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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이면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22
씨부라파 지음, 신근혜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평점 :
그림의 이면
봄과 가을이 만날 때가 있다.
노란 봄꽃과 붉게 물든 단풍은 다채로운 색들이 설혹 닮은 듯도 보여 끌리기도 하지만,
봄과 가을이 만날 그 다음의 계절은, 그들을 다른 길로 이끈다.
봄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푸르게 나아가지만,
가을은 화려했던 그 색을 품고 무채색의 날들을 견디며 마무리한다.
여기 봄, 22살의 놉펀이 있다.
그리고 이제 완연한 가을이 된 35살의 끼라띠가 있다.
놉펀은 끼라띠의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동경한다. 찬사를 보내며 추종하지만 둘의 결은 다르다.
깊이도 사랑도, 거쳐야 할 계절도 다른 사랑.
사랑없는 행복과 행복없는 사랑의 선택지조차 다른 두 사람.
그러니 그 사랑은 누군가에겐 짧고 누군가에겐 영원일 수 밖에 없다.
“제가 계속해서 온 마음을 기울여 여사님을 사랑해도 됩니까?”
“그것은 자네의 정당한 권리야. 그렇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네도 자신의 뜻으로 그 권리를 포기할테지.”
처음은 진부하다 느꼈다.
늙은 남자와 결혼한, 지적이고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촉망받는 미래를 가진 젊은 남자와의 절절하지만 짧은 사랑.
이런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읽다보면, 한때 꽂혀서 보곤했던 70년대의 한국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배우들은 연기를 하고, 성우들이 더빙한 대사를 듣다보면, 어느 순간 저 배우들이 내뱉는 말들은 모두 거짓같다.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가라고 하지만 가지말록 하는 말들. 예쁘게 포장되고 빙빙 애둘러 가는 35살의 끼라띠의 말이 성우의 더빙같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없이 죽는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 족하다.”
이 정도의 마음이라면 이렇게 슬프고 쓸쓸한 마음이라면......가을에 읽기에 족하다.
(이 소설에서 놉펜이 스카프를 풀어서, 끼라띠의 시린 발을 덮어주는 장면이 나온다.
남편에게 이 낭만적인 부분을 읽어줬더니... 이해할 수 없단다. 자신은 족보단 목살이 더 소중하다는 이상한 이유를 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