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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분 지나고까지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10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평점 :
작가는 죽음을 경험하고, 이전과는 다른 삶에 대한 태도로 글을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주인공 게이타로는 화자들로부터 이야기를 듣는다. “그의 역할은 수화기를 귀에 대고 ‘세상’을 듣는 일종의 탐방에 지나지 않았다”(344p) 이제 대학을 졸업한 게이타로가 세상을 처음으로 경험하는 방식이다. 청취자의 역할로 그들의 인생을 관조하고 있다.
모리모토, 다구치, 마쓰모토, 지요코, 스나가의 이야기를 들었다. 모리모토로 시작해서 마쓰모토로 끝나는 긴 이야기의 중심에 스나가가 있고, 그의 태생과 내향적 성품, 외로움이 자리 잡고 있다. 사실상 주인공은 스나가라고 할 수 있다. 게이타로는 타인의 이야기를 대충대충 듣고 다녔을 뿐이고 그는 단지 일자리를 얻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청취자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옮긴 것은 ‘에크리튀르(Écriture)의 영도(零度)’, 욕망과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글쓰기’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의 자아를 여러 인물들에 투영시키고, 그 인물들의 삶에 자신의 경험을 넣어 번뇌와 마음의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면서 자아를 탐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자아에 대한 ‘순수한 에크리튀르’를 시도하고 있는 것일까? 하지만 글의 곳곳에서 묻어나는 쓸쓸함의 정서는 바르트가 추구했지만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증거를 보여주고 있다. 게이타로는 거의 성공했으나 나쓰메 소세키는 실패했다. 이 작품에서 본 역설이다.
일자리를 얻으려고 친구 스나가의 소개로 그의 이모부 다구치를 찾아가고, 일을 얻는다. 그 일 이란 다른 사람의 뒤를 밟는 것, 그 사람은 다구치의 매제 마쓰모토이다. 이 다구치의 장난과 같은 지시를 통해 ‘고등유민’ 마쓰모토를 알게 된다. 그의 조카 다구치의 딸 지요코에게서는 마쓰모토의 아픔을 듣게 된다. 부유하고, 여행을 하고 즐기며 사는 학식이 풍부한 사람 뒤에 고통스런 기억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쾌감을 느낀다. 인간적인 모습을 보고 느낀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지요코와 스나가의 관계를 흥미롭게 보던 게이타로는 두 사람이 어렸을 적, 부모들에 의해 정혼한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스나가로부터 지요코에게 소극적인 이유를 듣게 된다. 정해진 관계라는 것이 부담스러웠고 이모의 딸일 뿐 전혀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앞에 나타난 다카기로 인해 질투를 느끼고 묘한 감정을 드러낸다. 외부로부터 자극받은 욕망이다. 그는 이 삼각관계 밖으로 도망친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들여다보고 의아해 한다.
“질투심만 있고 경쟁심을 갖지 못한 내게도 그에 상응하는 자만심은 이따금 음침하고 어두운 가슴 어딘가에서 어른어른 피어올랐던 것이다.”(279p)
그는 자신의 모순을 충분히 연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지요코에 대한 자만심이라니……. 거침없고 자유로운 지요코에게 우월감을 가지고 있는 그가 자신의 마음을 지키려고 경쟁을 피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그녀에게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은 정말 그녀에게 끌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다카기의 등장에 질투를 느낀다. 그 질투가 다카기 때문인지 지요코를 정말 좋아해서인지 모호하다. 자신을 흔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 곳을 떠나 홀로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자만심은 가슴 어딘가에 있는 실체를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뿌리내리고 있다. 그 어딘가에 구체화시키지 못했던 질문, 불안, 외로움이 있었다.
이런 감정들을 호소하기 위해 찾아간 외삼촌 마쓰모토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듣는다. 스나가는 여행을 떠나고, 외삼촌에게 매일 편지를 보내온다. 불안해하는 어머니와 외삼촌을 안심시키기 위해 쓰기 시작한 편지는, 안으로만 향하는 생각을 외부의 풍경으로 돌리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거듭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 노력이다. 그의 편지는 아름다운 풍경과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삶에 관한 행복한 서술로 가득 차 있다. 가볍기도 하고 우습기도 한 일상을 담기도 한다. 이것도 스나가가 시도한 ‘에크리튀르’이다. 그러나 그 뒤에는 쓸쓸한 그림자를 남긴다.
“제가 이렇게 잡다한 일을 신기한 듯이 알리면 외삼촌은 별난 놈이라며 필시 쓴웃음을 짓겠지요. 하지만 이는 여행 덕분에 제가 나아졌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자유로운 공기와 함께 교제하는 일을 처음 배웠습니다. 이런 시시한 이야기를 일일이 쓰는 번거로움을 마다하지 않게 된 것도 결국은 생각하지 않고 보기 때문이 아닐까요? 생각하지 않고 보는 것이 지금의 제게는 가장 편한 것 같습니다. 짧은 여행으로 제 신경이나 버릇이 고쳐졌다면 그 방법이 너무 천박해서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보다 열 배나 천박하게 어머니가 저를 낳아주었기를 간절히 바라 마지않습니다.……” (343p)
얼마나 쓸쓸한가 하고 생각했다. 계속해서 보내오는 편지는 마음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이 한 줄을 읽는 순간, 모든 글은 다 사라진다. 앞글의 심상이 바뀌어 읽히게 된다.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고 있는 고통과 외로움을 보게 된다.
마음이란 때로 가볍고 천박해보이기도 하고, 주체할 수 없이 무겁기도 하다. 상념이 가득한 마음에 돌을 던져 파문이 일면 저 깊은 심연으로 가라앉았던 존재의 불안과 두려움, 고독, 공포와 같은 것들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그 돌이 타인의 말이 될지, 열등의식을 느끼게 되는 사람의 출현이 될지, 상실이 될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 거대한 괴물이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놀라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슬픔에 압사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전의 내가 아닌 다른 나로 여행을 떠난다. 제자리로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그 여행지에서 편지를 보낼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가 자신 안으로 끝없이 파고 들지 않도록. 그리고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자신의 마음을 빼앗는 훌륭한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이나 자상한 사람을 찾아”(312p)내기를 바란다.
소세키가 이 작품에서 마음과 자아를 멀찌감치 떨어져 관조했다면, 『행인』에서는 거리가 더 가까워진다. 그 탐사는 『마음』에서 더 깊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