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연옥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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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Divina Commedia : Purgatorio

 

연옥을 믿지 않지만 연옥편은 신곡의 세 편(지옥, 연옥, 천국) 중에서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 부분이다.

 

연옥에 이른 베르길리우스와 단테는 지체하지 않고 산을 오른다. 카토는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호통을 치며 서둘러 오르라고 재촉한다. 달아나듯 서둘러 올라간 것과는 달리 길은 험하고 몸도 무거워 속도가 나지 않는다. 연옥의 아래쪽은 길이 비좁고 험하고 위로 올라갈수록 평탄해진다. 이 산을 오르는 영혼은 엄청난 무게 때문에 발걸음이 힘들다. 연옥은 7개의 죄의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음란으로, 영혼들은 오르며 그의 죄를 씻는다.(영화 세븐을 떠올렸다.) 각 단계마다 단테의 이마에서 P라는 글자가 한 개씩 떨어지며 몸이 가벼워진다. P는 라티어의 죄(Piccati)의 첫 글자이다.

 

그러자 그분은 나에게 이 산은,

아래의 시작 부분은 아주 험하지만

위로 오를수록 덜 험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위로 오르기가 한결 가벼워져

마치 물결을 따라 배를 타고 가듯이

이 산이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질 때면,

너는 이 길의 끝에 도달할 것이고

그곳에 고달픔의 휴식이 기다리니,

더 말하지 않겠지만 그것은 사실이다.

(연옥488~96)

 

어딘가 현세의 삶을 닮았다가벼워지고 기분 좋아 질 때, 그 길의 끝에 다다른다는 것이. 그들은 영원히 한 장소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지옥의 영혼들과 달리 이동하고 있고 상승하고 있다. C. S. Lewis의 환타지 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도 이런 장면들이 연출된다. 세상의 마지막에 사람들은 천국을 향해 걸어간다. 같은 길을 걸어도 세상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더 험하게 느껴지고 발걸음도 무겁다. 그래서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연옥의 영혼들에게는 육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고, 현세에서의 마음과 삶의 경향을 그대로 갖고 있다. 그 경향은 잡아당기는 듯 영혼들의 발걸음을 무겁게 한다. 그것들로부터 가벼워지기 위해 산을 오르며 씻어내야 한다. 현재의 삶은 사후세계의 예표이다. 마찬가지로 연옥은 현세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런 예표적 리얼리즘(피구라 리얼리즘)으로 그려진 연옥은 현재의 내가 살아가는 삶의 결과로서 평행하는 세계처럼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의 삶은 그곳의 어떤 모습을 가리키고 있을까? 그 연속성에 두려운 현기증을 느낀다.


단테는 저승을 여행하면서, “영혼들의 궁극적 운명을 표시하는 저승의 각 단계에서 그가 예전에 친히 알았던 혹은 그 생애에 대해서 들어 알았던 사람들의 영혼을 만난다. 그들이 살아있는 사람(단테)를 만났을 때 자신의 은밀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곡에 대해서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 상황을 잘 생각해보면, 그 만남이 환기하는 정서를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그 만남이 가장 진실하고, 가장 강력하며, 가장 인간적인 표현의 자연스러운 장이 되겠구나 하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만남은 이승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승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우연하게 만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들의 삶의 본질이 부분적으로만 표출된다. 또 활기차게 살아가는 일상생활의 강렬한 속도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는 것이 어렵고 그래서 인간 대 인간의 진정한 만남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또 단테와 영혼들의 만남은 죽음의 그림자에 의해 개인들의 개성이 말살되어 버린 그런 저승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 저승은 이승에 대한 기억이 희미한 베일에 가려진 기억 혹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런 곳이 아니다.”

(271p 단테에리히 아우어바흐)


기억이 현세의 생활로부터 어떤 이미지를 불러일으키든 간에 그것은 본질을 드러내 주는 포괄적이면서 결정적인 이미지이다. 심지어 자신의 내밀한 존재를 감추고 싶어하는 영혼들도 살아 있는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본심을 털어놓게 된다. 그들이 찾아내는 표현을 아주 날카로우면서도 아주 개인적인 표현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 자신과 지상 생활의 의미를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저승의 궁극적 리얼리티 속에서 그들은 아무런 모순도 없이 자신의 개성과 일치하는 존재가 된다.”

(289p 단테에리히 아우어바흐)


그러므로 이승의 삶을 감출 수도 감출 필요가 없는 것이다.

 

등 뒤에서 붉게 타오르는 태양은

내 모습 앞에서 부서졌는데, 나로

인해 햇살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에서만 땅이 그늘진 것을

보았을 때, 혼자만 남은 것이 아닌가

두려워서 깜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고,”

(316~21)

연옥의 영혼들은 빛이 투과하는데, 살아있는 단테에 햇볕이 부딪쳐서 부서지고 그림자가 지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자신의 그림자만 보고 홀로 있는 줄 알고 옆을 돌아보았다가 함께 동행하는 베르길리우스를 발견하고 놀란다. 연옥산을 올라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영혼들과 풍경을 그리는 단테의 묘사들은 탁월하다.

 

그리워하던 베아트리체의 눈을 바라보는 단테는 그녀의 눈에 비친 그리피스의 형상에 놀란다.

불꽃보다 뜨거운 수천 가지 욕망이

나의 눈을 빛나는 그 눈에 묶었는데,

그녀의 눈은 그리프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거울 속에 비치듯 그녀의

눈 속에서는 이중적인 동물이 빛났는데,

때로는 이런 모양 때로는 저런 모양이었다.”


단테는 돈호법으로 독자를 부르며 경이로운 광경에 초대한다.

독자여, 생각해 보시라, 사물 그 자체는

그대로 가만히 있는데, 반사된 모습이

변하는 것을 복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31124~126)

환타지 소설 같은 환상적인 장면이다. 그의 상상력에 감탄하게 된다.

 

연옥편에서 단테는 7가지 죄악과 병행시킨 성경과 신화, 역사, 신학, 과학, 예술 등을 추가하며 상상력의 베틀로 씨실 날실을 엮어간다. 사랑, 과학, 역사, 정의, 진리, 신앙, 심리 등의 모든 주제를 포괄하는 단테의 천재적 능력을 읽게 된다.

 

천국 문을 통과한 후 베르길리우스와 이별한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안내를 받아 천국의 하늘들을 오를 것이다.

 

새로운 잎사귀로 새롭게 태어난

나무처럼 순수하게 다시 태어났으니,

별들에게 오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33143~144)


성 조반니 세례당은 단테가 세례를 받았던 곳이다.

당시 피렌체 경제의 중심축을 이루던 협동조합 길드 조직들(Arti) , 가장 막강한 힘을 자랑하던 양모 제조업자 길드와, 이와 쌍벽을 이루던 양모 무역업자 길드 조직 Arte di Calimala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Arte di Calimala1401년 새로운 세례당의 문(북문)을 만들기 위한 콩쿠르를 열겠다고 발표한다. 45x38의 동일한 사이즈, 재료는 청동, 그리고 이삭의 희생이란 성경주제로 샘플 작품을 제출하면 평가해서 1등을 정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토스카나 출신의 뛰어난 예술가 7명이 참가를 했는데 파이널까지 간 두 명의 예술가가 바로 브루넬레스키와 기베르티였다. 23, 24살 비슷한 또래의 혈기 왕성한 예술가들이었다.

……

우열을 가릴 수 없어 고민하던 감독관들은 기베르티의 손을 들어 주었다고 한다.……

1401년 콩쿠르에서 승리한 로렌초 기베르티는 25년 만에 피렌체인들이 고대하던 세례당 문을 완성했다. 엄청난 찬사와 함께 콩쿠르도 필요 없이 나머지 문도 기베르티가 27년 동안 완성하게 된다.……원래 천국으로 가는 문인 동쪽 문은 신약 성경을 담는 것이 정석이다. 사실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구약성서의 내용)은 원래 다른 쪽에 달려야 하는 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문의 아름다운 문을 동쪽 천국의 문으로 놓자고 결정했다.”

(20~27p 피렌체 미술산책강화자)

 

피렌체에 갈 기회가 있다면 이 문 앞에서 신곡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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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05-23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성 조반니 세례당 문(복사판) 전시를 파리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막상 피렌체에 가면 구경할 것들 먹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정작 단테의 신곡, 연옥의 문 찾아 다니기 힘드러여 ㅎㅎㅎ

피렌체는 오월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ㅅ^

그레이스 2022-05-23 22:44   좋아요 3 | URL
ㅎㅎ
볼게 많을것 같긴 해요
이런 도시는 한달쯤 살아야하는데...^^

새파랑 2022-05-23 22: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연옥이 뭔지 몰라서 검색해봤습니다 😅 7개의 죄의 단계를 보고 반성하고 있습니다 ㅋ

그레이스 2022-05-24 00:54   좋아요 3 | URL
댓글 달았는데 왜 사라졌을까요?
암튼 저도 반성 많이 했습니다 ㅋ

얄라알라 2022-05-24 1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단테] 겁없이 달려들었다가 뒷걸음질 쳤는데 지금 읽는다고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그레이스님께서는 평행세계, 우주, 시공을 넘나들며 상상하고 흡수하셨네요. 그레이스님의 멋진 리뷰로, [신곡] 맛 보기라도 다시 하고 갑니다.

˝산을 오르며 씻어내야 한다.˝ 이 문장, 오늘 종일 생각 날 것 같아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레이스 2022-05-24 12:33   좋아요 3 | URL
^^
감사합니다.
욕망하고 소유에 매여있는 마음 때문에 무거운 발걸음.
산을 오르며 씻어낼수록 가벼워지죠.

저는 얄라알라님 댓글을 읽으니 산을 오르며 늘어난 체중을 덜어내야한다로 읽히네요. 늘어난 제 몸무게가 요사이 불편하게 느껴지고 있어서 그런지. ..😂

얄라알라 2022-05-24 1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 곧 여름이니 절로 몸이 가쁜, 가벼워지지 않을까 저는 몸도 안 움직이면서 그런 막연 기대를 합니다. 실제, 엊그제 책 읽다가 마음이 힘들어 산을 오르면서 숨 쉬고 읽고 그랬더니 좀 가벼워지더라고요. 지금 이 댓글을 달고 있는 공간에서도 50미터만 가면 바로 산이랍니다! 자외선이 어마무시하지만 않았던들!

그레이스 2022-05-24 12:41   좋아요 3 | URL
50미터!
산속에 사시는 군요 ^^
부럽습니다.
저도 썬크림 두껍게 바르고 도전해야겠어요 ㅋ

mini74 2022-05-25 08: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어릴적 지옥 참 무서웠어요. 할머니가 밥 남기면 나중에 죽어서 다 먹어야 된다. 혀를 쭉 빼서 자른다 등등 완전 고어영화 ㅎㅎ 유럽의 지옥도 만만찮더군요. 지금은 지옥이란 그저 신의 은총이 없는 곳 , 그래이스님 말씀처럼 연옥같은 모습일거란 생각들어요. 기베르티와 브루넬레스키 이야기 재미있어요 *^^*

그레이스 2022-05-26 07:34   좋아요 2 | URL
^^
맞아요 할머니들은 왜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셨는지...??

저는 연옥은 없다!
이승의 삶이 저승과 연속된다는 생각!
가보지 않았으니 죽음 이후는 믿음의 영역이란 생각입니다. 그 근거는 성경!

자크 르 코프의 <연옥의 탄생>은 그 배경을 잘 설명해줄 듯요^^

브루넬레스키가 열받아서 로마로 갔다가 피렌체로 돌아와 피렌체의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당시 피렌체 미술가들 이야기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