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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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 다녀오셨다면서 엄마가 내 손목에 팔찌 하나를 끼워주셨다
“뭐꼬?”
“이거 끼믄 오래 산단다. 건강하게 “
팔순노모가 중년의 막내에게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팔찌를 끼워주는 모습이 뭔가 좀 우습고 짠하다
거기다 천원도 허투루 안 쓰는 울 엄마, 팔찌에 쓰인 가격표가 거금 8000원이다.
엄마는 아이들 나오는 프로를 좋아하신다. 손주들 생각이 나서 그러신가 해서 여쭤봤더니 뜻밖의 대답이었다. 전쟁영화를 보면 그 시절 전쟁생각이 나서 무섭다고, 가난하고 배고프고 우는 걸 보면 피난가던 생각이 나서 싫다신다. 그저 이젠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싶으시단다. 그 좋은 기억이란게 드문 드문 어린 시절, 엄마의 엄마와 손 잡고 나물 캐고, 불 때서 밥 하던 그 따숩던 추억이란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보면 엄마도 그 아이들 나이가 돼서 노는 것 같단다.
엄마는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알지만, 아직도 나는 엄마 마음을 짐작도 못하겠다. 그 마음 속속들이 나와 언니들과 오빠가 있다는 것만은 알겠다. 그리고 나보다 어린 아이 하나도 있다. 엄마 마음 속 아이가 아이답게 밝고 환하게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

대전에 사는 친구가 울먹이며 전화가 왔다. 늦둥이와 같은 학원에 다니는 아이 하나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고. 이제 13살. 어린 그 아이가. 성적이 점수가 뭐라고 라는 말조차, 아이의 죽음조차 쓰기가 힘들다. 아이가 어떤 마음이었을지조차 조심스럽다. 부모 마음은 그럴테지. 좋은 선택이라 믿었겠지. 꽃길을 걷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까
내가 예전 살던 동네는 교육열로 유명했고 해마다 아이 하나는 어디에선가 추락했지만, 동네 분위기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미련없이 그 동네를 떠났지만, 그 동네에서도 비보는 그치지 않는다. 누군가 혹은 사랑하는 이가, 그 아이의 마음을 열고 다가설 수 있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날이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일. 팔순노모의 팔찌에 담긴 그 마음을 부모라면 갖고 있을텐데 그렇게 보내고 어찌 살지 먹먹해져 온다. 할 수 있는건 그저 기도와 바람뿐이다.


도어라는 책을 읽고 끄적끄적 몇 줄을 쓰고도 올리지 못했다. 마음이라는게 그 사람의 마음이라는게 무엇일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앞에서 속수무책일수 있을지, 그 사람의 선택이 죽음이라도 받아들여야 하는지. 그리고 그 마음들은 왜 그리 삐걱거리며 혹은 서로 다른 시간에 혹은 다른 방향으로 열리는지.


 
그녀, 에메렌츠, 나는,
어릴 적엔 겁도 없이 많은 문을 두드렸다. 문 뒤에 열린 공간들이 두렵지 않았다. 문 뒤로 사연들이 쌓여가며 이젠 조금씩 두려워졌다. 가끔 아주 가끔 누군가의 여리고 순한 눈빛들이 문을 여는 열쇠가 되곤 했지만, 보통은 남는 건 후회였다. 타인의 문 안을 보는 것, 내 문을 열어주는 것에도 지쳤다. 그저 길 위의 눈을 쓸고, 내가 필요한 이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누군가의 고독을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먼저 두드리는 것을 그쳤고, 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엔 없는 척 숨죽였다. 내 문 안엔 너무 많은 죽음이 먼지로, 거울로, 소파로, 의자로 서랍으로 남겨져 있다. 세월에 낡아가고 사라져 갈 그 죽음들을 그렇게 금고로 막아놓은 방 안에 가둬두고 살아간다.
그러다 어설픈, 20살 어린 작가를 만났다. 어설프고 쉽게 분노하고 조급하고 생각도 짧다. 그러나 자꾸만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너무 사랑해서 오히려 해가 되어버린 어린 암소, 벼락에 재가 되어 버린 쌍둥이 동생들, 우물에 뛰어들어 버린 아름다운 엄마, 평판을 버리며 지켰던 어느 유대인 아이, 그리고 내 고양이들. 혼자 살아갈 생존능력도 없고 한없이 약한 그 존재. 그들을 나는 모두 “비욜라”라고 부른다.
 

(마음을 문에 비유하곤 한다. 들어오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문을 부수고 들어와 헤집어 놓고, 불을 지르고, 낡아가고, 부서진다. 바람이 들어오고 햇살이 비치지만, 간혹 빗줄기에 바닥부터 썩어가기도 하고, 어울리지 않는 꽃묶음을 매달고 있기도 한, 그렇게 들뜨고 썩어 빛 바랜 후 소멸하는 문.)
 

아버지도 새아버지도 죽었다.
쌍둥이 동생들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
어머니는 우물로 뛰어내려 자살했다.
9살에 이 모든 일을 겪고, 외할아버지에게 버림받고 하녀가 되었다.
사랑을 했지만, 누군가는 죽었고 누군가에게는 버림받았고, 누군가는 사기를 쳤다.
그리고 보통사람의 5배의 일을 하며, 퉁명스러운 말투 속에 여전히 그럼에도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는 그녀, 에메렌츠와 그녀보다 20년 어린 작가의 이야기다.
 

눈이 참 많이도 오는 동네다
참나무처럼 야무진 덩치에 단호한 입매의 여인이 커다란 빗자루로 연신 눈길을 쓸고 있다.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쓸고 또 쓸어도 눈은 길 위로 연하게, 그러다 점점 짙게 쌓여간다. 충성스런 비욜라는 그런 그녀를 지켜본다. 가장 믿고 사랑하는 그녀, 주변의 사소한 움직임들에 귀를 쫑긋하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킨다. 그녀의 또 다른 비욜라는 창가에서 그녀를 지켜본다. 딱하기도 하고 도와줄까 싶지만, 결국 그 비욜라는 자신의 따뜻한 자리에 앉아 타자기를 두드린다. 딱 거기까지이다. 그녀와 그녀가 사랑하는 비욜라의 관계는.
 

책 속에서 여름에는 첫 번째 체리였고, 가을에는 영근 밤, 겨울에는 화톳불에 익힌 호박 봄에는 관목의 첫 봉오리였다라는 에메렌츠, 그녀는 문을 닫고 조용히 운명에 거스름없이 사라지길 바랐다.
그렇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 같이 차를 마시고, 숨겨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이가, 문 안에서 죽어갈 때 문밖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할 수 있을까.
 
책 속에서,
1.지금은 알고 있지만 그때에는 알지 못했다. 애정은 온화하고 규정된 틀에 맞게, 또한 분명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를 대신해서도 그 애정의 형태를 내가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2.에메렌츠에게 그냥 보통의 삶은 필요없어요. 에메렌츠에게는 그녀 자신만의 삶이 필요한데, 그것은 벌써 없어져 버린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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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11-04 16:5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엄마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더 많이 물어보고 알아야겠다 생각이 드네용~
13살 어린아이의 죽음이 황망하네요. 성적 그게 뭐라고...
미니님 건강하고 오래 사실 거 미리 축하드립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진짜 최고인듯~👍

mini74 2021-11-04 17:11   좋아요 5 | URL
제 취향은 아니지만 ㅎㅎ 소중히 아껴가며 오래 오래 끼려고요. 툐툐님은 잘 하고 계시잖아요. 물구나무 서서 물어보면 어머님 더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ㅎㅎ 고맙습니다. 오래오래 살게요 ~~ ❤️

새파랑 2021-11-04 17:1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어머니의 말씀이 감동적이면서 애잔하네요 ㅜㅜ
13살 어린이 이야기도 그렇고 참 안타깝네요. 다 행복하자고 하는 건데...

이 책 완전 제 스타일인듯 합니다~!!

mini74 2021-11-04 17:15   좋아요 5 | URL
새파랑님깨 추천 ! 원래 울 엄마 개그담당이신데 가끔 그러세요 ㅎㅎ

오늘도 맑음 2021-11-04 17: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2분 남짓 남은 찰나에 글을 남깁니다.
문에 대한 표현이 정말 멋집니다ㅠㅠ
늘 느끼는 감정이지만, 미니님의 글은 참 따뜻하고, 깊습니다. 쓰는 이의 마음이 글로 이어져 그런것이겠지요~ 미니님도 분명 아이들의 멋진 어머니시겠지요.......^^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헤어짐 없이 건강하셨음 좋겠습니다.

mini74 2021-11-04 17:20   좋아요 5 | URL
뭉클하네요 ㅠㅠ 맑음님 댓글이 더 따뜻한데요. 고맙습니다 맑음님. 퇴근길 꼭 안전 편안하게 가셔서 딸기랑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 저녁도 맛나게 드세요 *^^*

scott 2021-11-04 17: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헝가리 작가의 작품 보다
가족을 위해 불공을 드리는 막내딸에게 건강하라는 부모의 마음이 담긴 팔찌
8000원이라는 가격은 엉겁의 세월을 지나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 그 이상인 것 같습니다

뭉클한 미니님의 글,
맑음님 말씀처럼 세상의 모든 어머님들 건강하게,,
자식 사랑만큼 미니님 건강도 잘 챙기세요 ^^


mini74 2021-11-04 17:38   좋아요 4 | URL
고맙습니다 스콧님 ~ 스콧님도 건강 잘 챙기세요 *^^*

청아 2021-11-04 18:1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못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저를 위해 했던 셀 수 없는 것들,포기했던 것들이 다 그 말인걸 깨닫고 슬프고 고맙더라구요. 마음을 문에 비유한다는 대목이 유독 와닿아요~♡ 미니님 굿밤되세요!

mini74 2021-11-04 18:16   좋아요 4 | URL
온 마음과 행동으로 보여주신거 같아요. 미미님 말씀에 공감*^^* 미미님도 행복한 저녁 보내세요 *^^*

페넬로페 2021-11-04 18:3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문에 대한 의미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내 앞에, 또는 나의 가족앞에 있는 문 안엔 어떤 것이 있는지도 관심 가져야겠어요~~
우리 어머니들의 문 안엔 죄다 자식들만 들어 있는것 같아요^^

mini74 2021-11-04 18:35   좋아요 5 | URL
정말 그런거 같아요. 엄마에겐 자식들이 전부, 거기다 영원한 애기같은 존재 ㅎㅎ *^^*

coolcat329 2021-11-04 19: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에메렌츠...참 잊을 수 없는 주인공입니다.
처음 읽은 헝가리 소설이었던거 같은데 참 인상깊었어요.

mini74 2021-11-04 19:37   좋아요 3 | URL
정말 독특하고 인상 깊었어요. 볼수록 알수록 매력있는 인물 *^^*

Falstaff 2021-11-04 20: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책으로 향하는 추억 소환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정말 공감하면서 읽은 작품이예요. 대단하고 아름다운 고집. ^^;;

mini74 2021-11-04 20:02   좋아요 4 | URL
공감합니다. 여러 번 읽고 싶은 책이에요.~~

오거서 2021-11-04 20: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극단적 선택을 하였다는 아이의 부모는 장수 팔찌를 사주지 않았을 것 같아요. 아이의 문제라기보다 부모의 문제라고 봅니다.
미니님은 엄마가 사준 팔찌 덕에 무병장수 하시리라 믿어요 ^^;

mini74 2021-11-04 20:07   좋아요 3 | URL
대전에서 공부 엄청 시키는 걸로 유명한 학원이라 ㅠㅠ 안타깝지요. 오거서님 편한 저녁 보내세요.

서니데이 2021-11-04 22: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성적이 뭐라고요.
다 잘 살자고 하는 건데요.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런 소식 들으면 마음아프네요.
mini74님, 좋은 밤 되세요.

mini74 2021-11-04 22:05   좋아요 1 | URL
저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그레이스 2021-11-04 22: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3살, 상상이 안가네요.ㅠ

mini74 2021-11-04 22:36   좋아요 1 | URL
너무 어리고 너무 예쁜 나이죠.

바람돌이 2021-11-05 01: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mini74님의 마지막 문장 문을 열고 들어가 같이 차를 마시고, 숨겨둔 이야기들을 공유하는 이가, 문 안에서 죽어갈 때 문밖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할 수 있을까. 이말에 훅 끌리네요. 이 책을 봐야 할거 같아요. 오늘도 제게 또 한권의 책이 왔습니다. ^^

라로 2021-11-06 15: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일기에서 보고 패스했는데 미니님 리뷰 읽고 급 읽고 싶어졌어요!!!

singri 2022-02-10 21: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제 고수가 흑흑거리면서 엄마도 아니고 어머니 감사합니다 하던거 생각나네요. 전 어머니라고 말해본적이 없어서 어색했는데 감사하단이야기도 해본적이 없긴 마찬가지에요. 엄마는 늘 옆에서 뭐 모자른게 없나 챙기기 바쁜데 (절팔찌포함)
자주 가보지도 못하고 그렇네요.
그런 엄마생각도 나고 13살 아이도 생각나고 11살되는 딸래미한테 좀전에도 공부좀하자하고 말한것도 생각나는 글입니다. 문이 마음에 딱 떨어지는 표현들과 20살 차이나는 두사람은 또 어떤관계일지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