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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수업 - 잠시 멈춰서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
김창운 지음 / 하늘아래 / 2017년 11월
평점 :
들어가기에 앞서, 소설 비스무리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겠습니다.
어쩌다 태어나서 보니, 너무 가난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산골 오지에서 근근이 농사짓고 날품 팔고 살았더군요. 가난이라는 결핍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여전히 아비 어미는 굴레를 벗어던지지를 못했습니다. 아들은 먼 학교를 달리며 살아야 했고 오막살이집이 너무 추웠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에 그나마 믿을 구석은 공부를 잘!~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니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달리 말해서 암기를 너무나도 잘했습니다. 모든 것을 외워야 하는 공부에 있어서 만큼은 특별한 머리였습니다. 시골에서 서울 명문대학교를 진학하고 명석이라는 타이틀은 오로지 암기력 하나로 끝판왕이었거든요. 지긋지긋한 가난은 일류 대학이라는 간판이 포장을 해주기에 충분했거든요. 명문대도 그냥 일류대에서도 최고로 치는 법대였습니다. 일류대 법대. 뭐 그냥 사법 고시로 달려들어 가난의 타이틀이 신분 상승의 간판으로 그간의 가난의 극적인 반전을 이룹니다. 이는 모두 암기력 하나만 남들보다 빠지지 않았기에 가능했습니다. 가난 탈출의 도구는 암기력이었거든요. 법전을 달달 외우고 시험문제집을 통째로 갈아 마실 만큼 머리도 잘 집어넣었으니 학기 졸업도 전에 사법시험을 치고 합격합니다. 시골에서 용이 승천하는 순간이었죠. 넓은 대해의 바다에서 충분히 숙성된 용이 아니라 시골 개천에서 지질하게 가난한 개울가에서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단, 암기력 이거 하나가 제일 큰 무기이자 승천의 날개였던 셈이죠.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마담뚜의 장부에 이름이 올라가고 어느 유수의 집안의 사윗감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사랑은 오로지 가난을 벗어나게 해줄 처자의 집안이면 된 것이겠죠. 장인어른의 파워는 나의 삶의 전환점을 마련해주기에 충분한 것일 테니까요. 네 그런 수순으로 밟아 나가며 검사일에 하자가 없다면 또 특출난 암기력으로 승진을 거듭합니다. 간간이 장인 집안의 굳은 일까지 도맡아 해결하니 검사 전화 한방이면 안 되는 일도 다 될 것이고 장인의 사업도 번창합니다. 야 우리 사위가 어디 부장검사야. 까불지 마라. 이 정도의 파워는 불가능한 인가 허가에 무사통과로 돈에 돈을 부르게 됩니다. 그러니 어느 장인인들 사위에게 재산을 몰아주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똑똑하고 딱 부러진 성격에 집안 전체을 일으켜 세우는 1등 공신인데 딸도 주고 재산도 주고 해도 아깝지 않을 사위였던 거죠. 장인의 사업에 사위는 최대의 우군이자 지원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다시 장인의 사업적 바탕으로 사위는 점점 권력의 정점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먹히는 것이었으니까요. 어이, 김서방. 내가 사업을 하다가 약간 걸림돌이 있네. 자네가 좀 알아봐 주게. 옛설, 장인어른 재가 챙겨 볼게요.라며 사건을 뜯어 보니 구리지만 장인이 어디 땅이 있는데 김서방 이름으로 올려놓게나.라고 은근히 제시를 합니다. 그래서 전화 몇 통하니 허가도 자연스럽게 나게 되고 사업은 또 번창합니다. 따라서 승승장구가 제대로 어울릴 만큼 국가의 최고 권력기관의 수석까지 꽤 차게 되었으니까요. 이미 가진 재산도 얼마인지는 모르나 자랄 때 가난했던 아이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가문의 영광이요 지역 사회에서도 자랑 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온갖 곳에서 칭찬과 아부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었습니다. 권력이란 무상한 것이죠. 권력의 속성을 몰랐던 것입니다. 공부를 그렇게 잘했는데 권력이란 힘에 취하다 보니 무서울 게 없었고 권력자의 비위를 맞추려다 보니 하지 말아야 할 일도 적극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권력자에게 아부하며 부정한 권력자를 향한 충성한 나머지, 권력자를 비판하는 모든 것들에게 적개심을 품었고 마치 나의 성공에 방해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권력자의 하수인이 되어 법이란 칼을 휘둘렀습니다. 흡사 내가 권력자가 된 마냥 권력자의 충성이 나의 삶인 것처럼 철저히 똥개가 되었던 것이죠. 결국 은팔찌 차고 그동안 쌓은 이름의 명성은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삼단 다보탑보다 못하게 되었고 복구조차 가망 없을 만큼 나가 쌓은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똥개로 살았음을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가난했어도 사회의 올바름을 위해 살았던 인생이 아니라 권력자 똥구멍이다 딱는 것이 자신의 운명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가난의 결핍은 자신의 인성을 왜곡시켜버렸던 것이죠. 가난하다고 전부 왜곡되지 않습니다만, 사람의 인성에 따라 가난을 겹핍이 옳음으로 승화시키는 인생 역전극의 감동을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이걸 철저히 회피하면서 인정머리도 싹수도 없이 오로지 이익과 충성의 떡고물을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연 이 두 가지의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느 누구는 결핍을 문학적 시로 승화시키며 아름다움으로 표현하고 처절함으로 발산하는 반면에 어느 누구는 성공이란 달리는 브레이크 없는 마차에 타고 낭떠러지로 내몰고 달립니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을 것인지 인생의 나침반은 대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나침반은 인간성의 자기적 성질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성악설이냐 성선설이냐로 논쟁을 벌이는 철학적인 사유를 인간성에 대비시켰다는 점이죠.
이미 아비는 집안을 일으킬 힘이 없다. 그러니 아들이 집안을 일으키고 성공해서 아 아비를 보험처리해 다 오라며 닦달했던 것을 아닐까요? 앞서 언급한 소설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 것도 없습니다. 다만 이 소설 속의 실제 주인공의 아버지를 떠 올립니다. 자신으로부터의 결핍을 아들의 욕망으로 투영시켜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들의 성공이 곧 나의 성공인 마냥 돈을 많이 벌어와 주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심정은 죽을 만큼 힘을 내서 소도 팔고 쥐꼬리만한 땅덩이도 팔고 날품을 팔아서라도 학비를 대고 고학하는 우리 아들의 뒷바라지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사법시험에 합격한 아들은 가문의 영광이요 집안의 자랑이자 지역사회의 빛과 같은 자랑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야! 누구네 아들 시험 합격했단다. 동네잔치도 하고 마을 어귀에 시험 시험 합격 누구네 아들이라며 현수막까지 내걸었을 텐데 말이죠. 집안에 들어온 며느리 부모가 어마어마한 재산가였습니다. 시댁의 모든 것 대신할 만큼 부자였으니 사돈댁도 으리으리했거든요. 아무리 돈이 많다 한들, 사돈은 껌뻑 죽습니다. 아드님 정말 잘 키우셨어요. 우리 집 사위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앞으로 두 집안을 일으킬 우리 아들 사위가 자랑스럽습니다라며 따러 주는 술맛은 그간의 가난에 대한 결정적인 보상이자 눈물겨움의 환희였을 테니까요.
그러나 인간은 완전한 신이 아닌 이상, 완벽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완벽한 조건도 없을뿐더러 완전체도 아닐 것입니다. 금수저는 금수저로 태어나도 결핍이 있고 흙 수저는 흙 수저대로 결핍이 있습니다. 완전한 충족이란 없죠. 그런데 이 결핍의 파생되는 과정은 양상이 사뭇 다른데, 왜 다를까요? 결국 인간성이 관건이 아닐까 싶어서입니다. 이 책이 인간성 수업의 교재처럼 참고서처럼 쓰인 것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네, 맞습니다. 인간성. 줄여서 인성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의 보편적인 가치이자 보수적인 가치는 무엇이며 무엇이라야 할까요? 오로지 성공이라는 가치에 있어서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오로지 돈으로 귀결됩니다. 명예나 명성도 결국 자본적인 속성의 화폐경제로 편입된 상태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기도 합니다. 그러니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의 탈피 욕망은 결국 자본의 욕망으로 옮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이 욕망에 반비례되는 것들에 대한 가치는 반 욕망적이기도 하거든요. 오로지 성공을 위한 모델이라는 것이 잘 먹고 잘 살고라는 등식의 돈이란 욕망으로 집결되어 버릴 때, 머리 똑똑한 괴물이 되기 일쑤가 되는 원인이 무엇일까 싶습니다. 그래서 집념의 지폐 자본은 끝이 허망합니다. 평생토록 쌓은 부와 명성이 은팔찌 차고 포승줄에 묶이는 수모는 가문의 영광이 나락으로 추락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검사로써 법률을 다루고 사회의 부조리를 제거하는 소명감은 왜 생기지 않았던 것인지에 대한 답은 역시 인간성입니다. 인간적인 공감 함께 자신이 겪은 부조리함 때문에 생긴 가난을 이해하고 사회적 정의 시스템을 세우는 아주 좋은 수단이 있음에도 인성을 가지지 못한 것입니다. 결핍이 인간의 보편적 가치로 더 빛나게 승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오히려 추락해버린 삶은 한편의 비극적 스토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개구리적의 경험을 되살려 인간에게 더 연민할 수 있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그저 안타까울 뿐입니다. 이와 반대로 자신의 가난의 불편함으로 겪은 경험을 되살려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에 일조한 사람들은 결국 칭송과 존경을 받고 인간성을 검증받고 귀감이 되고 모범이 되어 가는 것도 불 수 있는데 삶의 마지막의 모습은 아름답기까지 합니다. 권력이란 한순간의 단물처럼 달콤하였지만 권력이 무너질 때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권력의 뒷맛이 그렇게 씁쓸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책의 작가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겪은 콤플렉스를 사진과 글쓰기를 통하여 발견했던 인성이 어떤 것인지 경험하였습니다. 네, 그렇게 특별한 내용보다는 각기 개별적이고 개인사적인 토대로 현재의 발견된 기존의 인성의 각성을 강의하듯 수업에 교재로써 서술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통의 평범함에서 찾아지는 인성의 모멘텀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본래적 가치와 지향점이 무엇인지 이야기를 내레이션하고 있는 것이니까요. 혹시 모르죠. 그런 머리 좋은 사람이 시를 알았고 사진을 느끼고 삶의 진정한 가치에 눈을 떴더라면 삶의 방향도 사뭇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옳음과 바름의 가치를 실현하는 힘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하는 아쉬움이 교차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삶을 사는데 있어서 큰 행복의 목적보다는 작고 하잘것없는 것에서 발견되는 다수의 만족과 눈 뜸이 자잘한 행복의 횟수를 증가시킬 이유가 분명하죠. 시 한 줄을 읽고도, 어디 문득 지나다 발견된 맛 집에서, 길 가다 시멘트 바닥 틈 사이에서 핀 작은 풀 한 포기의 모습에서 발견되는 위대함을 느낄 수 있다면 차라리 더 나은 삶인지도 모릅니다. 숭고함이란 보편적이거든요. 오늘도 하늘엔 태양이 뜨고 지는 것이 왜 고귀한지 지나치는 일상에서 문득 느껴지는 것에서 찾는 것이겠지요. 이래 사나 저래 사나 죽는 건 다 마찬가지일 텐데, 그렇게 악착같이 성공을 위해 이 한 몸 불살라버려도 나방과 나비의 차이는 어디서 오는지 곰곰이 따져 볼 필요가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