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451 환상문학전집 12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박상준 옮김 / 황금가지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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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리노이 주 워케건 출신의 작가인 레이 브래드버리는 전세계 에 두터운 SF팬층을 거느리고 있습니다. 특히 연작 소설인 ‘화성 연대기 (The Martian Chronicles)’와 더불어 화씨 451 (Fahrenheit 451) 역시 미국 내에서 높은 판매고와 더불어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특히, 그는 대학 진학과 같은 정규 교육을 받지 않고, 오로지 도서관에서 읽고 쓰기를 반복하며 ‘자신 스스로를 교육’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이런 브래드버리의 간략한 일대기를 읽는 도중에 문득 해리 트루먼 전 미국 대통령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우선 개인적으로는 고전을 막론하고 소설 리뷰를 쓰는게 정말 오랜만이기도 한데요. 가장 최근이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장편이었으니, 조금 오래되기도 한 것 같습니다. 브래드버리의 이 화씨 451을 읽게 된 연유에는 지금 거의 다 읽어가는 줄리언 바지니의 ‘자유의지’에서 인용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더욱이 책을 불태우는 방화사들이 나온다는 문구에 조금 혹하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꽤 여운이 남는 뒷 느낌과 함께 이 책을 일독할 수 있었습니다. 이 책은 원제, ‘Fharenheit 451’로 지난 195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여러 출판사 판본을 거쳐 2009년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제가 구입한 책은 벌써 16쇄를 찍은 판본이었는데요. 이북으로 구매할까 헌책으로 구매할까 고민하다가 며칠전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중고로 구입을 했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은 브래드버리의 이 소설을 SF 혹은 디스토피아적 사회소설로 받아들이고 계실텐데요. 다만, 개인들의 자유로운 지식의 습득이 터부시되고 금지된다는 측면에서는 사회 저변에 깔린 반지성주의화를 비판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지성인이란 말은 물론 들어도 마땅한 욕이 되었다”라든지, “이따위 책들에 나와있는 사람들은 이미 오래 전에 죽어없어진 작자들이야”, “사람들을 얽어매려고 철학이니 사회학이니 하는 따위의 불안한 물건들을 주면 안돼” 등과 같은 대사들은 매우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에게도 제법 적용될만한 수사라고도 느껴졌습니다. 사실 많은 일반인들 중에 책을 읽지 않는 대다수가 자신들과 다른 독서인들에게 갖는 매우 복잡한 감정을 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우리 시민들 혹은 대중들은 자신의 삶 속에서 각자의 수준과 의도 및 인식에 맞는 무언가를 하기 마련입니다. 다만, 언제부턴가 일부에게는 독서라는게 매우 거리가 있는 것으로 취급되고 기피되는 것은 어찌됐든 사회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을겁니다. 존 듀이는 시민들 스스로 자신을 위한 재교육이 민주주의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각자의 생계를 위한 목적이 먼저 충족되어야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 사회 구조로 계속 첨예화 되고 있어, 이것은 오로지 개인의 노력 만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 점도 분명해 보입니다.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주인공인 가이 몬태그가 방화사라는 직업으로 일종의 책을 불살라내는 일을 하면서 그동안 이행되어왔던 ‘개인들이 지식을 스스로 구하려고 하는 노력에 대해 사회적 봉쇄’에 대해 단편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는 변화의 틈에서 소설의 사건 진행과 나레이션이 시작됩니다. 이런 몬태그의 인식 변화를 불러 일으킨 매개가 된 것은 클라리세 매클런이라는 고등학생 나이의 어린 소녀였는데요. 그렇지만, 2부에서 몬태그가 마땅히 불살라버려야 하는 책들을 아내인 밀드레드 몰래 그 전부터 숨겨왔던 것으로 보아 클라리세와의 우연한 만남은 상황을 급진적인 전개를 불러일으킨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몬태그가 속해 있는 사회가 그리 된 연유에는 1990년 이후 두 번이나 있었던 핵전쟁과 연관이 깊다고 추측되는데요. 시와 소설이 사람을 감상에 빠트려 자살에 이르게 한다는 터무니없어 보이는 서술도 참혹한 전쟁 전후, 사회에 가중되는 압력 등을 고려해 본다면 생존을 위해 국가로 획일되는 사회구조를 수립의 목적으로 일정 부분 지식 말살에 전 국가적인 노력이 시작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부분 기술발전은 이뤄냈는지 벽면을 가득채우는 텔레비전이라든지 과속과 다름없는 쾌속으로 스피드 감을 맛볼 수 있는 자동차의 존재, 로봇개 등 이런 전체적인 상황으로 짐작해 보면 몬태그의 사회는 테크노크라트가 정점으로 대신 시민들에게는 어떠한 재교육과 지식 습득은 거부하는 정부 기조와 그러한 분위기에서 대중들 역시 동조하게 되는 이중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사회적 단면에 의해 개인화 된 인물이 바로 몬태그의 부인인 밀드레드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거의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하지 않으려 하고 생각 자체를 아마도 두려워하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몬태그는 그런 자신의 아내에 대해 “자신의 아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2부에서 등장하는 파버 교수에게 살짝 언급하기도 합니다. “이 캄캄한 동굴 같은 신세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몬태그와는 달리 밀드레드는 아주 적절하게 그런 사회기조에 적응한 인물로 사실 여기에도 적응이라는 말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거의 반 자포자기와 현실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으려는 인물로 그려지는데요. 결혼 생활을 한지 10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이 어디서 처음 만났는지 기억도 못하는 이 부부는 바로 스스로들의 ‘현실의 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인간이 전대의 수많은 인간들이 남긴 이 지식 유산들을 멸절의 대상으로 삼고 더욱이 이것들로 인한 사회가 나약해지거나 혼란스러워진다는 가정 하에 전면적으로 진행된 이러한 인간 개개인의 균질화는 마냥 이 소설을 디스토피아적 허구로 받아들이기에는 뭔가 뒷맛이 좋지 않기도 합니다. 조지 오웰의 1984는 그 자체로 허무맹랑한 일들이기 때문에 얼른 1984년이 왔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는 많은 미국인들이 있었다는 얘기가 전해지듯이 스토리 라인의 전면에 있는 몬태그를 포함한 방화사 부서를 제외하면 많은 이 시대의 많은 평범한 사람들은 그 만의 삶을 인정하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단지 몬태그라는 인물 만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작은 실마리 삼아 손에 쥐고 있었지, 그 반대인 그의 상사 비티 서장이 자신은 충분히 이 세계를 인지할 만한 지식들을 머릿속에 집어 놓고 있었음에도 그것을 현실에서 저항해내려고 하지 않고 몬태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자 했던 점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머리에 지식이 있어도 그것을 행동에 옮길만한 의지가 전무하다면 그 수많은 지식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반증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끝으로 이 몬태그라는 이름은 이 소설 속에서 하나의 단어만으로 등장을 하는데요. 3부에서 쫓기는 몬태그의 이름인 ‘가이’가 처음 삽입되는 것으로 보아 몬태그의 운명과 그의 진정한 이름인 ‘가이’의 드러남은 뭔가 극적으로도 느꼈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또다른 핵전쟁의 불씨 등도 브래드버리가 삶을 살았던 1950년대의 핵전쟁의 공포가 어떠했는지 조금 짐작할 만했습니다. 그 시대에서는 핵무기 만큼 막강하고 공포스런 존재가 없었을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대중들을 책과 지식의 그림자로부터 격리시키기 위해 벌였던 구조화가 꽤 높은 개연성으로 다가오는 이유 때문에 읽는 내내 복잡한 심정이 들기도 했습니다. 제가 쓸데없이 많은 사회과학 서적을 접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브래드버리의 숨겨진 뜻이라고도 여겨지는 “적지 않은 이들은 개개인들의 지식 습득과 책읽기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쉬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제 삶에서의 독서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교육하고 진실을 찾는 일에 매진하시기를 오로지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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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쇄신 - 디지털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법을 제시하다
네이선 가델스.니콜라스 베르그루엔 지음, 이정화 옮김 / 북스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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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거의 주도적으로 기획했다고 봐도 무방한 베르그루엔 연구소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 엔젤레스에 소재한 독립적 민간 싱크 탱크입니다. 전 상원의원인 크레이크 칼훈이 의장으로 있는 이 기구는 ‘월드포스트’ 공동 발행인인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에 의해 설립된 민간 연구 단체인데요. 마찬가지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은 이 책의 공동 저자로 참여했습니다. 참고로 베르그루엔 연구소는 거버넌스 연구를 기반으로 서구에 의해 주도되어 왔던 세계화에 대한 연구를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공동 저자인 네이선 가델스는 UCLA에서 비교정치학을 전공하고 1985년 이후로 쭉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언론인이기도 합니다. 아마도 2014년 ‘월드포스트’의 편집장으로 참여하면서 니콜라스 베르그루엔과의 연줄로 그도 역시 이 베르그루엔 연구소에 참여하게 된 듯 보이는데요. 특히 개인적으로 느끼는 이 책의 의의는 4장의 세계화 통제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는데요. 이것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에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Renovating Democracy : Governing in the Age of Globalization and Digital Capitalism”으로 201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2020년 4월 초에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이 글은 서문과 결론을 포함한 총 6장의 주제로 되어 있는데요. 제가 앞서 언급해드린 바와 같이 4장의 ‘세계화 통제’ 하나 만으르도 일독의 이유가 되며, 오히려 이 4장을 따로 분리하여 소고로 내어도 될만큼 내용이 충분하다고 여겨졌습니다. 더불어 서구에 의해 주도적으로 진행된 전방위적인 세계화에 대해 저자들은 일정 부분 비판적 인식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언론인에 의해 주도되어 설립된 민간 연구소가 이러한 이해를 보이는 것에 대해 약간 새로운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요. 그러한 측면에서, 1장은 오늘날의 중국의 번영과 빗대어 이상하게 나타나고 있는 미국과 유럽의 포퓰리즘 정치의 등장으로, 2장은 앞선 1장에서의 일종의 포퓰리즘 파급 효과라고도 볼 수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시민 발안제’를 포함한 직접 민주주의의 실험 모델을, 3장은 앞으로의 기술 혁신에 의한 테크노 자본주의의 등장과 이에 따른 사회 변화 및 인간의 노동 환경 변화를, 4장은 미국과 유럽이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사회정치적 제도와 반대로 가고 있는 중국, 그리고 그런 중국의 번영이 과연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어떠한 의미로 다가올 것인가에 대해 매우 객관적인 분석을 하고 있으며, 뒤이어 암울한 포퓰리즘의 그늘을 드리운 전세계 정치에 대한 미래를 끝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이 책에 주요하게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겠는데요. 현재 민주주의 정치하에 등장하고 있는 포퓰리즘 정치와 이러한 가운데 오랫동안 진행된 세계화에 대한 진정한 의미, 그리고 이 세계화와 반대되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 오늘날 중국의 번영과 그에따른 복잡한 함의가 글의 중요한 골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와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등이 정치 무대에 등장하게 된 연유에는 “가짜 뉴스, 증오 섞인 연설 그리고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2017년 1월 도널드 트럼프의 취임식 인파와 더불어 불거진 이 대안적 사실은 일종의 대안으로 제시할 수 있는 구성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 단어와 관련해 일반적인 지식사전에서도 그날의 사건 위주로 진술되어 있습니다만 저는 명확한 사실과 전혀 상관없이 정치인 자신과 그 지지자들을 위로하기 위한 대체 진술이라고 이해됩니다. 바로 이러한 민주주의 여론과 위배되는 소위 대중에 대한 선동 요인들이 오늘날 포퓰리즘의 등장을 알리는 사실상의 서곡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와 관련해 독일의 연방법에서는 네트워크 시행법 Network Enforcement Act 에 의거 증오 연설이나 가짜 뉴스를 웹상에서 삭제하지 않을 경우 5,000만 유로의 무거운 벌금을 부과한다고 이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습니다. 물론 위의 독일의 사례는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 내에서 개인 발언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와 같은 논란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겠는데요. 반대로 중국에서의 중국 국민들에 대한 대단위적인 디지털 검열 사례가 과거 구 소련의 고르바초프에 의한 정보 개방으로 인한 국가와 사회 붕괴를 예방하는 차원에서 기여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반대로 앞선 가짜뉴스와 극도의 혐오적 발언 및 증오 연설을 법으로 규제했을 때 나타나는 정치적 실효성에 대해 한번쯤은 논의해 봐야 되지 않나 개인적으로 생각해봅니다. 다만, 이렇게 제가 글을 써가는 도중에도 마음 한켠으로는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개인의 말할 자유의 보장이 권력을 견제하는데 충분한 효과를 보였던만큼 보편성의 측면에서 개개인들의 이에 대한 금지를 논하는 공론장에서의 논의 필요성을 외치는 이런 저의 모습이 뭔가 모순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만큼 역설적으로 이러한 조치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겠죠.

이와 비슷하게 1장에서 저자들은 “포퓰리즘은 우리가 보아왔듯이 복잡한 문제에 직면해 울분을 열정적으로 토해내고”, 그러한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 현상은 과거 수십년에 걸친 민주주의 자체의 부패에 기인하다”고 확언하고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진술은 바로 “기존의 엘리트 계층의 부패와 방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이 포퓰리즘에 기반하고 있는 대중 자체를 어리석은 정치로 몰아가는 기존의 엘리트주의의 타성이 바로 방만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렇게 현상에 있어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에 따라 해결방안을 찾아보는 등의 일련의 사회과학적 과정의 연장선상이라 볼 수 있을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점차 포퓰리즘적 이행에 놓여 있는 많은 국가들에게는 더욱 ‘개방사회’로 나아가려는 목표가 강화되어야 하며, 이 개방사회의 근본적 가치는 “자신들의 미래에 관해 핵심적 선택을 플랫폼화 할 수 있는 능력”을 실행시킬 수 있는 배경이라고 판단됩니다. 그리고 특유의 개방사회라는 가치는 우리의 민주주의가 다원주의적 정치로 나아가기 위한 선결 조건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다음 이어지는 2장은 포퓰리즘적 정치와 더불어 일정 부분 정합되는 “직접 민주주의”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시행되고 있는 국민 소환제와 결이 비슷한 ‘시민 발안제’에 대해 저자들은 비판적 분석을 하고 있는데요. 주지사를 비롯한 행정적 절차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을 요하는 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일정 요건을 갖춘 시민 발안제를 그동안 광범위하게 제출했던 나머지 지난 몇년간 캘리포니아 주의 정치적 환경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이 글에서는 부분적으로 비판해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매디슨 이후 변화된 미국의 상원제도를 언급하면서, “상원이 탐욕스러운 디지털 자본주의가 탄생시킨 새로운 부호, 기성 경제 엘리트, 조직화환 특수 이해집단이 휘두르는 특대형 권력에 맞서는 방어벽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선출되지 않는 상원의 구성원들의 특수 권력화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방지하면서 탁월하고 비범한 시민들의 상원 참여가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 그 방법의 재구성에도 분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는 오늘날 기술 혁신 산업의 초기 시대로 진입한 것과 관련해 “고임금 일자리와 저임금 일자리 간의 노동력 양극화 현상”을 어떻게 하면 해소하고 그 가운데 더 강력해진 디지털 자본주의 시대에 일반 시민의 권리를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는가에 논의의 초점을 맞추고 진행됩니다. 여기에는 특히 주목할 만한 사례가 등장하는데요. 노르웨이와 베네수엘라의 각기 비교되는 자원 개발 행태를 소개하고, 국부 펀드를 이용해 석유 자원을 관리하고 있는 노르웨이와 반대로 무분별하고 기득권층의 이익에 올인했던 베네수엘라의 대비되는 현실을 비교합니다. 이 노르웨이의 사례는 소위 미국 알래스카 주의 시민배당과 꽤 유사하다고 여겨졌는데요. 각국의 국부 펀드는 미래의 국가 부의 관리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경제적 상황이 급변할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이를 대비하기 위한 측면이 강합니다. 따라서, 3장이 함의하는 현실화라고 할 수 있는 이 지식 주도의 경제가 더욱더 역동적일수록 재정립되는 사회안전망과 기회망을 더욱 튼튼해야 한다고 저자들은 강조하는 것과 일견 일맥상통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기술 기반의 산업 기반으로 인해 더 심각해질 불평등의 문제와 관련해서도 저자들은 현실적으로 부유층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재분배에 나서기보다는 지금부터라도 기회 균등의 측면에서 사회 구성원들은 시민들의 기회망에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드워킨의 방식이나 롤스의 방식이냐를 떠나서 상식적인 선에서의 해결 방안이라고 개인적으로는 이해되었습니다. 다만, 저자들이 이 기회망의 보장과 사회 안전 보장이 몇줄로 진술되는 것만큼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점을 과연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지는 약간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제가 좀 더 주목한 4장에서는 소위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변되는 기존의 자유민주주의적 정치 기반 가운데 진행되는 시장 자유화에 반하는 중국의 권위주의적 경제 주도 체제에 대한 서구 유럽의 복잡한 심정을 먼저 저자들은 언급하며, 현재 중국 정치의 강점으로 “합의적 통치 형태”에 주목합니다. 저는 이 부분과 관련해 현재 중국의 합의제에 의한 통치가 사실상의 과두제와 유사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이를테면, 전 인구가 가운데 고작 9,000만에 이르는 중국 공산당원과 이 인원들과는 거의 상관없는 거의 세습구조의 소수 권력 독점이 일반적인 과두제에서 만큼의 숙청과 배제를 중국의 합의제 통치와 비교할 수 있겠는가에 의문을 갖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이는 현재의 통제된 중국 언론과 여론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점과 휴 화이트 등에 의해 제기된 중국 국내의 은폐된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 여부와 같이 사실상 중국의 저 합의제 통치가 보나파르트 식의 과두제와 다를바가 없다고 여겨집니다. 다만, 이 글에서 인용된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후치리의 다음 진술인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모델은 국가가 시장을 통제하고 시장이 기업을 이끄는 것이다”는 것과 이러한 체제 가운데 극심한 개인 인권을 억압하고 언론을 통제하면서도 “비록 공산당의 고압적인 가부장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하지만, 여론 조사에 참여한 중국인 중 80% 이상이 자신들의 조국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인용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러한 내용을 보면서, 과연 통제되지 않는 정보와 그에 따른 열린 사회가 얼마나 민주주의 정치를 건강하게 만들어주는지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반대로 중국과 같은 사례에 있어서 자신들의 유래없는 경제적 발전을 기반으로 일대일로의 추진과 “중국의 지도자들은 남중국해 섬의 사슬을 지배하는 것은 ‘공격’이 아니라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만큼 점점 더 적대적으로 보이는 배타적인 미국 주도의 동맹에 대항하는 주위 방어선 구축”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으로 이런 특유의 문화사적 근거 하에 중국 내부의 배타적 민족주의가 기반한 국제 정치 무대에서의 중국 정치가 어떤식으로 귀결될지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과거 아리기는 전세계 안보의 안정적인 환경 조성에는 중국이 얼만큼 평화적으로 국제 정치 무대에 안착할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다고 발언한 바가 있습니다. 오히려 현재로서는 지난 2017년 도널드 트럼프의 사실상의 자유무역에 대한 철회와 미국 우선주의 그리고 (견고한 철학이 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과거 전통적인 고립주의로서의 회귀로 오히려 시진핑의 영향력이 확대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것은 거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봐도 될지는 아직은 불분명확합니다만, 기존의 미국에 의한 동맹체제가 최근에 필리핀을 이 동맹체제에서 분리시키기 위해 벌이고 있는 중국의 고약한 접근과 이에 동조하는 두테르테의 행위는 사뭇 파행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여겨집니다. 시진핑의 언급대로 “세계 무대의 중심으로 중화의 역사적 회귀를 공고히 하는 것”을 과연 어떤식으로 펼쳐지게 될지에 대해 우리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저자들은 전체적인 맥락에서 따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앞서 언급한 미국과 유럽의 포퓰리즘 정치의 확대와 반대로 권위주의적인 중국 정치의 비대칭적 확대와 자신의 우군을 확보하기 위한 여러 불협화음 그리고 그 와중에 서구 유럽과 미국의 불평등과 같은 내부 문제 등은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협이라고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여기에 논의된 각각의 흐름들은 보기에 따라서는 관련성의 문제로 의견이 다를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이해 가운데에서는 충분히 세계화의 문제와 더불어 직면한 갈등과 파급 문제는 앞으로 충분히 심사숙고해서 다뤄야 하지 않을까 책을 다 읽고 나서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4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중국의 미국 동맹 체제의 이탈을 위해 필리핀에 대한 접근은 반대로 보면 발전된 민주주의화와 경제적 번영이 결여된 미국 동맹국들에게는 단순한 미국에 의한 안보 그늘이라는 측면의 이익 만으로는 이들을 붙잡을 수 있을지 약간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태국과 파키스탄은 필리핀과 더불어 중국 영향권에 놓일 수도 있는 국가들이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요. 그러한 측면에서 우리나라가 취할 국익에 수렵하는 정책은 사실상 정해져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이 글의 4장은 세계화 과정에서의 진행된 중국의 발전과 이를 바라보는 미국과 서구 유럽의 시각 그리고 그에 따른 중국의 과거 지위 회복과 그것의 여파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꽤 광범위한 논의가 포함된 것인데요. 어떻게 보면 세계화를 강조하는 자유시장주의자들이 오히려 각국의 내부 불안을 일으켜 미국과 선진국가들의 중국에 대한 정치경제적 우위를 흔들리게 하는 직접적 요인이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국민을 멱살잡아 내부의 불평등 문제를 강제로 함구시키고 있는 중국의 현 상황이 어떤식으로 귀결될지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대결구도를 확정짓는 요인이 될 수 있다 생각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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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합들 - 갈등과 적대의 세계를 정치적으로 사유하기 사상가들 총서 1
샹탈 무페 지음, 서정연 옮김 / 난장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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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도 자신을 ‘정치이론가’로 소개하고 있는 저자, 샹탈 무페는 전세계에서 많은 존경과 관심을 받고 있는 여류 학자입니다. 특히 번역된 이 책의 간행 취지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정치학 및 정치철학 분야에서 최근의 무페 만큼 조명을 받고 있는 학자는 흔치 않기도 합니다. 그녀는 영국에서 학문적 동반자이자 삶의 동반자인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의 만남으로 자신의 사상적 경향이 여러모로 견고화되었고, 라클라우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대의적인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 또한 두터워진것으로 봐도 되겠습니다. 더불어 그녀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적 성찰과 분석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근래 세계의 여러 문제들을 다루는 데 있어 중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학문적 소명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이 책은 지난 2013년, “Agonistics : Thinking the World Politicall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글의 서문에서도 무페가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의 바탕은 그녀의 공개 강연과 발표가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더불어 글이 대체적으로 주장하는 바는 “정치 제도를 방치하는 전략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대의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것에 대한 문제 제기”와 더불어 최근 세계의 문제적인 경향들과 다시 정치와 정치적인 것을 회복시키고자 하는 일련의 학문적 목표 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무페는 ‘경합’이라는 용어를 등장시키고 있는데요. 이것은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갈등은 근절될 수 없으며 근절되어서는 안된다”는 명제 아래 “모든 쟁점을 따져보고 다만 이를 서로 적대화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앞선 단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 경합을 통해 무페가 바라는 점은 “사회가 완전히 총체화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즉, 단일대오 아래 정치적 선명성이 거부되고 오로지 하나의 사상 하나의 주장으로 총체화 되는 것에 대한 완벽한 거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렇게 자유민주주의 기조 아래에서 서로 대치되고 대비되는 정치적 상대자들이 서로 괴멸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어쩌면 정치이론가들 내지는 정치학자들의 사명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최근의 미국 정치 무대에서 풀뿌리 정치 운동이라고 불리우는 “티파티 운동”이 미국내의 모든 진보주의 운동을 사실상 격멸의 대상으로 여기는 점은 이렇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겠습니다.

이처럼, 이 책은 총 6장의 다소 구분된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1장에서는 경합적 정치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와 함의, 2장은 만약 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가 가능하다면, 과연 어떤 민주주의가 필요하겠는가에 대해. 3장은 다소간의 인위적이고 배타적인 집합통일로의 선택에 놓여 있는 현재의 유럽과 국가인가 지역인가의 유럽 논의를, 4장은 사실상의 포퓰리즘을 시사하는 오늘날의 급진주의 정치의 현주소를, 5장은 경합적 정치로 도출되는 현재의 보완적인 예술의 가치와 실천을, 그리고 마지막 6장인 결론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우선, 1장은 그동안 제가 집중했던 로버트 달과 찰스 틸리의 다원적 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근거 정당성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다원주의적 민주주의의 특정성은 정확히 갈등에 대한 승인과 정당화”에 있으므로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갈등은 근절할 수도 없고, 또한 근절해서도 안된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대결을 혐오하면서 합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정치적 참여에 대한 무관심과 불만을 야기한다”는 전자의 부정으로 초래될 수 있는 측면을 이처럼 서술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적 대의가 수많은 의견들의 총합을 기본으로 통일된 주장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고 조정된 각각의 의견을 도출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점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혼란과 의견 불일치를 더욱 강화시켜 기본적인 현실 정치에서 역효과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강조하는 반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만 제가 굳이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언급하기보다는 인간의 권리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현재까지 고안된 여러 정치 사상이나 이론들 가운데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해 낼 수 있는 것은 거의 민주주의가 유일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일찍이 스피노자가 밝힌 바와 같이 권력을 구성하는 요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체제나 제도의 결함보다는 그 권력을 손에 쥐고 흔드는 인간들의 본질적인 욕망에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각 권력들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측면의 이 민주주의는 따로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을정도로 다수의 이익에 효과적으로 수렴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물론 소수의 이익에 집중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이들은 이러한 민주주의를 사실상 거부하고 시장에서 정치를 제거하고 공공선을 아예 시장에 일임하는 맹목적 믿음을 갖고 있는데, 지난 40여년의 이러한 이행 가운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아주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적대없는 다원주의를 구성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춰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먼저 여기에는 무페가 강조하는 대로 “갈등이 적대적 형태로 출현하는 것을 먼저 피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버마스가 주장한대로 시민들의 건전한 공론장이 많이 마련되어야하며, 저자인 무페가 대중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이라고 이해하는 바와 같이 스스로가 부화뇌동하지 않는 건강한 이성과 이를 통한 여러 학습들을 통해 합리적인 정치성을 갖추는 것이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2장에서는 다극적이고 경합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보편적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와 평등과 인민에 의한 지배, 즉 인민 주권의 이념을 특권화하는 이 민주주의 모델이 우리의 삶의 형태를 구성하고 있으며, 이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강조합니다. 저는 여기에서 저자인 무페가 얼마나 강력하게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는지 엿볼 수 있었습니다. 혹자는 이런 그녀를 사회주의를 품은 혁명주의자라고 급진주의와 같은 멋대로의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만 일전에 민주정치 아래에서 많은 좌파들이 지리멸렬한 것이 신자유주의자들과 보수 우파들에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궁극적으로는 건강한 민주제도를 답보하기 위함이라는 대의에는 실패했던 것이라고 진단했던 그녀의 이런 주장에는 앞선 논의들이 기반되어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가서 “인민에 의한 지배라는 민주주의적 이상의 다층적 절합들, 종교와 정치가 다른 관계를 가질 수도 있는 그런 절합들의 가능성을 구상하는 다원주의적 접근법을 취할 필요가 있다”고 그녀가 진단하는 데에는 오늘날 대규모 이슬람 난민의 유입 사태에 놓여 있는 유럽의 상황과 맞물려 있습니다. 또한 이 점은 얼마나 우리가 효과적으로 다원주의적 사회를 향해 갈 수 있겠느냐에 대한 선결 과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뒤이어, 3장은 앞서 간략히 설명한대로 오늘날 유럽의 선결 문제인 이슬람 난민들과 이주민들의 유입과 더불어 진정한 통합에는 거리가 먼 현재의 유럽 정치를 서술하고 있습니다. “국가들의 유럽인가, 지역들의 유럽인가”라는 이번장의 소제목은 이렇듯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즉, “유럽연합은 주권의 담지자이자 민주주의 실행의 중심처를 제공하는 동질적인 데모스를 유럽적 수준에서 창안하는 데 목표를 둬야 한다는 제안을 상기해야 한다”고 먼저 저자는 언급하고 이러한 측면에서 사실상 오늘날의 유럽은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좌파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유럽 연합의 틀 안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모델의 대안을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전반적인 이익을 위한 정치 제도화의 개변에 따른 지난 몇 십년간의 이행에 따른 다수의 고통에 눈을 감고 있는데요. 이것은 아직도 경제로 인해 사회는 진보하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삶의 개선에 이르지 않았냐고 이들은 반문합니다. 즉, 어떻게 보면 신자유주의 이행 자체에 대한 어떠한 결점도 없다는 식의 일방적인 수용화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의 탈정치화를 동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만, 확실히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어지는 4장의 오늘날의 급진정치 특히 우파 포퓰리즘의 등장이 앞선 3장과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인 무페는 이 4장의 첫줄에서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무소불위를 떨쳤던 날들이 다행히 저물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만 저는 여기에 그리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은 여러 출판계를 포함해 많은 학계에서도 끊임없이 이어진 것은 분명한 사실일겁니다. 그렇지만 이 신자유주의적 헤게모니가 우리의 비판에 의해 대안 가치의 부상으로 인한 쇠퇴인지, 그냥 그 반대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앞서 설명해 드린대로 과거 좌파의 실패는 부정할 수 없고 이러한 가운데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 세력과 대안 세력이 전무한 가운데) 이어진 신자유주의화가 어떤식으로 나타났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바로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의 개선을 위해서는 다시 시장에 대한 정치의 우위와 탈정치화를 회복시켜 많은 시민들이 정치 일선에 복귀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이것을 조직하고 단일하게 만들 세력이 있는지는 부정확합니다.

따라서, “자유 무역이 진보를 이룬다는 잘못된 통념”을 얼마나 우리가 극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에 따라 다중이 스스로 자율적으로 조직할 수 있겠는가”에 앞으로의 대안도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개인은 사회와 국가로부터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 절대적으며 환원 불가능한 존엄성을 지닌다”는 점은 우리가 앞으로 어떤식의 민주 제도를 구축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 보여지는데요. 사실 장황한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대해 쓸 글은 많지만 아주 중요하게 고찰해야 될 점은 뭐니뭐니해도 이 신자유주의화가 마땅히 행해져야 했을 기본적인 민주적 가치를 외면하게 하고 시장이 무엇보다 우위를 점하는 식의 체제를 일방적으로 구축시켜 왔다는 점에 있을겁니다. 여기에는 지그문트 바우만이 우리 인류가 얼마나 경제를 받아들였다고 애초에 인간과 경제가 같이 태어난것으로 여기는 경제학자들과 이러한 풍토에 비판했던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가 우리에게 중요한 과제로서 내리는 결론인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적 공격을 함께 개시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점은 저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그녀의 말대로 우리가 정말 ‘일반지성’을 갖는 ‘자발적인 다중’이라면 최소한 현재의 체제에 대한 최소한의 비판적 인식은 갖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많은 학자들과 이론가들이 현실에 맞는 이론들을 재정립화시켜야 하며, 시민들은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고 다원주의적 가치에 맞는 건전하고 힘있는 시민들의 권력을 새롭게 탄생시키는 것이 앞으로 다음 세대와 전세계에 미래에 가장 필요한 해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먼저 이 책을 좀 더 면밀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샹탈 무페의 “민주주의의 역설”의 일독이 무엇보다 필요한데요. 현재로선 절판되어 구할 수 없기에 이 점은 매우 아쉬울 따름입니다. 조만간 시중에 다시 재간행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인민’, ‘인민주권’과 관련해 아직도 이데올로기적 가치관으로 투영해 보이는 외눈박이 분들이 있을텐데요. 얼마전에 국사를 가르치는 황현필 선생은 “이 인민이라는 글자는 사람인과 백성민으로 이뤄져 있는데 이 얼마나 아름다운 단어인가”라는 취지로 강의에서 밝힌 바가 있습니다. 저 역시 이에 동의하고 더불어 우리가 장 자크 루소의 인민 주권과 그에 따른 공화주의를 긍정하고 인정한다면 이 인민이라는 단어를 이념적 단어로 몰이해하는 것은 이제는 그만해야 될 것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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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역사 - 거래, 스파이, 거짓말, 그리고 진실
존 루이스 개디스 지음. 강규형 외 옮김 / 에코리브르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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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에 이르러 대단한 냉전 역사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존 루이스 개디스는 미국 텍사스 주 커튤라에서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내고 난 후, 의외로 텍사스 대학에서 현대 철학을 전공하게 됩니다. 이후, 영국 옥스포드와 미국 프린스턴 대, 그리고 핀란드 헬싱키 대학 등지에서 방문 교수를 역임하며 비로소 그의 명성에 걸맞는 세계 현대사와 냉전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더불어 ‘냉전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조지 케넌과의 밀접하고 돈독한 관계는 아마도 냉전사와 미국 현대 외교사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넘어 천착하게 된 이유가 되지 않았나 짐작해 봅니다. 또한, 그의 삶에 있어서 마지막 원고가 될지도 모르는 ‘조지 케넌’의 전기의 집필은 냉전사를 비롯한 미국 현대사에 대한 이 노학자의 집념을 엿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여기에 따로 저자인 개디스가 언급했던 이 책을 펴내게 된 목적의 변을 적어보고 싶은데요. 이제는 냉전 이후에 태어난 세대들이 많아진 만큼 이 냉전을 일반적인 교양 수준에서라도 후세에 전하고 싶었다는 그의 솔직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번역 출간된 마이클 돕스의 글과 함께 같이 읽어보시면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이 책은 지난 2005년, “The Cold War : A New History”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모두 살아남았다”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의 그의 소회가 이 냉전을 여실히 평가하는 문장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여기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베를린 장벽과 구소련이 붕괴한 1989년과 마지막 1991년이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첨예한 냉전의 기간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냉전은 무엇이었는가냐고 질문을 한다면 1945년의 분단과 1950년의 한국 전쟁으로 귀결될 수 있을겁니다. 마찬가지로 개디스의 이 글 역시 진정한 냉전의 시작을 바로 의도치 않은 한국 전쟁의 발발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항상 실용적이었던 루즈벨트는 2차 세계대전중에 소련을 동맹국으로서 환영했다”는 문장은 전후 스탈린의 비타협적인 소련의 팽창을 루즈벨트가 어느 정도 인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관된 제국주의자의 면모를 보인 처칠과는 달리 스탈린은 “그의 겉모습 뒤에 신중한 타산, 야심, 권력욕, 질투, 잔인성, 그리고 교활한 복수심이 숨어 있음”을 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점은 전후 그리스에서의 혼란에 영국이 재빠르게 책임을 뒤로하고 바통을 이어 받은 미국에 이 그리스 카드를 이용해 스탈린은 전후 구상인 ‘동유럽에서의 소련의 우선권’을 따내게 됩니다. 물론 상당히 민주주의가 진행된 체코슬로바키아에 스탈린이 붉은 군대를 파견한 것은 이를 여실히 입증한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더욱이 냉전 시기 동안 NATO의 존재와 함께 다루었던 다소 배타적인 핀란드 문제는 다수의 서유럽 국가들이 우려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이와는 구별되게 이 글 1장에서 밝히는 바와 같이 2차 대전 종전 후, 미국이 오로지 바랬던 것은 바로 “안전보장”이라고 언급됩니다. 1949년까지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했던 미국이 자신의 안전보장을 추구했다는 것은 약간 이해하기 힘들기도 하지만, 근래 읽었던 많은 미국 정치와 관련된 책에서 미국 유권자들이 매우 직접적으로 시민의 안보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대통령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스탈린의 구상에 반항을 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고슬라비아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입니다. 사실상 모스크바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던 티토는 이후 소련의 징벌을 받을것이라고 여겨졌으나, 오히려 그는 워싱턴과 가까워지면서 역사의 확신을 거부합니다. 바로 이후, 마오쩌둥을 다루는 데 이골이 나있다고 여긴 스탈린은 “차이나 핸들러”로서 당시 김일성에게 한국 전쟁을 승인하고, 이후 전세의 영향에 따라 중국을 지원카드로 내세우는 등의 방안을 마련하지만 이것은 미국의 신속한 참전에 다시금 냉전의 서막을 일깨우게 됩니다. 고작 작은 땅덩어리 남한을 공산화시키는 것을 모욕이라고 여겼던 트루먼은 아주 재빠르게 (전쟁이 발발한지 거의 12시간도 안되어) 참모들을 소집하고 더 나아가서는 유엔에 회부하는 등의 정치적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당시, 이 한국 전쟁은 그동안 재건에 나서고 있던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안보 보장이라는 측면의 외통수였으며, 애치슨 라인을 차치하더라도 워싱턴은 이를 마냥 좌시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전쟁 와중에 “워싱턴의 유럽 동맹국들은 확전을 생각하면서 겁을 먹고 제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언급에서 맥아더가 부르짖었던 핵무기 사용과 더불어 한반도 무력 통일이 왜 불가능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맥아더는 이를 인식하는 동시에 수용하고 이후 워싱턴의 처분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글의 후반부인 5장에서 이 냉전을 요약하는 “전쟁 억지 전략가들은 방위 대책이 전혀 없이 차라리 미사일 수만개를 즉시 발사되도록 배치해 놓는 것이 국방을 위한 최선의 방안이라고 확신했다”는 개디스의 평가는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와 1983년 미국과 나토 회원국의 연합 훈련인 “에이블 아처 83 Able Archer 83”의 두 번의 핵전쟁 위기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상호확증파괴 MAD는 차치하더라도 아예 민간인들의 절멸까지 인식하는 두 강대국의 핵대결은 물론 냉전을 종전시킨 세 명의 트로이카, “로널드 레이건, 마가렛 대처, 레흐 바웬사”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가기 전까지 아마도 우리에게는 거의 생존의 문제였을 겁니다. 개디스는 본문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이 인간사의 피폐화를 무조건 답보하지는 않았다고 비평하고 있습니다만 일전에 스탈린이 자본주의 국가들 간에는 필연적으로 갈등과 전쟁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이 마르크스 교조주의가 허구로 밝혀졌던 것만큼 전세계 민주주의에 의한 자본주의체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개디스는 “정당성과 정의는 다르다”는 헨리 키신저의 말을 소개하면서 이 키신저를 비판했던 자유주의자들의 말에 문득 답이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대외 정책이 언제나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고, 따라서 안정을 일순위로 추구하는 키신저의 냉소적인 태도를 비난했다”는 이 정치적 자유주의자들의 논리는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왜냐하면 이 첨예한 냉전 구도의 시기에서 미국의 CIA가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과테말라에서 1954년 아르벤스 구스만 정부를 몰락시키고, 1961년에 케네디 행정부가 벌인 쿠바 피그만 침공의 수포, 그리고 1970년 선거로 선출된 칠레 민주정권인 살바도르 아옌데 정권을 3년간이나 몰락시키기 위해 고군부투한 당시 백악관과 후에 군부 쿠데타에 끝장난 칠레에 대해 헨리 키신저가 적잖이 안도했다는 회고를 붙인 것은 키신저주의에 대한 사실상의 어두운 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 냉전 시기에 미국과 자유 진영의 생존의 사활적 이익이 달려 있다고 하더라도 CIA가 외국 정부를 몰락시키는 것에 대한 정당성은 과연 어디에 있었는가 대해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과거 매카시즘에 대한 것만으로 적당한 교훈을 미국인들이 얻었다면 스스로 민주주의의 맏형 국가를 자임하면서도 어떻게 선거로 당선된 민주 정부를 퇴출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미국인들의 양심에 의한 학문적이고 정치적인 고찰이 수반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것을 키신저가 그냥 국제 외교에서의 단순한 낭만주의라고 취급하려고 하는 부분은 노련한 외교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라고 생각됩니다.

또한, 닉슨이 벌인 일들로 인해 그의 하야 이후 법 위에 대통령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일종의 중차대한 헌법적 관념에 비해 CIA가 외국 정부에 벌인 일들을 그냥 위법 정도로 해석하고 있는 것은 약간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레이건이 특유의 단순명료함으로 중요한 문제에 대한 통찰을 보여왔다고 평가하는 것에서도 그가 닉슨과 같이 불거지지 않았을 뿐이지 여러 과오를 만들어냈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할겁니다. 더군다나 레이건 임기 말년에 이란-콘트라 게이트의 관련자들에게 연방 대통령령에 의거 면죄부를 쥐어준 것 또한 대비되는 레이건과 닉슨의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이와는 약간 별개지만 민영화와 더불어 진행된 신자유주의화에 대해서도 보이는 저자의 애매한 태도도 약간 아쉬워 보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강조하지만 상호 멸절의 대결 구도에서 “미소 관계에서 오로지 추구했던 것은 안정화”였던 만큼 그와는 다르게 반대로 진행된 대규모 핵무기 감축 조약과 더욱 개량된 탄도탄 미사일의 개발과 배치 등은 수없이 많은 우발적인 핵전쟁이 발발할 수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의 평화를 위한 노력과 서유럽과 아시아에서의 미국 동맹국들에게서 진행된 민주주의적 이행이 좀 그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든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여기에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사태를 보면서 키신저가 “세계는 2차대전 종전 이후로 한치도 나아가지 못했다”고 보는 것과는 분명 다른 면모일 것입니다. 물론 개디스가 언급하는 민완 외교관인 키신저에 대한 꽤 긍정적인 평가가 글 곳곳에서 보이기도 합니다만 일반적으로 역사가의 입장에서 백악관의 주요 행위자였던 헨리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다르게 할 수도 있다는 측면의 진술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입체적인 분석은 스탈린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의 행적, 수많은 백악관과 크레믈린의 주인들을 통해서 이를 매우 현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점은 저자인 개디스의 수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약간 첨언으로, 스탈린이 한국 전쟁에서 신속한 미국의 개입을 오판한 것은 당시 백악관이 대만으로 쫓겨난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구원하지 않은 것에 기인한다고 개디스는 언급하고 있는데요. 더불어 앞서 밝힌대로 트루먼이 이 남침을 미국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던 것도 분명해 보입니다. 덕분에 과거 애치슨 라인에 대한 실제적인 외교적 평가가 그동안 공개된 여러 외교문서들로 인해 ‘개인적 의견’으로 이해되고 있는 점은 뭐랄까요 역사의 드러난 선명성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는 분들에 따라서는 최근에 번역된 개디스의 “미국의 봉쇄전략”과 갈등하실 수도 있겠는데요. 전반적인 내용은 전자가 더 상세하고, 여기의 “냉전의 역사”는 약간의 개론으로 봐도 될 것 같습니다. 분명 양자는 각각의 일독 가치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번역은 후자가 좀 더 나아보인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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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 파워
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 스마트파워위원회 엮음, 홍순식 옮김 / 삼인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조지 W. 부시 행정부 이후 차기 행정부인 오바마 행정부에 지난 이라크 전쟁 등을 통한 동맹과의 균열 그리고 전세계에서 미국의 영향력 쇠퇴에 직면한 시기 등에 적절한 조언의 목적을 위해 탄생한 것이 이 ‘스마트 파워’라는 보고서 입니다. 국내에는 삼인 출판사가 일종의 단행본으로 번역 출간을 했습니다만 미국 국무부와 국방부 등지에서 편찬하는 관련 백서나 보고서와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보입니다. 바로 이 보고서를 작성한 곳은 미국의 국제전략문제연구소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CSIS 즉, CSIS인데요. 이 CSIS는 영국의 국제전략연구소 International Institution for Strategic studies를 본떠 만든 초당적이고 독립적인 비영리적 기구입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전 상원의원인 샘 넌 Sam Nunn이 1999년부터 의장을 맡아온 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국제정치학과 국제외교에서의 ‘스마트 파워’를 고안한 조지프 나이와 과거 딕 체니와 함께 포드 행정부에서 헨리 키신저를 몰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대표적인 네오콘 인사인 리처드 아미티지가 이에 속해 있습니다. 특히 리처드 아미티지는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국무부 부장관을 역임했고, 우리에게는 대표적인 ‘저팬 핸들러’로 유명한 인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09년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아무래도 보고서라는 성격상 다시 재간은 불가능하지 않나 짐작해 봅니다.

먼저, 이 책의 서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 제기가 등장합니다. “전통적인 동맹국들조차 미국적 가치와 이해가 과연 그들 자신에게도 적합한지 의문을 품고 있다”고 단정하면서, 이러한 연유에는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벌인 이라크 전쟁과 이후, 불법적으로 운영된 관타나모 수용소에서의 죄수들에게 대한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가 단순한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를 넘어 동맹국들간에서도 미국의 영향력 쇠퇴를 불러일으킨 주범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CSIS는 근래 ‘스마트 파워’를 고안한 조지프 나이의 추동에 힘입어 차기 행정부에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재고를 위해 적절한 조언을 하기 위한 목적을 이 보고서에 담았다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시각에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미국의 영향력 유지에 악영향을 끼친 관타나모 수용소의 존재 하나 만으로 이러한 결과가 도출된 것은 아니며, 냉전이 종식된 시기 이후부터 2001년 9. 11 테러를 거쳐 이러한 사실상의 미국 패권 위기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특히, 미국을 상대로 굉장한 짓을 벌이고 있는 중동의 테러단체와 같은 비정부적인 소수 무력 단체의 등장은 어쩌면 국제 사회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적나라하게도 이들 소수의 테러단체가 극소량의 핵무기라도 손에 넣는다면 그것의 파급효과는 기존의 핵보유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와는 본질을 달리하는 결과를 낳을지도 모릅니다. 본문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핵 관련 참사로 말미암아 지구상에 광범위한 물리적 피해가 일어날지 모른다는 위협은 반세기 동안 존재해 왔다”는 것 이상의 참혹한 나레이션이 앞선 테러단체들의 의해 발생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책 2부에서 언급되는 “공유된 전략 목표가 없는 상태에서, 위기는 더 일어나기 쉬울 것”이며, 여기에는 어떻게 하면 미국이 추구하는 자국의 안전 보장 및 세계 안보 위기를 막을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고심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존의 하드 파워에 의존한 대응을 잠시 내려놓고, 국제 사회의 공감대와 미국에 대한 준 적대국들에 대한 태도 변화를 불러일으키고 기존의 동맹국들이 미국의 대의적 목적에 규합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스마트 파워’를 위주로 영향력 재편을 해야한다고 이 보고서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뿐만 아니라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최근의 국제적인 구상들을 거부해 왔는데요. 기후변화에 관한 교토의정서, 국제형사재판소, 대인지뢰금지협약, 아동권리협약이 포함된 일련의 국제 함의 등을 미 의회가 거부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공식적인 협정과 세계적인 규멉은 가장 필요한 때에 미국이 동맹들과 함께 움직일 수 있는 지속적인 역량을 제공한다”는 가치에 반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더욱이 “미국 국내의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국제법을 구속력이 있는 것이라기 보다는 시사적인 것으로, 동맹을 구식이며 없어도 되는 것으로, 그리고 국제 제도를 노후하고 부적당한 것으로 본다”고 첨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바마 행정부 시기에 이러한 미국의 직접주의에 대한 선입견을 해소시키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아직도 많은 국가들은 “서구의 군사력 아래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다”는 시각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국이 처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이 보고서는 일종의 다자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기존에 해왔던 AIDS/HIV 백신 개발에 대한 초정부적인 협력과 후진국들과 실패 국가들에 대한 점진적인 원조 프로그램, 그리고 국제 무대에서의 대의에 관한 최소한의 공감대 전환 등을 이 다자주의 이론에 근거해 제시합니다. 물론 이러한 조언에 대해 8년 기간의 오바마 행정부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문제는 이후 트럼프 행정부가 미국 우선주의를 채택하면서 어쩌면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절보다 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유일노선을 경주하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까지 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과연 이 스마트 파워가 하드 파워를 상호 보완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이 동맹들과 우호국들과의 연대에 나서 자신들이 원하는 목적을 위해 협력과 대화에 나서는 길이 그냥 자신의 하드 파워인 군사력을 투입해 직접적으로 추구해 가는 것이 좀 더 손쉬운 길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의 보고서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공공외교에 대한 지원과 각 국가들의 협력을 불러일으키는 여러 지원프로그램 그리고 기존의 동맹들에 대한 “같이 갈 수 있는 대의”에 대해 본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미국이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성대하리라 여겨집니다. 사실 다자주의적 국제 정치가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막대한 비용보다는 적을 수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그리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미국 국민들이 자신들의 안보에 얼마나 기여하고 보장할 수 있는 대통령을 뽑으려고 하는 점은 그들의 권리일 수도 있겠습니다. 따라서, 각자의 행위자들이 서로 추구하는 목적과 이익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일방적인 수단의 투사는 그것의 정당성을 논하기에 앞서 그 결과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아야 됩니다. 특히, 오직 미국만이 선점했던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의 큰형, 전세계인들의 인권의 요람 및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지난 이라크 전쟁과 포로들에 대한 극악한 대우와 인권 유린 등이 오늘날 어떻게 미국을 바라보고 있는지에 대해 미국 정치권이 계속 고심해봐야 하는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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