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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ㅣ 크리스티네, 변신에 도취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싸구려에 맛없는 빵을 먹고, 딱딱하고 볼품없는 침대에서 잠이 든다. 가장 좋은 것을 가질 수 있음에도 불편함을 선택하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아름다움에서 추함으로, 안락함에서 불편함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갈 자신이 없다는 그 남자는 언제나 최악의 것을 선택했고, 그의 삶 또한 그가 살아갈 수 있는 삶에서 가장 아래의 것이었다. 삶에서 찾아오는 따스하고 좋은 것들을 외면하고, 추운 겨울로만 살아내는 그다. 사람들은 추운 겨울이 닥쳐도, 따스했던 기억으로 마음을 데우며 살아간다는 걸 알지 못했나 보다.
그러나 이 책 속 주인공 크리스티네는 잠깐의 봄바람 같던 휴가를 잊지 못한다. 이제 자신이 그럭저럭 살던 곳은 더욱 끔찍한 곳이 되었다. 분노가 차오르고 화가 난다. 마음을 데울 추억이 아니라 마음을 베는 기억이 되었다.
크리스티네는 정반대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어린 시절의 즐거웠던 추억도, 맛있고 달콤했던 삶도 기억에서 너무 멀어졌다. 그런 삶보다 더 긴 추운 날들을 겪으며 그녀 주변의 모든 것들은 생존일뿐이다. 밀가루 부스러기조차도 계산하며 사는 삶, 비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며, 청춘에도 사랑에도 웅크리며 살았다. 반쯤 얼어버린 몸은,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청춘들의 스텝에도 꼬일 뿐이다. 그녀에게 청춘은 전쟁의 폭격 속에 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런 크리스티네에게 봄날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추문에 휩싸여 사라졌던 이모의 초대, 그 곳은 별세계였다. 푹신한 이불과 부드러운 실크옷감의 드레스, 발에 맞는 신발, 달콤하고 부드러운 음식들과 친절해 보이는 이들에 둘러쌓여, 자신을 추앙하는 남자들에 황홀해하며 크리스티네는 천국을 맛보지만 곧 추방을 당한다. 차라리 몰랐다면, 경험하지 못했다면 크리스티네는 회색빛 칙칙한 옷을 입고, 우표에 도장을 찍으며, 옆집의 곧 홀애비가 될 보조교사와 결혼해 빵값을 걱정하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동화였다고, 짧지만 행복했던 시간이었다며 그저 추억으로 담기엔 크리스티네의 삶에서 그 순간은 너무 찬란했다. 한 번도 행복과 여유로움을 따스함과 포근함을 모른 체, 일만 하며 전쟁의 두려움 속에서 살아온 크리스티네. 이젠 모든 것이 구질하고 참을 수 없다.
크리스티네에겐 견딜만한 희망이 없다. 그런 그녀에게 형부의 친구인 페르디난트가 다가온다. 전쟁으로 불구가 되었고, 잔인하도록 가난한 페르디난트다. 둘은 마음이 통했지만 사랑을 속삭일 공간조차 가질 수 없다.
자유와 사랑을 억압하는 가난, 희망조차 없는 가난 속에 둘의 선택지는 파멸이다.
“저 거울 속 유령처럼 나도 아무 보람 없이 소모되고 늙어가며 조금씩 죽어가겠다.”
“가난이라는 좁은 골목에서 큰길로 나가는 출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믿지 않았다. 게다가 축축한 외투를 입은 잔인한 적과 같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
1차대전과 그 후의 암담함, 부의 편중과 잔인함이 느껴졌다. 선택지없는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전쟁에 휘말리며 어떤 고통과 아픔을 당하는지, 르포식의 글보다 오히려 크리스티네의 과거회상과 그녀의 지금의 모습이 더 와닿는다.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지친 그들의 선택이 슈테판 츠바이크의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1942년 아내와 자살하면서 남긴 유언이다.
“인생에 이별을 고하기 전에 나는 자유로운 의지와 맑은 정신으로 마지막 의무를 다해 두려고 합니다. 60세가 지나서 다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한다는 것은 특별한 힘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향 없이 떠돌아다닌 오랜 세월 동안 나의 힘은 지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제때, 그리고 확고한 자세로 이 생명에 종지부를 찍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친구에게 인사를 보냅니다. 원컨대 여러분은 이 길고 어두운 밤 뒤에 마침에 아침노을이 떠오르는 것을 보시길 바랍니다. 성급한 사나이는 먼저 떠나야겠습니다.”
전쟁에 쫓기고, 유대인이라 추방당하며 노년의 몸을 이끌고 여기 저기 방랑했을 그에게, 이제 희망은 남아있지 않았고, 희망없는 삶엔 죽음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는 말처럼 그렇게 떠났다. 자신의 죽음앞에서도, 남은 이들에겐 희망이, 아침노을이 찾아가길 바란다.
( 표지그림은 클림트의 다나에다. 제우스는 황금비로 변해 갇혀있는 다나에를 찾아온다. 클림트는 이 장면을 그리면서 황금비를 황금동전처럼 둥글게 표현했다. 크리스티네는 황금에 취해버렸고 그런 그녀에게 아울리는 표지가 아닐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