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준비 없는 이별. 김광석의 노래이다. 이 노래는 나의 18번이라서 노래방 가면 일단 이 곡부터 시작하기도 하니 그만큼 가사를 무척 좋아한다. 가사에서도 나오듯이, 이별은 늘 준비를 할 수 없다. 어떤 이별이든 간에 준비된 이별이란 없다. 물론 우리의 모든 이별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이별은 준비를 할 수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딸아이와 일상생활에서의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조금만 분발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약간 남았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이별이라 할지라도 약간 늦출 수 있었을 텐데 무척 아쉽다. 이젠 확정 지워 결정을 내리고 마음을 가다듬어 각오를 다지고 준비를 해야 한다. 딸아이가 대학 입학을 위해 기숙사로 들어가야 시간이 점점 다가온다. 신학기가 3월부터 시작이니 그동안 차근차근 옮겨갈 준비를 해야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좋아하던 영문학과는 모두 탈락. 딸아이는 대신에 불문학을 선택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불문학에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억지춘향처럼 다니고 싶지 않다고 했다. 학교의 명성도 좋고 학교 분위기만 따라가기에는 뜻도 없었던 불문학은 공부할 의지가 없다는 말. 그렇다면 새로운 걸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 이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도 못한 경영학부를 지원하고 경영 관련 영어를 공부하겠다고 하니 말릴 생각까지는 없다.
고삼 동안 내내 아침이나 저녁으로 등하교를 시켰다. 특히 심야 야간 자율 학습 후 하교할 때는 늦은 밤이라 꼭 데리러 갔었다. 자기소개서 쓸 때도 봐줬고 대입에 학과와 학교 선택도 딸아이와 함께 고민했었다. 대부분은 딸아이 의견에 동의를 했었다. 학교 다닐 때 영어 발표 경시대회 준비할 때도 딸아이의 모의 심사관처럼 분석하고 발음을 교정하고 발표의 제스처까지 참고하였고, 동아리 영어책 발표 전시회 때도 의견을 내고 함께 따라가 주었다. 참고 배서인처럼 딸아이 옆에서 공부할 때 나도 같이 공부하며 한 해를 바쁘게 살았던 시간이었다.
딸아이 어릴 때는 유난히 사진을 많이 찍어 주었다. 흡사 "윤미네 이야기"처럼 찍고 싶은 걸 따라 하고 싶을 만큼 유아기 때의 사진을 보면 여전히 그때의 추억은 흡사 내 머릿속에 박재가 되어 있는 것처럼 선연하게 떠오른다. 딸아이의 관심과 딸아이에게 헌신하고 싶은 사랑은 결론적으로 따지면, 나의 결핍이 만든 것이다. 나는 부모님과 무얼 제대로 하나 하지를 못했다. 나이 많은 막둥이였으나 오히려 서운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나는 중 고 혹은 대학 졸업식에 부모나 가족과 찍은 사진 한 장이 없을 정도로 소외되었다. 물론 지금이야 머리로 이해할지라도 마음으론 그 서운한 감정은 가셔지질 않는다. 흔해 빠진 여행이나 관광조차 함께 가본 적도 없었고, 어디 근사한 곳에서 밥 한 번 먹기 어려웠다. 멋지게 추억을 만들 능력이 될 무렵에는 부모는 나이가 너무 많았고 아버지는 일찍 여의고 말았다. 시간이 야속하지만 부모는 너무 늦게 나를 낳은 탓을 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감각이나 섬세함이 없이 늦게 아이를 낳겠다는 노산 소식은 외심으로 축하한다고 말은 해도 내심으론 걱정부터 앞선 이유가 많았었다. 부모와 나이 차이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단절된 것이 많다는 뜻이라는 걸 사람들은 잘 모른다. 늦둥이를 가진 사람들은 좀처럼 고민을 하지 않는 것을 심심찮게 목격하곤하고 개인적으로는 무척 아쉬울 따름이다. 이왕 낳을 바에는 좀 일찍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더 확보하는 게 맞다. 시간의 결핍은 늦둥이를 가진 부모는 왜 고려의 대상이 아닐까 생각해보면, 겪어 보지 못한 미숙함은 아닐까 싶었다. 인간이란 예상과 추측을 논리적으로 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세상에는 단지 딸이란 이유만으로 구박하고 방임하며 무관심하거나 딸에게 슬픔을 안겨주는 못난 아버지도 많다. 평생의 트라우마를 겪으며 사는 딸이 얼마나 많을까? 최근에 사건에서도 나온다. 딸아이를 죽이기까지 하고 버리거나 학대하는 아버지들. 그래. 차라리 낳지나 말 것을. 뭣하러 낳아놓고 불행 제조기가 되려 하는가 말이다. 본능적인 책임이 전부가 아니다. 딸 이전에 한 인간의 인권적인 삶이라는 것. 나도 결혼하고 아이 낳기를 싫어했었다. 아이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었으나 아이를 가짐으로써 발생하는 그 책임감, 생명을 책임진다는 무게감이 간단하지가 않았다. 또한 낳고 나서는 감당을 해야 하는 것은 또한 의무사항이고 필수이다. 자의이든 타의이든 일단 낳은 아이는 전적으로 사랑으로 뭉쳐져야 한다. 그러나 낳기 전과 낳고 난 이후가 다른 것은 일종의 죄악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낳기 전과 후가 동일해야 하는 아이에게서도 책임감의 일관성은 무엇보다 중한 지점이 아닐까 한다. 아이가 제 스스로 낳아 달라 했는가? 혹은 누가 낳아 달라 했었나? 아니잖아. 결정은 순전히 부모 자기들 욕망으로 낳아 놓고 책임도 못지는 짓으로 평생을 상처로 살게 하는 짓은 인간이 저지를 죄 중에 가장 큰 죄다.*발~. 그래서 낳았다면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당연히 따라다녀야 한다. 당연히 나도 그러기 싫었다. 나의 결핍을 아이에게 유전처럼 물려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했다. 불행은 당대에서 끊어야지 이걸 되풀이하면 안 된다. 그럴 바에는 아예 낳지 않는게 더 낫다. 왜 낳아놓고 고통스럽게 하는지, 갈 때 마음 다르고 올 때 마음 다른 게 인간이라 한다지만 그런 인간을 저주한다. 일관되고 합리적이고 논리적 감성이라야 한다. 특히 인간에겐 더더욱 필요한 덕목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 모순이 드러날 때 불행이 이미 만들어 내는 것이다. 내 나이 또래 여자들에게 있어서 아버지는 가끔 무서운 존재든가 혹은 술주정뱅이가 많았다. 아비의 비루한 삶이 딸에게 그대로 불행의 트라우마로 평생을 달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어릴 때 받은 상처로 인해서 여자가 겪어야 할 남자에 트라우마는 결국 오늘날 페미니즘이라고 하는 형태로 드러난다. 아버지의 불성실함과 무능함이 딸에게 전가되는 것은 사회적인 또 다른 성별의 차별로 이어지는 원초적 시발점이 아닌가 싶었다. 이 단초를 제공한 것도 무지한 아비의 잘못도 크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남자가 행복하기 보다 여자가 더 행복해야 하고 아들 보다 딸이 더 행복해야 하고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더 행복해야 사회 전체가 골고루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인간이 원시사회에서 왜 모계사회로써 이루어진 건지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특히 유전자에서도 모계의 유전 분석은 되지만 부계의 분석은 어렵다. 따라서 생체적 족보는 원시사회처럼 모계가 맞다. 모계는 여자가 딸에서 어머니로 이어지는 유전적인 상향으로 봐서 제법 생물 과학적 설득력이 있는 관점이다.
앞으로 대학 가서는 당연히 이때까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상을 나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약간 어리바리 까는 게 마냥 귀여웠던 딸아이는 그런데 의외의 구석이 있어서 재미나게 학업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이때까지 노력한 만큼 똑같이 새로운 꿈을 잉태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하여간 이 세상의 모든 딸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PS : 아 그런데 학교 기숙사 가서도 걸핏하면 휴일마다 휴일마다 오라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