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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평점 :
세이렌은 속삭임이나 노래로 남자들을 유혹해 죽임에 이르게 한다. 실제 세이렌은 여자얼굴에 독수리의 몸을 가진 괴물이다. 오디세우스는 부하들의 귀를 수초로 막아 무사히 세이렌이 있는 해안을 탈출한다. 오르페우스는 아르고의 모험에 나서는 중, 세이렌을 만나게 된다. 오르페우스는 세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결국 모욕감에 세이렌은 몸을 던져 자살하고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세일렌은 그 후로 오랫동안 여자의 유혹이나 속임수의 상징으로 시작되었다. 이 책에서도 그런 대목이 나온다. 여자들의 목소리는 세일렌이니 밀랍으로 귀를 막으라고.
결국 그들은 그레이스의 말을 들어줄 의도가 없었다. 그녀의 무죄를 믿지도 않았고, 그녀가 유죄이든 무죄이든 중요하지 않다. 밀랍으로 귀를 막은 건 그들이다.
그레이스가 열등한 존재이든 요부이든 순수한 소녀이든 살인범이든 선택은 그레이스가 아니라 그들이 하는 것이다.
가난이란 말로도 부족하다. 북적이는 아이들, 무책임하고 폭력적이며 알콜중독인 아버지와 파랗고 커다란 예쁜 눈동자에 절망과 죽음만 남은 어머니. 그 사이에 태어나 넝마를 입고 구걸을 하고 험한 일들을 하며 자랐다. 13살도 되지 않은 나이에 하녀생활을 시작했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누군가는 아름다운 옷을 입고 사치스런 삶을 살아감에도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저 굶지 않음에 기뻤다. 손이 터지고 붉어져도 허리가 휘도록 눈이 빠지도록 옷을 빨고 바느질을 해도 그저 좋았다. 자신과 몸을 꼭 붙이고 잠들며 세상을 알려준 친구 메리도 생겼다. 그 친구가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았다. 세상은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저 여기저기 하녀로 옮겨다닐 뿐, 그러다 토마스 키니어란 집에 하녀로 취직하게 된다. 부자 주인양반의 정부라는 낸시의 이중적인 모습에도 참을 뿐이었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범죄에 휘말렸다. 공범이라는 맥더모트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16살에 예쁜 얼굴, 순진해 보이는 모습의 그레이스는 종신형을 받았다. 누구는 그녀를 요부로, 누구는 순진한 아이로 봤다. 그런 그녀를 사람들은 마음대로 재단했다. 요부에서 정신병자로 혹은 순진하게 이용당한 소녀로. 그런 그녀를 석방시키고자 노력하는 이들도 그저 자신들이 만든 이미지를 믿을 뿐, 그레이스의 목소리에는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겠다던 조던 박사도 신경최면을 하겠다는 뒤퐁박사도 석방을 돕는다는 베링거 목사에게도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레이스의 태도 또한 모호하다. 애매하다. 진실을 주장해도 거짓을 이야기해도 결국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낱말을 문장을 만들어 낼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하녀로서 주인들이 원하는 드레스와 퀼트를 만들 듯, 그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랄 뿐이다.
(그 시대 여성에 대한 처우와 처벌, 정신병동이나 감옥 등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레이스가 들려주는 살아온 이야기는 가난하고 끔찍함에도 너무나 매력적이고 어떨땐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레이스의 이야기엔 우아함과 인간에 대한 순수한 믿음이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