 감정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 삼켜야만 했어요. 힘들 때 그에게 잠시 어깨를 기대지도, 팔짱을 끼지도 못했습니다. 헤르베르트는 집에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죠.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하면서요.

“다른 집도 다 이렇게 살아!”   p.31~32

독일을 대표하는 심리학자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지난 40년간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처의 문제를 파헤쳐왔다. 그가 알게 된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기쁨의 원천이라 여겨지던 사랑이 실제로는 가장 파괴적인 상처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 특히 자기애에 빠져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과의 관계는 심하게는 폭력으로도 이어져 결국 씻을 수 없는 아픔이 된다. 우리나라만 해도 매년 신고 되는 데이트 폭력만 1만 건에 달하며, ‘안전 이별이 사회의 주요 키워드로 떠오를 정도로 그 상황이 심각하다.

 

이 책은 일반적인 심리학 서적과는 달리 한 연인 관계의 시작과 끝을 소설처럼 이야기로 풀어놓고, 심리학자인 저자가 각각의 장면마다 필요한 코멘트를 남기는 식으로 진행된다. 그러니 우리는 마치 연속극 드라마 보는 것처럼 이들의 이야기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나 자신이나 내 주변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사랑하는데도 외롭고, 헤어지기는 두려운 사람들에게, 관계를 끝낼 용기가 없어 상처받은 마음을 방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사랑에 빠졌어도 우린 때때로 숨 돌릴 여유가 있어야 하고, 각자 몸을 뻗을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사랑에서 공감은 매우 중요하지만 독립성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으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계속 책임져야만 한다. 두 사람 모두 자신과 상대의 가치를 존중하고 소중히 할 때 올바른 관계가 형성된다. , 자신의 단점뿐만 아니라 장점을 스스로 인정하며 그것을 두 사람 관계에 적극 활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자존감과 인식을 갖춰야만 한다.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채 자신의 가치를 상대에게서 찾으려 한다면, 그 관계는 계속 삐걱댈 수밖에 없다.    p.275~276

소냐는 어린 시절 엄마를 유방암으로 먼저 떠나 보내야 했고, 아빠와의 관계는 조금 서먹한 편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녀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했고, 동생인 리자는 너무 어렸으며, 엄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충격을 극복하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처참한 상황에서 그 누구와도 제대로 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힘들었다. 그녀는 열여덟 살이 되자마자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독립을 했고,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왔지만 매번 자신을 힘들게 했던 남자들을 선택했다. 스물다섯에 만난 네 살 연상인 헤르베르트와 결혼했지만, 남편과 맞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았으며 그녀는 결혼 생활 내내 불행했다. 그러다 마흔일곱 살에 만나게 된 남자 프랑크와 그녀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긴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되지만, 그와 함께 하는 동안에도 소냐는 제대로 배려 받지 못했고, 행복할 수 없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말에 많은 것을 허락한다. 그러나 과연 함께 있으면 너무도 아프고, 힘들기만 한데 이런 관계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소냐는 대체 왜 상처뿐인 관계를 쉽게 끝내지 못하는 걸까. 이기적인 자기애에 빠져 타인을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매번 지켜지지 않는 약속, 상대에게 무례하게 행동하고 부당한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자, 우리는 종종 자신이 상대에게 속았다는 걸, 이미 실패한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한다. 상처만 남기는 관계를 지속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랑하기 때문에 그랬다는 말로 무조건 참고, 견디고, 허락해야만 하는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은 비단 이 책 속 소냐의 상황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이 고통 받고 그 고통을 합리화하는 모든 관계에 도움이 되길 바래본다. 그리하여 내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삶,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삶을 되찾길 바란다. 나 자신은 너무도 소중한 존재라는 걸 잊지 말기를, 세상의 모든 따귀 맞은 영혼들에게 들려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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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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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진 놈이 뭐가 아쉬워서....."

진경이 중얼거리자 영감은 아무 대꾸 없이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한참만에 무거운 생각이 말끝을 누르는 듯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잃을 것도 없는 우리는, 왜 저런 짓을 못 하나 모르겠다. 나비 혁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네."     p.79

공원 입구에 주차된 자동차 안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사망한 여성은 30대 초반의 소아과 의사 ''로 이틀 전 외출 후 귀가하지 않아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해 놓은 상태였다. 경찰은 수의 죽음이 강간 후 살해된 것이라 발표한다. 그들이 지목한 범인은 수와 사랑에 빠졌던 남자 도경이었고, 이는 타운 최대의 스캔들이 된다. 그들이 함께 했던 모습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수와 도경을 평범한 연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남자는 L2도 아닌 완벽한 사하이고, 여자는 타운의 소아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은 로맨스였을까, 범죄였을까.

여기서 신분을 지칭하는 낯선 단어가 등장한다. L2는 무엇이고, 사하는 무엇이며, 타운이라는 것은 또 어디란 말인가. 기업이 한 도시를 인수한다. 이 도시는 본국으로부터 독립되어 기업인지 국가인지 알 수 없는 작고 이상한 '도시국가'가 된다. 이곳은 '타운'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공동총리제를 도입했으며, 총리단에서는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주민 자격을 두기로 한다. 그리하여 주민권 L을 지닌 사람과 체류권 L2를 지닌 사람으로 나뉘게 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주민권을 획득했고, 자격에는 못 미치지만 범죄 이력이 없고 간단한 자격 심사 및 건강 심사를 통과하면 체류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민권은 물론 체류권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사하맨션 사람들로 그들은사하라 불렸다. .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잎들은 초록색으로도, 연두색으로도, 때로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도 보였다. 빛나는 벚나무 터널을 지나는 어린 연인.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진 여름의 벚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봄이 아련한 줄 몰랐고 여름이 반짝이는 줄 몰랐다. 가을이 따사로운 줄 몰랐고 겨울이 은은한 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는, 살았다고 할 수 없겠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겠지. 진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p.325

자본이나 기술, 전문 지식이 없으면 국민으로 받아 주지 않는 나라. 어떠한 국제기구나 지역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은 나라. '타운'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 그리고 그 안에서 섬처럼 고립된 사하맨션. 그곳은 비참한 생의 종착지이자, 누군가에게 허락된 마지막 공동체이기도 했다. 바로 그 사하맨션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엄마의 추락사를 자살로 둔갑시킨 사장을 죽인 도경과 그 누나, 남매처럼 10년 전 국경을 넘었다는 관리실 영감, 본국에서 낙태 시술을 하다 사고가 발생해 도망쳐 온 꽃님이 할머니,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눈이 없었던 사라, L2로 태어났지만 보육사의 꿈을 좇았던 은진 등 사하맨션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들이 다른 듯, 닮은 듯 보여지고 있다. 국가 시스템 밖에 놓인 난민들의 공동체,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절망의 감정들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다는 점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극중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라가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게 되는 순간이 너무도 와 닿았다. 사라에게 세상은 딱 그 만큼의 크기, 그 정도의 난이도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테두리 속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많은 일들에 화가 나고 억울해진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나쁜 일을 당할 뻔한 걸 구해준 우미가 괜찮냐고 묻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당연히 차별과 배제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지옥 같은 현실을 그저 견디기만 해서는 무엇도 바뀔 수 없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약자와 소수자가 마주하게 되는 차별과 혐오의 현상을 보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무력하게 안주해서는 안 된다. 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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