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고 온 Go On 1~2 세트 - 전2권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9년 5월
평점 :
절판


 

"가족이 전부야. 그러니까 가족이 우리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야."

나는 부모형제로부터 물려받거나 내 스스로 만든 잡동사니들로 어지러운 지난 40년 동안의 생을 돌아보았다. 오빠를 면회하고 나서 며칠 동안 우리가 공모하게 된 그 얘기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낸 직후였다. 슬픔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지? 우리는 언제부터 슬픔에 익숙해지게 되었지?  나는 원고를 다시 보며 아직 꺼지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 한 모금을 깊이 들이마셔 마음을 가라앉히고 펜을 집어 들었다. '각각의 가족은 하나의 비밀 사회다.'    1, p.19~20

더글라스 케네디의 2019년 신작이다. <비트레이얼> 2015년 작품이었으니, 꽤 오랜 만에 나온 소설이기도 하다. 사백 페이지 짜리 두 권 분량이라는 꽤 방대한 이야기는 아래 두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세상은 돌아간다. 아무리 괴롭고 힘든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하루를 견딜 수 있는 힘이 자기 안에 숨어 있다.' 라는 책 속 문구는 전체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동력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생의 의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는 삶에게 끊임없이 태클을 걸어야 하는 반항심 같은 것 말이다. 모든 걸 다 잃더라도 시간은 여전히 흘러 가고, 생은 또다시 미래를 향해 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앞으로 우리 앞에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는지 그 누구도 절대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순간을 살아내고, 버티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 책의 제목처럼 그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작품은 미국의 중산층 가정인 번스 가 사람들을 중심으로 우리의 생에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위기와 불행들을 극복하고 살아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열다섯 소녀 앨리스의 엄마와 아빠는  매일 다투며 20년을 살아왔다. 앨리스의 큰오빠 피터는 예일대 신학대학 신입생이었고, 학교의 스타였다. 작은 오빠인 아담은 아이스하키 선수로 성공하는 게 꿈이었는데, 2년 전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친 후 아빠의 권유로 뉴 팔츠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니고 있었다. 큰오빠는 부모가 바라는 게 무엇이든 전혀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운 선택을 했고, 작은오빠는 마치 부모에게 인정받는 게 인생의 목표인 것처럼 무조건 순응하는 태도로 일관했다. 엄마는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지만 전업가정주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처지를 남편과 자식 탓으로 돌렸고, 전쟁터에서 혼자만 살아남았다는 부채감을 안고 있는 아빠는 가정에 충실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권위적이기만 하다. 그 속에서 앨리스는 피터 오빠처럼 자유롭고 싶었고, 집을 떠나 독립하고 싶었으며, 그러면서도 부모의 애정을 갈구했다.

 

 

“누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하지 않아. 이제 더블린에서 일어난 사고도 당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해. 그 일 때문에 당신은 정신적으로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 거야. 변화를 자신의 세계관과 통합하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야. 정말 끔찍한 일이었지만 살아남았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당신에게 선물로 주어진 생명이야. 하느님이나 신이 결정했다는 뜻이 아니야. 나 역시 무신론자라 신의 보호 운운하는 말은 안 믿어. 다만 나는 운명을 믿지. 우주의 기운이라고 할까? 앨리스, 당신은 운명적으로 살아난 거야. 내 말이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운명의 힘이 당신을 살리기로 결정했다고 생각해. ‘앨리스는 아직 죽을 때가 아니야.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어. 생존의 시간을 더 부여해줘야 해.’라고 말이야.”    2, p.68

여느 때처럼 엉망이 된 추수감사절 아침, 앨리스는 생각한다. 왜 우리 가족은 서로 돈독하게 지내지 못할까? 왜 끊임없이 서로를 도발하며 힘들게 할까? 그날은 개학 첫날이었고, 등교를 서두르던 앨리스는 현관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다는 모르몬교 선교사 두 사람을 만난다. '가족과 함께 영생을 누릴 수 있는 복음입니다. 엄마 아버지와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어요' 라는 그들의 말에 대한 앨리스의 대답은 바로 "그건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죠." 였다. 가족들끼리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 날선 공방을 주고받고, 험악한 말로 상대를 공격하고, 끊임없이 언쟁을 벌이는 가족의 모습은 사실 그다지 낯설지 않다. 사실 이러한 막장 가족들의 모습은 티비만 켜면 쉽게 만날 수 있는 드라마 속 등장인물들이니 말이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아이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가해자들은 권력의 힘으로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앨리스의 친구 칼리가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앨리스는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집단 괴롭힘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회 문제 역시 작금의 우리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기존에 만나왔던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들이 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도 못할 만큼 엄청난 어드벤처를 느끼게 만들어준 화려한 스토리라인을 자랑했었더라면, 이번 작품은 두툼한 분량에 비해 플롯 자체는 생각보다 심플하다. 물론 주인공들에게 위기가 닥치고, 왜 계속 살아가야만 하는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게 만들어주는 그의 탁월한 능력은 여전하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더글라스 케네디의 작품이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 장에 이르면 내 삶을 한 번쯤 돌아보게 된다. 내가 과거에 했던 선택들은 옳았던 건지, 나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지, 내 삶은 올바른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 건지 말이다. 그리고 인물들의 개인적인 삶과 이야기에 집중해왔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는 페미니즘부터 냉전시대의 국제정치, 테러, 대통령의 사임, 경제 불황, 정체불명으로 불치의 병으로 여겨졌던 에이즈의 비극, 그리고 레이건 신보수주의 정부 이야기까지 시대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 현대 미국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원제는 '그레이트 와이드 오픈'이다. 극중 대사를 인용하자면 이는 텅 빈 공간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하고,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삶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며, 미래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세상의 끝에 온 듯한 기분이 들더라도, 그것을 끝이 아닌 시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은 오직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거라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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