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힌 이름, 완전한 이름


 

혁신과 새로움의 아이콘 바우하우스 또한 여성들을 입학시키는 것을 꺼렸다. 너무 많은 여성학생의 수는 신뢰감을 줄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더 많은 입학금을 냈고, 실력과 무관하게 주조 직조 등으로 보내졌다.

이런 바우하우스에서 클레를 통해 아동미술 등을 배우고 창작에 힘을 쏟은 한 화가가 있다.

프리들 디커 브란다이스

2차대전, 트레진 수용소에서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친 화가이다.

기다리는 건 죽음이지만, 그렇다고 공포에 굴하며 살 수는 없는 법. 아이들에게 나비가 되는 법을 고통앞에서도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을 가르치다, 아우슈비츠로 남편이 이송되자 본인도 자처해서 그 곳으로 향했고,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았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상자 안으로 밀어넣었지만, 그녀는 우리를 그 상자에서 꺼내주었다.”

생존한 학생의 말이다.



 

노은님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 물고기 그림일거다. 눈을 말갛게 뜨고 있는 물고기들이, 자신들의 우주일 푸른 물 속을 유영하는 모습은 나를 참 작게도 만들었고, 생명의 힘참을 통해 위로도 받았다.

그 중에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꼽으라면 이 책에 소개되는 큰 걸음이다.

성큼 성큼 발을 내딛는 그 두 다리가 살아 있는 듯, 즐거운 듯 행복한 듯 보여서 좋다. 큰 보폭이 시원해서 좋고, 어디론가 갈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하라 말한다. 너무 조바심내지 않아도 우린 어딘가로 가고 있는 중이라 느꼈다.

세상앞으로 나온 천진한 걸음, 달관한 걸음, 용감한 걸음앞에서 나는 내게 맞는 걸음을 찾을 수 있겠단 생각, 아니 맞지 않더라도 내딛음에 뿌뜻함을 느꼈다.

 

빈곤을 얘기해도 남루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는 정직성이란 이름의 작가.

아이들을 키우고, 자개농을 주워 새로운 꽃과 하늘을 파도를 만들었다.

너무나 정직해 보이는 그의 문패앞에서, 스스로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는 화가의 모습이 엿보인다.

 




마음만큼 해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108)


둘의 공통점은 애연가였고 그 시대 여성가장이었다는 것. 둘은 절친이었고 서로를 보듬었던 박경리작가가 천경자 친구를 생각하며 쓴 시이다. 좀 고약한 예술가라 칭하지만, 세상은 천경자 작가에게 더욱 고약했다. 그녀의 작품을 마음대로 평가했고, 그녀의 삶에도 입방아를 찧어댔다.

그렇게 살아남은 두 예술가가 서로를 보듬으며 그렇게 의지했다.

화관이 아닌 뱀을 머리에 두룬 젊은 여자의 그림이 어릴 적 참 기이하고 무서우면서도 끌렸던 기억이 난다. 살아있어 더 아름다웠던 뱀을 머리에 두른 여자....는 작가 자신이었다.


 

이 책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진작가를 만났다.

박영숙 작가. 일명 미친년 프로젝트와 마녀 시리즈, 화폐 개혁 프로젝트 등 사진으로 많은 활약을 하는 작가분이다.


고등어를 썰다가 잠시 칼을 들고 무언가 생각에 잠긴 여성.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평가받지고 못하고 폄하되는, 매번 되풀이되는 가사노동을 저 고등어대가리를 잘라내던 칼로 숭덩 끊어내고 싶었을까. 아니면 이 지리멸렬한 세상을 휙하고 그어보고 싶었을까.

제주도의 곶자왈에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올려놓고 찍은 사진들은 마녀들의 제단같은 느낌도 든다.

비비안 마이어의 사진, 작가의 아버님이 물려주신 카메라,루이즈 부르주아의 초상등을 높아두고 찍은 사진들엔 촛불들이 일렁인다.

 

대상과 공감하고 교감하되 이들을 이미지로만 소비하고 이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박영숙 사진이 고수하는 윤리학이다. 한탕주의가 아니라 인연과 공감을 밑거름으로 길게 갔다. 생각을 같이하는 동료페미니스트들은 모델을 서고, 의견을 내며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지인들끼리 사부작거리며 찍은 것 같은 연출 사진들이라고 혹자는 폄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묵직하다.” (122페이지)

 

최초의 추상화가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그린 힐마아프 콜린드 등도 소개된다.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않지만 표지의 그림은 헬렌 세르프백의 <자화상>이다.

핀란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며 수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젊고 아름다운 시절의 자화상도 좋지만, 어렴풋이 흐릿해져가는 노년의 자화상엔 시간말고도 그녀의 고된 삶과 예술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많이 담겨 색감들이 흘러넘칠 듯 이그러지고 뭉개진다.

 

잊힌 화가들, 여성화가들의 이름을 되살리자 그들의 역사를 되찾자는 책들이 굉장히 많이 나오고 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혹은 남편의 이름으로 바뀐 그들의 그림이 진짜 이름을 되찾기를 바라본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무시되거나 폄하되었던 그들의 그림 또한 제대로 평가되기를. 스캔들과 흥미위주로 소모되지 않기를.

척박한 곳에서 꽃을 피우는 것은 더 대견한 일이다. 누군가가 밟고 지나는 곳, 물조차 주지 않는 곳에서 가장 자신다운 꽃을 피우는 것은 위대한 일이다. 대견하고 위대한 일이기에 앞서 엄청난 희생과 고통 또한 따르는 일이다.

 


이 외에도 여성화가들을 다른 책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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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05-10 13:3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말씀처럼 여성 예술가의 이름들이 다시 거론되고 많은 작품들이 재주목받는 현상~ 세상은 진전하고 있구나 싶어서 마음이 놓입니다!

mini74 2022-05-10 13:38   좋아요 7 | URL
책마다 작가들이 조금씩 겹치기는 하지만, 새로운 작가들을 알아가는 재미에 자꾸 사게 되는 거 같아요 화가님말씀처럼 세상이 전진하고 있는거 같아 저도 좋아요 *^^* 박영숙작가님 고등어 사진 보여줬더니 남편이 고등어는 손질된거 사오라고 ㅎㅎ

거리의화가 2022-05-10 13:40   좋아요 6 | URL
ㅋㅋㅋ 남편님도 미니님처럼 재치가 넘치시는 분 같아요ㅎㅎ

얄라알라 2022-05-10 1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 넘 재밌는 페이퍼입니다. ˝큰 걸음˝은 보기만 해도 속이 뻥 뚫릴 듯 시원한 큰 걸음이네요, 저렇게 걸으며 산책하고 싶어요. 그리고 고등어 사진, 밑의 고등어 보기 전 여성분 얼굴표정만 봤는데 연출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뭔가 극 일상적이었어요.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자 갑자기 섬뜩하다, 답답해진다는 마음, 사진이 뭘 이야기하는 걸까 상상하게 되네요. 덕분입니다

mini74 2022-05-10 13:53   좋아요 4 | URL
노은님 그림 참 좋지요 ~ 박영숙 작가님 사진 다 재미있고 생각할 점도 많았어요 허난설헌으로 지폐만든 프로젝트도 좋았답니다 ~~

얄라알라 2022-05-10 1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손질된 고등어 ㅋㅋ

새파랑 2022-05-10 13: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직성 작가님은 정직하실거 같아요~!! 고등어 써는 사진은 좀 무섭네요 ㅋ 역시 미니님의 미술 감성은 대단합니딘~!!

mini74 2022-05-10 13:54   좋아요 4 | URL
정직하고 싶다는 마음 , 곧아보여 좋았어요. 고등어 ㅎㅎㅎ 박영숙작가님 마녀 미친년 프로젝트 사진들이 유쾌하면서 풍자가 담겨 있어 더 재미있었어요 ~

미미 2022-05-10 14: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큰 걸음>속 다리가 롱다리가 아니어서 더 친근하게 느껴집니다ㅎㅎ

엉뚱한데 피었다고 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데 가볍게 여겨지는 경우가 종종있죠.
그래서 척박한 환경에 피었다면 더 대견하다는 미니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mini74 2022-05-10 15:52   좋아요 4 | URL
고맙고 고마운 일이란 생각도 들어요 ㅎㅎ 큰걸음 저도 친근해보여서 더 좋아요 미미님 ~~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레삭매냐 2022-05-10 15: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직성 문패가 아주에 마음에
드네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세상이
라 더 그런가 봅니다.

mini74 2022-05-10 15:52   좋아요 3 | URL
모양새도 참 정직해보이는 문패지요. 저도 맘에 딱 와닿더라고오 ~~

페넬로페 2022-05-10 15: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정직성에 끌리네요.
지금 제 머리 스탈과 비슷하기도 하고요~~
스타일을 스탈로 써봤는데 이런건 레삭매냐님께서 잘 살리시잖아요 ㅎㅎ
미술에 대해 잘 모르지만 바우하우스는 낯이 익어요^^

mini74 2022-05-10 15:57   좋아요 4 | URL
정직성 작가가 자개로 만든 작품도 정말 아름다웠어요 ~ 페넬로페님 헤어 스퇄 이시군요 ㅎㅎ *^^*

바람돌이 2022-05-10 15:5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큰걸음이라는 작품은 저도 정말 좋네요

mini74 2022-05-10 16:02   좋아요 3 | URL
노은님작가님 생명 시리즈도 참 좋아요 바람돌이님 *^^*

라로 2022-05-10 17: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올려주신 저 부분에서 읽기가 더 나아가기 힘들었어요...
친구라서 쓸 수 있는 시네요. 멋지다, 우정이요. 부럽다, 우정이요.^^;;
암튼 저 고등어 보면 제 최근 고등어 썰던 사연이 생각나서 토 할 거 같아요. 언제 글로 함 써야할 것 같아요. 잊어버리게..휴

mini74 2022-05-10 17:50   좋아요 4 | URL
ㅎㅎ 궁금하네요 고등어 사건~ 박경리 작가가 은행에서 대출받아서 눈이 나빠진 천경자화백 보약 해먹이는 내용도 나온답니다 ㅠㅠ 저도 부러웠어요 ~

coolcat329 2022-05-10 17: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큰 걸음 정말 당당함과 힘찬 기운이 느껴지는 그림이네요. 저도 따라 그릴 수 있을 것도 같긴 한데요. ㅋㅋ
근데 저 고등어 자르는 여인은 칼을 든 손으로 얼굴을 만지시니 위험해 보이는데 정작 본인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네요. 조금 무섭기도 하고 뭔가 사연이 있으신거 같기도 하고 🤔
남편따라 아우슈비츠로 간 브란다이스가 인상적입니다.

mini74 2022-05-10 17:58   좋아요 5 | URL
갇힌 몸 정처없는 마음~ 이 제목인데 쿨캣님 정확하게 보신 듯 합니다. 위험한 칼을 들고 다른 생각에 빠진 ㅠㅠ
정작 남편은 살아돌아왔다고 합니다. 둘 다 살아돌아왔다면 아니 모두가 살아돌아왔다면 정말 좋았을텐데 말이지요 ㅠㅠ

scott 2022-05-11 1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요 시구절 맘속에 새겨 넣어여!

청명한 하늘을 품은 오월!

미니님 맘 속에 가득!
ฅ(= ´ꈊ` =)ฅ

mini74 2022-05-11 18:45   좋아요 3 | URL
정말 두 분이 찐친인게 느껴지는 시 구절이지요. 박경리선생님 시도 👍스콧님 댓글도 👍

서니데이 2022-05-11 18: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래전 천경자 작가 그림 처음 봤을 때는 상당히 낯설었어요.
읽으면서 90년대에는 계셨던 두 분이 이제는 계시지 않고, 작품만 남았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얼마전에 김지하 시인의 부고 소식도 있었네요.
잘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mini74 2022-05-11 18:46   좋아요 4 | URL
위작 소송 등 신문에 오르내리며 참 힘드셨다고 해요 ㅠㅠ 그러고보면 예술가들은 작품으로 영생을 사는 거 같습니다 ~

서니데이 2022-05-11 18:48   좋아요 3 | URL
그 소송은 정말 유명했어요.
작가 본인이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이 주장했으니까요.
작가가 사망하면 작품은 더 가치가 상승한다고 해요. 가끔은 예술품은 작품보다 작가가 더 특별한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레이스 2022-05-11 21:4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장바구니에 넣었어요.
미술책들에 깔려 숨 못쉬더라도 이 책은 사고픈... 미니님께 감사를 해야할지 원망을 해야할지 ... ㅋㅋ
아르테미시아도 사야겠고!
감사해요 ~^^

mini74 2022-05-11 21:54   좋아요 4 | URL
ㅎㅎㅎ 저도 그래요 그레이스님 ~ 그레이스님 덕분입니다. 미술관련책 앞에만 서면 욕망덩어리 ㅠㅠ ㅎㅎㅎ가 됩니다 ~~

희선 2022-05-12 03: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젠 잊히지 않고 이름을 제대로 찾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네요 지금이라고 사는 게 쉽지 않지만...


희선

mini74 2022-05-12 08:02   좋아요 4 | URL
정말 저도 그랬음 좋겠어요 ~~조금 흐린 아침이에요 희선님 *^^* 날씨는 흐리지만 맘은 환한 날 보내세요 ~

다락방 2022-05-15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박영숙 님의 저 식칼 사진이 너무 좋네요. 썰어진 생선 대가리들과 함께한 사진이요. 저는 이 책을 사겠습니다, 미니님. 와 언제나처럼 너무 좋은 페이퍼에요. 아 너무 흥분되네요. 좋아서 ㅋㅋㅋㅋㅋ

땡투입니다~~

mini74 2022-05-16 17:20   좋아요 0 | URL
생선 대가리 강렬하지요 ㅎㅎ 저도 넘 좋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