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유행했던 말 중에 지랄총량의 법칙이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가슴 속에 어느 정도의 지랄스러움을 가지고 있고, 언젠가는 폭발한다는 것.

주로 사춘기, 외계 생명체같은 아이들을 보며 희망조차 찾을 수 없던 엄마들이 우스개소리로 하는 말이다. 결국 그들이 가진 지랄스러움을 다 태워버리고 나면 짐승계에서 인간계로 돌아온다는 것.













자메이카 킨케이드의 애니 존을 읽으며 <지랄발광 17>란 영화가 떠올랐다.


(여주인공 네이딘, 아버지를 잃고 절친은 자신의 오빠와 사귄다. 거기다 내가 다 부끄러워질 정도로 온갖 사건들이 터지고 수습은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 무엇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친구도 상황도 엄마도, 자신의 얼굴과 몸매도, 학교도......)

둘의 환경도 상황도 다르지만 닮았다.

부모가 나를 낳았고, 부모가 지어준 이름으로 부모의 발자국을 따라가며 가장 안전한 그 곳에서 평온을 느끼며 착한 아이로 살았다. 엄마의 자장가와 엄마의 냄새, 부모님이 지은 집, 이 곳은 아늑했고 안전했다. 그렇지만 아이는 자란다. 부모가 불러주는 이름 속 알맹이를 채우는 일은 자신의 몫이다. 부모는 완벽하지 않다. 자신을 버리고 떠나기도 하며 실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들의 곁을 떠나 오롯이 자신이 되기 위한 과정, 위험하고 무모하고 어떨 땐 한심스러워 보이는 행동도 나름대로 성장통이 된다.

지랄발광 17세의 주인공인 네이딘과 애니 존의 차이점이라면?

애니 존에겐 그나마 SNS가 없다는 거다. 이거 큰 축복이다.

 

엄마와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생활.

애니가 아이에서 소녀가 되려하자, 엄마와의 작은 낙원에서 애니는 추방당한다.

추방당했지만, 스스로 원한 추방이기도 한다. 언제까지 작고 귀여운 순수한 노래를 부르는 아이일수는 없다. 몸은 자랐고, 이제 마음은 반항으로 가득하다.

아픈 성장통과 자신을 둘러싼 이들에 대한 혐오를 감추고, 독립적인 자신이 되기 위해, 애니는 고향을 등지고 배에 오른다.

 

왜 그런 심정이 들었는지 말로 설명해 보라고 누군가 요청했더라도 왜 그런 심정이었는지 곰곰이 따져보고 그 이유를 설명할 말을 찾아낼 수년의 시간이 주어졌더라도 난 단 한 글자도 끄집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내 심장이 그러했고 그것이 내 평생 느낀 가장 강렬한 감정이었다는 것만 알았을 뿐이다.”

사춘기와 성장,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사춘기를 뭐라 정의할 수 있으며,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들을 했는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왜 힘든지, 왜 떠나고 싶은지, 왜 죽을만큼 아프고 방황하는걸까.

유년의 시절과 작별을 고하는 것, 유년의 것들을 버리고 텅 빈 마음을 다시 채워야 하는 막막함과 외로움, 그러나 실상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마음이다.

 

엄마는 기회만 생기면 날 죽일 거야 용기만 있으면 내가 엄마를 죽일 텐데.”

 

애니는 자신의 트렁크에 자신의 물건을 담아 배에 오른다.

그 후에 애니는 어떤 삶을 살게 될까.

지랄스러운 네이딘과 애니가 그럼에도 싫지 않은 건, 그들이 또 한번의 탯줄를 끊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 좁은 산도를 통해 나와서 처음 본 내 가족, 그들에게 자신을 그대로 맡겼던 삶에서 이제 독립해 새로운 자신들이 되어야 한다. 성장하고 혼자 서는 준비를 해야 한다.

또 다른 좁고 힘든 사춘기란 산도를 혼자 힘으로 헤쳐 나와, 유년기의 탯줄을 끊고 나면 남는 건 혼란과 외로움이다. 이젠 자신의 것들로만 채워야 하는 그 외로움, 자신이 혼자 이겨내야 하는 혼란.

 

139페이지밖에 되지 않는 짧은 소설이다. 주인공의 유년시절이야기며, 대학진학을 위해 배에 올라타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작가 자메이카 킨케이드는 영국령 식민지에서 자랐고, 주인공 애니처럼 배를 타고 영국으로 와 보모생활을 시작한다. <애니 존> 이후의 삶은 <루시>란 작품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혼란스럽고 자신도 알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부모에 의해 만들어진 유년기란 낙원에서 걸어나와 자신의 낙원을 찾아가는 여정의 성장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떠올랐던 책이 있다.



<유년기의 끝>이란 sf 소설이다. 지금은 식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전개지만, 그 식상함의 첫 시작이 바로 이 책이었다.

오버로드란 외계인들이 결국 지구의 유년기를 끝장내려 한다. 정체성을 가지고 고유의 문명을 추구하며 살아가던 지구에서, 그들은 새로운 형태의 진화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의 다른 이름은 멸망이다.

오버로드덕택에 지구는 유토피아라 불리는 상태가 된다. 투쟁과 갈등이 사라진 곳, 그러나 예술과 종교 과학 또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겉으로는 좋아보이나 진정한 발전은 사라지는 현상

투쟁과 갈등이 없는 것이 정말 유토피아일까.

오버로드가 말하는 방향은 옳다.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다.

그럼에도 다른 길로 가고 싶다. 갈등하며 싸우다 결국 오버로드가 말한 그 길로 가게 되더라도, 일단은 자신의 마음대로 길을 가고 싶다. 둘러가더라도 절벽을 만나더라도, 긁히고 넘어지더라도 말이다. 스스로 획득한 경험치로 자신의 정체성을 쌓아가고 싶다. 유년기의 몫은 끝났으며, 이제 부모의 손을 놓고 싶다. 아이들은 유년기를 벗어나 성숙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 질문의 답은 이젠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아야 할 부모에게 있겠지. 우리도 그러했으니까.

 

갈등과 투쟁이 없는 지구는 유년기를 통해 성장하지 못하고 끝을 맺었고, 애니와 네이딘은 지독한 갈등과 투쟁 속에서 유년기를 통과해 성장한다. 지랄총량이 법칙이 필요한 이유다.


댓글(35)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2-09-02 13: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2 14: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크pek0501 2022-09-02 13: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지량총량뿐 아니라 불행총량의 법칙도 있다고 봐요.
초년에 고생하면 노년에 편하게 산다는... 저의 바람일지 모르겠습니다만...
고생 모르고 자란 사람은 작은 불행에도 크게 불행하게 느끼잖아요. 반대로 불행을 많이 겪은 사람은
웬만한 불행엔 끄덕도 안 하죠. 그래서 불행총량이 같아진다는 거예요. 제 생각입니다.ㅋ^^

mini74 2022-09-02 14:10   좋아요 4 | URL
행복은 총량이 없었음 좋겠어요. 막 퍼올리는 행복 ㅎㅎ 이건 욕심이겠자요. 포레스트검프에 나왔던 초콜릿상자 생각납니다 ~

얄라알라 2022-09-02 15:12   좋아요 2 | URL
헉! 그렇겠네요

지랄총량의 관점에서 보면, 행복도 확 몰아 소진하면 나중에 밋밋할 터이고
고생 총량도 가능하겠네요...
페크님 덕분에 생각의 전환

책읽는나무 2022-09-02 14: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지랄총량의 법칙이었군요?
며칠 전 딸한테 그런 말이 있단다. 지랄발광의 법칙이라고~~~~??? 지랄발광 맞나???
아무리 생각해도 뭐가 어색한지 몰라 계속 말이 헛도는 거에요ㅋㅋㅋ
미니님이 언급하신 <지랄발광 17세> 저 영화제목 때문이었나 봅니다ㅋㅋㅋ
유년기 때 지랄총량을 다 채워버리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런 사람일수록 미니님 말씀처럼 성장하는 과정일 수 있을테니까요^^

mini74 2022-09-02 14:12   좋아요 3 | URL
약하게 지나가는 녀석도 미친거 아니야. 저거 갖가버리고 싶게 지나가는 아이들도 있고. 전 생각해보니 좀 늦게 온 거 같아요 막 반항하면서 연애결혼도 하고 ㅎㅎ 저희집에서 제가 제일 소심하고 얌전했는데 유일하게 연애결혼했거든요. 다들 네가 그럴 줄 몰랐다고. ㅎㅎ 따님들 이제 개학? 누가 그러더라고요. 아이들이 미치기전에 방학을 하고 , 부모가 미치기직전에 개학을 한다고 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9-02 14: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SNS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큰 것 같아요. 제가 어릴적 학창시절까지만 해도 SNS가 없어서 그나마 사춘기를 덜 혼란스럽게 겪으면서 건너왔다 생각하는데 요즘 아이들은...흠~ 참 얼마나 조마조마할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되요. 어디에나 노출되 있다는 느낌? 내가 하는 행동이 모두 감시당한다는 생각은 끔찍하네요ㅠㅠ

mini74 2022-09-02 14:17   좋아요 3 | URL
지울 수도 없지요 ㅠㅠㅠ 예전엔 가슴속에 묻고 혼자 부끄러워하던 일이 박제되는 ㅠㅠ 거기다 비교대상은 너무 많고ㅠㅠ 상처받을 일글이 더 많아진가 같아요.

레삭매냐 2022-09-02 14:2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이런 표현 넘모 좋삽니다.

지O총량의 법칙 !!!
예전 독서 모임에서 아주 발랄
하게 외치던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지금은 어려서 다 폭발시켜서
아주 순한 양이 되었다고 합니
다 ㅋㅋㅋ

mini74 2022-09-02 14:26   좋아요 4 | URL
그죠 ㅎㅎ마늘 안 먹여도 동굴에 가둬놓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사람되더라고요 *^^* 근데 무슨 독서모임이시길레 이런 구호를 ㅎㅎㅎ

얄라알라 2022-09-02 15:17   좋아요 4 | URL
저로 레삭매냐님처럼 점잖게 두번째 글자는 o처리 할 걸 그랬어요 ㅎㅎㅎ

mini74 2022-09-02 15:45   좋아요 3 | URL
알라님 넘 귀여우세요 ㅎㅎㅎ 저는 과감하게 ㅠㅠ

레삭매냐 2022-09-02 19:34   좋아요 2 | URL
책모임에서 술 잔뜩 묵고
막 야호~~~~

지O랄라라~ 야호 지O랄라라
타령을 하던 기억이 핫하하 -

고상한 책 읽고 뒷풀이는 아조
고상하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서니데이 2022-09-02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중고등학교 학생 시절에 사춘기를 지나는 사람도 있지만, 30대 이후에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고 해요. 늦으면 늦을 수록 더 힘들다고도 하고요. 언젠가 한번은 자기 존재의 문제와 마주하는 시기가 다 오는 것일 수도 있지만, 순탄하게 사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유년기의 끝, 아서클라크의 책도 오랜만이네요.
잘읽었습니다. mini74님 즐거운 금요일 되세요.^^

mini74 2022-09-02 15:46   좋아요 2 | URL
서니데이님 유년기의 끝 읽으셨군요. 처음 이 책 접해울때 넘 신선했어요. 이 책 읽고나니 만화영화 영화 책들에서 꽤나 많은 설정을 가져왔구나 보이더군요.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

scott 2022-09-02 15: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갈등도 투쟁도 없이 순응적인 일본의 지난 시절 잃어버린 30년을 보니 들끓고 분쟁하며 떠들석한 사회가 발전의 가능성을 열어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키옹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을 때면 일본 국민들 대다수가 현재 상황에만 만족 (오늘 하루 무사히) 내일에 대한 희망이 없어요(사연들을 통해 알게 됨) 그래서인지 자살률이 높은 것 같습니다.

mini74 2022-09-02 15:48   좋아요 2 | URL
헉. 그러고보면 정치적으로도 문제가 많은데 참 조용한거 같아요. 시위도 없고 ㅠㅠ 예전 전공투? 때 너무 많은 힘을 쓴 건지. 스콧님 말씀처럼 좀 떠들석해야 발전도 있겠지요 *^^*

단발머리 2022-09-02 15: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킨케이드는 이번에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부모를 떠나 성장의 과정을 거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하면서... 부모의 심정이란 또 복잡하니까요.
미니님 덕분에 또 좋은 책을 업어갑니다. 참, 부지런히 많이 읽으시는 미니님!! 짱!!

mini74 2022-09-02 16:00   좋아요 2 | URL
이 분이 노벨상 후보시군요. 잠자냥님 리뷰 읽고 끌렸습니다. 이 다음 이야기가 루시로 이어진다고 하더라고요. ~ 전 문해력이 딸리는거 같아요. 단발머리님 ㅎㅎ 고맙습니다 ~

청아 2022-09-02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내용과 제목이 참 잘 어우러집니다. *^^*
SNS 때문에 문제도 많이 생기고 오해도 빚어지고ㅜ.ㅜ
저는 스마트폰 없애고 싶을 때가 종종 있어요. 이런 편리한 수단보다 편지 주고 받을 때가 사람 사이에 관계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해요. 스콧님 말씀도 그렇고 일본보다는 우리나라가 그런면에서 희망적으로 보입니다.

mini74 2022-09-02 16:45   좋아요 2 | URL
그러고보면 예전엔 편지쓰고 카드 보내고 예쁜 우표도 사고 그랬던거 같아요. 시끄러운 사회가 건강한 사회인거 같아요 ~

2022-09-02 16: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2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2 16: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2 16: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9-02 17: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2-09-02 16: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정말 책 다양하게 읽으시네요.
킨케이드 작가 처음 들어보는데 이 작가에도 관심을~~
지ㅇ총량은 정말 있어요^^

mini74 2022-09-02 17:05   좋아요 3 | URL
잠자냥님 리뷰 읽고 찜했어요 페넬로페님 ~ 분량 짧고 문장들도 좋아서 쉽게 읽혔습니다 *^^*

coolcat329 2022-09-02 19: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작가가 노벨문학상 후보군요.
짧으니 좋네요. ㅎㅎ
미니님 정말 다양하게 읽으세요.

mini74 2022-09-02 22:00   좋아요 1 | URL
저도 단발머리님 댓글 보고 알았어요. 이렇게 유명하신 분이라니 ㅎㅎ *^^*

새파랑 2022-09-03 09: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뭔가 쌓인걸 풀어줘야한다는 이야기군요. 저는 서점가서 이책 잠깐 봤는데 좀 짧아서 사기는 좀 그렇더라구요 ㅋ 미니님은 스트레스를 쌓아놓다가 유튜브를 통해 푸시는거 아닌가요? ^^

서니데이 2022-09-03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태풍이 온다고 하더니, 바람이 많이 차가워요.
mini74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그레이스 2022-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메이카 킨케이드의 루시 사놨어요.
그것부터 읽고 읽을려구요.
지랄 총량의 법칙 ㅋㅋ
근데 지랄이 한의학에서 저혈압이었다가 고혈압이었다가 종잡을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용어래요 ^^

기억의집 2022-09-07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년기의 끝 사다만 놓고 아직 안 읽은 책인데( 방금 책장에서 찾아보니 역시 있네요) 오 이번에 읽어봐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