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아이들이 보는 세상은 흑백이라고 한다. 온통 흑백의 세상 속에서 어느 순간, 엄마가 달아놓은 색색의 고운 모빌을 느낀다면, 아기의 마음은 어땠을까. 태어났길 잘했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색들로 가득하구나 이런 할머니스런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
사각, 사각, 쓱 쓰윽......
손재주 좋으신 아버지가 가지런히 깎아 놓은 연필 서너 자루를 필통에 넣는 일이, 어린 시절 아침의 시작이었다. 길쭉하고 맞춤하게 잘 깎여진 연필들의 앞과는 달리, 연필을 씹는 버릇이 있었던(무지 혼났다) 뒤쪽은 자그만 이빨자국에 꾹꾹 눌려 있었다.
수업시간 졸음이 오면, 열심히 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리고 네모를 그렸던 기억이 난다. 그 틀을 가득 채우고 나면, 내 손은 새끼손가락을 따라 쭈욱 맨들맨들하게 검은 물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젠 교과서 글자들의 이응 부분을 채우기도 하고, 바둑이에게 검은 리본을, 혹은 영희에게 짓궂게도 수염을 그리기도 했다. 갓 태어났던 그 순간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본 것이 뿌연 흑백이었다면, 내 낙서의 시작엔 검은 색 연필이 있다. 그래서일까. 연필심 느낌의 검은 색이 좋다. 완전히 새까맣지도 않지만, 거무스름하게 빛을 내는 듯 반들거리면서 금방이라도 지우개든 내 손가락이든 어딘가에 물들어 버릴 것 같은 검은 색.
책을 읽을 때 다들 습관 하나쯤은 갖고 있지 않을까.
나는 등장인물에 색칠을 하는 버릇이 있는데, 이게 재독할 때 문제가 된다. 왜 이 사람에겐 노란색을 칠했지? 혹시 신경질적 인걸까 아님 못 말리는 몽상가인걸까.
이렇듯 색은 원하지 않음에도 제멋대로 의미를 부여한다. 성별과 취향과 성격까지, 고정관념은 덤이다.
검은색은 어떨까?
타인과 죽은 이들의 눈에서 숨고자 했던 색이다. 가시광선을 모두 흡수해 버리는 검은색은, 정말 모든 색들을 품고 숨겨버리는 지도 모른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 모든 색을 품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검은색은 여러 모습을 가지고 있다. 숨기는 듯, 정숙한 듯, 그러나 도발적인 듯, 그 모든 것들의 교집합 같은 색, 태어나 만나는 색, 내 낙서의 시작에 있는 색.
이 책은 그런 검정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림으로 풀어낸다. 사실 검정의 역사와 재료와 의미 등에 대해서는 미흡한 책이다. 그렇지만 검은색으로 가득 찬 그림들만으로도 나는 설레고 좋다. 교과서에서 이응을 찾아서 까맣게 칠하던 그 때로 돌아간 듯, 더욱 고급스럽고 다채로워진 검정 앞에서 황홀해진다.
그러고 보면 검정은 밤을 의미하기도 한다. 밤의 여신 닉스는 암흑의 신 에레보스와 결혼한다. 검은 장막을 드리운 채 신혼을 보내지 않았을까.
인류가 처음으로 발견한 색들 중에 검정도 있지 않을까. 불을 사용하면서 타버린 숯이나 목탄에서 검정을 발견해 내곤, 원시인들은 소중하게 침이나 소변 등을 섞어 동굴에 신성한 그림들을 그렸을 것이다.
검정으로 신성한 빛을 말하는 조르주 라 투르, 값비싼 검은 옷을 입을 여인을 그린 렘브란트, 전쟁과 내면의 고통과 고독을 검정으로 그려낸 고야 등 많은 작가들의 그림이 소개되고 있다.
또한 실제로 가시광선을 백프로 흡수하는 완벽한 검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최근에 2019년 블래키스트 블랙이라고 해서 메사추세츠 공대에서 빛 흡수율이 99.995%인 검정을 발명했다고 한다. 빛을 비추어도 흔적이 거의 남지 않는 검정.
기억에 남는 그림은 쇠라의 <쿠르브부아: 달빛 아래 공장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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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묘법으로 유명한 쇠라의 조금 낯선 그림, 콩테 한 자루로 가득 채운 그림이다. 동양화의 기법에는 (홍운탁월)이라는 것이 있다. 구름을 퍼뜨려서 달을 이끌어 낸다, 즉 달을 그리지 않고 달을 그린다는 것이다. 쇠라의 그림에도 그런 달이 떠 있다. 그리지 않음으로 존재하는 달이다. 그런 달빛조차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어둠속에 공장들이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 죽음의 안개인걸까. 공장들이 낮동안 뿜어대던 어둠으로 고통받던 이들이, 이제 진짜 어둠 아래 달빛을 받으며 잠들어 있다. 어둠이 걷히고 아침이 온들, 그 햇살이 이 곳까지 올 수 있을까.
그리고 너무나 꼿꼿하고 꼬장꼬장해 보이는 미국의 국민엄마지만 실제 제목은 <회색과 검정의 배열> 휘슬러가 본인의 어머니를 그린 그림이다. 휘슬러 또한 청교도적인 어머니를 굉장히 무서워했다고 하는데, 꼭 다문 입매가 예사롭지 않다. 이 그림은 미스터 빈이란 영화에서 고통을 당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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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말레비치의 <검은 십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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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말레비치는 <검은 사각형>이 사실 먼저다.
대상에서 형태를 해방시킨 피카소나 대상에서 색채를 해방시켰다는 마티스, 그렇지만 그들은 재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말레비치는 제재와 대상에서의 해방을 위해 회화는 절대적 창조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결국 도달한 것이 정사각형이라고 한다. 그는 러시아의 성상이 걸려야 할 자리에, 자신의 검은 사각형을 걸어놓았다. 너무 어렵다. 정리를 해 봐도 알 듯 말 듯 하다.
표지에도 쓰인 존 싱어 사전트의 <마담 X- 피에르 고트로 부인>
처음 이 그림에선 한 쪽 어깨끈이 살짝 내려왔으나, 너무나 외설스럽다는 비난에 오른쪽 어깨끈을 올리는 걸로 수정했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그녀가 귀스타브 쿠르투아에게 의뢰한 초상화도 어개끈 한 쪽이 내려와 있는데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 순백의 흰 드레스이니 어깨끈 하나 정도는 내려와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검정이 주인공인 듯한 다양한 그림들이 소개되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그림이 하나 있다. 여기엔 소개되지 않았지만.
바로 마크 알렉산더의 <검은 가셰박사의 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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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721/pimg_7675121143031669.png)
원래 <의사 가셰의 초상>은 고흐가 그린 그림이다. 고흐의 말년을 함께 해 준 의사를 그린 그림이며, 90년대에 8,240만달러에 일본의 료에이 사이토란 기업가에게 팔려 세상을 놀라게 한 그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더 놀랄 일은, 사이토란 사람이 자신이 죽으면 이 그림을 같이 화장해 달라고 한 것. 실제로 사이토는 1996년에 사망했고, 그림의 행방은 묘연하다. 우린 그렇게 명작 하나를 잃었다. 위안이 되고 많은 이들에게 기쁨을 준 그림이 타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상실감이 검은 색으로 덮이어진 가셰박사의 초상에 가득하다. 가셰박사앞에 그려진 꽃은 폭스글로브, 심장병치료약으로 쓰였지만, 잘못 쓰면 독이 된다고 한다. 고흐의 그림은 치유와 위안이 되었지만, 결국 그 그림은 새카맣게 타버렸고, 당혹스런 상실감으로 독이 된 지금과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존재하던 색들이, 누군가에 의해 구분되어지고 이름 붙여지고,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수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는 것.
그저 색일뿐인데, 마음에 따라 다르게 다가온다는 것.
사람들의 사정에 따라 오늘은 좋은 색이었다가 내일은 외면당하는 색이 되는 것.
그래서 색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