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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 히피 로드 - 800일간의 남미 방랑
노동효 지음 / 나무발전소 / 2019년 4월
평점 :
히피 로드.
오랜만에 아주 괜찮은 여행기를 만났다.(이웃분의 책소개 감사드린다.) 모름지기 여행이란 어디로인가 이동의 수기처럼 나열이다. 이 나열 속에서 만나는 공간과 시간 그리고 사람들의 풍경이며, 여행의 풍경이란 낯선 곳에서 만나는 나의 이질감의 낯섬이다. 흔한 관광지라는 포인트, 즉 점으로의 이동이 아니라 선으로 이어지는 노매드가 여행이라는 걸 여행기를 통해서 다시 한번 느끼게 해주는 책이었다.
이미 유명해진 관광지를 찾아가는 것은 여행이 아니다. 와서 보라고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얻져 먹는 것처럼, 이미 세팅된 개량된 패스트푸드나 먹는 것과 같다. 관광에 따르는 자본의 입김은 여행이라는 그럴싸한 보여주는 밥상에서 그럴싸하게 차려낸 레시피의 맛일 따름이다. 눈요기 관광을 가고서 여행 갔다고 하는 착각은, 자본이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낸 상품이다. 푸드코드의 차림표에 보이는 사진을 보고 고르는 관광 상품을 보고서 여행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 이유는 뻔하다. 관광은 정형화된 코스이고 여행은 중구난방의 바람처럼 구름 가듯 발길 닿는 선의 이음이고 보면 상수가 아니라 변수이다. 여행은 우리 삶에 있어서 X라는 변수. 낯선 곳에서 문득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라는 근본적 질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여행이다.
여행의 정의가 비정형적이라고 한다면, 그동안 나는 노매드가 아니라 정착민으로 살았다.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무언가 탈것으로 이동하기보다는 걸어야 하는 한계가 늘 도사리고 배낭을 메고 아픈 다리를 끌고 가야 하는 것에서 여행은 고역이라는 것과 정형화되지 않는 노동같은 이동이 여행이었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나는 평생 미결 유기수로 감옥에 갇혀 산 거나 다를 바 없다. 누군가의 고착된 정착민의 성실함과 근면함의 주장이 부지불식간에 교육이란 이름으로 사육당했을지도 모른다. 열심히 일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회적 개인적으로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한자리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의 삶의 결과는 무엇이었나라고 생각해보면 참 서툴렀다는 생각이 가끔은 억울할 만도 하다. 어느 때부터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부터 떠남의 동경이 늘 상존했던 거 같다. 이름 모를 지명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곳에서 낯선 풍경과 낯선 사람들의 삶을 이질적으로 보이는 것에서 이질감에서 찾아내는 자신의 동질성에 대해 갈구하게 되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저마다의 감옥을 만들고 자발적인 구속을 시키는 게 아닐까 한다. 나이 차면 학교에 가야하고 군대를 가야하고 때가 되면 여자를 만나야 하고 결혼이 늦어지면 왜 결혼하지 안 하느냐라고 하더니 결국 결혼하고 나니 왜 아이는 안 낳나라고 오지랖들에게 속은 결과가 결국 아이 가지고 낳아 양육하고 그러다 보니 집도 얻어야 한다느니 예금도 해야 한다느니, 그런 일률적인 강제성의 교육이란 이름의 사육당한 느낌이 깨름직하다. 말로는 창조성 운운해도 일탈을 창의성으로 여물게 하지 않는 사회의 정체된 사고방식들이 그러하다. 그대로 그들 누군가의 오지랖과 권유형 강요와 협박과 모두 그렇게 사는 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가 덧붙여짐으로써 자의반 타의반의 구속 같다. 결국 시간만 훌쩍 건너뛰듯이 어느새 고개를 들어 보니 머리엔 흰머리가 난다. 늙었구나. 흡사 태생이 야생마로 살아갈 수 없이 우리 막사에서 태어난 말의 운명이 거의 정해져 있는 것처럼, 사육당해서 길들여진 채로 노매드를 잃어버린 채 순치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마사에 갇혀서 꼬박꼬박 때 맞혀 조련사가 주는 여물을 안 죽을 만큼 먹고, 죽을 만큼 채찍질 당하며 준비된 사로에서 죽어라 달리는 상태랑 비슷하다면 비유가 과한 걸까 싶다. 결국 마사 우리를 활짝 열어 제쳐 놓아도 나갈 수 없는 적응성 때문에 야생으로 놓아지는 것을 오히려 두려워해버린 것은 아닐까. 타의적 구속이란 권유와 강요가 자본의 안락과 편안과 확정된 여물 같은 연봉에 구속당해서 뛰쳐나갈 수도 없는 자발성은 자기 스스로의 최면을 걸고 여기서의 삶이 나름대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그러나 지루하고 재미없는 굴복의 굴욕만 늘어가는 건 아닐까. 흔히 월요일이 두려운 사람은 월요일에 고정적으로 갈 곳이 있다는 안도하는 등치이다. 경주마의 운명은 초원의 더 넓은 곳을 한 번도 달려 보지 못한 채로 안락사 당하는 거나 뭐가 다를까. 누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세끼 배불렀다고?, 아니야 배고파서 그래. 먹어도 허기는 왜 계속 생기는 줄 알아? 배만 부르면 잠 온다면 분명 마사 우리 속에서 스스로 자유를 의식 못하고 순응당한 자일 거야.
흔히 그렇게 갇혀 있다가 나이 들어서 그동안 못해봤던 걸 은퇴하고 마음껏 하라고 해도 못하는 이유는 하고 싶었던 것들에 대한 근육이 전혀 없이, 늦은 후에서야 근육을 키우려 하는 기회가 생기지 않는다는 거다. 근육도 젊을 때나, 한창일 때 붙이고 굵게 키워서 평생 써먹어야 할 자산인데 자산도 없이 이제 자산을 모아서 하겠다는 게 얼마나 늦어버려서 한계를 들어 나는 건지 모를 일이기도 하다. 은퇴하고 늙어서 여행을 실컷 가야지, 영화라도 실컷 봐야지, 이것도 배우고 저것도 가보고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등등등의 바람들을 한껏 풍선 부풀리며 불지만, 삶이란 예상치 못한 바늘 하나에도 부푼 풍선의 바람은 일시에 터져 버리고, 빈 껍데기의 잔해만 너덜너덜하게 공웡을 배회하듯 남는다. 덩그렇게 남아도는 걸레가 되어버린 시간의 조무래기나 붙들고 공원에서 하릴없이 내가 뭐하고 살았나 싶을 테니까 말이다. 직업이 만들어준 인위적인 사람과의 관계는 직업이 끊기면 이미 끈 떨어진 관계의 지나버린 미련 따위는 없는 인간관계일 뿐, 결국 누굴 만날 사람도 오라는 곳도 없이 어딜 가도 자산 없이 너덜거리는 껍데기의 시간만 가지고는 빌붙어주지를 않는다.
이런 점에서 책은 모름지기 평소에 바람대로 추구하는 삶의 근육을 키우는 기초작업에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유용하다. 비록 지금 당장 카메라를 매고 남미에서 떠도는 히피와 집시의 삶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전 기초적 양식을 배양하는데 더없이 좋은 간접적 경험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상상하고 여행 근육을 강화시키는 루트를 개발하는 선험적 경험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다는 점이다. 여행을 좋아하고 꼭 언젠가 나도 배낭 메고 여권을 챙겨서 여행, 관광이 아니라 여행을 가려 한다면 여행자가 쓴 다양한 수기를 읽어 보는 것이 유용한 이유이다. 그들의 새로운 경험과 낯선 곳의 이미지와 감상을 통해서 익히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이 여행기를 읽는 목적이다.
히피와 집시, 그리고 보헤미안. 이 단어만 들어도 이미 가슴부터 두근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