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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4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5년 1월
평점 :
렘브란트의 그림이, 세상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음악이 등장하는 몇몇 단편을 보면서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 들었다. 단편소설집이라고 알고 있는데 뭐지 이런 전개는? '열네 편의 단편들은 각각 독립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동시에 세밀한 문학적인 장치들을 통해 서로 연결되어 또 다른 서사를 형성한다.' 는 뒷 표지의 글을 읽으면서 뜬금없는 생각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중에는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들조차 제목에서 오는 '겨울'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같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잔혹함, 전쟁으로 인한 가족간의 비극에서는 눈을 돌리고 싶었다. 어떤 희망도 없는 절망. 하지만, <손안의 희망>이라는 단편에서는 굳이 희망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신체적 자유가 보장되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으로는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주인공을 보면서 조금은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어느 장소에 있느냐보다 누군가랑 연결되어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기억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유언장>에 등장하는 남자의 인생은 가여웠다. 모든 공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복병이 버티고 있었으니......세상에는 모르는게 약인 경우도 있는데말이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자들 앞에 펼쳐진 미래 또한 매우 끔찍할 수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받아들여야 했으니까.-p42
<고트프리트 하인리히의 꿈>에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본능이 신의보다 앞섬으로써 묻혀지는 진실들이 얼마나 많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어쩔 수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뭐랄까? 예술의 힘에 대해서 느낄 수 있는 지점들이 많았다. 인간의 사심이 가득히 들어차 예술의 본질을 흐리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그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책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와닿는 부분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엄마의 기억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보고 있어서인지 기억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나를 보게 된다.
... 그리고 네게는 너의 기원을 상기시켜 주는 작품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기억의 상실보다 더 고통스러운 죽음은 없으니까.
-p110
졸탄은 그녀가 그 약속을 기억하지 못해 그곳에 나타나지 않을 경우가 가장 두렵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망각이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p 264
기억을 잃어가는 사람, 기억을 잃어가는 사랑하는 이를 지켜보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불행할까? 시간이 흐른 후에야만 알 수 있는 선택을 매 순간 하면서 살아야하는 인간의 삶이 왠지 서글프게도 느껴지는 문장도 있었다.
"좋아. 하지만 누구랑 결혼하는 것 자체로 네가 실수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는 없어."
"그렇지. 누구나 시간이 지나봐야 우리의 선택이 실수인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p 261 ~262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단편들도 있었는데, 그 작품들은 다시 읽어봐야할 것같다. 자우메 카브레는 정말 생소한 작가였다. 친구를 통해서 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데, 도서관 신간 코너에 있어서 너무나도 반가웠다. 조금은 특이한 서술 방식도 있었고, 쉬웠다고만은 할 수는 없었지만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된 것은 큰 수확이었다. 미술, 음악,신화, 문학등을 잘 버무려 놓은 잘 차린 한 상 이었다. 이젠 낯선 이름이 아니라 나에게 좋은 기억을 남긴 자우메 카브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