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중독시킨 한마디 괜찮아
김경진 지음 / 애지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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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의 영화를 보면 종종 듣는 말이 있다. "노 프라블럼!~".( 문제없어. 괜찮아.)라고 한다. 절체 절명의 긴박한 순간에서도 몇 마디 까지 이어가는 여유를 건네는 장면에서 감상자는 조급함으로 애가 탄다. 늦어짐으로써 생기는 문제가 없을 수가 없는데 주인공은 태연스럽고 간단하게 '괜찮아'라며 한마디가 "노 프라블럼~"인 것이다. 이처럼 상황이 심각한데도 불구하고 우린 가끔 자기 최면을 걸며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이까 짓거 별거 아니야."라고 태무심하듯 낙천의 여유를 부리는 척한다. 하기야 따지고 보면, 아니 조금만 더 들어가서, 문제가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문제가 심각해."라는 거다. 막판에서도 극심한 공포와 고통이 머리를 쥐어뜯고도 이게 뭐가 문제 인가라며 아픈 거 빼고는 아무 문제는 없다고 최면을 건다. 문제는 답을 요구하지만 문제가 없다잖아. 답을 낼 필요가 없어. 그럼 문제없어. 노 프라블럼. 내일 지구가 짜게 져도 뭐가 문제야 노프라블럼. 괜찮아.

 

거대한 태양계에서 태양이 플라스마 폭발해서 방사능 태양풍이 지구를 덮쳐도 노 프라블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인 우리가 문제에 대해 답을 설사 안다 해도 어찌할 수 없는, 도리가 없으니 차라리 자포자기적인 낙천성으로써 노 프라블럼이 차라리 더 나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삶도 영화에서처럼 절체 절명의 심각한 위기 상황에서도 시나리오를 쓴 작가가 딱 한마디를 외치게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괜찮아. 이거 별거 아니야. 그래서 노프라블럼을 연발할수록 지켜보는 시청자는 더더욱 심장이 흥분하고 감정이 극렬해지며 영화의 마지막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그 위기의 여운을 주인공이 어떻게 결말을 맺은 엔딩의 환영이다.

 

살아온 시간을 보니 그럭저럭 괜찮으면 괜찮을 거고, 반대로, 아냐, 내 인생은 정말 심각했어. 지금까지 이렇게 어렵게 벼텨온거야 그래서 대단해. 대단하니 괜찮아진 거야.라고 자기 최면을 걸어야 한다. 옆에서 훈수질 뜨는 사람이나 제 3자나 혹은 오지랖이 태평양 바다처럼 넓은 사람이 보기에는 굉장히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뭐 이 정도쯤이야 난 괜찮아. 설사 뒷감당이 "전~~~혀" 되지 않아 속수무책인 무비에 유환이 뻔함에도 "괜찮아. 노 프리블럼을 외칠 수밖에 없을 때도 있다는 것. 원천적으로 부정할 수 없을 때는 긍정으로 자기 착각을 해야 살아가고, 살아지는 원리가 우리 이만하면 괜찮은 거라고 얼버무리는 낙천적 외면성이다. 반대로, 아니더라도 괜찮아라며 의식적인 최면을 걸어야만 한다. 그래야 오늘을 견디고 버틸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어쩔 건데? 그냥 여기서 꼬꾸라져서 땅 밑으로 파고 들어가 버리고 말 결론은 또 아니란 거다. 괜찮을 때는 정말로 괜찮아서 괜찮을 수도 있고 반대로 괜찮지 않을 때라도, 손을 쓸 수 없는 무력감에 빠졌을 때도, 괜찮음이라는 역설이 숨어있다. 괜찮다가 강조될수록 괜찮지 않는다는 말과 동격이다. 반대의 반대는 강조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픈 환자에게 더 이상 치료가 무의미해질 때에서도 약을 주며 이 약으로 괜찮아질 거라는 자기 최면의 플렉 시보 효과는 그래서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 괜찮아질 거라는 긍정의 희망이 때론 자신에게 무척 배신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 또 시간은 흐를 것이고 지나면 또 괜찮을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세상에는 전부 다 괜찮아서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들 저마다 한두 가지씩, 혹은 아니 더 많이 몇 가지씩 마음의 짐을 지며 힘 들어서 꼬꾸라질 거 같아도 멀쩡한 표정으로 애써 미소를 띠며 괜찮아. 아무 문제없어. 노 프라블럼을 외쳐야 하는 경우, 과연 누가 심저에 가라앉은 슬픔을 오열로 쏟아 내게 할 수 있을까? 위로가 필요한 시대라고 하지 않는가. 절대로 난 괜찮지 않아. 그래서 이번 생은 망했어라며 미리 포기하겠다고 약봉지를 털어 넣는 사람의 심정을 다 알 수는 없어도, 자기 힐링이든 자기 연민이든 타인의 위로이든 등을 토닥이며 아무런 말 없어도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정화가 어느 시대보다도 더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어느 시대이든 간에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당면한 문제가 가장 아픈 법이다. 시대는 시대에 벌어진 상황에 따라 개별적으로 아픈 법이지, 시대와 시대를 비교해서 어느 시대가 더 아프고 덜 아프고라는 식의 비교의 대차 대조는 의미가 없다. 하기야 내 손톱 아래에 찔린 가시 바늘이 더 아픈 법이니까. 더 아프고 덜 아프고의 문제가 강도의 문제가 아니라 아픔이 있느냐와 없냐라는 거다. 요즘 다들 배가 불러서 진짜 아픈 걸 모른다는 식의 꼰대는 그래서 인기가 전혀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개인사적으로도 어느 시대이고 간에, 누구든 간에 엄밀하게 보면 괜찮은 적이 거의 없었다. 세간을 떠들썩한 살인 사건도 가족 간에 일어난 불화 때문인지 정신병적인 것인지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자행되고 죽이고 죽는 걸 보면 이게  괜찮을 리가 결코 없다. 다만 문제가 있음에도 덮고 작정조차 할 수 없게 지나쳐 버리는 것이 일쑤인 것이 우리 인간이 사는 현재의 모습일 따름이다. 따라서 인연이란 기쁨이다가도 때론 잔인한 것 중에 하나의 이중적인 모습을 하는 것일 테다. 만나지 않으면 부대낌도 기쁨에 겨울 일도 없다. 사람은 사람으로 만났으니 때론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서 아파하기도 하고 한다. 늘상 그랬다. 괜찮았으니까 덮었고 덮어 지나쳐 버렸으니 다시 괜찮을 거라도 우리는 또 그런 줄 알면서도 새로운 인연을 욕망한다. 어쩌면 이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괜찮음이란 종교를 맹신하고 추종하는 기초적인 이유가 아닐까 싶다. 자, 다시 우리가 외쳐 보자. 괜찮아. 노 프라블럼. 에브리싱, 오케이라고.

이 책은 긴 투병 생활에 지쳤고 아내를 일찍 떠나보낸 한 남자의 자기 위로의 독백 같은 책이다. 다행히 생의 업이 시인이라서 그 치유와 자기 연민을 글로 치료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떠난 아내가 남긴 생의 의미들. 그리고 남겨진 시인의 고독한 자기 체면들. 하기야 우리 모두는 이미 예정되어 있는 인연에 마주하고 있다는 점이라고는 하지만 이게 실제 현실로 만났을 때는 무어라 애써 상흔을 남기지 않을 리도 없다. 그래서 주문처럼 외우는 염력의 용언이 괜찮음이라고. 그래 노 프라블럼 이었던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준비 없는 이별에 직면한다. 그동안 수많은 사진을 담으며 이별을 만났다. 시간과 이별했고 공간과 이별했고 아기였던 딸이 어느새 성장해서 어릴 때 아이 때의 딸과 이별했다. 와이프가 만난 이후에서도 언젠가 나의 아버지와 이별했듯이 이별하고야 만다. 예정된 이별인 셈이다. 이별은 닥치고 사랑은 언제가 기억에서조차 희미하게 퇴색되어 가는 내 아버지의 얼굴처럼 선명하지가 못하다. 기억은 희석되어 묽어지며 점점 한때의 기억은 특정 부분만 남는 추억이 되고야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우리는 이별을 할 줄 전혀 모르지도 않는데 새로운 만남의 인연을 맺어간다. 왜 그렇게 다들 괜찮았으니까. 만나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것도 알면서도 우리는 기꺼이 또 괜찮아질 거라고 주문을 외우듯 외친다. 괜찮아. 에브리싱 오케이인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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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9-06-20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하는 인도 영화 [세 얼간이]에서 주인공이 항상 ˝알 이즈 웰 all is well˝ 을 외치며 항상 괜찮다고 하는 장면이 떠오르네요.

yureka01 2019-06-21 08:54   좋아요 1 | URL
대체적으로 인도인과 일해본 분들이 가장 많이 듣는 게 노프라블럼..이라고 하더라구요..

2019-06-21 06: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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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08: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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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21 0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제 곧 「라이온 킹」실사판이 개봉예정이어서인지 ‘하쿠나 마타타‘라는 단어가 떠오릅니다^^:)

yureka01 2019-06-21 08:52   좋아요 2 | URL
하쿠나 마타타..
딸아이가 어릴 때 동요로 부르던 노래^^..

강옥 2019-06-21 10: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모르파티
라는 노래 아시죠? 중독성이 있는 멜로디라 나도 몰래 흥얼거렸는데
제목의 뜻을 최근에야 알았어요
아모르는 사랑, 파티는 인생.....자신의 인생을 사랑하라는 뜻이라네요
괜찮아, 다 잘될거야,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면 되는 거겠지요
기왕이면 웃으며, 즐겁게. 찡그리면 나만 손해니까요 ^^*

yureka01 2019-06-21 10:42   좋아요 0 | URL
물론입니다..아우츠비츠에서도 살아 남은 사람들의 특징이 긍정이었다고 하더군요..
아마 부정이 앞서면....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아모르 파티..저도 노래 들어 봐야겠습니다~^^.

2019-06-21 12: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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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1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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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6-21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한철의 ‘슈퍼스타’에 나오는 후렴구도 중독성이 있어요.

“괜찮아 잘 될 거야 너에겐 눈부신 미래가 있어괜찮아 잘 될 거야 우린 널 믿어 의심치 않아.”

yureka01 2019-06-21 16:17   좋아요 1 | URL
그노래 ...기억 나네요..
네 잘 될 거예요..라고 믿고 사는 거죠..

2019-06-22 12: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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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7: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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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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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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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8: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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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7: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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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7 15: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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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8 21: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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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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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2: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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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12: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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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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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낸 절벽에

 

지층의 시간이

 

덧게를 벗었다

 

한줄과 한줄의

 

사이에 굳어간

 

세월의 무게감

 

한순간 지각이

 

뒤집혀 일어난

 

영원한 사건들

 

순간과 영원의

 

어제와 오늘에

 

침묵한 아우성

 

모조리 부절이

 

없다는 사실을

 

무심코 앓았다

 


우리의 존재감

 

어디에 있다고

 

믿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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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09: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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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09: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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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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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9 14: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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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6-21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회생활을 할 때는 일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곤 했는데
나이 먹어가니 존재감이 점점 떨어지더군요.
가정에서의 위치나 인간관계속에서 존재감을 찾기보다
자아실현을 통해 존재감을 느끼고 싶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다들 책을 내고 전시회를 하고.... 뭔가 확인하려하는지도....

yureka01 2019-06-21 10:44   좋아요 0 | URL
^^ 지우당님도 존재감이 있습니다.
자주 블로그에 사진과 글 보여주시잖습니까..
그럼요..늙었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보다는,
뭐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
존재감으로는 제일 좋은 거라서요....

2019-06-22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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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7:0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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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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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3: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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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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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10 12: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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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4 13: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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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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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뒤집자.

사진으로 가끔 세상을 뒤집어 본다.

시간도 좀 뒤집어 보는 것을 우리는 흔히,

역사라고도 하지.

 

왜곡된 물질 세계의 현상에서 뒤집어 보고,

우리의 삶을 뒤집어 보다 보면,

가지고 있는 슬픔과 고통과 쓰림의 정체가

무엇인지 따져 들게 된다.

비록 현실을 디집지는 못할지라도,

가끔 뒤집어 보자.

사진처럼 뒤집기하듯이.


 

 

긍정을 부정하고, 부정을 긍정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을진대,

사진으로는 의외로 간단하다.

 

다만, 뒤집어 보겠다는 의도만 있다면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의도가 우리 삶에 의지로 발전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기를...

 

 

2.MAY I TAKE YOU PICTURE?

 

사진 찍어도 되겠습니까?

아니오 라면 돌아서야 하고,

예라고 한다면 다가가야 한다.

 

비단, 인물만은 아닐 것이다.

 

풍경에게 말을 걸어,

풍경아, 사진 한 장 찍어도 될까?라고 물어본다.

 

오늘의 빛과 그림자에

일렁이는 이랑과 고랑 사이로,

인연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틈을 비집고,

그래서 순간의 멈춤을 만나서,

찍어도 되겠습니까?라고 물어야 한다.

 

친수성이 친밀성으로 만나는 거룩한 관계겠지.

적어도 풍경에게서 조차 정중하고도

무례하고 싶지가 않아서이다.

 

PS 참조: 사진에 느낌을 담는 여덟 가지 방법, <스가와라 이치고(菅原一剛)지음, 김욱 옮김, 한빛미디어, 2010>

3. 어설프게 모르고 어설프게 아는, 이 사이의 길.

 

'봐야 한다.

안 보일 때까지.

 

보지 말아야 한다.

보일 때까지.

 

본다는 건 볼록 렌즈의 빛을 모아 불을 일으키는 것과 비슷하다.'

 

<인용 _ 나는 지구에 돈 벌러 오지 않았다. 이영광 산문집, 이블, 2015 12>

 

 

어설프게 알고 봤던 것들과,

어설프게 모르고 봤던 것들의 사진들.

이런다고 알면 얼마나 알 수 있을런지,

모르면 또 얼마나 모를 수 있을런지.

그래서 인간인가 싶었다.


다 아는 것도 못하고,

다 모르는 것조차도 못하고,

이 어정쩡함의 정체가 모습의 실체 같았으니까.

 

전지(全知)한 신과 전무(全無)한 백치.

이 사이에 난 길에서 서성댈 따름인 거 같아서 이다.

 

사진이란, 

얼마인지도 모르고 마구 써버린 신용카드의 전표같은 것.

훗날에야 전표에 찍힌 숫자를 보고 까무러치게도

너무 많이 써버렸구나,

이걸 다 어떻게 갚을 거지'라는 부채.

그러니 사진 찍는 게 두려워져.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두려움, 

감당하려는 난감함.

 

어줍잖게라도 찍겠다고 나설 때는 

겁없이 맹렬히 날아드는 불나방이 홀린 것처럼 빛에게 달겨 들어,

그리고 초라하게 사멸한다.

 

이는 필시 중독된 거다, 나방의 맹목에 대한 어설픈 시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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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전에 담은 사진과 글입니다.

 

봉인된 사진 블로그를 보면,

이 사진과 글을 내가 직접 적은 건지

낯설 때가 있어서 다시 알라딘으로

옮겨봤습니다.

 

즐거운 감상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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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3 11: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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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3 11: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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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2: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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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08:4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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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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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2: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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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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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4: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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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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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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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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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옥 2019-06-15 18: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락, 반가워라. 낯익은 저 사진들 ^^*
유레카님이 즐겨 찍으시는 소재를 눈치챈 지 제법 되거든요 ㅎ
며칠 나갔다 왔더니 피곤이 누적되어 눈 앞이 어질어질합니다.
집 앞 저수지에서 유레카표 물결무늬 흉내도 내봤지 말입니다 제가 ㅋ

yureka01 2019-06-15 23:05   좋아요 1 | URL
네 .저걸 보면 일렁이는 시간이 느껴져서요..
앞으로도 저런 사진 궁극까지 한번 시도해보고 싶습니다...

2019-06-15 21: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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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23: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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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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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0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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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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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07: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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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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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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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8: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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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22: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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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간식은 감꽃이야! - 최순나 교단일기
최순나 지음 / 만인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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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초등학교 선생님.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제자들에게 진정성 있는 사랑이 무엇인지 교사가 교단에서 쓴 일기로 구성된 책이다. 요즘 초등학교의 교육은 어떤 것인지 거의 모른다. 딸아이 초등학교 시절을 보내서 학부모가 되어서 짧은 기간 동안에 초등교육에 관심을 가졌을 뿐 딸아이가 진학함으로써 초등학교는 관심사에서 멀어져 버리는 것도 사실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정규 교육과정으로, 그리고 첫 사회생활의 범주에 포함되는 학창시절의 생활이 초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사람으로 변화해야 하는 첫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초등학교의 교육이 별 대수롭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에서 경험과 지식과 담아지는 추억은 평생을 가지고 가야 할 즐거움이거나, 때론 인생의 나쁜 추억의 짐으로 자리매김 하는 과정이다. 어릴 시절에 받았던 사랑이나 결핍이 일생에 트라우마를 낳기도 하는 만큼, 굉장히 중요한 시절임에는 틀림없다. 중학교는 초등을 거쳐 고등학교의 과정으로 짧은 기억에 크게 남지 않을 수도 있고 고등학교는 대입이라는 관문에 인상이 강렬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학은 사회생활에 있어서 성인으로써의 역할에 대한 기억들 때문에도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이렇듯이 초등학교 시절의 추억이란 때로는 미화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초등학교의 선생님에 대한 역할은 인생에서 무의식적으로도 심어지는 인성의 판도에 미치는 영향이 결정적일 수 있다. 특히 선생님의 인품과 성격이나 성향 그리고 사명감이나 교육 철학과 방향에 따라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일생에서 잊을 수 없는 각인되는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떤 선생님을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너무나도 적다. 한 반에 고작 30명도 채 되지 않는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고 있는 중이다. 따라서 아이 하나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지를 격세지감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다녔든 국민학교 시절에는 베이비 붐의 끝 세대였다. 한 반에 거의 70명 가까이 넘는 아이들이 좁은 교실에서 바글바글했었다. 넘치는 아이들이 보물보다는 거추장스러운 액세서리쯤은 아니었던가 싶었다. 많아도 너무 많았던 탓이다. 그러니 선생님은 있어도, 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볼 수도 없고 개인별로 선생님과의 관계 형성도 어려웠다. 책임져야 할 아이가 넘쳐났으니 선생님의 교육은 인격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하루하루가 북새통으로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절이었다. 열악한 품질의 교과서로 몽당연필의 교육이 대부분이었다. 선생님과의 관계란 그저 한 학년 거치면서 지나쳐 버리고야 마는 그저 스쳐버린 관계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과의 추억이 별로 없다. 결정적으로 각인된 추억 자리에서는 선생이라는 교육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아이들의 생산이 사회적이거나 혹은 개인적으로도 어떤 문제와 어떤 과정의 인생을 겪는 것인가에 대한 각성은 없었던 시절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낳아 놓기만 하면 제 먹을 것은 다 있다는 이 터무니없는 육아 방식은 때로는 효도라는 보험적 성격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먹고 입히고 학비를 들여서 공부 시키면 양육은 끝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물리적으로 들이는 비용이 양육의 기본이라고는 하지만 아이의 시대적 십자가에 대해 그 시대의 부모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배운 적도 없고 알아야 할 개별적 동기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저 결혼하면 아이는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오토매틱 시스템처럼 작동하던 시대의 과잉의 인구는 여러가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는 것은 지속적인 산아 재한 정책의 결과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관습적으로 혹은 전통적으로 무조건 낳기만 하면 다 되던 시절에 사연 많은 집들이 어디 한둘은 아니었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 태어났던 사람이 이제는 장년층이 되고 보니 왜 그렇게 무턱대고 낳았던 것인가에 대한 각성과 함께 자신의 세대의 치열한 경쟁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도래했다. 한 반에서 이부제 수업까지 했었던 내 또래들 세대가 겪은 그 바글바글한 숫자에 대해 다들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 넉넉하지도 못했던 가정 형편에 아이들이의 감내할 고단함은 지금의 기성세대가 겪는 일종의 슬픈 트라우마로 작용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많이 낳아 방임하듯 양육하기보다는 적게 낳고 보살핌을 집중하겠다는 자연스러운 발상은 전혀 낯선 것도 아니다. 우리 세대의 마지막 베이비붐 세대으로 대학 진학률은 졸업 정원제를 시작으로 급격히 고등 교육이 늘어났던 점도 이에 부합하고 따라서 우리 부모 세대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과잉의 경쟁과 바글바글함에서 부대끼며 겨워했을 세대가 취할 행동 패턴은 당연히 각성된 여건이 이를 증명하듯 급속하게 인구 숫자를 줄이게 만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고도성장에서 야기된 부의 재분배 문제와 더불어서 급격하게 치솟는 부동산의 가격과 결혼 비용의 증가로 이어짐으로써 혼인율을 낮아지게 만들었다. 당연히 혼인율이 낮아질수록 출생률도 비례하여 떨어지는 것도 이와 맞물려 있다. 또한 양육비와 교육비에 비례해서 소득은 늘어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결과야 당연히 인구 감소로 이어진다. 길게 설명했다만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어려우면 낳기를 주저하게 되는 것쯤은 당연하다. 여유와 잉여가 없이 낳음으로써 무대책의 결핍을 재현하고 싶지 않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는 아이 하나하나가 귀중한 보물처럼 여기는 이유도 부모 세대의 바글바글함으로 빚어진 결핍을 다시는 겪지 않게 하고자 하는 것도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내 또래 친구들 아이를 보면 대부분 하나 아니면 둘이다. 셋 이상은 거의 없다. 넷까지 낳았다면 굉장히 측은하게 보는 것도 어쩌면 부모 세대가 겪은 트라우마의 작용과 반작용적인 역학적 관계에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귀중한 존재로서의 아이들을 교육하는 문제에 있어서 선생님의 존재가 특별히 더 크게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한다. 아이 하나하나를 지속적인 관심과 개별적인 성향을 파악하고 교육의 지침과 방향을 설정하는 문제는 아이가 장차 성장하면서 미치는 영향은 평생을 이어간다는 전인적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 제일 중요하게 봤던 부분이 바로 선생님의 담임반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글쓰기에 대한 교육이 굉장히 부럽게 다가왔다. 아이를 내버려 두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느끼게 한다.

 

어릴 때만 해도 글쓰기의 시작이 일기 쓰기였다. 일기라는 숙제도 제일 골치였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지 혹은 생각을 어떤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으로 이어 나갈 것인지 큼지막한 칸에 글씨를 채워 넣어야 하는 숙제가 제일 싫었다. 지나고 보니 일기를 쓰라는 숙제는 내줬지만 일기를 어떻게 쓰고 어떻게 이어 나갈지,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은 거의 없었다. 단순하게 그 날 있었던 사실의 나열이 곧 일기라고 짧은 가르침이었다. 기본적으로 어떻게 생각하고 아이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인가라는 글쓰기 창작에 대한 고민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저 일기라고 쓰기만을 강요했을 뿐이다. 주입식 일방적인 것을 교육이랍시고 그 시절의 선생님들 대부분 그러 했었다. 무슨 생각으로 어떻게 나열하며 자신의 느낌을 글감으로 만들어 내는 훈련도 없으면서도 쓰라는 일기의 강요는 결국 제일 싫은 숙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방학숙제에 제일 큰 걸림돌이 일기 쓰기 였으니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서 나오는 아이들이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보니 문득 요즘 아이들이 무척 부러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 책에서 보면 최순나 선생님의 별명이 아이들이 지어낸 "최쓰나 선생님"이라고 하니 글쓰기 교육이 얼마나 잘 강조된 것인지 감동이었다. 어린 학생들의 자기 생각을 담는 교육이야말로 앞으로 학생들이 자라면서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대해 표현하는 방법론이 이루어질 때 생각을 도출하여 판단하며 정리하게 됨으로써 논리를 갖추고 부족한 지식과 정보에 대해 찾아서 자신의 생각에 반영시키는 능력이 얻는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런 글쓰기야말로 비로소 창작이라는 과정으로 옮겨갈 수 있는 기본적인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글쓰기가 심화되면 시처럼 확대되는 효과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발전한다. 특히, 우리 세대에서는 글쓰기를 재대로 배워 본 적이 없는 아쉬움이 매우 크다. 글쓰기를 배운 부모가 없으니 아이들이 장차 글잘 쓰는 작가가 되겠다고 하면 부모는 아이의 장례를 걱정하기 시작하는 것도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의 특징이다. 시대는 바뀌었다. 글쓰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앞으로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컨텐츠와 창작의 시대가 더 크가 작용한다는 걸 간과한다.

 

전체주의적이고 획일적인 사회는 교육에서도 개별적인 생각의 표출을 막았다. 개별적인 특출난 사고방식은 억제된 사회에서는 창의적인 사고가 나올 수 없다. 사람이 전부 다른데 비슷한 생각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나 다름없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데 선생님은 저렇게 하라"고만 하는지에 대한 아무 논리의 강요가 선생님을 존경의 대상보다는 강압적 두려운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글감의 발상을 의도하여 이끌어 주고 의견을 지속적으로 묻고 너라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라고 질문이 곧 교육의 토론 방식에 대한 시작이다. 개별적 학생들의 특성을 고려하고 그 적재적소의 다양한 경우의 수를 따르는 개성적인 교육이 한 아이 아이마다 이 특성을 표현하는 중요한 수단이 글쓰기가 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개인적으로는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 시절에 김순나 선생님 같은 스승이 있었더라면 작가는 못되더라도 글쓰기에 아주 좋은 가르침을 배웠을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글쓰기에 대해 배우지 못한 세대는 단순 글씨의 문맹은 낮아도 문장의 문맹은 높다. 하물며 몇 줄 조차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데 상당히 애를 먹고 있다. 일방적으로 주입된 교육의 방식은 받아들이는 in put이 활발했으나 out-put이 어려운 이유이다. 읽기가 되는데 역설적으로 이해력의 미흡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창의력은 사유에서 비롯된다. 사유의 근본은 단어와 단어로 이어지는 문장으로 도출되는 논리를 띄는 측면이 강하다. 창의력 뿐만 아니라 의견을 피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굉장히 뛰어난 문장은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만 평범한 일기 같은 글은 일상의 꾸준한 글쓰기는 많은 연습과 훈련에서 나온다. 이런 측면에서 아이들의 글쓰기 토대가 마련되고 장차 글쓰기를 통해서 사유할 수 있기에 몽매를 피해 갈 수 있다. 생각은 행동하게 하는 단초이다. 비상식적인 사회에 무지함을 이겨 낼 수 있는 기초가 결국은 글쓰기에 있다고 믿는다.

 

특히 선생님이라는 선행과 글쓰기의 모범으로 아이들에게 본보기는 진정한 선생 다운 교단일기라는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이란 업이 무엇인가. 학생들보다 먼저 하고 선두에서 모범으로 보이며 따라오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이다. 가르침이라는 게 강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피동적인 교육보다 능동적이고 동기 유발의 교육이 확실히 효과가 있음은 이미 입증되고도 남음이 있다. 아울러, 선생님의 교단 일기를 통해서 얼마나 아이들에게 진심을 다해서 교육하는 교육가인지 엿보고 이런 훈련을 받아 자란 아이들이 정말 부럽고 행복해질 것만 같았다. 나는 일제시대에 비정상적인 교육을 그대로 이어받은 선생으로부터 교육받은 이후 세대이다 보니 바글바글한 학생을 통솔하기 위해서 매을 들고 몽둥이질하는 선생을 자주 겪었다. 좁은 교실에서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아이들에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교육이라는 게 고작 주입과 강요에 의하는 것도 일견 이해는 한다. 교실을 더 늘리고 학생 수를 더 줄이고 교사의 수를 많이 하기에는 가난한 나라에서 교육 재정의 한계는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성실히 교사 업무에 임하는 스승도 찾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이 책의 저자인 선생님이 한해 동안의 교단에서 아이를 돌보며 관찰하고 학습계획을 아이들과 공유하며 함께 써 내려간 일기를 제자들이 보고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초등학교 선생은 결코 아닐 것이다. 사랑은 받아먹은 사람만이 아는 그 심리적 여유와 만족감에 대해 아이들이 얼마나 견고한 자아의 확립이 이루어질 것인지를 알게 한다.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시대에 아이 하나하나가 존귀함으로 대우받아야 하는 시대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아이에 걸맞은 교육자는 직업 가로써의 선생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마음을 내보이며 아이 하나하나가 선생님을 대하는 태도에서 스스로 아이가 느낀다면 그 아이가 성장하며 형성해 나갈 인격은 그야말로 품격을 갖추는 시민으로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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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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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5: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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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4 1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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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5 08: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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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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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2: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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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3: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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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4: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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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4:1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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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8: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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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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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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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1 18: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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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2 09: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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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1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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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1 07:2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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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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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21: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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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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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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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만 6706㎡(19만 5천628평). 국회의원 99명(배우자 소유 포함)이 보유한 농지 면적이다. 농지라는 점에 주목하자. 일반 토지면 그러려니 해도 농지라는 것에 뭔가 상당히 의문표가 찍힌다. 국회의원이 농사지을 것도 아닌데 왠 농지가 이렇게 많은가 말이다. 전부 상속이나 증여를 받은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 쳐도 저렇게 많이 상속이나 증여를 받을 수 있는 것도 또한 놀랍긴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농지법에는 농민이 아니면 농지 소유가 불가능하다. 농업을 경영하는 농업법인을 제외하면 일반 법인조차 농지 소유 불가이다. 대대로 우리나라의 농지는 경자유전의 원칙에 의거하여 농사를 짓는 자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 다만 예외적인 사항이 있는데, 대부분 국회의원들은 이 예외사항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농업을 겸직하는 국회의원은 한 명도 본 적이 없다.(아 옛날에 강기갑 전 의원은 농민이었지.) 이런 예외라는 것은 결국 경자유전의 원칙을 훼손한다. 농사를 짓지 않는 사람이 소유한 농지는 과연 무슨 용도일까? 농사를 짓는 농민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다는 이 대원칙이 상당히 무색하게 변질되어 버렸다.

 

결국은 부동산도 소위 있는 자들끼리만의 복마전일 뿐이다. 여기의 토지 시장은 거의 대부분이 없는 자는 철저히 열외이다. 어딜 나가서 둘러 봐도 어느 구석을 해매도 내 수중에 지불할 자금력으로 든든하고 보면 또 다른 눈먼 자금이 보이지만, 없는 사람에겐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자본력은 자본의 냄새에 아주 민감하게 하고 시야를 상당히 넓혀 주는 마력이 있기도 하다. 즉, 어떤 수준의 소유에 대한 차이가 이를 자본의 확장을 결정한다. 농사를 짓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농지가 어느 공공이나 민간의 개발  계획에 포함되느냐, 개발지의 근처 주변에 있으냐에 따라 시세 차이와 호가는 천차만별이고 개발을 전혀 할 수 없는 "절대농지나 보전 임지"는 평생을 가지고 있어도 요지부동으로 거래가 없다. 대부분 자본력 있는 자들의 농지는 개발 호재를 따라가는 것이 뻔하다. 다만 그 개발 정보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 위치인가에 따라 농지의 소유도 판가름 날 것이다. 따라서 자본력은 자본의 집중을 위해 냄새 또한 기가 막히게 민감도를 올리는 역할도 한다.

 

부동산에 대해 좀 더 확장해서 비약해 보자. 자본력의 차이가 결국 권력의 호불호가 갈리고 정치력의 결과이다. 상당히 아픈 지적이겠지만, 어느 누가 나선다 하더라도 자신의 자본력이 삶의 방향성을 결정하기도 한다. 정치적 방향성도 마찬가지일 수도 있다. 누구는 하루하루 얼마의 일당을 받아 일상을 살아나가든, 직업이 없어도 자본력으로 얼마든지 소득을 유리하게 끌어 내서 더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것도 이 차이를 말한다. 누군 자신의 자본력으로 시세차액을 남길 곳에 투입하면서 보이지도 않는 미래의 자본을 결국은 현실화시키는 결정도 현재의 자본이 결정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에 더불어서 잔머리 잘 굴러가서 기막힌 타이밍에서, 적재적소에 자본을 투입하는 자본의 민감성 또한 실력이 될 것이겠다. 이런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것도 물론 자본력과 정보력이 존재해야만 하는 기초 자산일 것이다. 특히 천민자본주의가 심화되고 강력해질수록 없는 놈은 점점 더 약탈당하듯 자본을 축적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극히 소수의 재벌가들은 평생 다 써도 못 쓰고 죽을 만큼의 자본이 집약되는 형국이다. 기울어진 자본의 운동장에서 달리는 모든 사람들이 해당된다고 보면 맞다. 신발에 모터가 달린 사람이랑 맨발로 달리는 사람의 자본적 추력은 어마어마한 차이가 벌어지는 것. 자본의 추력은 자본주의에서는 기본이기 때문이다.

 

학교 전공을 도시계획이었다. 즉 개발 정보에 접근하기 유리한 공부도 했었다. 개발 사업에 따라 부동산 가격은 진폭 파동을 이루기 마련이기에, 즉 토지이용에 따른 토지의 가격이 결정되기도 한다. 전공 수업 때 지대론(부동산 가격론)은 거의가 토지이용에 관한 것이었으나,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동산 투기 혹은 투자는 한 번도 해 본적도 없다. 게다가 회사 업무도 부동산에 관한 것도 많이 있고 토지에 관한 법률이나 부동산 개발 등 건축에서 다루어왔다. 그러나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왜 당신은 하지 못하는가라고 와이프로부터 평생을 타박 받았다. 알지. 왜 모르겠나. 정보력도 관련 공부도 다 되어 타이밍도 찾아 잴 줄도 아는데 단 하나의 관건은 자본력이었더란 말이다. 자본이 천박해질수록 돈이 돈을 버는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자본력의 부재는 자본의 집약에 최대 걸림돌이었다는 걸 와이프는 간과 한 것일 테다. 월급만으로 내 살 집조차 하나 건사하기에는 이젠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즉 자본 시장에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해도 늘 자본 시장에서 노는 사람들에 비해 늘 뒤처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 시장에 입장할 수 없어 거래할 수 없다면 뻔한 거 아니겠는가. 나도 물론 이 시장에 입성조차 못했다. 따라서 자본력이 계속 불로소득의 자본으로 집중될 때는 노동이나 근로가 폄하된다. 진짜 뭐 빠지게 일해도 노동 푸어가 된다는 이야기이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자본의 축적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는 사람들의 일상은 늘 그자리만 맴돌 뿐이고 혹여 그 자리마저 잃게 되면 바로 나락으로 추락하는 급진 하강이 삶을 무수히 봐왔지 않았던가 말이다. 열심히 일 하는데 왜 늘 부족하고 점점 빼앗기는 것처럼 가난한가라는 질문의 답은 열심히 일해도 벌어서 축적할 동안 자본은 더 많이 축적되니 항상 허덕거리는 결과를 낳게 되는 거다. 하다 못해 열심히 농사 지어서 버는 소득보다 어느 누군가의 땅이 개발사업에 수용되어서 보상금으로 몇 억을 벌었다는 이야기는 가끔 한 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이게 자본의 기회론에 수렴된다. 어디에 어떻게 무슨 위치에 있는가에 따라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진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인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는 것도 전혀 도외시할 수 없는 본질적 운명은 다 가지고 있는 셈이다. 땅도 마찬가지이다.

 

주제넘은 생각이었지만 한동안 비교적 자주 땅을 보러 다녔다. 무슨 대단한 자본력으로 투기하고 싶어서 토지를 구하려 하지는 않았다. 얼마 있지 않을 은퇴도 대비해야 하고 그동안의 살아온 도시의 삶을 청산하고 싶은 마지막 욕망이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이 욕망이 너무나도 어렵고 고단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지역적인 거리를 감안하고 주변의 환경을 고려하고 풍경과 조망을 고려하고 접근성을 따지는 등등의 조건과 토지의 형상과 풍수지리를 보고 게다가 이에 따른 지대 가격에 상관된 자금을 생각해보면 정말 터무니없이 올라가는 땅값을 따라잡을 방법이!~ 난감 난감이다. 2-3년 전의 땅값이 현재는 평당 몇십만 원 오르는 걸 무슨 노래 부르듯 올라 버리는 호가에 기겁하고 놀라기만 한다. 올라도 너무 올랐는데 자금력은 상대적으로 점점 반비례로 턱없이 부족해져만 가는 상황이다. 쌓이는 속도에 오르는 가격을 쫓기가 너무도 어렵다. 게다가 계획하는 토지이용을 할 수 없는 땅은 누가 공짜로 줘도 소용이 없다. 필요한 토지는 가격만 들입다 비싸지고 별 쓸모도 없는 토지조차 꾸준한 인상의 욕망에 바람만 잔득 불어 댄 꼴이다. 시골이나 산골에 인구가 급격히 줄어간다고는 하지만 시골에 땅을 소유한 사람들의 욕망 또한 강력하기 때문에 쉽게 내놓지 않는다. 새로운 인구 유입이 차단된 상태에서 시골 산촌 땅은 잡풀이 우거진 버려진 땅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다. 소위 묵전이라고 묵은 전답은 농사짓기 점점 어려워질 텐데 관리가 전혀 안된 땅들이 많다. 게다가 시골에 무슨 놈의 전원 주택 단지를 조성하는 땅 장사는 그리도 많은지, 온통 산을 깍고 전답을 매워 주택 부지로 분양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부지 조성공사에 토목공사로 투입된 자금의 본전을 생각하고 이익을 얻다 보니 터무니없는 높은 분양가격이 형성되는 형국이다. 전 국토가 부동산에 망조가 들어가는 걸 보면 토지의 필수적이고도 삶의 주거안정성에 토지의 역할이 오히려 방해되는 꼴을 낳고 만다. 지금 생산성이 전혀 없는 부동산에 발목이 잡힌 부채가 얼마나 될는지 수백 조는 넘을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전처럼 열정적으로 땅을 보러 갈 의욕도 사라졌다. 그렇다고 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떻게 상황이 전개될 것인지 지켜보자는 심산이 강하게 일어난다. 어차피 쉽게 이루지 못할 거라면 당분간 지켜보며 상황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가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듯하다. 뭐 그렇게 더 오르다 보면 자연스럽게 지금의 자금력으로 소화를 못 시킬 요건이라면 아예 깔끔하게 단념하는 것도 마음 조림이 덜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다 뭐라고 아둥바둥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소원하고 욕망을 한다 해도 종국에는 내가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건데 왜 악착같이 열정의 에너지를 소모시키며 삶을 고갈시켜야 할 것도 아니란 거다. 되면 되고 말면 말자. 바락바락 달려들어도 찾아지지 않는 것들에 소모시키지는 말아야겠다. 시간은 늘 희나리처럼 흰 재처럼 날아가 버리는데 말이다.

 

어디 겔러리 하나 지을 땅 없나? 나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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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6-01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땅을 살 수 있는 자금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무엇보다 갤러리를 짓는 데 거의 완벽한 조건을 갖춘 땅을 찾는 일이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겠어요.

yureka01 2019-06-02 11:50   좋아요 0 | URL
핵심입니다..자금이야 무리해서라도 조건에 맞는 땅을 찾으면 질러 볼텐데...찾아도 보이질 않으니 말이죠..

2019-06-01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02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겨울호랑이 2019-06-03 13: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땅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음에도 제대로 된 농촌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이면서 비극이라 여겨집니다...

yureka01 2019-06-03 13:31   좋아요 2 | URL
시골분들 거의가 70대 80대입니다..앞으로 10년 내 급격한 도시인들의 유입이 없다면,
공동화현상이 일어납니다. 지금도 공동화가 진행중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땅값은 반대로 오르는 기현상이 발생하더군요..
부동산업자 때문인지 아니면 소유자의 욕심 때문인지 아니면 시골 땅 수요가 갑짜기 폭증해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이 그렇습니다.
저처럼 자금력이 부족한 사람은 점점 시골로 귀향이 멀어지는 듯하네요...
모아도 오르는 땅값에는 턱없으니까요..
조바심 내지 않기로 했습니다. 땅도 다 인연이려니...합니다...

강옥 2019-06-04 1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제부턴가 시골길 가다 보면 뜬금없이 갤러리가 나타나곤 하더군요
작업장 겸 갤러리로 사용되는, 거의 문이 닫혀있는, 필요에 따라 개방하는 -
사진이나 그림하는 분들의 로망이 갤러리카페나 갤러리주택일 겁니다.
전자는 상업용이고 전자는 주거용이겠지만,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기는 정도지 싶어요.
단순 귀농이나 귀촌이 아니고 갤러리를 꿈꾸신다면 여러가지 생각할 것들이 많겠지요.
돈만 있으면 해결되는데, 그넘의 돈이 어디 가서 안 오는지 ㅎㅎ
도시계획 전공하셨으면 공무원으로 취직, 관공서에 들어가서 알짜 정보를 선점(?)할 수도 있었을텐데 ㅎㅎ

일주일 외유에서 돌아오니 반가운 유레카님의 글이 올라와있네요
날씨 더운데 컨디션 관리 잘하이소~~~

yureka01 2019-06-04 11:34   좋아요 1 | URL
사진으로 돈 벌 수 있을 만큼의 지명도나 명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진 재주가 월등한 것도 아니라서..겔러리 하면 ...즉각 망하는게 상업용이라서요..
그러니 상업용 겔러리는 제 주제에 과분한 거라서 ...
그저 사진 즐김용이나 은퇴후의 2막의 삶은 꼭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 싶어서요..
일단 시골로 가면 돈이 많이 필요가 없어서요..투자할 자금만 있으면 시골 살이 유지는 그리 많이 필요한게 아니라서 가능할듯해서요..
어릴때 아주 가까운 사람이 공무원이라서..공무원하면 제 숨이 막힐듯해서 안했습니다..ㅎㅎㅎㅎ
요즘은 공무원이 1등 직업군이더만요.

네 여름 시작이네요..감사합니다!~

2019-06-04 14: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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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7 09: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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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3: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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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17 14: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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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4: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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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0 08: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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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2 1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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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3 21: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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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6 1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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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6 09: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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