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제 : 이 책을 읽기 전에 유튜브에 나오는 태평양 전쟁사를 시청하면 이해가 훨씬 빠르다. 또한, 이 책에서 다루는 디테일한 글은 읽어 보면 되니 생략하기로 하고, 다만 의견을 덧댄다.


이 책은 태평양 전쟁에서 군국주의 일본의 패망사를 다큐 형식으로 다룬 책이다. 따라서 약 1세기 전의 일본 제국의 폐망을 다루었다면, 언젠가 역사는 일본의 제2 패망사가 써지지나 않을까 싶다. 그것은 후쿠시마 방사능 때문일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의 태평양전쟁 폐전을 극복했다고 공식적으로 선포한 이벤트가 1965년 도쿄올림픽이었다. 2020년의 도쿄올림픽이 후쿠시마 사고의 복구와 회복의 이벤트 용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방사능은 거짓말 안 한다. 무지하다면 무지하고,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방사능 대처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지출해도 해결할 수 없는 핵물리학적인 관점에서는 솔직히 답이 없다. 일본 국내 문제 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당면 과제이자 인류의 도전이 되어 버렸다. 어느 핵 과학자가 동일본을 포기하라는 게 뼈아프게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국민들이 서서히 병 들어가고 아파가는 것을 애써 외면한다고 사라질 것도 아니다. 심지어 일본인은 방사능에 면역되었다는 게 어처구니 없이 웃게 된다. 인간은 원자력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였지만, 어떻게 안건들일 수 있는 욕망의 파도는 잠들지 않겠지.


한국의 현대 정치사는 격변의 역사였다. 해방된 이후 미 군정은 일제의 관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안정에만 주력했고, 이는 일본을 굴복시킨 맥아더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미 군정에 정부를 수립한 이후의 이승만의 정치도 일제 잔재를 그대로 이용해 버렸던 오염된 시작되었다. 두 번의 군사 쿠데타의 하극상 정치로 이어졌다. 우리나라도 올림픽도 거의 정치적으로 이용된 적도 있다. 독재 권력은 항상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것을 좋아한다. 역변의 변명을 항상 올림픽등과 같은 이벤트라는 거창한 행사로 무마시키는데 아주 좋은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쿠데타였다. 이렇게 발전시켰다는 것이 결국은 독재자들이 내세우는 필연적인 논리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그 와중에서도 민주화를 멈추지 않았다. 60년대생으로 80년대를 겪었기에 광주에서 서울에서 혹은 부마사태로 불리는 부산 마산에서 대규모 시위를 통해서 독재정치의 비민주적 역사를 민주주의로 물줄기를 조금씩 바꾸어 나갔다. 수많은 민주주의자들이 이룬 그들의 피가 우리 역사의 근현대사를 뒤덮었다. 오늘날 오래전에 정착된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에 따라가는 정치적 민주화도 이루었다. 물론 민주주의는 완성형이 아니라 진행형이라서 아직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멀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타락한 권력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게 국민으로부터 국가 권력이 나온다는 민주주의적인 핵심이다. 물론 아직은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그나마 여기까지 온 것도 역시 다수의 국민이 가지는 민주적인 의식이 깔린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리라.


그러나 일본은 아직도 아니다. 민주적인 선거라도 있지만 그게 어디 선거라는 시스템의 흉내만 낼 뿐, 외부의 세력이 이식된 타의적 민주주의였다. 게다가 정치인들의 자기 직분과 시민들의 자기 직분은 엄연히 나눠져 있다. 누구라도 출마할 수 있다고는 하더라도, 비정치인이 정치에 출마해서 이룬 당선은 멀리 있어 보인다. 일본은 여전히 자기 직분에 벗어난다면 이지메하는 걸 모를 리가 없잖는가 말이다. 그래서 자기 직분에 맞는 직업으로써의 정치가와 장인 정신으로 된 자기 가업은 구별될 수밖에 없다. 국민이 원해서 법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 전혀 다른 몇몇의 극소수의 의원들이 그리고 당내의 당직자들의 권력을 가진 소수의 주장이 관철되는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일본을 유사 민주주의라고 하는 이유이다. 일본의 사무라이식 군국주의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일본 현대의 60년 동안의 정치는 거의 바뀐 적이 없다. 천왕제가 바뀌적이 없듯이, 유사 민주주의의 군국적 마인드도 여전하다. 그들의 적은 늘 내부에 있어도 그 해결책으로 외부로 돌리는 것은 변함이 없다.


아무리 자기 직분에 따라 자기의 삶을 결정지운다고는 하나, 일본 군국주의 제국 시절에서 일본 국민들의 불행은 크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듯하다. 천황을 위해 가미카제가 되어 돌아올 수 없는 전투기를 타고 자살공격을 해야 하는 그 위대한? 착각에서 개개인의 행불행은 오로지 대의를 위해 개인이 철저히 희생을 바탕에 두어도 좋다는 식의 그릇된 행복이었다는 점이다. 불행을 불행으로 보지 않고 행복하다는 개인의 무한한 희생으로 누군가 얻어지는 것들에 대한 분노는 거의 없다는 거다. 그러니 주면 주는 대로 자신이 철저히 적응해야만 하는, 그래서 적응을 뛰어넘어 독보적이어야 하는 봉건 근대적 일본 막부 사무라이 시절의 국민들과 뭐가 다를까라는 점이다.


국가의 수립과 존립의 근거는 어디까지나 국민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에서 나와야 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본령이고 정신이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 국민 개개인의 행복이 천황에서 나온다는 식의 고대 신과 천황의 대리격이라고 보는 샤머니즘의 신도국가이다. 그래서 아직 일본에는 신사가 그리도 많은 이유가 아니고 뭐겠는가 말이다. 그게 노예적인 마인드일 것이고, 왜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는 늘 굴복의 역사에서 종속된 행복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국민이 당연히 국가를 위해 희생했다는 식의 미화된 위대한 주장은 봤어도, 어느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일본 국민들에게 큰 불행을 안겨 줘서 진심에서 나오는 사죄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 국가가 국민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이게 올바른 가치관이라고 여기는 가치관으로 보자면, 국가의 결정이 국민에게 불행을 주지 않고 영광된 길을 주었다는 논리가 될 수밖에 없다. 당연한 것인데 사과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군국주의자라고 국민의 불행에 사과도 없고 국가를 위한 일이었으므로 떳떳했으니 반성이 없다. 국가가 국민에게 뻔뻔한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런데 가장 큰 오류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 필요한 존립 근거이지, 국민의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거다. 그렇다면 국가의 존립에 가장 핵심은 누구여야 할 것인가. 천황인가? 국민인가? 여기에서 일본의 사상적 배경과 사고방식은 국민의 행복이 출처가 천황이라면? 국민은 늘 노예로 살아도 할 말이 없다는 거다.


공화국과 왕국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공화의 주체는 국민이고 왕국의 주체는 왕이지, 국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왕이 주체가 된 국가의 사람은 그저 신하일 뿐이다. 일본 국민은 왕의 신하이고, 왕이 죽으라면 영광스럽게 죽어가야 하는 것. 이게 가미카제가 탄생할 배경적 이념이다. 그런데 하물며 그 신하의 하등한 국민인 조선으로 바라보는 한국민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절대 있을 수 없는 논리적 배경이기도 하다. 아무리 한국인이 일본 정부에게 사과하라 해도 깨어있는 몇몇은 하겠지만, 대부분의 사고방식으로는 거의 불가하다. 일본의 국민이 왕의 신하로 여기는 이상, 그들이 생각은 바뀌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 역사상 단 한 번도 왕의 핏줄이 바뀐 적이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국가가 국민을 못살게 굴면 바꿀 수 있는 것은 전 세계 역사적인 과정이었으나 일본이 유일하게 예외였던 까닭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된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가 있다. 일본은 천주교가 들어간 시기가 1500년대라고 찾아 보니 나온다. 상당한 박해도 많이 받았던 일본의 천주교 역사였다. 역시나 현재 일본에서 기독교 신도는 거의 미미하게 얼마 되지도 않는다. 기독교적인 역사로 봤을 때, 아프리카 오지에도 선교가 되는 마당에 일본에 기독교가 선교가 쉽지 않고 별로 안되는, 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이는 기독교적인 교리의 핵심인 하나님과 예수라는 영역이 일본 샤머니즘적 신도에게 침투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처럼 어느 지역 웬만한 곳에 빨간색 십자가가 즐비하게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은 아닐까 한다. 신이라도 다 같은 것도 아닌 것은, 신이라는 관념과 신을 대하는 신앙의 차이일 것이고  유일신과 다신의 개념은 서로 섞일 수 없는 그런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웃기는 거지만 적어도, 일본에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막부 시절의 일본은 미국의 페리 제독이 대포를 쏘며 개항을 요구하고 나서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다. 동양에서 처음으로 유럽의 신식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인 국가를 이루며 제국화는 가속화되었다. 여전히 동양은 봉건적 전근대적으로 살았다. 제국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약탈과 침략으로 얼룩졌어도 극동 아시아는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 유럽에서 멀리 있었으니까. 그런 아시아를 잡아먹기에는 더없이 좋은 시장이었고 쉽게 무력으로 진군할 수 있었다. 비등한 전쟁이 아니었으니까 초반에는 쉬웠다. 조선이 굴복했고 중국 대륙이 굴복했다. 필리핀과 같은 동남아시아도 전략물자의 조달처로는 좋은 먹잇감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연안과 중국 대륙, 만주까지 이렇다 할 변변한 대응할 무기조차 없이 전근대적 무기와 군사조직으로는 상대가 안되었던 거다. 아시아에서 군국주의 일본제국의 최대 적이 기상이나 날씨, 위생 등이었지, 상대방의 허약한 무력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거다.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원인이 상대방이 보잘 것 없었으니까 가능했던 거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의 봉쇄령에 맞서 진주만을 공격해버렸던 것. 미국이야 당연히 가만있을 리도 없고 사자를 건드려 버렸으니 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기고만장했을지는 모르나, 미국의 막대한 군사 생산력은 일본이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시아에서 미국처럼 강력한 생산력으로 근대화된 국가를 상대로 일본은 싸운 적이 없었으니 싸우면 이길 거 같은 착각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스스로는 몰랐던 거다. 상대할 대상이 심각하게 허약한 국가라면 아무리 뻘짓을 해도 문제가 되지 않고 문제가 드러나지도 않는다. 군국주의 일본이 승승장구한 것이 월등히 뛰어난 전쟁의 힘이라기보다는 상대가 처절하도록 허약한 상대였을 뿐이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크고 더 힘이 쎈 상대라면 자신의 조그마한 헛짓도 엄청 큰 대미지를 입을 수밖에 없다. 일본의 전쟁사에서 보면 강력한 상대로 한 심각한 뻘짓을 태평양 전쟁사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나는 패배한 전투가 부지기수이다. 게다가 뻘짓한 지휘관이 승승장구하는 승진을 거듭하는 걸 보면 왜 일본제국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가 나온다. 이 책과 더불어 일본 태평양 전쟁사에 대해 관련 유튜브 다큐 영상을 참고하시면 금방 이해될 것이다.


최근의 허튼짓으로 최대의 판단 착오는 동일본 대지진으로 후쿠시마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의 폭발 사고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만약에,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사고가 났을 때, IAEA 등 국제기구를 통해서 조속한 지원과 대처 방안에 대해 신속한 결정을 하였더라면 그 이후의 전개 과정은 어떠했을까라는 가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방사능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개별 국가의 자존심 따위의 문제보다 전 인류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한 솔찍한 고백이기도 하다. 아직도 일본은 방사능이 컨트롤하고 통제되고 있다는 몇 마디로 퉁치기고 있어도, 안전하다라고만 하는 주장을 주야장천 하고 있으나 충분한 물리과학적인 근거가 너무 없기도 하다. 일례로 체르노빌 원전 사고가 났을 때, 소련이라는 공산국가였던 것인지 군인들을 갈아 넣을 정도로 투입하고 그들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지금도 방사능은 뿜뿜대고 있을 거다. 콘크리트로 아예 봉쇄하였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콘크리트 부식 등의 이유로 러시아는 사고 현장의 원전을 스테인리스로 아예 덮어버리는 공사를 한다. 여기에 막대한 건설자금은 러시아가 부담하기 벅차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의 십시일반의 예산까지 투입된 사례를 볼 수 있다. 단순히 남의 나라의 문제가 아니라, 방사능은 국경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이 전 지구를 오염시키는 이유 때문이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 수습은 오도하고 덮어버리려 하며, 이후는 방사능에 관한 뉴스를 차단하기 바쁘다. 일본은 개개인이 후쿠시마 방사능에 관한 사실을 알리기만 해도 처벌받는 이 웃지 못할 짓을 벌이고 있다. 기본적으로 방사능이 전부다 생물체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것만은 확실한대도 이를 안전기준치를 운운하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식으로 호도하려 한다. 미국이 이식한 민주주의는 정착된 듯 보여도, 일본은 여전히 천황이 국민의 권리에서 출발하는 봉건제 무늬만 민주주의일 뿐이다. 정치가 세속 되는 영주나 쇼군과 다를 바 없는 셈이다. 국가는 어디까지나 국민을 위해서 필요로 한 것이지, 국가를 위해 국민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동일본 전역으로 퍼져나간 방사능과 앞으로도 멜트 타운 되며 발생하는 지하수의 방사능 오염은 사라지지 않는다. 제염작업을 일본 전국토에 전부를 할 수는 없고 물리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반감기가 도래하지 않는 이상, 계속 방사능 원자 붕괴가 계속 이루어지고 방사선은 계속 뿜어져 나온다. 감마선은 생물체의 유전자 사슬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것이며 사람들은 점점 질병에 걸릴 확률은 높아간다. 어린아이들이 갑상선암에 걸린다는 소식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이런 뉴스조차 발표를 금지하는 일본의 정치는 일본 국민들에게 눈을 가리게 하는 법률부터 만들었으니까 말이다. 후쿠시마에서 피난했던 사람들을 안전하다는 홍보로 다시 후쿠시마로 돌려 보네는 압력이 후쿠시마 피난민들의 제정 지원부터 끊어 내고 돈을 벌어 먹고살아하는 입장에서는 제정 지원이 끊기고 후쿠시마에 남은 주택 등에 대해 세금 지원을 끊고 다시 돌아가라고 한다면 언제까지 피난민으로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을 것이다. 돌아가자니 방사능의 위험을 알고 돌아가지 않으려니 제정 지원을 끊겠다고 하니 피난민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국민을 진정으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도록 만들어야 할 국가의 책임은 무엇일지, 아직도 과거의 신하들처럼 그렇게 어떻게 병에 걸린 줄도 모르고 걸리면서까지 불행을 자초하게 될 것인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방사능에서 나오는 방사선 감마선이 거짓말하지는 않을 증상은 두고두고 현실을 증명하게 될 것만은 분명하다. 얼마나 웃끼는 문장인지 들어는 보았는가? "(방사능을) 먹어서 응원하자"라는 게 기막히다 못해 웃기기까지 한다. 피할 수 있게 차단시켜도 모자를 판에, 먹어서 응원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먹고난 후의 내부 피폭은 감당할 수 있느냔 거다. 한번 실수는 가능하다지만 저건 너무 바보스럽다. 천황이란 샤머니즘 같은 지배층이 시키면 시키는 데로 다 하는 게 숙명처럼 받드는 게 결코 정상적으로 보이지가 않는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어느 지역에 작은 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사는 사람이라면, 이웃 간에 상부상조하는 것과 이웃 간에 서로 반목하며 싸우는 것의 차이는 각기 개별적인 인간의 사회성과 관련된 행불행에 대해 개인별로도 관계가 깊다. 서로 좋은 이웃을 두고 함께 공동으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있다면 관계가 밝게 발전되며 서로에게 공동의 이익으로 성립되지만, 만약에 아웅다웅 싸우고 다투게 되면 가까이 있어서 더 미워지고 서로가 불행한 관계로 개별적 삶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이다. 유럽에서 왜 국가 공동체인 EU라는 유럽연합을 만들었겠는가. 역사적으로 가까이 있어서 허구한 날 치고 박고 싸우니 서로가 불행했던 역사적 교훈을 스스로 국민들이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싸울수록 서로가 가해자이자 피해자가 될 것이란 것은 유럽은 두번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부터 경제통합에서 시작하여 이제 국가적인 통합까지 이루었던 거다. 물론 여기서 영국은 빠져나가겠다는 섬나라 특유의 아집이지만 여전히 유럽에서는 관세와 국경과 통화에서 자유롭게 된 원인이 결국은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자는 공통의 사고방식이다. 이익에 다툼이 없을 수는 있을지라도 서로에게 대포를 겨누며 싸우지는 말자는 큰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특히 나라끼리 국경을 맞대고 있는 경우에 더욱더 필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독일이 유태인이나 프랑스를 향해 필요할 때마다 사과와 반성을 하는 경향도 독일의 제국주의자들이 말끔하게 청소되어 처단된 이유도 될 것이고 독일에서 하켄 크로이츠 깃발만 내 걸어도 독일 내부에서 법정으로 세우며 처벌하는 것도 독일이 가지는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과거의 교육과 경험에서 출발한 현명한 판단이다. 그런 현명한 판단이 독일이 국제 사회에서 대접받고 지지를 얻으며 인정받는 중요한 이유가 된다. 독일의 국민들이 겪은 제국주의자들에 대한 심판은 독일 국민들이 겪었을 고통에 대한 정당한 처벌과도 같다. 제국주의에게 지지했고 종사했던 사람들을 아직도 법정에 세우는 노력을 독일 국민들이 그들 스스로가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는 이유이다. 그런 독일을 바라보는 프랑스는 독일의 국민들에게 긍정의 신호로 보고 화해하는 것은 사과와 반성, 그리고 제국주의자들의 처벌이 동시 이루어지고 나서야 가능했던 일련의 과정들이었다. 철저하게 피해자였던 국가와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반성하는 것과 이를 역사로 교육하는 국가에 대한 용서는 이루어진다. 과거의 앙금과 상처가 미래에도 악영향이 계속 미치게 될 때, 가해자였던 국가나 피해자였던 국가는 서로가 불행하다. 이는 우리와 일본에 대한 역사적인 과정의 적용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여전히 일본의 국민들의 민주주의 국민으로써의 시민의식에서는 시민이 아니라 천황의 신민이라는 가치관으로는 반성과 사죄도 없을 것이 뻔하다. 일본회의라며 샤머니즘적 신앙의 민족으로는 현대적 관념의 가치관과 공유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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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8-25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추측이지만, 오랜 기간 지방 다이묘들의 전란을 겪은 일본인들이기에 자신의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문화와, 중앙집권을 갈망하는 지배층들의 요구가 결합된 것이 메이지 유신 이후 현대 일본의 모습을 결정지은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천황제의 이면에 있는 이러한 문화가 ‘경제 선진국, 정치 후진국‘ 일본을 만들었다 조심스럽게 짚어 봅니다...

yureka01 2019-08-25 21:54   좋아요 1 | URL
전국시대의 전란에 무사가 아닌 농민이 살아 남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면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자기만의 특화된 업무의 곤조가 있어야 쉽게 죽이지 못했을지도 모르니까요...일본에 산재된 신사를 보면 그들이 얼마나 기복적 신도인지 느끼게 됩니다.

NamGiKim 2019-08-25 2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평양 전쟁사라면 혹시 그 일본침몰인가 뭔가 하는 13부작 다큐 말씀하시는 건가요?

yureka01 2019-08-25 22:47   좋아요 0 | URL
최근에 봤던게 3부작 태평양전쟁이었습니다.
몇가지 버젼이 있으니 검색하시면 될듯합니다..
13부작은 태평양전쟁비사...이걸로 검색하시면 됩니다..

NamGiKim 2019-08-25 22:49   좋아요 0 | URL
네 알겠습니다.^-^

yureka01 2019-08-25 22:52   좋아요 1 | URL
참고로, HBO에서 방영했던 퍼시픽이란 드라마도 있으니 참고하시면 좋을듯합니다....

NamGiKim 2019-08-26 13:39   좋아요 1 | URL
아 그 드라마 제가 고등학생때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불어 진짜 재밌게 봤던 드라마입니다. 3년 전에도 봤구요.^-^

yureka01 2019-08-26 16:27   좋아요 0 | URL
태평양전쟁은 전투 환경이 유럽전선에 못지 않는 악조건이었죠.아니 더 나빳을 겁니다.
아마 그런 점에서 보자면 상당히 잘 묘사된 드라마였단 평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8-26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있는 언론사와 시민들이 있던데 그 힘이 커졌으면 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결국 진실이 이길 것으로 믿고 싶습니다.

yureka01 2019-08-26 12:56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일본에도 과거 군국주의자들에 반대하는 사람들 있긴 있어요..아주 극소수라서요.
학교에서 과거 일본의 역사에 대해 교육도 안합니다..피해자같은 교육은 있어도 가해자로써의 역사는
안가르치거든요..그렇게 배운 학생들이 기성세대를 이루게 되거든요..

강옥 2019-08-28 0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울 갔다온 사이에 포스팅이 두 개나~~~
일단 반갑고예, 유레카님은 정말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하시네요
편향된 독서가 아니라 제가 배울 게 참 많네요. 느끼는 것도 많고.
누군가는 박테리아까지 씹어먹겠다고 한다더니 방사능까지 먹어치우는 사람도 있었군요
뭔들 못 먹겠어요 하긴. 일단 먹어야 사니까.
방사능보다 강한 종족. 과연 독종들이라는 생각이 ㅎ

2019-08-28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0: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4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일을 하고 싶어 하는가? 라"라고 묻는 질문에 55세 - 79세까지 연령층의 65%가 73세까지 일을 하고 싶다는 통계 조사 결과로 나왔다. 며칠 전 퇴근길 차 안에서 듣고 있던 라디오 뉴스 한 토막이었다.

 

며칠 전, 회사에서 자체 사업으로 주거용 건물을 올리고 있는 부지의 준공전 토지 지적을 정리하는 업무가 있었다. 측량 신청을 하고 현장에 토지정보 공사에서 직원이 나와 측량 예약한 날이 17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16일을, 17일로 착각하여 16일 아침 일찍 현장에 나갔다. 물론 16일에 측량하는 직원이 나올 리가 없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17일로 착각인 걸 모른 채, 왜 측량 기사가 제시간에 오지 않는지 일말의 의심도 없이 기다렸다. 아무리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한 시간에는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고 따졌다. 그러나 나는 심각히도 날짜 착각 중이었다. 그제서야 오늘이 17일이 아니고 16일인 것을 알게 된 순간, 단순한 인지 착오가 아님을 자각했다. 가끔 건망증이 새삼스럽게 심각한 느낌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부터 부쩍 이런 착오의 일들이 잦아졌다. 아무리 정신을 차린다 해도 가끔 미스매치하는 경우가 야금야금 늘어난다. 이렇게 가다간 나 자신도 스트레스이고 일을 맡긴 회사도 업무 효율에 마이너스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창 일하던 젊은 시절인 30대나 40대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착오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단적인 예이긴 하지만 이런 착각의 경우가 점점 잦아진다는 것.

 

나이가 들면  이렇게 단순한 것조차도 착오의 경우가 늘어가는데 하물며 새로운 시스템이 적용될 때 나 스스로가 얼마나 이 새로움에 적응하고 빠릿빠릿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상당히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배운다는 것도 머리 잘 돌아갈 때나 배우는 거지 점점 굳어가며 뇌의 회백질은 흡사 콘크리트처럼 굳어서 전화번호조차 뒤돌아서면 곧장 망각의 고개를 처드는 나이인데 뭘 하나 외운다는 게 보통으로는 외워지지도 않는다. 한번 보고 흡수했던 지식이 이제는 흡수되어 기억하지 못하는 뻣뻣하고 딱딱해져 버린 효용가치가 사라져버린 굳어 버린 시멘트 스펀지가 된 기분이다. 인지력과 암기력은 그만큼 떨어지고 낮아졌다. 공부도 다 때가 있다는 이유가 여기서 나온다. 새로운 일에 항상 부닥쳐야 할 업무가 점점 힘겹고 어렵게 될 때, 과연 나도 70세까지 지금과 같은 일을 할 수 있을까? 자신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렇게까지 업무의 연장선상에서 머물러야 할 인생 이 자체가 정말 우울한 시간이라는 거다. 단순한 착각도 자주하다 보면, 누군가 급여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무척 큰 역효과이다. 그렇다면 계속 일을 주고 급여를 줘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 이런 일을 더 잘하는 젊은 후배들도 많다. 앞으로는 과거의 낡은 업무가 새로운 업무로 대체되고 과거의 업무에 비해 새로운 시스템의 일은 전과는 전혀 맞지 않다.

예를 들어 계산을 위해 주판 1급의 실력으로 엑셀을 잘할 수는 없는 일이다. 계산의 원리는 같지만, 그 작동 방식은 전혀 다르다. 주판 실력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손가락이 주판 알을 잘 만진다 해서 엑셀의 키보드 두드리는 일과는 그 체계가 전혀 다른 것이다. "내가 왕년에 주판 1급이었는데 계산이란 말이야 엑셀 정도는 웃습니다"라며 아무 문제없다는 식의 자신감은 그저 자만이며 오만일뿐이다. 계산의 시트의 체계와 주판 알의 계산 체계는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로 멀리 있다. 주판 실력으로 75세까지 엑셀을 하겠다는 것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뻔하다. 하고 싶다 해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란 것쯤은 자각해야 한다. 착각과 자각 사이에 내가 있을 뿐이다.

젊은 시절에 모은 자산으로는 70세 넘어서 감당할 수 없다는 산술적 계산이 깔려 있다. 하기야 당장 벌어먹고사는 사람이라 축적할 수 있는 자산의 여력이 없다면 공짜가 없는 시대에 누가 노후를 보장해줄 거 같지는 않고, 더구나 공공적 복지 체계가 70세 넘은 노인네들의 생활비까지 보조할 충분한 지원도 안된다. 젊은 세대가 무대책으로 늙어 버린 노후세대까지 부양의 짐을 지우는 일도 사실 버거운 현실이다. 결국은 각자가 각자의 삶의 스케줄에서 닥쳐올 미래의 인생에 대해 무시한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나이 든 노인네는 누군가 다 봉양했다. 환갑 나이만 지나도 어디 직장을 매일 다니며 고정적인 수익을 올리는 사람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다 살아가더란 것. 물론 남은 자산과 자식의 봉양으로 생존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했어야 하나, 통계에서 보듯이, 한 달 최저 생계비도 안되는 연금으로 생활이 안되는 노후의 세대들이 너무 많다. 그렇다고 자식들이 이제는 보험도 아니었고 노후를 책임지라 말할 수도 없다. 지금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앞가림조차 버거워서 오히려 부모 세대에게 손을 내미는 경우를 많이 봤다. 그러니 73세까지라도 어떻게라도 무슨 일이든 해야 하는, 당장의 생계 문제가 되어 버린 셈이다. 달리 대책도 없으니 죽을 때까지 일하고 당장의 생활비에 연명해야 하는 운명은 정말 처절하고도 슬픈 일이다. 70세까지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은 스스로도 너무 억지스러운 삶이 아닌가. 그러나 현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노예로 살고 싶지 않으려 한다. 노예로 살려고 의도적으로 태어나고자 한 자도 단연코 없다! 다만 노예로 살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무시하고 태어나게 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란 자존감을 가진 존재로서의 주체적 존재라는 뜻이다. 아쉽게도 우리의 운명을 탓하며 노예는 아니지만 존재의 노예화가 된 시대를 사는 것은, 결국은 살아가는 것의 노예가 아니고 뭘까? 젊은 시절이야 어떤 든든한 자리에 직업을 가지려 하는 것도 생존에 더불어 자신의 삶의 성취감 등등의 여려 가지 이유를 붙이며 존재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늙어서 몸도 노쇠하고 인지력도 떨어지며 건강도 이상이 나타나는 나이에서까지 일을 해서 여전히 돈을 벌어야만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이게 너무나도 억지스럽고 거북스러운 거다. 그래서일까. 결과론적으로도 노인네들의 자살률이 다른 연령층보다 월등히 높은 이유를 달리 다른 것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듯하다. 쉽게 말해, 앞가림 안되면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프지만 정확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노예가 더 이상 일을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 내가 돈 벌지 못하면 더 이상 가치 없으니 죽어야 한다는 자조가 노인네 입에서 공공연하게 나오는 현실은 노예적으로 살았음의 직접적인 실토가 아닐까.

하기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일을 해야 산다는 명제는 죽을 때까지 유효하다는 생각. 태어난 목적은 일을 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산다는 철칙 같은 관념화된 인식. 현실적으로도 가치관적으로도 일을 못하면 생존에 위협을 받는다는 불변의 자연법처럼 견고한 성같은 거다. 왜 우린 일을 해야 할까?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하지 않는다. 그야 뻔한 대답이 근본적 존재론적인 질문의 자리를 차지하고 대신하는 듯하다. 다른 질문을 하면 흡사 불경죄를 지어 처벌받을 만큼 생각은 고착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다른 의문을 품는 자는 가까이할 수 없는 불가촉민 것처럼 이 사회와 가정에 대해 위협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어느 부모라도 지금 태어나게 한 자식은 앞으로 권력자가 될 것인지, 죽을 때까지 일만 하도록 살게 할 것인지, 판단이야 다 권력자 대열에 서 있으리란 가정을 하겠지만, 결과는 어느 사회이든 하부 구조를 이루는 사람이 아니란 보장은, 사실 하나도 없다. 내가 살아온 모습이 자식에게 그대로 투영될 것이란 생각은 왜 하지 못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대신에, 자식은 나보다 더 나은 직군에서, 더 좋은 자리에서, 더 멋지고 근사한 위치에서 호령할 자식이 되리란 보장은 할 수 있는가? 학교 다닐 때, 수학 시험은 30점을 맴돌던 부모가 자식에겐 100점을 요구하는 것도 자신의 욕망을 투사시킨 것일 뿐이다. 영어 시험을 100점 맞고, 국어를 100점 맞고 수학을 100점 맞으면 좋은 대학 좋은 학과 혹은 의사나 판사쯤 되는 꿈을 꾼다. 자식이 이루는 성취가 곧 내 삶의 성취로 둔갑하는 것은 바로 자식이 반드시 노예로 살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영 아니란 말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엄연히 1등급 학생은 전교에서 4% 일 뿐이고 나머지 96%가 2등급 이하인 것을.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도시에서 살면서 일상에서 먹고 마시고 쓰는 모든 것들을 거의 대부분 전자결제 시스템을 사용한다. 지갑엔 현금 대신에 플라스틱으로 된 IC 칩이 내장된 카드를 쓰며 혹은 휴대폰의 전파로 전자 결제 시스템에 접근해서 돈을 지불한다. 전산 기록 상에 존재하는 숫자가 진짜로 화폐와 비례할까 아니면 단지 숫자의 정보일까. 그리고 어떤 곳에서 사용된 결제 자는 포인트 점수를 주거나 때론 몇 번 구매하면 하나는 서비스를 준다며 쿠폰을 주기도 한다. 결제를 수납 받은 금융기관이나 통신사에서 포인트 점수나 마일리지를 주기도 한다. 현금으로 주고받으면 결제 회사를 거치지 않으니 포인트나 쿠폰이 없다. 뭔가 손해 보는 느낌은 난다. 계속 한 곳에 집중해서 소비하려는 심리가 발동된다. 내가 소비에 있어서 이른바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셈이다. 때론 이런 할인처럼 보이도록 유도하는 것을 마케팅이라고 하기도 하고 상술이라고 하는데 소비자의 얼마 되지도 않고 또 이미 할인된 금액을 제품가에 다 반영 시켜 놓고서 할인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고 다른 곳을 이용하지 않도록 유도하는 족쇄형 마케팅 전술이다. 나아가서 우리가 매일 지출하며 결제하는 신용카드, 전제 결제 시스템에서는 거래 기록이 그대로 빅데이터가 된다. 어디서 무엇으로 소비를 하며 어떻게 이용하는 것인지에 대한 단순한 정보가 모이면 모일수록 소비의 패턴이나 성향이 나타나고 이런 소비의 성향을 통계적으로 추출하게 되면 적절한 시간과 공간에 마케팅의 자료로 활용된다. 모든 SNS의 수익기반이 광고 마케팅의 도구인데, 어떤 쇼셜 미디어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그 마케팅 자료는 곧잘 홍보용으로 빅데이터로 제공될 때 역시 또 새롭게 유인용으로 대체된다.

오래 전 역사에서 배웠다시피, 분명 노예제도가 있었다. 고대로부터 전쟁으로 폐한 국가의 국민이나 시민들이 포로로 잡혀가면 노예로 살다 죽었다. 혹은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도 노예로 살다 죽었다. 노예는 재산이 되어 이리 지리 노동력을 제공하며 살았다. 예를 들면 로마시대에는 노예의 수명이 30년이 채 넘지 못했다는 기록을 봤다. 노예로 살았던 사람의 무덤을 발굴한 뼈를 보면 무릎이 거의 남아나지 않았다고 하니 무릎이 다 닳아 버리리 정도로 노동을 했으니 어떻게 30까지 살지는 못했던 수명이었다. 권력이 점점 고착화되면서 전쟁의 포로가 노예로 살기보다는 노예가 노예를 낳는 것이 점점 많아졌을 것이고 보면, 노예는 왜 노예를 낳았을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지만, 하나 어느 노예가 그런 질문을 할 만큼의 자존감을 가지고 존재의 근원에 대해 따져 묻는 것은 서자로 취급받아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르지도 못한 홍길동 정도나 되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노예는 질문이나 의문을 가질 자유가 없었다. 조선시대의 양반 가문의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도 노비라는 항목의 재산이 얼마나 자산적 가치로 취급했는지 기록으로도 나온다. 대를 이어 노비는 노비로 살아야 했던 그 노비의 아비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고 물을 필요는 없다. 그런 노예나 노비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만한 자각이나 인식의 지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뭘 알아야 생각이란 걸 하게 된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노비였으니 당연히 자식, 또한 노비로 노예로 주인을 섬기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대를 이어 가문의 노비가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생각이었고 여기에 다른 이의를 품을 수도 없는, 그런 확신의 신념 앞에서 노에 탈출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물론 간혹 탈출이라고는 하겠지만 극소수의 상황으로 가능했을 수는 있어도 그러지는 못했다. 노예는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해 노동을 끝없이 제공하는 역할만 있을 뿐,누군 태어날 때부터 노비고 양반이고라는 물음의 생각이란 것을 하는 즉시 죽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각할 지식도 없이 태어나면서 주어진 고착될 종속된 인생에 다른 어떤 의문이 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완전한 자유에 배제된다는 뜻이고 존재함으로써 반드시 구속될 수밖에 없는 근본적 이유이기도 하다. 육체의 구속일 수도 있고 생각의 구속일 수도 있고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는 것의 조건에 따르는 것으로써 필수적으로 종속되기도 한다. 어느 시대에 살았는가에 따른 구속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적인 전지한 존재로는 인간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래서 종교가 만들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누구인지 지금의 누구인지 그 사회적 환경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은 몇 살까지 일해야 하는가라고 물을 때마다 곤란하다. 네, 죽을 때까지 일하죠. 일로 노예처럼 살도록 나왔으니까요.라고 말하면 시작부터 너무 우울하지 않을까. 사는 게 도대체 일하러 나왔다는 것도 슬프다. 이럴 바에는 왜? 나와가지고 이렇게 일 없어서 삶의 졸보로 사는 걸까. 오늘도 또 지루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질문을 또 받았다. 언제까지 일할 거냐라고 묻는다. 아, 이 무슨 저주스러운 질문인건지...

가스 학살로 유명했던 폴란드의 아우츠비츠 유태인 수용소 정문에 걸린 팻말이 떠오른다. 

"ARBEIT MACHT FREI"(일하면 자유를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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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8-09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무엇인가에 얽매이는 순간 노예가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랑의 노예, 돈의 노예 등등... 진정한 자유를 얻어야 노예 상태에 있질 않겠지만, 자유도 갈망하다 보면 자유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레카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욕망‘을 하는 순간 사람은 노예로 빠질 운명인 듯합니다...^^:)

yureka01 2019-08-09 09:08   좋아요 1 | URL
족쇄가 발에 차는 쇠고랑이거든요..
채워져 있으면 쉽게 풀지 못하게 되거든요..
채워진 것을 쉽게 풀지 못하는 것..이게 노예화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국 쉽게 족쇄를 풀어낼 지혜가 자유를 만드는 것이겠지요...
네 욕망도 족쇄가 되면..욕망의 노예가 되니까요.

강옥 2019-08-10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코끼리 조련에 대한 얘기가 생각나네요
코끼리를 길들이기 위애 조련사들은 코끼리 발에 무거운 쇠사슬을 채운대요
반복된 학습을 통해 코끼리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고
나중엔 쇠사슬을 풀어도 도망가지 못한대요.
우리 사는 것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노동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사는 -

광활한 황야에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땡볕이 쏟아집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릅니다. 본능적으로 죽기는 두려운 거구요.
어디쯤엔가 오아시스가 있으려니.... 생각하며 그 땡볕 속을 걸어갑니다.
그 자리에 서면 그대로 타서 죽을 것 같아서. 그렇게 살아도 60년이 금방입디다 ㅎㅎ

yureka01 2019-08-11 06:16   좋아요 0 | URL
60년이 금방이었다니...아고..네....비유가 ^^.....

2019-08-11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3: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19-08-14 12: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글쓰기를 75~80세까지 할 수 있다면 행운일 것 같습니다. 이것도 건강이 따라 줘야 가능하죠.

완전한 자유는 없을 듯합니다. 살면서 생각의 구속도 얼마나 많은지...

yureka01 2019-08-14 17:27   좋아요 1 | URL
물론이죠..좋아하는 일을 하는 건 근로가 아니죠..
글쓰기로 생계도 해결되면 뭐 더없는 금상첨화일겁니다.
완전한 자유는 없거든요...

2019-08-15 1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6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서니데이 2019-08-22 2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주보다는 기온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더운 여름입니다.
오늘도 더운 하루, 시원하게 보내고 계신가요.
유레카님, 좋은 밤 되세요.^^

yureka01 2019-08-23 15:38   좋아요 1 | URL
처서도 지나가니 헌결 선선해질 거예요..
요즘은 업무가 바쁘니..글도 못올리겠어요..ㅎㅎㅎㅎ
늘 감사!~

雨香 2019-08-25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부조리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임을 잊지 말야햐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갈 무렵 <시지푸스의 신화>를 읽고서요

yureka01 2019-08-25 20:21   좋아요 1 | URL
무척이나 동감입니다....존재 이 자체의 부조리함...

2019-08-27 16: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7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5: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9: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7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27 17: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일단 텍스트 없이 사진만^^.

 

 

 

 

 

 

 

 

 

 

 

 

 

 

 

 

 

 

 

 

 

 

 

 

 

 

 

 

 

 

 

 

 

 

 

 

 

 

 

 

 

 

 

 

 

 

 

 

 

 

 

 

 

 

 

 

 

 

 

 

 

 

 

 

 

 

 

 

 

 

 

 

 

 

이상입니다^^...편안한 감상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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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ssbaum 2019-08-06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림도 그렇듯, 사진도 좋은 사진들을 많이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 ^^


yureka01 2019-08-06 11:13   좋아요 1 | URL
피사체들이 그리 심각한 생각을 요구하지 않는 사진들이라서..편안하게 감상하셨기를!~^^..

hnine 2019-08-06 12: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로등 아래 비 맞고 있는 나뭇잎 사진, 저는 제일 좋아요.

yureka01 2019-08-06 13:22   좋아요 0 | URL
비올 때 사진 찍으면 비와 상념에 푹 젖어 들죠..

단점은 사진 찍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입니다..
우산과 카메라 같이 들고 찍기에 자세가 안나와서요..

책읽는나무 2019-08-06 14: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빛들이 아름답게 느껴지네요.
태풍 영향으로 비도 오고 있고~~고요하게 사진 감상하기 딱 좋은 시간입니다.

yureka01 2019-08-06 16:57   좋아요 0 | URL
네 편하게 감상하셨길....
지금 비내리네요..바람은 세지 않고 시원하게 내립니다....^^..

stella.K 2019-08-06 14: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얼마만에 보는 사진입니까?
못 보는 사이 명작을 탄생시키셨군요.
그림 같습니다. 훌륭합니다!!

근데 비오는 날에도 나가 사진을 찍으시는군요.
그 열정에 박수를 보냅니다. 짝짝짝!

yureka01 2019-08-06 16:58   좋아요 1 | URL
비내릴 때 카메라들면 ..비의 감성에 젖어들게 되더라구요..
비내리는 사진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편안한 감상 되셨길.

아 사진 많이 못찍으니..자주 못올리게 되었어요..

2019-08-06 15: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6 1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yo 2019-08-06 1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자주자주 많이많이 찍어주세요.....

yureka01 2019-08-07 09:06   좋아요 0 | URL
알라딘 서재에서는 포스팅하기 좀 멋쩍긴해요..ㅎ

겨울호랑이 2019-08-06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7번 째 사진의 구름은 마치 빛을 발하는 새, 불사조 처럼도 보입니다. 빛을 쫓는 유레카님의 마음이 피사체에 투영되어서일까요. 사물은 사진기 앞에서 작가의 눈에서 한 명의 배우/모델로 거듭남을 느낍니다.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

yureka01 2019-08-07 09:05   좋아요 1 | URL
구름이 새로 보였다니..그러고 보니 새로 보이긴 하네요..^^..

2019-08-07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7 1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옥 2019-08-0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바쁜 와중에도 꾸준히 사진을 찍으셨군요.
맨 앞의 사진은 유레카님 사업장 내지는 근무처(?)인가 싶은 생각도 ㅎㅎ
사진 사이즈를 좀 키우셨으면 어쩔까.... 싶은 생각도.
몇 페이지 글보다 사진 한 장이 훨 낫습니더!!!

yureka01 2019-08-07 16:16   좋아요 0 | URL
혼자 즐기는 사진이라서요..꾸준함..이거 좋아합니다..
아 동네도 있고, 여러지역에 걸쳐 있는 사진이었습니다...

아참..알라딘 서재블로그는 텍스트용이라서 사진하고는 안맞아요..

블로그 프레임이 자동 리사이즈 축소되어서 사진 크게 올리기가 어렵더라구요.

저도 역시 글보다는 사진이 좋아서요..

강옥 2019-08-07 18: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물결무늬 사진 말인데요
우리 동네 저수지에 가서 시도해봤는데
생각만큼 멋있게 안 나오던데요 ㅠ.ㅠ
촬영 팁을 좀.... ㅎㅎ
어떤 조건에서 찍으면 좋은지 한 수 갤카주세욤~~~

yureka01 2019-08-07 20:10   좋아요 0 | URL
모티브는 미국의 추상화가 잭슨폴록의 화화를 참조 했습니다.
이미 오래전 부터 파고 들었던 주제입니다.

조건은 역광에서의 반사입니다.순광에서는 명암대비가 적어요..
즉 피사체의 반사된 그림자를 담아보세요..
환경은 수면과 피사체가 가까워야 하고
적당한 물결이 일어야 합니다.
바람이 없어도..바람이 너무 일어도 물결은 정지되거나 흐트러지거든요..
골과 산을 이루는 물결에 반사된 피사체..
영원과 무한...순간과 유한이겠지요...

이와같은 조건과 환경이 아니면 이런 사진은 나오지 않으니 참고 하세요.
이렇게 되어 있는 항구나 가까운 포구에 가셔도 됩니다....

서니데이 2019-08-07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잘 봤습니다.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은 서로 다른 느낌이 좋은 것 같아요.
유레카님, 시원하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yureka01 2019-08-07 23:34   좋아요 1 | URL
때론 거친 흑백도 좋아하고..
아주 말끔한 컬러도 좋아하죠..
매 순간마다 땡기는 색감이 있더라구요..

에어콘 빵빵하게 틀어요..더위 며칠 안갈 겁니다..ㅎㅎㅎ

2019-08-11 1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12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9-08-13 0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너머 이렇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시선이 더 감동스럽고 아름답네요🐳👍👍👍

yureka01 2019-08-13 09:11   좋아요 1 | URL
아름답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1. 휴가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충남 공주에 있는 우금치로 향했다. 갑자기 우금치였던지 모르겠다. 특별히 작정한 바 있어서 가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1894년 11월 그날의 전투의 현장에서 과연 이름 없는 아무개 농민이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죽창 하나 들고 우금치 고개를 달렸을 그 순간을 떠 올렸다면 너무 비약인지는 모르겠다. 좁은 골 양 사이드에 대포와 개틀링 기관총은 밀집 대형으로 뛰어오는 농민군들이 쉬운 표적지나 마찬가지였겠지. 전투라기보다는 그냥 학살 수준이었을 것이고, 농민군 입장에서 보자면 거의 자살 수준이었다. 1-2만 명이 50번의 "둘격 앞으로"에서 죽어 나간 숫자가 산을 이루듯이 시체가 쌓였을 것이다. 참가한 인원이 정확히 몇몇인지 참가 대장을 기록하지도 않아서 일까 기록이 없으니 아마 누군지도 몰랐을 것이고 구체적인 숫자도 몰랐을 것이다. 전황을 분석할 줄 아는, 군사지식을 전문적으로 배운 지도자도 없이, 싸우던 대로 변변한 무기조차 없이 오로지 돌격 앞으로!~였으니, 패배하는 거야 아쉽지만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했을 것이다. 썰에 따르면, 일본군 1명이 거의 500명을 죽였을 정도로 전투 수치는 극명히 대비하는 것을 보게 된다.



2. 시작은 전라도 고부 군수의 폭정이 원인이었지만 국내외의 정세는 제국주의가 침략이 시작되고 전 세계는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 유행처럼 번졌을 때이다. 일찍 개항을 하고 막부의 군국주의가 임진왜란에서 주장한 정한론이 다시 군국주의적 제국건설과 대동아공영권이 다시 정한론으로 나온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것이다. 소비시장이 필요하고 자원을 약탈할 식민지가 그래서 필요한 목표가 조선 점령이었을 것이다. 하나의 국가가 패망하는 이유나 원인은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결국은 집권하고 있는 통치 세력의 무능과 판단력 부재, 그리고 기득권의 집착으로 요약될 수밖에 없다. 일개 군수가 저지른 패악으로 비추어 보면 중앙의 집권세력의 패악은 오죽할까만은, 철저한 기득권의 권력 안주는 국제정세를 너무 둔감할 수밖에 없고 기득권의 손실을 두려워 놓지를 못하게 하는 것도 판단을 방해하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는지도 모른다. 쇄국도 자신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서 문을 닥고 막기에 급급한 방편일 뿐이었음에 대한 결과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런저런 사건과 사고가 다 국가의 힘을 가질 수없는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집권세력의 판단에 대한 책임은, 그대로 국민으로 피해로 전가되었고 국가를 잃은 식민지 2등 국민의 역할은 36년 동안의 피지배자로 약탈당하는 고통으로 연결되었다. 권력의 무능한 책임에 대한 대가가 국민이 고스란히 전가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똥칠은 권력자들이 질러 놓고, 치우는 것은 국민이었던 아픔이다. 사대주의 속에 빠져 있었을지라도, 복속당해서 말과 글을 잃은 적이 없었던 역사에서,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침략으로 흡수 합병되어 나라가 사라지는 결과는 처음이었으니 근대사의 뼈아픈 치욕적 패배였다.



3. 러시아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집단 돌격 앞으로!~의 구령이 우라!~이다. 돌격 앞으로 할 때 우라!~~~를 외치며 총알과 포탄이 터지는 사이로 달려 들어가 백병전을 벌이는 전술은 무모하기 이를 대가 없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피를 끓게 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날의 전투에서 이름 모를 농민이 죽창 하나 빼어 들고 앞으로 달려 나갔을 것이다. 죽창으로 한번 찔러 보지도 못한 채 멀리서 쏘는 타깃이 된 돌격은 무참히 쓰러지고 나뒹굴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 고통의 아우성 같은 바람 소리가 우라!~~로 들렸을 법도 한 착각이었다.



4. 우금치 골짜기에는 너무나도 적막한데 한 여름의 바람 소리는 흡사 그날의 아우성처럼 복잡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골짜기를 타고 빠르게 흐르는 바람은 그날의 소리를 닮은 듯이 거세게 불어 댔다. 그리고 100년도 더 지난 한 여름날의 더위는 숨 막히게 했다. 이름 모를 무수한 들풀들이 우금치 골짜기에 빼곡히 피어 있었다. 개망초꽃이 뜨거운 한여름의 바람을 맞아 흐드러지게 흔들렸다. 이 많은 풀들이 흡사 그날 치열하게 내 달렸을 농민들이었을 것만 같았다. 스치는 바람은 더 뜨거웠던 함성을 닮았다.



5. 휘몰아치는 바람에 골짜기의 나무는 온몸을 비틀어 가지를 흔들 거렸다. 역사는 그날의 기록으로 한 페이지를 남겼지만, 추풍낙엽처럼 떨어져간 영혼들은 외로운 위령탑 하나로 가름하기에는 너무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렇겠지. 장비도 변변하게 없이 군복이란 것도 없이 전투모 하나 없이 짚신으로 전투를 했을 사람들의 생명들은 바람 앞에선 촛불과 다를 바 없었던 비극의 현장이었던 거다.





6. 역사는 지나간 과거의 영향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미치고 효력은 되풀이로 살아난다. 징용당해 청춘을 빼앗긴 피해자가 민간 개인 신분으로 기업에 착취 당해 배상을 청구한 결과를 두고 정치적 대응한 현재의 일본 정치권은, 수출 규제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고, 이에 국내는 일본에서 만든 제품의 불매를 시작했다. 결과는 어디까지 미치게 될지 장담은 할 수 없으나 현대에서 기업의 제품은 각종 부품의 생산 유통 제조 판매가 분산되어 있거나 분업화되어 있다고 보면 정확하다. 한 기업에서 모든 것을 다 하기에는 벅차다. 하려면 다 할 수 있지만 너무 비효율적이고 생산 코스트의 상승을 야기하게 된다. 이런 국제 무역의 질서가 효율적이고 상대적인 이익 발생이 우월하기 때문에 분업화되는 무역 선정한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질서에 대해 정치적인 영향으로 재제적 수단화시키는 것은 양자 사이에서 대단히 위험하다는 거다. 그런데 일본 정치권에서 사법적인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무역의 제재라는 카드가 상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지만 자칫 자해적이기도 하다. 일본은 간과한 것이 하나가 있다면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몰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대대로 일이 꼬여 박살 날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 때 분연하게 일어난 것은 이름 없는 의병이 불처럼 일어나듯 같은 시민들의 합일점이었다. IMF 때 금반지까지 빼서 던질 분위기를 잘 타는 민족임을 몰랐던 거다. 아직 IMF의 자금을 받은 국가치고 이렇게 금을 모아 달러로 바꾼 경우는 우리가 유일하다. 즉, 분위기 타는 것을 냄비근성이라고도 하지만 이랬든 저랬든 그 위기의 대응은 결국 다수의 결집으로 타나 났던 거다. 이런 분위기가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이 대중화되기 전과 후의 양상은 사뭇 다를 수 있다는 거다. 요즘 가끔 대두되는 문구가 떠오른다. 독립운동에 나서지는 못했으나, 불매운동은 참가할 수 있다고 한다. 동학 농민군들처럼 죽창을 들고 개틀링 기관총 앞으로 돌진할 수는 없어도 내가 가진 자본으로 일본산 제품을 구입하지 않는 것은 독립운동보다 훨씬 쉽다는 의미일 것이다. 무역이란 어디까지나 구매처가 갑이다. 사달라고 마케팅이 있고 판매가 이루어져야 이익이 발생한다. 팔아도 사주지 않겠다는 단체의 구매력의 힘은 자본주의에서 함부로 건들기 상당히 힘든 상황에 빠지게 한다. 일본은 개개인의 청구권에 제갈을 물리겠다는 발상에는 동학 농민군이 지금 나타났다면 과연 찬성했을까 따져 볼 문제일 것이다.


7. 일본의 방식은 늘 한국이 그들의 존재적 이유였던 것처럼 이익을 많이 봤다. 식민지에서 뽑아 먹은 노동력이 얼마였으며 자원이 얼마였고, 수탈한 물자들은 얼마였겠는가 싶다. 6.25한국 전쟁의 군수물자 생산 기지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것도 한국 때문이었을 것이고 베트남전에 한국의 군수물자를 수출해서 벌어들인 돈은 도쿄의 올림픽을 하고 자신들이 부를 쌓은 과시를 했다. 그러나 그들은 옆에 뽕 빨아먹는 존재가 있어서 고맙기는커녕 항상 혐한이 그들의 방식으로 임란 때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닮았을까.


독일에 점령 당한 프랑스의 어느 서점에서 혐독일이란 책이 매대를 차지하고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는 일은 없다. 영국과 프랑스가 백 년 전쟁을 벌였을 정도로 앙숙이었다지만 영국의 어느 서점에서 혐 프랑스 코너로 다수의 책이 베스트셀러라고 하는 책도 없고 프랑스에서 어느 서점에서 혐영국이란 베스트 코너도 없다. 하물며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어느 서점에서도 혐독일하는 책이 베스트셀러로 제일 잘 보이는 매대를 장식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그러나 일본의 유명 대형 서점에는 혐한의 지독한 정서로 장식된 책이 버젓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며 판매 순위를 오르락 거린다. 일본에서도 분명 지식인이 있고 양심이 살아 있는 층이 있을 수 있다지만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서이다. 반대로 우리나라 어느 서점에서도 혐일하는 책을 모아 제일 잘 띄는 위치에 매대를 세웠다는 뉴스를 본 적이 없다. 알라딘 온라인 서점에서도 혐오의 일본에 관한 책을 모아 코너로 만든 것도 없다. 과연 한국이 일본에 무슨 잘못을 하고 밉보였던 걸까? 혹시 그들의 섬나라 특유의 열등감은 미움과 혐오로 발전되고 살아가는 존재적 이유는 아닐까 싶을 정도이다.


일본은 한때 잘 나갔다. 잘 나갔을 때의 갈라파고스 같은 똥고집은 곧 잘 장인정신으로 우대되며 오로지 자기 분야의 최고 실력으로 발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날로그 시대가 저물고 디지털 시대는 복제가 자유로운 시대이다. 광범위한 복사의 방식은 진본과 모방의 구분을 없애 버렸다. 여기에서 일본의 장인정신은 타협 없는 똥고집이 최고하는 신화가 무너진다는 점이다. 그 똥고집과 혐한의 정서는 결국 자신들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성찰을 방해한다.

사과와 반성은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하는 것이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피해자가 그만하면 많이 했으니 반성과 사과를 받아들일 때 비로소 해소가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고방식을 그들의 특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못하는 자만심의 민족이 아닐까 싶다. 앞으로 한일간의 갈등 역시 양상의 방향과 키는 가해자이자 전범국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다. 피해자였던 우리가 용서와 반성을 받아 줄지 말지를 결정권자이다. 이런 인식이 없는 한, 앞으로도 한일간의 서로 앙숙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국가가 패망한 것은 한 번도 과하다. 다시는 막무가내의 돌격 앞으로 같은 우를 범하지 않고 국가가 복속되었을 때의 식민 국민의 한을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노예는 가끔 자발적일 때가 제일 안타까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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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31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31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1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8-01 08: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01 09: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휴가를 일찍 보내셨네요. 저는 좀 일부러 휴가 날짜를 늦게 잡았어요. 이번 휴가는 그냥 집에서 보낼 건데 일찍 잡든 늦게 잡든 똑같은 거 같아서요.. ^^;;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에 우금치 전적지를 찾는 사람들이 조금 늘어났을까요? 일제 강점기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도 존경하고 기억해야 하지만, 근대 이전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의병장들도 많이 주목받았으면 좋겠어요.

yureka01 2019-08-01 09:31   좋아요 0 | URL
드라마 했군요..TV를 아예 시청하지 않는터라 드라마 하는 줄도 몰랐어요..
네.영화나 다큐로 제작된 적은 있다고 알고는 있지만 본 적은 없었거든요..
일제 치하 통치기간의 독립운동은 그나마 조명되는데 이전에 대한 근대 저항역사는 약간 못미치는듯하더군요..

휴가 길지도 않고 해서 시간은 금방 지나버렸어요..아놔..

강옥 2019-08-02 16: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마낫!
며칠만 일찍 이 글을 읽었더라면 우금치엘 가보는 건데요....
수요일(7/31) 공주, 서천 그 동네 돌아다녔거든요
일주일동안 수도권을 맴돌았는데 갑사, 마곡사는 알아도 우금치는 몰랐던..... ㅠ.ㅠ

오늘 일본이 2차 공격을 감행했네요
미국이 중국을 밟고싶은 것처럼 일본도 우리를 밟고 싶겠죠
니 마이 컸네? 하면서 마구 밟아 뭉개고 싶을 거예요. 우리가 앞설까봐

yureka01 2019-08-02 19:56   좋아요 0 | URL
국가 조선은 힘없는 나라였는데,
쮜뿔로 없는 농민이 낫들고 호미들고 죽창들고 죽을 줄 알면서도 우라!~~~~를 외치던 그 객기.....

지금은 낫들 필요도 없이,
안사고 안먹고 안가면 되니 얼마나 편한가 싶습니다..

ㅎㅎㅎ 라이카 너무 비싸요.
그런데..와잎이 라이카 살까 하니 사라더군요..핫ㄷㄷㄷㄷㄷ

Nussbaum 2019-08-03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주는 제 고향인데, 올리신 사진을 보니 며칠 전 다녀온 고향이 생각납니다.

음.. 제 고향 사람들의 성향으로 볼 때 그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화가 났을까 하는 생각으로 닿게 되네요.

일본과 독일은 참 대비가 잘 되는 국가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둘 다 인류에게 끔찍한 짓을 저질렀지만 한쪽은 아직도 그 망령에 사로잡혀 있고, 한쪽은 많은 반성을 하는 모습을 보이고.

이번 일로, 조금이나마 반성의 시간을 갖게 되는 일이 벌어졌으면 하는 바람 가져봅니다.

그나저나 라이카 Q2가 나와서 무척 고민이신가 봅니다. 요즘 생각을 해 보는데 만일 카메라 하나를 더 사야 한다면 저는 라이카입니다 ^^


yureka01 2019-08-03 10:56   좋아요 0 | URL
아고 공주가 고향이셨군요...
고향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 가져도 좋은 고장이더군요.
다른 거 다 제치더라도 그 자유를 향한 저항의 역사는 두고두고 기념할 사건이었으니까요.

지금 유럽에서 EU의 경제 공동체 정치공동체..심지어 화폐조차 유로화로 단일 체제가 된 주축의 원인은
독일이 전쟁범죄에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죠..
가까운 나라들이 합심하고 단일 경제로 나갈 때 얼마나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지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는지 좋은 사례거든요..

네..라이카....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내년에 예금 만기되면 지르까...고민중입니다..
가격이 진짜 넘사벽이라서..아흑.~~~~~

더운 여름날 시원하게 나시구요~~~감사합니다~

2019-09-01 1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9: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것의 가격 -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가격의 미스터리!
에두아르도 포터 지음, 손민중.김홍래 옮김 / 김영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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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가 그린 "붉은 포도밭"이란 작품이 팔린 가격은 그 당시 가격으로 400프랑. 참고로, 근래에 소더비 경매장인가 거기서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라는 그림은 2억 4000만 프랑에 팔렸다. 고흐의 그림은 하나를 뺀 나머지는 전혀 팔리지도 못했다. 가격을 비교해도 어마어마하다. 고흐는 가난과 정신분열증으로 인해 생을 자살로 마감했다. 생후에 그의 그림으로 수집가들이나 소장가들은 막대한 부를 고흐의 그림으로 쌓아 올렸다. 정작 만든 사람은 아프게 죽어갔으나, 그림 소장자들이 결과적으로 돈을 벌어들인 셈이다. 어쩌면 시대를 너무나 앞서가버린 회화 천재라서 불행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지금 고흐가 살아 있다면, 자신의 그림 가격을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상당히 궁금하다. 뭔가 억울해라고 하지 않을까? 보통 예술 작품의 가격은 당대의 작가가 삶의 비용으로 치르는 가격과 폭등해버린 작품의 가격의 불균형이다. 도대체 이 가격이라는 덩어리를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이 책에서 밝혔다. 물론 문화라는 가격에 대한 고찰도 장황하리 만큼 길게 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절대적인 가격은? 없다. 가격이란 대게가 상대적일 뿐이다. 특히 절대적일수록 가격은 무한대로 커졌다가 일순 사라져 버린다. 이 물건은 가격을 메길 수가 없다고 하는 순간, 가격은 사라진다. 가격을 메길 수 없다는 것은 가격이 없는 것과 같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매일 숨 쉬는 공기를 가격으로 따질 수도 없고 매일 마시는 물의 가격도 따질 순 없다. 공기의 질적인 부분이나 물의 질적인 부분으로 가격이야 상대적일 따름이다. 특히 시간을 돈으로 사고파는 거라면 부자는 남의 시간을 사들여서 영원히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간을 사고파는 일은 없다. 즉 가격이 없다는 의미이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것일수록 꼭 필요한 필요성이 절대적인 것들이다. 논리의 가격과 철학의 가격, 문학의 가격 등등 우리가 인문학적으로 추구하는 예술의 가격은 절대성에 수렴하게 될수록 가격을 매길 수 없다. 상대적인 것일수록 가격에 민감성이 높다.

 

이처럼 가격이란 우리들이 시장 경제와 자본주의 체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과 임무가 있다. 하루라도 소비를 하지 않고 가격에 전혀 도외시하며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편으론 대부분 종속되어 있거나 심지어 이 가격에 의해 지배당하기도 하고 또는 가격을 주도하기도 한다. 이 책에서는 은행가들에게 질타를 한다. 시장의 가격을 주도하는 역할이 은행가들이었다고 봤다. 은행가들의 이익에 따라 가격의 흐름을 리드하는 것도 결국 이자율일 것이다. 이렇게 돈에도 가격이 있다. 돈의 가격을 매기는 은행가들에게 고액의 연봉은 일반 노동자의 노동 가격보다 훨씬 많다. 결국 돈을 주무른 자와 돈에 굴복된 자의 차이는 노동의 가격으로 차이를 낸다. 이 또한 상당히 큰 불공정한 거다.

 

추상적인 것들의 가격의 결정은 극히 소수의 수요와 공급으로 결정되며 현실적인 것들일수록 상품의 가격은 수요에 결정된다. 어떤 제품을 구입하고자 하루에 서너 번씩 가격을 비교하고 가용성. 즉 가격 대비 효율성을 따지는 것도 결국 가격의 상대적인 가치에 높은 효율을 얻어야 이익이 발생한다는 원리일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공기의 가격, 우주의 가격, 문학의 가격, 심지어 가정의 가격. 혹은 도덕과 윤리의 가격을 따져 보면 우리 인생의 삶이란 모든 것을 가격이란 객관적인 가치로 환승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삶의 가치는 과연 얼마인지를 따져 본 적이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적절한 사유를 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조금 흥미롭게 읽었던 부분이 공짜의 가격이었다. 공짜에도 가격이 있고 공짜에 숨은 이면의 심리적 현상에 대해 저자는 조목조목 지적한다. 그러고 보니, 알라딘 서재에서의 리뷰의 가격은 얼마일까 싶었다. 막상 이 책을 읽고 떠오른 소감을 글로써 써 내려가는 것의 가격은 얼마일까 싶었다. 자기 돈을 들여서 책을 구입하고 읽은 책의 독후감을 또 생산하여 보여주는 것에 가격이 얼마라야 하는지 크게 따져 본 적은 없었는데 문득 이 책에서 공짜의 가격에 대해 지적하는 걸 보니 리뷰의 가격은 얼마냐라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간혹, 출판사에서 책을 얻고 쓴 리뷰는 제외하더라도 알라딘의 서재에서 포스팅되는 리뷰 대부분은 아마도 거의 공짜일 것이다. 나도 어떤 대가도 없는 책 리뷰라서 그런지 몰라도 과연 이 리뷰의 가치는 얼마일까 비교론으로 따지기도 애매하다. 어떤 리뷰의 기준이 없이 길든 짧든, 독후감의 가격이란 무엇인지 이 책이 따져 묻게 한다. 어느 작가는 자신이 글에 저작권을 걸어 책으로 발표하여 출판사와 작가에게 인세라도 가는데 알라딘 유저 대부분은 글이 거의 공짜다. 전통적인 경제이론이었던 사람들은 합리적인 소비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데 알라딘의 유저들은 과연 합리적인 생산자이자 소비자 일까.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합리적이지 않는 것이 공짜이었기에. 경제 시간에 배웠던 가격의 결정요인이었던 수요와 공급이라고 했다. 그러나 리뷰에 수요는 얼마이며 공급이 얼마길래 가격이 결정될까 싶기도 했다. 리뷰의 수요는? 그리고 공급은? 사실 리뷰의 수요와 공급은 객관적이지 못하다. 그러니 가격을 객관적으로 얼마다 이야기할 수도 없다. 그러나 얼마나 집계되지는 못해도 분명 수요와 공급은 있을 텐데 다만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앞으로 물론, 리뷰로 가격을 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 책을 읽었던 토대로 사진을 오래 했던 나로서는 가격과 연관 지어서 사진의 가격이 얼마일까?라는 질문은 한편으론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내가 찍은 사진의 가격은? 물론 고전적 경제이론에 따라 수요가 없으니 아무리 공급이 있다 해도 가격은 늘 0에 수렴한다는 것쯤은 잘 안다. 혹여 수요가 있다 해도 가격을 떠받칠 만한 강력한 수요는 아니기에 역시 가격은 0에 수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진이 어떤 특정한 사건이나 사고에 우연찮게 관련이 되면 그 가격 역시 0에 수렴되는 웃지 못할 상황에 빠진다. 사진은 반드시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이루어지는 수주형 가격이 맞는 거 같다.

오래전에 내가 사는 지역의 지하철에 큰불이 났었고 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잠시 몸을 담았던 동호회 친구 한 분이 그 지하철 기차를 타고 있었다. 물론 사진동호회 회원답게 사진을 좋아해서 늘 카메라를 소지하고 있었다. 지하철에서 누가 불을 지르고 연기가 온 열차 칸칸이 퍼질 때의 상황을 카메라로 담았다. 그런 사진을 개인 홈페이지에 포스팅하고 그때의 상황을 기록했었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 담았던 사진은 온 언론사가 모두 퍼갔다. 그리고 자신들이 취재한 양 저자에겐 동의 한마디 구하지도 않은 채로 사고를 기록한 긴박한 순간의 그 사진을 그대로 신문에 실었다. 심지어 통신사와 제휴를 맺은 외국 통신사도 그 사진을 실었다. 사진은 비록 유명해졌으나 사진을 찍었던 작가에게는 이런저런 한마디 설명도 전혀 없었다. 그저 작가는 사진만 제공한 셈이 되었고 신문사는 손쉽게 사진기자를 투입하지도 않고 기삿거리의 사진을 얻었다. 신문사로는 사진을 얻는 비용이 거의 공짜였던 거다. 사진 기자가 취재하러 오며 가는 시간을 줄였고 사진 기자가 취재할 경비를 줄였다. 분명 그 사진으로 신문사로써는 비용을 아끼는 등의 이득을 취했으나 작가는 그 어떤 소득을 얻지는 못했다. 다만 작가에게는 공공의 소식에 알리는 역할만 있었을 뿐이다. 문제는 단순히 얻어걸려 찍은 사진이든, 작정하고 취재하여 찍은 사진이든 사진에는 목적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는 것이었다. 지하철에서 불이 나서 자욱한 연기에 감싸인 객실의 모습을 담은 사진 한 장의 수요는 폭발적이었으나, 공급은 딱 한 장이었다. 물론 경제 이론상 공급이 한 장이었고 수요가 너무 많았으니 가격은 천정부지였겠지만, 아쉽게도 공익이란 목적이 경제 이론적 수요 공급의 가격 절정권을 무너 뜨린 셈이다. 그렇다고 그런 사건이나 사고를 재현해서 담은 사진은 가치가 없다. 사진의 가격은 조작이 없을 때라야 가격이 오르며 공공의 목적에 가까울수록 가격도 사라진다. 그러나 가격이 사라졌다고는 하나, 그 사진의 가치는 가격으로는 도저히 매길 수 없는 사진이었다. 가끔 뉴스에서 결혼식이나 이런 사진을 망쳐서 클라이언트에게 사진을 못 주고 사기 치는 경우도 사진의 가치와 가격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이유이다. 결국 시간의 가격과 공간의 가격이 맞물린 것이 사진의 가격일 것이다.

역시나 나 또한 사진으로 가격을 매겨 본 적은 없다. 누구에게 사진의 가격을 매겨서 팔아 본적도 없다. 사진의 수요가 없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수요도 없는 사진이라고는 하지만 내 삶의 정체성과 사유에 대한 과정이 사진에 담겨 있다. 그러니 가격으로 따지기는 상당히 곤란하다. 이게 얼마라 말 할 수는 없다. 이때까지 사진을 담기 위해 돌아다녔던 시간을 기회비용이라고 한다면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했더라면 돈을 더 벌었을 수도 있겠으나, 그러지를 못했다. 특히 사진을 담았던 시간은 가격으로 따질 수는 없다. 돌아다니며 들였던 이동 수단에 대한 경비는 일절 자부담이었다. 누가 찍어 달래서 담은 적이 거의 없으니까. 결국은 사진도 내가 좋아서 돈 들여서 해야하는 노고 일 뿐이다. 누가 하라 해서 한 것도 아니고 하지 말란다고 안한 것도 아니었던 거다. 역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는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없는 것 중에 하나가 사진이 얻어 걸린 거나 마찬가지다. 이 책을 읽고 리뷰를 쓰다 보니, 한편으로는 저마다의 각자가 가진 시간의 가격은 얼마일까? 시간의 절대적인 균등성에서 사람마다 가진 시간은 다 같다고 한다면, 하루에 주어진 시간 24시간의 가격은 어떻게 책정될 수 있을까? 시간 단위당 가격이라는 것. 결국 그 시간 동안에 무엇을 생산하거나 어떤 행위로써 가격이 정할 수 있나 싶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노동의 가격에 대한 여러 가지 고찰이 나오기도 한다. 노동자의 노동 가격의 차이가 어떻게 벌어지고 좁혀질 것인지에 대한 흥미였다. 다 같은 시간을 사는 이 순간의 가격이 싼 것인지 비싼 건지를 떠나서 무거웠을 것만 같았다. 인도의 어떤 아이가 하루 종일 쓰레기를 뒤져 플라스틱 병을 모아서 벌 수 있는 돈의 시간과 월가에서 펀드매니저가 벌어들이는 펀드 수익의 시간적인 비교론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가치로운 것인가에 대한 비교론만으로는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분명 없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가치와 가격에 대한 고민은 고품격인지 저 품격인지 비교의 기준이 뭔지에 대한 생각은 실로 다양하기에 어떤 가격으로 자신에게 부여할 것인지 따져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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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7-23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작권이라는 게 있는데 남의 사진을 마구 퍼가도 되는 건가요?
친구분(저작권자)가 그 사진을 공개로 설정해놓으셨던가요?
저도 글 도둑질을 많이 당한 사람이라 그 심정 이해합니다.
요즘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째로 복사하는 기능이 있다보니
사진이고 동영상이고 마구 퍼나르는 추세 같아요 ㅠ.ㅠ

yureka01 2019-07-23 14:01   좋아요 2 | URL
퍼가는 거야 막을 수야 없겠지요.다만 퍼간 사진을 어떤 목적으로 무단 사용이 문제라서요...
공개된 사진이라도 이용했을 때 공익적 목적이었더라도 양해를 구해야 하는 것이 먼저 순서이니까요...
돈벌자고 찍은 사진이 아니더라도 저작자의 권리를 무시하면서
신문사는 자신들의 기사에 저작권을 걸고 있는 모순을 보면 상당히 잘못된 거죠..
자기의 권리는 지켜 달라면서 남의 권리는 무시하는 처사는 비판 받아 마땅하니까요..

2019-07-23 16: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3 16: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23 16: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는 일도 본인이 정말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면 어느 정도 비용이 들어요. 책을 덜 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 위주로 읽다보니 도서구입비는 예전보다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교통비가 조금 올랐어요. 제가 차를 소유하지 않고 있어서 주로 탑승하는 이동 수단은 버스에요.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직접 보기 위해서는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구의 도서관에 가요. 이 도서관, 저 도서관에 가게 되면 버스카드에 충전된 금액이 야금야금 줄어들어요. ^^;;

yureka01 2019-07-23 16:28   좋아요 1 | URL
그럼요,좋아한다라는것은 비용이라기 보다는 좋음의 값을 치르는 의미겠지요...
네 보고 싶은 책 대부분 사는 것도 적은 것도 아니니까요...

2019-07-24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5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5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26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1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2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雨香 2019-08-05 14: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은 비록 유명해졌으나 사진을 찍었던 작가에게는 이런저런 한마디 설명도 전혀 없었다. 그저 작가는 사진만 제공한 셈이 되었고 신문사는 손쉽게 사진기자를 투입하지도 않고 기삿거리의 사진을 얻었다. ‘

기사를 무단 전제하면 안된다는 하는 이들이 그 사진은 공공의 것으로 생각한 것일까요. 명예기자가 아니라면 최소한 지면 한칸을 통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했어야 하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요즘 언론의 데스크나 편집에 제 정신인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들지만요)

yureka01 2019-08-06 09:14   좋아요 1 | URL
흔히 경험하는 거죠..
나는 공적이라 되고 넌 사적이라 안되고....이런 이중성이 쩔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