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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들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평점 :
슈테판 츠바이크는 이 소설 『가난한 사람들』의 탄생을 드라마틱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동이 환하게 틀 때까지 두 친구는 서로 황홀해 하며 즐겁게 말을 나누었다. 이윽고 네크라소프는 서둘러 러시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비평가인 벨린스키에게 향했다. 그는 깃발처럼 원고를 흔들며 “새로운 고골리가 태어났다”며 문가에서부터 외쳤다. 의심쩍어 하는 벨린스키는 “당신들 집에서는 고골리들이 버섯처럼 쑥쑥 자라는가 보구려” 하며 시큰둥하게 투덜거리며, 지나친 감격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다음날 도스토예프스키가 방문했을 때, 그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대체 당신이 무엇을 만들어 냈는지 아시겠습니까?”하며 벨린스키는 흥분한 목소리로 어리둥절해 하는 젊은 도스토옙스키에게 외쳤다. 이 새롭고 갑작스런 명성 앞에서 심지어 공포와 달콤한 전율이 그를 엄습해 오기도 하였다.”
(32~33p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1844년 24세의 도스토옙스키가 쓴 인간연구서, 「눈물이 흐를 정도의 열정의 화염으로」 라는 가제를 달고 있었던 이 소설은 그의 가난이 낳았고, 이후에도 그는 마치 자신의 소설의 주인공인 듯 가난과 병, 상실에 시달리며 살아갔다. 이 작품은 주인공 마까르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도브로셀로바(바렌까)의 편지글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편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들의 삶과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읽게 된다.
제부쉬낀은 『외투』의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를 떠올리게 한다. 가난한 하급관리, 필경사, 볼품없는 외모, 독신은 아까끼를 닮았다. 마까르 살고 있는 주거환경은 『목로주점』의 아파트를, 그가 살고 있는 하숙집 부엌 한쪽에 칸막이를 세워 만든 방은 브뤼 영감이 지내던 계단 밑 골방을 연상케 한다. 그가 이런 곳에 머무르게 된 것은 자신의 소유를 하나 둘씩 팔아 바롄카의 필요를 채워주었기 때문이다. 그의 바렌까를 향한 감정을 무엇이었을까? 두 번째 편지에서 그는 “늙은 나이에 사랑의 감정에 빠져 횡설수설”(20p) 했다고 후회하다가 다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은 “순수한 부성애”(21p)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그의 진심은 사랑이지만 많은 나이 차이와 사람들의 시선, 관습 등에 둘러싸여 자신의 감정에 한계를 두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기에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꼬프와 결혼하는 바롄까를 만류하지 못한다.
『책에 따라 살기』에서 작가 김수환은 “이 소설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 중 하나는 그의 문체가 작품의 말미에 이를수록 현저히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라고 한다. 그는 떠나는 바르바라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서 “이 편지가 마지막이라니오, 절대로 그럴 수는 없습니다. …… 이제 제게도 좋은 문장력이 생겨나고 있는데…….”라고 탄원하고 있다.(219p) 실제로 그의 편지를 읽어가면서 처음의 거칠고 직설적인 표현이 비유나 상징의 아름다운 언어들로 채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문체가 좋아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고 한 후, 그가 써내려간 문장들은 비애감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가끔 저는 아침 일찍 관청에 서둘러 가다가 넋 놓고 도시를 바라보는 경우가 있어요. 잠에서 깨어 일어나는 모습, 연기를 피워 올리며 무엇인가 끓이는 모습, 왁자지껄하게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모습 등을요. 가끔 그런 모습을 재미있게 보다가 저는 난데없이 코라도 한 방 얻어맞은 사람처럼 풀이 싹 죽어 버립니다. 그리고 조용하고 겸손하게 가던 길을 재촉하며 손을 내젓고 말죠.”(175p)
도시 빈민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도시 속에서 느낄 법한 감정을 하나의 풍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의 문장이 좋아진 이유는 책을 읽고 계속 해서 써왔기 때문이다. 바르바라가 첫사랑 뽀끄로프스끼의 영향으로 책을 읽게 된 것처럼 제부쉬낀은 문학모임에서 만난 사람들과 바르바라가 권해 주는 책들을 통해 독서 경험을 넓혀간다. 바르바라가 노트에 쓴 뽀끄로프스끼에 대한 기억은 한 편의 뛰어난 소설이다. 액자소설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처음에 보였던 마까르와 바르바라의 글쓰기와 독서에서의 간격은 차츰 좁혀지고 있다. 마까르는
“그리고 제가 당신의 책을 좋아하게 된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이런 겁니다. 어떤 작품이든 가끔 다른 책들은 아무리 읽어도, 아무리 애를 써도 마치 그 책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쓴 것처럼 아주 묘한 책들이 있습니다. 저로 말하면, 저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어요. 따라서 저는 너무 수준 높은 작품들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주신 작품은 마치 제가 쓴 것처럼 정말 제 생각을 그대로 옮겨다 놓은 것 같더군요. 제 마음을 있는 그대로 사람들 앞에서 뒤집어 보인 것 같았다니까요! 그 정도로 자세하게 씌어 있었습니다! 정말 그랬어요!” (109p)
라고 고백한다.
그런 그도 바르바라가 빌려준 고골의 외투를 읽고는 몹시 불쾌한 감정을 담은 답장을 보낸다. 바렌까에게 서운해하고 이 책의 내용을 비판한다.
“도대체 당신은 어떻게 이런 책을 저에게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나요? 바렌까, 이건 몹쓸 책이에요. 진실성이 결여된 책이라고요.”(119p)
그는 왜 이런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아까끼의 처지와 비참한 가난과 굴종적인 태도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가 각하라 부르는 상관에게 불려가 파랗게 질려있는 모습은 아까끼의 태도와 유사하다. “마치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내 이야기가 자세하게 씌어 있는 책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살면서 그것을 모르고 지나치는 일이 가끔 있었다는 것”(109p), 이전에는 전혀 모르고 지나쳤던 일들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생각나게 되고, 기억이 되살아나고, 내막을 알게”(109p)되어서 그녀의 책을 좋아한다고 하던 그도 『외투』는 피하고 싶은 내용이었다. 아까끼의 불행한 죽음 또한 그에게 불안을 안겨주는 내용이었을 것이다. “책의 끝부분에서라도 상황이 호전되고 분위기가 좀 누그러졌다면 좋았을 텐데” 라고 분노한다.
그러나 아까끼는 자신이 머무는 방과 직장의 책상, 돈을 모아서 맞춰 입은 외투에 갇혀있는 인간이다. 반면 제부쉬낀은 타인을 향한 연민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천성, 신앙, 전통적인 윤리…, 그 중 어느 것에서 비롯되었든 그는 당장 자신이 굶더라도 더 비참한 사람을 위해 적은 소유를 내놓는다. 이런 태도는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그 가치가 실체화되고 사유로 자리 잡는 것을 볼 수 있다. 어쨌든 바르바라의 책은 그에게 변화를 일으켰고, 같은 처지의 아까끼와는 다른 방향으로 삶을 이끌었다는게 나의 생각이다.
“바렌까. 저의 이런 생각은 어쩌면 정도를 넘어 버린 자유사상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이여, 가끔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어쩝니까? 그런 생각이 들면 저도 모르게 가슴속에서 뜨거운 말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 어쩌죠. 따라서 도시의 소음과 굉음에 기가 죽어서 스스로를 가치 없는 사람으로 여길 필요는 없는 겁니다.”(177p)
바르바라의 노트에서 뽀끄로프스끼의 아버지가 죽은 아들의 관을 울부짖으며 쫒아가는 모습, 아들에게 선물했던 푸쉬킨의 책들이 그의 주머니에서 비어져 나와 비바람이 부는 거리 진흙탕 속에 떨어지는 장면은 처절했다. 제부쉬킨의 마지막 편지에서 떠나는 바르바라에게 계속 편지를 쓰겠다고, 문장이 좋아지고 있는데 그녀가 떠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는 비탄은 그 장례식 장면과 연결되며 상실의 아픔을 극적으로 그리고 있다. 뽀끄로프스끼의 죽음으로 그가 아끼던 책이 의미 없어지듯이, 제부쉬낀의 문장력 또한 읽어줄 그녀가 없이 소용없는 것이다. 스스로도 자신을 싫어했던 “그의 마음과 영혼에 밝은 빛이 들게”(162p) 해주고, “자신이 가슴도 있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162p) 해준 그녀를 상실함은 존재의미를 잃는 것과 같다.
그러나 제부쉬낀은 계속 쓰겠다고 말했고, 계속 쓰리라 생각된다. 바르바라를 사랑한 기억 안에 갇혀 살더라도, 문학은 그에게 위로가 되고, 아픔은 글이 될 것이다. 어쩌면 계속 쓰겠다는 이 절규는 도스토옙스키의 외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세상사에 어둡고, 현실에 열정적이기에 현실성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들은 이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츠바이크는 그들 “개개의 불확실성은 민족의 불확실성을 뜻한다”고 한다. 19세기 “도스토옙스키의 인물 개개인의 비극과 분열, 장애가 러시아 민족 전체의 운명에서 나온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통이라는 뿌리를 상실한 도스토옙스키의 작중 인물들은 순수 러시아 혈통의 과도기적 인간들로서, 가슴에는 새로운 시대의 카오스를 안은 채 각종 장애와 불확실성에 시달렸다. ……그들 모두가 과도기의 인간, 새로운 시작의 인간들이었다.”(95p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제부쉬낀 역시 제정러시아 관료주의 사회와 전통의 정신의 지배를 받고 있으면서, 책을 통해 자유주의적이 사상을 키워나가는 지식인들의 대열에 막 들어서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앞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쓰게 될 작품 속 인물들은 이런 혼란과 불안감을 통과하며 어떤 인간형을 보여줄지 전망해본다. 그리고 저 멀리에 있는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지나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드미트리와 이반과 알렉세이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