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링 미 백
B. A. 패리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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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근데 괜찮아, 지금은 다 풀렸어."

"다행이다. 자기 아까는 되게 무서웠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품에 안는다. “다시는 자기가 나 때문에 무서워할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날 밤 레일라처럼. 나는 소리 없이 덧붙인다.      p.98~99

연인인 핀과 레일라는 므제브에서 스키를 타고, 파리에 들러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자정쯤 도로변 주차장에서 핀이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레일라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다. 핀은 그녀의 이름을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찾았지만 레일라는 보이지 않았고, 그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경찰에 신고한다. 사실 여기까지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어 보인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에서 '실종'이라는 소재는 너무 자주 사용되고 있는 사건 중의 하나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짧은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에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게 내가 프랑스 A1 고속도로 부근 어딘가에 있는 경찰서에 앉아 경찰에 한 진술이었다. 진실이었다. 온전한 진실이 아니었을 뿐.

그리고 12년 후, 핀은 레일라의 언니인 앨런과 결혼을 앞두고 있다. 앨런은 레일라와 녹갈색 눈동자 말고는 모든 것이 정반대였는데, 핀은 그녀와 레일라의 추모식에서 만나 가까워졌다. 새로운 일상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당시 실종 수사를 했던 경찰에게 연락이 온다. 12년 전 실종된 레일라가 목격됐다는 제보가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집 밖 길바닥에서 레일라가 늘 지니고 다니던 러시아 인형이 발견된다. 이야기는 핀과 앨런의 일상이 보여지는 현재와 핀이 레일라에게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진행되는 과거가 교차 진행된다. 과연 레일라가 실종되던 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그녀는 12년 전 그날 죽은 것일까. 하지만 그녀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고, 지금 목격되고 있는 사람이 정말 레일라가 맞는 것일까.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다 끝내버릴 텐데. 어디 있지 묻는 핀의 이메일에 바로 답장을 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목소리는 말했다. 그놈에게 알려주지 마, 그놈에게 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지 마. 목소리를 거부할 수는 없어서 핀에게 실마리만 하나 주었다. 제발 그가 실마리를 풀 수 있기를 바라면서.

나를 다시 데려가, 너무 늦기 전에.     p.284

심리스릴러의 여왕 B. A. 패리스의 신작이다. 벌써 3년 째 매년 6월에 그녀의 신작을 만나고 있어,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면 생각나는 작가가 되어 버린 것 같다. 역대급 데뷔작이었던 <비하인드 도어>는 군더더기 없는 빠른 전개로 첫 페이지를 열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려가게 만드는 가독성 최고의 작품이었다. 두 번째 작품인 <브레이크 다운>은 정신적, 심리적 폭력이 얼마나 극한의 공포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오싹한 기분을 안겨주어 무더운 여름 밤에 읽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었다. 이번에 만난 세 번째 작품 <브링 미 백>은 상상조차 못했던 짓까지도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폭력성을 보여주는 반전 스릴러로 여전히 페이지 터너로서의 매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어느 작가나 그렇겠지만 특유의 패턴이 있어, 작품을 거듭해나가면서 비슷한 구성이나 캐릭터가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B. A. 패리스 역시 그러한데, 덕분에 데뷔작 만큼의 임팩트를 두 번째, 세 번째 작품에서는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녀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 왔던 독자들이나, 유사한 장르의 작품들을 많이 읽어 왔던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지점, 금방 눈치를 챌 수 있는 단서들이 많아 상황 파악이 너무 빨리 된다는 아쉬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류의 장르를 많이 접해 보지 않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가독성이 뛰어난 매력적인 작품임에는 틀림 없다. 특히 B. A. 패리스의 작품을 이번에 처음 만났다면, 정말 뛰어난 데뷔작 <비하인드 도어>도 꼭 챙겨 보기를 추천한다. 여러 모로 아쉬운 점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B. A. 패리스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것은 틀림없다. 데뷔작 만큼 놀랍고, 독창적인 그녀의 다음 작품을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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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릭 스테이트
시몬 스톨렌하그 지음, 이유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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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일이 언제 시작되었던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평범한 여가 활동처럼 시작되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처럼. 사람들은 가끔 텔레비전을 보았고 가끔은 뉴로캐스터를 쓰고 앉아 있었다. 나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뭔가 괴상해지기 시작한 건 1996년 대규모 업데이트 이후였다. 모드 6 말이다.    p.49

미국의 모하비 사막, 옅은 안개 속에서 회갈색 먼지 층을 걸어가는 10대 소녀와 소형 로봇이 있다. 때는 1997년 봄, 몰락한 첨단기술의 잔해가 나뒹굴고, 드론과 함선이 방치되어 있는 어두운 세상이다. 대부분의 디스토피아 작품들이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비해, 이 작품은 옛 향수를 자극하는 과거의 미국을 무대로 하는 대체역사 SF이다.

책의 첫 페이지부터 모드 6이라는 뉴로캐스터 기기의 광고가 등장했는데, 이야기가 시작하면 여기저기 뉴로캐스터를 쓴 채 널브러진 시체들이 즐비하다. 7년 넘게 치뤄진 거대한 전쟁은 드론 조종사들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그 과정에서 불운하게 십자포화에 희생당한 민간인들과 전쟁 중에 사산된 연방군 조종사의 자식들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 작품은 TV를 대체하게 된 가상현실 기술이 서서히 일상을 앗아가는 섬뜩한 세계를 거의 실사처럼 느껴지는 생생한 일러스트로 구현해냈다. 그리하여 어떤 그래픽 노블과도 다른, 이전까지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SF가 탄생했다. <인피니티 워>, <엔드 게임>, <윈터 솔저> 등 어벤저스 시리즈를 제작한 루소 형제와 각본가들이 판권을 사들여 영화화를 진행 중이기도 하다.

전혀 다른 상황에서 봤더라면 나는 그것들을 아주 좋아했을 것이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이 거리를 산책하며 매료되었을 것이다. 어떤 역겨움이 드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열광적이고 기분 좋은 역겨움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모든 것이 거꾸로였다. 우리가 바로 저 매력적인 생장물, 광인들이었다. 건강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픈 영혼들이었다. 이제 우리 뒤에 안전한 일상은, 되돌아갈 정상 지대는 없었으며 유일한 길은 앞으로만 나 있었다.   p.101

이야기의 화자인 10대 소녀는 조손 가정에서 자라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위탁 부모에게 보내졌는데, 그로 인해 동생과 강제로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위탁모의 코뼈를 부러뜨리는 등 폭력적인 행동으로 엇나간 성장기를 보낸다. 이후 친구 어맨다와의 이별, 위탁 부모의 죽음 등을 겪었는데, 기괴하게 변한 거대 드론과 뉴로캐스터를 쓴 채 방황하는 사람들로 보여지는 황폐화된 사회의 풍경이 소녀의 불안한 심리를 고스란히 시각화해서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인간의 지능이 뇌세포 수억 개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일어난다면, 뇌세포를 수억 개 더 연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 결과는 머릿속 이미지들이 실제로 보이는 세상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믿기 어려운 황폐화된 도시였다. 뉴로닉스 공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마치 영혼 없는 좀비 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셸. 정신 차려. 그건 꿈이었어. 게임일 뿐이었다고. 짐과 바버라 덕에 이제야 나도 깨달았어. 너랑 나는 그냥 놀이를 했던 거야. 그리고 괜찮아. 어차피 그런 척한 것뿐이잖아."

그런데, 만약 꿈이 현실이 된다면 어떨까. 게임 속 가상현실이 실재가 된다면 말이다. 황량한 거리, 송두리째 파괴된 도시, 도로에 방치된 몰락한 첨단기술의 쓰레기들..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를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있는 놀라운 일러스트들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완성된 영화처럼 느껴진다. 그래픽 노블 보다 텍스트의 비중이 확실히 높고 밀도가 있으며, 일러스트의 완성도와 퀄리티가 뛰어난 아트북이지만, 디스토피아 SF 소설로서도 굉장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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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병동
가키야 미우 지음, 송경원 옮김 / 왼쪽주머니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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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들린다. 이 청진기에는 불가사의한 힘이 있다.

"선생님, 무슨 일 있으세요?"

멍하게 서 있는 나를 기다리다 지친 마리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 청진기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의사라니. 그런 말은 두 번 다시 못 하도록 해 주겠어.   p.40

호스피스 병동의 여의사 루미코는 환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무신경한 의사로 유명하다. 말기 암 환자와 환자 가족의 컴플레인이 일상이지만, 지적을 당해도 속으로는 대체 그게 왜 잘못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니 심각하다. 물론 스스로도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점도 자각하고 있었고, 에두른 표현이나 미묘한 뉘앙스에는 옛날부터 자신이 없었던 그녀이다. 그래서 늘 환자와 보호자에게 사과하고, 혼자 고민한다. 나 혼자만 이렇게 둔감한 걸까. 다른 의사는 전부 환자의 마음을 정확히 읽는 걸까. 병원에서 근무한 지 곧 10년이고, 밥 먹을 시간도 변변히 챙기지 못하며 열심히 하고 있지만 어쩐지 자신이 없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루미코는 화단에서 청진기 하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이 청진기를 환자의 몸에 대면, 환자의 마음 속 목소리가 들려온다. 처음에는 환청인가 싶었는데, 환자와 대화를 해보니 진짜 환자의 속마음이 청진기를 통해 들렸던 거였다. 게다가 청진기를 통해 과거로 돌아갈 수 된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들이 가장 돌아가고 싶었던, 가장 후회되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다시 살아볼 수 있게 되는 것인가. 물론 그 시간 속에서 아무리 오래 살아도, 실제 현실에서는 5분 정도의 시간만 지날 뿐이다. 마치 잠깐의 최면 체험이나 시간 여행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말이다. 과연 루미코는 이 특별한 청진기를 통해서 환자의 마음 속 말을 듣고, 그들에게 더 이상 눈치 없다는 컴플레인을 듣지 않게 될까? 그리고 후회의 순간으로 돌아간 그들은 어떤 선택을 바꾸고, 그로 인해 무엇이 달라지게 될까?

나는 대체 가족에게 뭐였단 말인가? 돈 벌어다 주는 기계? 고작 그뿐이야?

, 얼마나 허무한 인생인가. 만약 인생을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면 맹세코 야근은 안 할 것이다. 누가 뭐래도 안 한다. 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싶었다. 상사가 싫은 소리를 하든 말든, 꼬박꼬박 휴가를 챙겨서 아이들과 수영장에 가거나 여행을 가고 싶었다. 주말에는 집 근처 공원에서 놀기도 하고, <도라에몽>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에도 데려가고 싶었다.   p.151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시한부 환자는 네 명이다. 유명한 여배우의 딸로 태어났지만 더없이 평범한 외모였던 사토코는 엄마처럼 화려하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연예계 생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엄마는 딸의 데뷔를 반대해왔고, 그 꿈이 계속 마음에 남아 엄마를 원망했던 사토코는 과거로 돌아가 연예계에 데뷔한다. 평생을 가족을 위해 일해 온 휴가 게이치는 죽음을 앞둔 자신 앞에서 돈 걱정만 하는 아내와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자녀들이 서운하다. 그래서 그는 과거로 돌아가 회사에만 매여 있던 시간을 아이들과 아내를 위해 쓰면서 자신이 미처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그리고 40대 중반이 되도록 결혼 안 한 딸을 두고 눈감을 수 없는 칠십 대 엄마와 어린 시절 친구에게 혼자 도둑질한 죄를 뒤집어쓰게 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사십 대 남자의 사연도 있다. 이들은 루미코의 청진기를 통해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고 자신의 후회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올 것이다. 특히나 갑작스럽게 나에게 내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말이다. 이렇게 빨리 죽을 거라는 걸 알았다면, 그때 그러지 않았을 텐데.. 살면서 지나쳐왔던 그 모든 선택과 행동에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미련, 앞만 보고 달리느라 정작 곁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아쉬움, 함께 하지 못하고 스쳐 지나갔던 인연과 소식이 멀어진 어린 시절의 친구에 대한 기억 등등 '만약' 다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떨까. 죽어가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는 이야기지만 마냥 어둡고, 무겁게만 풀어가지 않아 좋았던 작품이다. 설정은 판타지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들을 생각하게 만들어 주는 점도 가키야 미우만의 장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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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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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가 겨울에 어디 가는지, 기러기의 음악이 무슨 뜻인지도 배웠다. 시처럼 온화한 알도 레오폴드의 단어들로부터 생명이 응축된 토양은 무엇보다 풍요로운 지구의 자산이라는 사실도 배웠다. 습지의 물을 빼면 그 너머 수십 킬로미터에 걸친 땅이 메마르고 물길 따라 살아가는 식물과 동물이 죽어버린다는 것도 알았다. 어떤 씨앗들은 바짝 마른 흙 속에서 잠을 자며 수십 년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물이 다시 집에 돌아오면 흙을 뚫고 힘차게 솟아올라 얼굴을 드러낸다는 것도 알았다.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자연의 경이와 실제 삶의 지식, 누구나 알아야 하는데, 버젓이 주위에 노출되어 있는데 씨앗처럼 은밀하게 숨어 있는 진실들.   p.141

여섯 살 카야는 다섯 아이 중 막내였고, 언니 오빠들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이들은 비좁고 조잡한 판잣집에 바글바글 끼어 살았는데, 어느 날 카야는 엄마가 한 켤레밖에 없는 외출용 신발을 신고 작은 여행용 가방을 들고 걸어 나가는 걸 본다. 바로 손위 오빠지만 일곱 살이나 나이가 많은 조디가 집에서 나와 카야에게 말한다. 엄마는 돌아오실 거라고. 엄마들은 자식을 두고 가지 않는다고. 원래 그렇게 못한다고. 하지만 엄마는 그날 이후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엄마가 떠나고 몇 주에 걸쳐서 큰오빠와 언니 둘도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다 못해 다 도망가버린다. 마지막 남은 형제인 조디 조차 아버지한테 심하게 맞은 어느 날, 더는 여기서 못 살겠다며 카야에게 조심하라고 말하고는 떠난다. 그렇게 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가족들이 모두 불뿔이 흩어지고, 여섯 살짜리 여자애 하나가 홀로 남겨진다.

 

이야기는 야생에 남겨진 어린 소녀가 대자연의 동물처럼 홀로 서는 법을 배워가는 성장의 플롯과 17년 후 벌어진 살인 사건의 미스터리 플롯으로 교차 진행된다. 카야가 여섯 살이던 1952년부터 차곡차곡 진행되는 시간과 1969년 마을의 인기 스타 체이스 앤드루스가 해변의 습지에서 시체로 발견되고 나서 사람들의 의심이 습지에서 홀로 살아남은 카야에게로 향하는 과정이 동시에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의 이야기는 진행되면서 점점 매혹적인 로맨스소설이 된다. 야성적이지만 아름다운 카야, 남성적인 매력을 지닌 체이스, 그리고 습지와 생물학에 관심이 많고 다정한 테이트, 이들 세 남녀의 로맨스 또한 잠시도 페이지에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다. 특히나 다양한 생명이 숨 쉬지만 인간이 살아가기에는 가혹한 환경인 습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라 너무도 아름다운 묘사와 밑줄 긋고 싶어지는 문장들이 빛을 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카야는 논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구름을 바라보며 상념에 빠졌다. 곤충 암컷은 짝짓기 상대인 수컷을 잡아먹고,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포유류 어미는 새끼를 버리며, 많은 수컷이 경쟁자보다 더 잘 파정하기 위해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방법들을 고안해낸다. 생명의 시계가 똑딱똑딱 돌아가는 한, 천박하건 무례하건 아무 상관없다. 카야는 이것이 자연의 어두운 면이 아니라 그저 모든 위험요소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걸 알았다. 인간이라면 물론 그보다는 훌륭하게 행동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p.229

평생 야생동물을 연구해온 한 생태학자가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 출간한 첫 소설이다. 그리고 미국 남부의 노스캐롤라이나주 아우터뱅크스의 해안 습지를 배경으로 한 소녀의 성장담은 미국 출판계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아마존 독자 리뷰 수가 12,000개를 넘어서고,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와 아마존 판매순위에서 1위를 차지하고, 결국 올해 3100만 부 판매로 밀리언셀러에 등극했다. 계기는 미국 도서 업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헬로 선샤인 북클럽' 운영자이자 할리우드 스타인 리즈 위더스푼이 이 책을 발굴해 추천작으로 소개했기 때문인데, 그 이후로 놀라운 일들이 연이어 벌어진 것은 바로 이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일 것이다.

 

작가인 델리아 오언스는 아프리카에서 야생동물을 관찰하고 연구 성과를 정리한 논픽션 세 편으로 이미 전 세계에 명성을 떨친 학자이다. 그러니 미국 남부 습지의 비현실적인 풍광, 나뭇가지마다 유령처럼 걸린 스패니시 모스와 무른 흙, 드넓은 늪과 못에 떠다니는 물풀들. 호소와 늪을 지나 개펄과 바다로 이어지고,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고 섞이는 습지에 대한 이해와 묘사는 작가가 평생을 관찰하고 연구해 온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단단한 땅에 발붙이고 사는 평범한 이들에게 습지는 재빨리 메워 쓸모 있는 땅으로 만들어야 할, 미완의 지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기에 배척당하며, 익숙지 않기에 거부당하는 습지라는 환경을 야생에 버려 저 홀로 서기를 해야 했던 한 소녀의 삶에 이입해 놀라운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을 향한 경이로운 찬가이자, 가슴 저미는 러브스토리, 감동적인 성장소설이 되었고,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터리와 땀을 쥐게 하는 법정 스릴러이기도 한 매혹적인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평생을 야생과 벗 삼은 생태학자가 길어낸 이야기의 힘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아름다운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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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위 - 꿈에서 달아나다 모노클 시리즈
온다 리쿠 지음, 양윤옥 옮김 / 노블마인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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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래, 이건 꿈이야. 히로아키는 돌연 그렇게 의식했다.

나는 꿈속에서 잠이 깬 거야.

가마타에게서 다음 업무에 대해 듣고 그 사건의 무대가 된 초등학교 꿈을 꾸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이렇게 또렷하게 꿈 속에서 꿈이라고 인식한 것은 오랜만이었다. 가마타의 이야기가 영향을 끼친 것이리라. 가마타는 항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꿈을 스스로 분석하고 있을까. , 좋아. 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보자.   p.55

정신의학자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이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 1900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한 세기 이상 지나서 꿈 자체를 영상 데이터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고, 꿈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직업도 생기게 된다. 그야말로 눈으로 ''을 보고 진짜로 '꿈의 해석'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지몽을 꾸는 것으로 인정받은 일본 최초의 인물이었던 고토 유이코는 12년 전, 끔찍한 화재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예지몽을 전해오던 그녀를 세상 사람들이 잊을 무렵,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고토 유이코의 약혼자였던 시게아키의 동생 히로아키는 이제는 세상에 존재할 리 없는 그녀의 모습을 발견한다. 잠깐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눈을 의심하게 했지만, 분명 고토 유이코였다. 그 즈음 전국의 초등학교 아이들이 집단 이상행동을 보이는 사건이 벌어진다. 학생들이 갑작스럽게 고통을 호소해 집단 식중독이 아닌가 했지만, 아이들은 곧 안정을 되찾았고 이후로 악몽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꿈 해석사로 일하고 있는 히로아키가 그 사건을 맡아 아이들의 몽찰을 해석하는 일을 하기 위해, 문제의 사건이 벌어졌던 초등학교 중 한 곳을 찾아 간다. 해석할 수 없는 기괴한 악몽의 의미는 무엇이며, 대체 이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내 생각에는 반드시 그런 지시 때문만은 아니야. 사람들은 말하기 싫은 건 결코 말하지 않는 법이거든."

"말하기 싫은 것이라니?"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어. 이번 일이 자신들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엄청난 일이라는 것을. 학교 괴담이나 도시 전설 따위와는 완전히 수준이 달라.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고 어떻게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면 다들 애초에 '없었던; 일로 치부해 버리는 거야. 그냥 모르는 척하다 보면 나중에는 정말로 모르는 일이 되어버리는 심리, 알지?   p.184~185

이 작품의 제목인 '몽위' '꿈에서 달아나다'라는 의미이다. 극중 고토 유이코는 수많은 사상자를 내는 큰 사건사고들을 꿈에서 목격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을 했지만, 사실 꿈의 내용이 아무리 참혹하다고 해도 그러한 미래를 모두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예지몽의 사건이 정확히 언제 발생할지 날짜까지 알 수는 없었고, 장소나 사람을 찾는 것도 의외로 어려웠던 데다, 내용에 따라서는 프라이버시 때문에 몽찰 자체를 공개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그녀에게 불길하다, 재수없다는 말로 비난하고 야유하기도 했다. 끔찍한 사건 사고를 미리 알 수 있을 뿐, 그것을 막지 못하는 일이 반복되었으니 말이다. 꿈을 눈으로 볼 수 있는 시대였으니 나쁜 꿈을 바꿀 수만 있다면 좋았을 텐데.. 그 누구에게도 그런 능력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 유령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모습이 여기저기서 목격되고 있었으니, 아마도 그녀가 다시 꿈을 꾼 것이라고, 그것도 뭔가 중요한 재앙의 꿈일 거라고, 히로아키는 뭔가 꺼끌꺼끌한 불안을 느낀다. 아무 일 없이 지나가지 않을 것이다. 분명 뭔가 일어 나고 있었다.

 '서정적 공포' '몽환적 글쓰기'로 잘 알려진 온다 리쿠의 작품답게 이야기는 시종일관 오싹하고, 뒷골을 서늘하게 만들고 있다. 꿈을 기록하고 관찰하는 시대라는 설정 또한 인간의 무의식 가장 밑바닥에 봉인해두었던 두려움이 열리고, 꿈과 현실의 경계 그 너머에 있는 세계로 향하는 매혹적인 배경이 되어 준다. 온다 리쿠의 반전 매력은 섬뜩하게 느껴지는 공포도 아무렇지 않게 그려내고, 너무도 적나라한 표현으로 당황스럽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분명 미스터리 추리물 같은데 완벽하게 열린 결말 때문에 어딘가 모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이중성'에 있지 않나 싶다. 이 작품은 그러한 온다 리쿠의 기존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장점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지만, 여전히 서늘하고, 섬뜩하면서도 그녀만의 독특한 서정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어 흥미로웠다.

꿈은 일반적으로 꿈을 꾸는 사람의 무의식 혹은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게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꿈을 영상으로 기록하는 신기술이 실제로 개발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될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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