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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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가진 놈이 뭐가 아쉬워서....."

진경이 중얼거리자 영감은 아무 대꾸 없이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한참만에 무거운 생각이 말끝을 누르는 듯 느릿느릿 말했다.

"그런데 잃을 것도 없는 우리는, 왜 저런 짓을 못 하나 모르겠다. 나비 혁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됐네."     p.79

공원 입구에 주차된 자동차 안에서 여성의 시신이 발견된다. 사망한 여성은 30대 초반의 소아과 의사 ''로 이틀 전 외출 후 귀가하지 않아 가족들이 실종 신고를 해 놓은 상태였다. 경찰은 수의 죽음이 강간 후 살해된 것이라 발표한다. 그들이 지목한 범인은 수와 사랑에 빠졌던 남자 도경이었고, 이는 타운 최대의 스캔들이 된다. 그들이 함께 했던 모습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수와 도경을 평범한 연인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남자는 L2도 아닌 완벽한 사하이고, 여자는 타운의 소아과 의사였기 때문이다. 과연 그것은 로맨스였을까, 범죄였을까.

여기서 신분을 지칭하는 낯선 단어가 등장한다. L2는 무엇이고, 사하는 무엇이며, 타운이라는 것은 또 어디란 말인가. 기업이 한 도시를 인수한다. 이 도시는 본국으로부터 독립되어 기업인지 국가인지 알 수 없는 작고 이상한 '도시국가'가 된다. 이곳은 '타운'이라 불리기 시작했고, 공동총리제를 도입했으며, 총리단에서는 무분별한 밀입국을 막기 위해 주민 자격을 두기로 한다. 그리하여 주민권 L을 지닌 사람과 체류권 L2를 지닌 사람으로 나뉘게 되고,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과 전문 능력이 있는 사람은 주민권을 획득했고, 자격에는 못 미치지만 범죄 이력이 없고 간단한 자격 심사 및 건강 심사를 통과하면 체류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주민권은 물론 체류권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사하맨션 사람들로 그들은사하라 불렸다. .

 

 

햇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잎들은 초록색으로도, 연두색으로도, 때로는 흰색이나 황금색으로도 보였다. 빛나는 벚나무 터널을 지나는 어린 연인. 꽃이 지고 열매가 떨어진 여름의 벚나무가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다. 봄이 아련한 줄 몰랐고 여름이 반짝이는 줄 몰랐다. 가을이 따사로운 줄 몰랐고 겨울이 은은한 줄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는, 살았다고 할 수 없겠지. 살아 있다고 할 수 없겠지. 진경은 혼자 중얼거렸다.    p.325

자본이나 기술, 전문 지식이 없으면 국민으로 받아 주지 않는 나라. 어떠한 국제기구나 지역 연합에도 가입하지 않은 나라. '타운'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가장 작고 가장 이상한 도시국가. 밖에 있는 누구도 쉽게 들어올 수 없고 안에 있는 누구도 나가려 하지 않는 비밀스럽고 폐쇄적인 국가, 그리고 그 안에서 섬처럼 고립된 사하맨션. 그곳은 비참한 생의 종착지이자, 누군가에게 허락된 마지막 공동체이기도 했다. 바로 그 사하맨션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나름의 삶을 꾸려나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엄마의 추락사를 자살로 둔갑시킨 사장을 죽인 도경과 그 누나, 남매처럼 10년 전 국경을 넘었다는 관리실 영감, 본국에서 낙태 시술을 하다 사고가 발생해 도망쳐 온 꽃님이 할머니,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눈이 없었던 사라, L2로 태어났지만 보육사의 꿈을 좇았던 은진 등 사하맨션에 살고 있는 이들의 삶들이 다른 듯, 닮은 듯 보여지고 있다. 국가 시스템 밖에 놓인 난민들의 공동체, 그리고 그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절망의 감정들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다는 점이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했다.

극중 사하맨션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라가 시선이 바깥으로 향하게 되는 순간이 너무도 와 닿았다. 사라에게 세상은 딱 그 만큼의 크기, 그 정도의 난이도로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테두리 속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너머의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 당연하게 여겨 왔던 많은 일들에 화가 나고 억울해진다. 그래서 남자들에게 나쁜 일을 당할 뻔한 걸 구해준 우미가 괜찮냐고 묻을 때 이렇게 말한다.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당연히 차별과 배제를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인정해서는 안 된다. 지옥 같은 현실을 그저 견디기만 해서는 무엇도 바뀔 수 없다. 우리는 사회 속에서 약자와 소수자가 마주하게 되는 차별과 혐오의 현상을 보면서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무력하게 안주해서는 안 된다. 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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