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로 복 많이 받으라는 것에 반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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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복이 어디 있습니까? 정말 복이라도 있으면 거래도 할 수 있을 텐데, 대체 복이 어디에 있길래, 대체 복은 누가 만들길래 복을 받으라는 것인지 모를 일입니다. 복을 주고받을 수만 있다면 이 또한 얼마나 복을 착취할 것이고 빼앗으려 들 것인지요.
새해에 뭐 별달리 건넬 인사가 없으니까 복 많이 받으시라고 하지만 가만 따지고 보면 이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말인지 웃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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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복을 많이 받을 수만 있으면 욕심껏 받아 보고 싶은데 당체 누가 준 것도 아닌데 복을 받을 수 있는 기브 엔 테이크처럼 이전할 수 있는 대상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도 우리는 복을 주거니 받거니 하라고 합니다. 다들 아실 겁니다. 복을 많이 받을 수만 있다면 까짓 꺼 로또 번호라도 찍어 받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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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복은 스스로 짓는 거라고 하죠. 복은 만들지도 받을 수도 없는 불가역적인 행운의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얻는 것이야말로 복을 스스로 집을 짓듯이 건축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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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본에 어떤 설화가 있었습니다. 허름한 집이 한 채 있었는데 그 집에는 새장에 새가 한 마리 살았답니다. 어느 날 집안에 난로가 과열되어 불이 났습니다. 집 주인은 새장의 문을 열어 놓고 황급히 집 밖으로 피했습니다. 그런데 새는 도망가지 않고 근처 게울 가로 가서 작은 부리로 물을 담아 불난 집에 물을 뿌리고 불을 끄려고 했습니다. 옆에서 불타는 집을 지켜보던 집 주인은 새에게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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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무슨 능력으로 불타는 집을 끌 수가 있단 말인가? 그만둬라."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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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 물론 불 끌 수 있을지 없을지 모릅니다. 작은 부리로 불을 잠재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습니다. 이거라도 해야 할 거 같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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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 부리에 물을 머금고 집에 뿌리자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습니다.
불은 금방 꺼져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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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하늘이 반응을 하는 것이 그게 의도인지, 기회인지, 운인지, 때 마침의 행운인지는 규정할 것도 없습니다. 새가 할 수 있는 일, 설마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효과도 미미할지라도 무모하게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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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복은 짓는 거라고 합니다.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지 않고 할 수 있을 때 하는 기회를 잡는 것. 준비하는 것입니다. 복을 받을 준비는 스스로가 복을 지어 내는 것입니다. 아무리 쌀이 있어도 밥을 지을 수 없다면 생쌀을 씹을 수도 있겠지만 참 먹기가 고역입니다. 마찬가지로 밥을 지을 수 있는 것과 같이 복을 지어야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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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시인에게서 받은 몇 권의 책을 나누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뭐 임의대로 보냈습니다. 1년간 대구의 시인들이 쓴 시 한편을 모아서 시로 희망을 노래하고 이 노래를 들려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저도 뜻밖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시인께서 잘 봐주셨길래 사진 몇 편 실렸고 이를 또 결과물로 받아 다시 알라딘의 이웃들이 책을 좋아하는 만큼 보내 드릴 수 있었던 것이니까요. 아마 사진을 찍지 않았더라면 이런 기회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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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사진으로 만나게 되고 사진으로 인연을 맺어 그래서 기회가 왔고 나누게 된다는 것. 복을 받지 않았지만 복을 사진으로 만들 수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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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한정된 예산으로 만든 책이라서 많은 수량을 받을 수는 없었는데요. 무척 아쉽습니다만 다음에 또 이렇게 나눌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나도 유레카 북풀(알라딘) 이웃인데 왜 난 안줘?" 이렇게 섭섭한 생각은 안 하셔도 됩니다. 언젠가는 꼭 이렇게 나눌 것이라고 마음을 먹은 이상, 기회는 꼭 옵니다. 조금 기다려 주시면 됩니다.^^. 드리고 싶은 분들이 꼽아보니 적잖이 되더군요. 넓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세상이 어렵다고 하나, 세상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렵습니다. 비논리, 부정의, 타락, 탐욕, 사기, 부조리, 비리, 내로 남불, 가치의 이중적 잣대, 부정직 등등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어렵습니다. 그래서요. 이것을 질타하고 미워하게 됩니다. 논리적이고, 정의롭고, 타락보다는 희생과 헌신, 가치의 단일한 공정성 기준이 되지 못함에 분노하게 됩니다. 이런 분노가 절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귀신이 무섭다기보다는 사람이 무섭습니다. 그러니 이런 절망이 우울증으로 바뀝니다. 상당히 슬픕니다. 나 눌 수 없는 독점된 권력과 자본이 개개인의 삶을 더 이기적이고 더 악랄하게 바꿉니다. 살고 싶은 마음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으로 변해가는 거 같아서 몹시 슬프고 맥이 빠지고 힘이 생겨나질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주변이 전부 불붙은 것 마냥 마음들이 우울의 불길로 번져 가서 마음을 태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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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절망의 불을 꺼야 하는데, 내가 가진 힘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새의 우화처럼 새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모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다는 가녀린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의지를 가져야 하거든요. 도저히 이것도 못하고 살면 자살이라도 해도 전혀 이상할 것도 없는 시절의 흐름입니다. 세월호 진상을 위해 단식하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폭식으로 따지는 이 우울한 비상식과 무치 앞에서 그래도 우리는 포기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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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생각합니다. 오늘 나는 왜 살고 있는가? 지금 당장 죽어도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만 같은데도 이 현실의 이 순간을 존재한다는 이유가 대체 무엇이라야 할까요. 늘 묻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질문 앞에 각자 겸허한 삶이 곧 준비된 삶의 기회로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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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월급날인데요. 돈이 들어오면 계좌에 잠시 머물다 썰물처럼 일시에 다 빠져나가 버립니다. 흡사 버스 정류장처럼 버스가 도착했다가 이내 떠나 버립니다. 우리 삶도 월급과 같이 시간의 정류장에 있는 셈입니다. 시간은 월급처럼 밀려왔다가 이내 빠져나가 버리고 다시 우리는 시간의 버스를 타고 어딘지를 모르게 가고 있거든요. 대체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는 이 과정을 왜 살아야 할지 그 누구도 답을 내려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도 없는, 이 삶의 노마드를 무슨 복을 가지고 지으며, 만나야 할 것인지 정녕 모를 일입니다. 그래도 가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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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식상한 인사말을 대신할 다른 말도 없습니다. 아마도 받으라는 것에는 내가 줄 테니 받으라는 말입니다. 어디론가 시간의 버스를 탄 승객분들이라면 꼭 많이 받으시길 바랍니다. 그래도 가야 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