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 본능 - 일상 너머를 투시하는 사회학적 통찰의 힘
랜들 콜린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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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의 사회학자로 알려진 랜들 콜린스는 하버드와 스탠퍼드를 거쳐 버클리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과거 미국이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을 당시 그는 반전 운동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유명했는데요. 이후 하버드에서 사회심리학을 연구하고 버지니아 대학 등을 거쳐 현재 펜실베니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도 자주 등장하지만 아마도 랜들 콜린스는 어빙 고프먼에 주로 탐독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따지고 보면 고프먼도 역시 뒤르켐의 학문적 지류이니 콜린스 역시 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막스 베버와 비슷하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에밀 뒤르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회학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뒤르켐의 사회학의 기능주의적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만, 실증적 논거를 비롯한 사회학에서의 기본틀을 마련한 그의 업적은 분명 존중받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지난 1982년 초도 출판되었으나, 이후, 1992년에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Sociological Insight”로 국내에는 바로 1992년판을 기반으로 지난 2014년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

우선 이 책은 현재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구조들을 (현실) 사회학적 이해를 기반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글 자체는 저변의 확대를 위해 쓴 것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으나 꽤 독해가 수월했던 것은 확실합니다. 즉. 총 6장의 주제로 차례대로 요약해 보자면, 1장은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의 맹신 이면의 비합리성, 2장은 사실상 종교의 공통된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도덕주의, 3장은 일터나 일상생활에서 규명해 본 권력의 개념, 4장은 법과 범죄의 서로 역설적 측면에서 비롯된 사회 범죄의 의미, 5장은 전통적 성애적 권리의 변화 및 현재의 결혼 제도의 예측을, 6장은 사회학의 필연적 존재라고 여겨도 될 만한 인공지능의 불확실한 미래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6장은 좀 더 설명이 필요한데요. 문맥 그대로라기 보다는 인공지능의 출현을 일종의 사회적 실험으로 저자는 바라보는 듯 했습니다. 더불어 이것에는 사회학과 사회학자들의 존재 의의가 있다고 보는 듯 했고요.

이 책의 저자인 콜린스는 자신의 글을 본격적으로 써 나가는 와중에 독자들에 중요한 인식 수단들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은 완벽하지 않으며, 그 이면에는 비합리적인 측면이 반드시 존재하고, 그런 인간들이 모여 구성한 사회는 이 개개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합리적 행동에 나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그 안에 ‘의례’와 ‘유대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즉, 인간의 합리적인 본성 가운데 존재하는 비합리적인 측면과 의례 및 유대감을 기본 인식으로 이 책을 읽어 나가시면 글의 일관된 논지를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경제학자들은 완전히 반대되는 주장들에 대해 저마다 철저히 이성으로 무장한 옹호론을 내놓는 일은 아주 흔하다”고 저자는 일반적인 경제학과 이 합리적 본성과 더불어 사회학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는지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사회학자들은 이 합리적인 본성 혹은 이기심과는 다른 “사회에 필연적으로 필수불가결인 도덕주의적 요구”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할텐데요. 바로 이러한 합리적 본성에 의해 추구되었던 “계약주의 내지는 계약설”에 에밀 뒤르켐이 “사회 조직의 궁극적인 기반이 계약이 아니라는 점”은 사회학자들이 이를 어떻게 보는지 극명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양자간의 계약 관계를 해설하며 양쪽의 어느 한 사람이 계약 관계를 철회해 자신이 더 큰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며, 이것이 바로 인간의 합리적인 측면이라고 풀어냅니다. 다만, 매번 모든 계약 관계가 이런식으로 될 것이라면, 사회적 합의가 무너질테니 따라서 법에 의한 강제 규정이 존재하게 된 것은 앞의 근거적 단순화를 차치하더라도 꽤 아이러니한 부분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개인의 이익과 안정의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저자는 계약을 다루고 있으니 그만큼 저자의 이론에 대한 접근이 평이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또한,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이 어떤 강제된 규약(사법체계)에서가 아니라 “모두가 공통의 이익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는 도덕적 의무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의무 조항 역시 근거가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익을 추구하는 인간이 유대감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면 사익을 추구하는 집단의 경우는 훨씬 더 하다”는 분석은 단순히 유대감의 존재 여부에 따른 사회의 구성적 요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사익 추구와 별개로 도덕적 측면과 상대방을 고려하는 유대주의가 중요하다는 논법일 것입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이 과거 계몽주의적 도덕적 접근이라고 폄하될 수 있으나 현재의 개인들의 수많은 이익 추구에 대해 어떠한 면죄부가 주어진 것은 꼭 모든 경제학자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들에 대한 합리적 근거를 교묘히 제시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본주의적 발전 과정에서 사회 전반에 이런 인식이 내면화 된게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전통주의 사회 이전과는 달리 근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이식된 기존의 사회가 생산력과 그로 인한 사회 발전에 나서게 됨으로써, 이것이 필연적으로 진행된 흐름이라고 봐야 할 것이죠. 물론 이러한 도정에서 우리의 도덕적 책무와 도덕주의가 뒷전으로 밀려났으니 이 부분은 그것의 폐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 4장은 특히 현재 미국내의 범죄와 사법제도의 모순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요. 그만큼 현재 미국 사회의 범죄 발생의 근원을 사회적 차원에서 규명하는데 큰 조언을 주고 있습니다. 모든 독자가 이 4장을 따로 읽어보는 것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뒷부분에 인용이 되기도 하지만, 에밀 뒤르켐은 사회가 살아남으려면 범죄가 필요하다고 하기까지 했는데요. 이 부분이 일정 부분 이런 범죄자들을 도태시켜 건전한 부분만을 건사시킨다는 의미인지는 모르겠으나, 현재 미국의 사법 체계에 따른 판사와 검사, 변호사들 간의 거래와 가해자들에 대한 형량 거래 등이 만연한 범죄에 따른 사법 당국의 일처리 효율을 위해 벌어지고 있다는 점을 매우 강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개인의 범죄에 대해 그것을 일개 사람의 일로 국한시켜 이해하려는 편견이 있습니다. 저자인 콜린스는 이러한 기본적인 개인의 인식을 보이더라도 사회학자의 입장에서 이들 범죄에 대해 접근하고 이해하면 그 결과는 분명 다르다고 목소리를 높이는데요. 그래서 범죄가 법의 역설적인 측면에서 조장되고 있다는 해석은 크게 공감이 되었고, 미국의 사법체계가 처벌의 엄중주의에 급급해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중범죄인들이 있는 교도소에 무차별적으로 수감시켜 갱생은 커녕, 다시 중범죄의 굴레에 옭아매는 결과를 미국 사법제도와 사회가 재생산하고 있다고 바라보고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정독을 하다가 잠시 들었던 생각은 경찰 조직과 사법 조직을 아주 면밀하게 관찰하고 시스템을 분석하는 어떤 연구 용역이나 연구부서가 있으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를테면 형법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모여서 이 조직내의 실제적인 조건과 성격을 규명하고 이것을 시민 사회에 널리 인식시키는 것이 이 자체만으로도 범죄 최소화에 기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 이것은 다른 측면으로 의사나 변호사들이 자신들의 업계 정보를 가급적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 소위 전문가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일종의 은폐주의와 비슷한 효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인들인 너희들이 무엇을 알겠느냐와 같은 이 차별적 태도는 의사들이 자신들의 일을 자신과 동일시하면서 사회 구성원들과 자신들은 다른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따라서 이들 계층이 통제가 되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고 저자는 분석합니다. 실로 명료한 해석이라고 여겨졌습니다.

끝으로, 우리가 그동안 자유주의적 이성에 기반한 사회적 체제의 틀을 마련해 왔다면, 이제는 이 합리적이라는 수준의 인식을 달리 해봐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즉, 앞선 의사들의 예를 들었듯이 우리 모두가 사회적 유대감을 갖고 아주 직접적인 권력에 의지해 사회를 유지하기 보다는 소속감을 고취시키는 건전한 의례와 소수의 기득권층을 공통된 사회 구성원으로서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을 반드시 마련하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의무이자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뭔가 통제라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실 수도 있으나 이것의 기본적인 의미는 “합리적인 이익이라는 본성의 비합리성을 통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학의 근본 목표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분명 실종된 현재의 도덕적 책무를 고려해본다면 분명 매우 중요한 시점임은 분명합니다. 아마도 이것은 더 나아가서 열린 다원주의의 근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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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 조커가 지배하는 시대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4
안병진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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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와 서울대를 거쳐 미국 뉴스쿨 대학원에서 한나 아렌트 상을 수여받은 경희대 미래문명원 안병진 교수는 국내에서 제법 잘 알려진 진보적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의 유명한 논저 가운데 하나인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와 보수주의 위기의 뿌리’는 학계와 출판계에 큰 반향을 일으킨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안교수가 포퓰리즘 연구를 해보면 큰 학문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요. 물론 이는 일개 독서인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저자가 서문에서 짦게 밝히는 대로 광범위한 도널드 트럼프 연구의 그리 가볍지 않은 길라잡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이 책은 몇년간의 지난 트럼프의 단상을 돌아본 글이면서, 앞으로 트럼프로 초래된 미국의 정책 변화와 세계 체제에 대한 여러 질문들에 대한 답이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작은 분량의 글이지만 몇가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의문을 다소 해결할 수 있었는데요. 또한, 꽤 객관적인 시각의 글이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우선, 미국의 수장인 도널드 트럼프는 국내에서 학계와 여러 전문가들에게 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도 역시 트럼프의 어디로 튈지 모르는 예측 불가능성을 언급하고 특유의 괴랄한 트위터 정치 그리고 자신이 어떤 분야이든지 통달했다는 식의 자기애적 사고를 마찬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통해 새로이 얻게된 사실은 트럼프가 백안관에 입성 후, 전 정권이었던 오바마 행정부가 추진한 TPP를 휴지조각으로 만들어 오히려 아시아 태평양에 중국의 영향을 확대시킨 것과 최근에 이란의 핵합의를 과거로 돌리고 중동에 암울한 전운을 드리운 점 등을 고려했을 때, 트럼프가 사실상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매우 진지한 예측과 성찰이 없는 인물이 아닌가하는 일종의 뜨악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의 전임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는 미국의 패권과 영향력이 과거와 비교하여 상당히 기울었던 점을 인식하고 이를 위해 안정적인 국정 운영과 그 한계를 받아들여 그전과는 달리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때로는 이스라엘이 포함된 중동 정세에서 우유부단한 모습을 오바마는 보이기도 했는데요. 그런 배경에는 미국의 쇠퇴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지만, 중동에서 이스라엘을 제대로 억제하지 못한다면 물론 약간 다른 논법이지만, 저자의 말대로 중동에서 제3차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이란의 핵문제와 이스라엘의 과도한 대응이 미국과 동맹국을 전화로 이끌 가능성이 있는데요.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과연 트럼프가 국제 정치 무대에서 이러한 파급 가능성을 과연 이해하고 있었는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는 미국의 백악관을 차지하기 위해, 무소속이나 제3의 후보가 되는 길을 고려치 않고 공화당을 점령하는 길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특히 트럼프가 “인종적 배타성에 근거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화신”이고, 티파티를 비롯한 극우 포퓰리즘과 러스트 벨트를 비롯한 하류층 백인 남성의 지지를 얻고 당선에 이릅니다. 이러한 지지층의 파괴력으로 말미암아 공화당 내 꽤 건전한 보수주의자들 역시 트럼프에 굴복해 그의 지지기반이 된 점은 매우 유감스러운 상황입니다. “이런 트럼프의 포퓰리즘을 지성주의적 리버럴들이 불편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운동”이라고 저자는 평가하며, 여기에 대한 미국 리버럴들의 단순한 격하한 평가와 대응 부족은 지난 3년간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약간 다른 관점이겠지만 좌파 포퓰리즘과 같은 민주적 원동력을 주장한 샹탈 무페를 저자도 인용하고 있지만 인종주의와 엘리트 층에 대한 격렬한 분노 그리고 쉽게 선동되어 버리는 극우 포퓰리즘을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맥락 속에 존재한다고 이해하는 저자의 판단에는 불행하게도 동의하기는 힘들었습니다. 미국의 고도화된 반지성주의적 분위기에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의 출현을 예견한 리처드 호프스태터의 인식을 감안하더라도 이 극우 포퓰리즘을 자유 민주주의의 어떤 사생아 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집니다. 사실 저자 역시 맺음말에서 이러한 위험스런 정치 변동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시민들의 중요한 당위적 행동들과 인식의 확장 등을 여러 문장들로 제안하고 있습니다만, 시민이 자신만의 왕성한 지적 욕구와 깊은 성찰과 토론을 통해 선동 정치가들의 궤변을 논파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 현재까지 다수의 시민들을 이러한 공론장에서 퇴출시켜 버린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그냥 몇마디 말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지성주의가 지성주의를 압도하는 시대”라고 표현하는 저자의 언급은 매우 설득력이 있습니다. 물론 왠만한 지성주의 시대로 표현되는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과도한 믿음 또한 문제이긴 하지만, 트럼프 지지자들과 엘리트 들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이것이 과연 정치 발전을 위한 대응인지 아니면 표만 얻으면 그만이라는 어떤 선동 정치인의 의도가 숨겨져 있는지는 꽤 명백해 보입니다. 다만, 이것과 관련해 저자가 설명한 “비통한 자들이 땅 위에서의 비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위대함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해선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앞선 부분에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어떤 욕망이 내포되어 있는 듯 보이는데요. 이들이 스스로 비루함을 선택한 것은 아닐텐데, 마찬가지로 젠더와 같은 개념이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것과 같이 이들의 비루함 또한 개인의 온전한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저자가 인정하듯이 “1980년대 이후 지속된 신자유주의적 영향”과 이를 레이건 시대에 양 정치 세력이 용인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끝으로, 1960년대 현재 트럼프의 아버지로 지칭해 될 만한 포퓰리시트였던 조지 윌리스와 마찬가지로 로널드 레이건을 트럼프와 한 묶음으로 만든 저자의 결단에 박수를 치고 싶었는데요. 리처드 닉슨과 로널드 레이건이 겉으로 표징하는 이념이 보수에서도 더 오른쪽이지만 이들이 꽤 유연한 정치적 판단으로 놀라운 결과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중국에 대한 긴장 완화와 소련에 대한 데탕트를 초래한 것 등과 같은 사례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야한 리처드 닉슨이나 때로는 정치색을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널을 뛰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정치인의 단일한 색깔을 정할 수 없을 정도로 (긍정적) 혼란을 준 것은 분명하나, 특히 레이건과 같은 경우도 그의 업적에 비견될 만큼 과도하고 불법적인 일들을 벌인 것은 분명합니다. 현재 미국 내에서 레이건의 위상을 고려해 본다면 그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빨리 제대로 이뤄졌음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또한, 트럼프 현상을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 기반해 해석한 것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고, “양극화한 적대적 정치”이라는 현재 미국 정치의 일면을 어느 정도 드러낸 점은 좋은 평가를 받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결론에서 많은 독자들이 오로지 얼마간의 국제 기사에 의지해 글로벌 현상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제언 역시 크게 공감할 만했습니다. 다만, 이러한 환경을 제대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먹고사니즘’을 얼마나 극복할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이 먹고사니즘과 관련해 오해를 방지하고자 더 첨언하다면, 자신의 의지만으로도 충분한 문제들을 모두 먹고사니즘으로 몰고가는 행위를 주요하게 표현한 것입니다. 물론 막줄은 이 책의 서평과는 매우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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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로베르트 미지크 지음, 오공훈 옮김 / 그러나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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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이 글의 저자 로버트 미지크는 1989년 ‘아르바이터 차이퉁’을 거쳐 92년부터 97년까지 프로필의 독일 베를린 특파원을 역임한 좌파 언론인입니다.또한, 그 이후에도 팔터, 프라이탁, 융에 벨트, 노이에 도이칠란트,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및 자이트 지에 기사와 칼럼을 기고 하는 등 오스트리아와 독일 양국에서 비판적인 언론인으로서의 왕성한 활동을 해오고 있는데요. 여기에는 흔히 좌파 지식인이라면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던 분야인 비디오 블로그에 자신의 정치 비디오쇼인 “FS 미지크”를 운영하고 있기도 한데요. 스스로를 말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성격이라고 겸손을 담고 있지만,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 지식은 단순히 앎이 아니라 실천하는 것이라는 것에 그 스스로 몸소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봤습니다. 저에게는 미지크와 관련해 얼마전 “고장난 자본주의”에 이어 두번째 서평이기도 한데요. 구글에서는 오스트리아에 출판된 그의 책이 여럿 검색이 되는데, 조만간 그의 다른 책도 국내에서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이 책의 원제는 “Was Linke Denke”로 지난 2015년 출간되었으며, 국내에는 201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저자인 미지크가 책의 결말에서 이 책의 취지에 대해 “좌파는 무슨 생각을 하는가”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국문으로 번역된 이 책의 제목 “좌파의 생각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는 상당히 본래 의미와는 거리가 먼 것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제목을 다른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오만하게 느껴질 수 있기도 한데요. 물론 독자들의 눈에 쉽게 들어오게 하려는 의도야 충분히 이해는 되지만 이런 시도는 조금 지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다시 본래 글로 들와서, 저는 여기에다 “소위 탈이데올로기 시대에 좌파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지금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좀 더 드러난 의도라 여겨집니다. 아주 단순한 구성적인 측면에서 보면 구체적 담론을 드러내는 매우 진지한 논저라기 보다는 ‘좌파의 생각’ 그리고 이들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 사고, 인식 등이 꽤 단순하고 설득적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미지크 본인 뿐만 아니라, 번역가의 노력도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래서 번역 역시 칭찬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날 세계의 자본주의가 최근 한차례의 심각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주요한 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체제로서 대안이 없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신자유주의와 한몸이 되면서 이 틈에 정치가 들어올 자리는 분명 없었습니다. 이쯤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마거렛 대처의 말대로 “대안은 없다”는 식의 맹목주의적 믿음이 과연 모두에게 합당한 결과를 낳았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이 신자유주의적 권력을 제대로 견제하기 위해 진보주의와 좌파의 지리멸렬이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난 연유에는 아마도 샹탈 무페의 “좌파가 일반 시민들과 유리되어 있었다”는 해석대로 그 원인의 일부가 설명되지 않나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1980년대의 좌파에 경도된 학생들이나 지식인들은 스스로 의문을 갖고 수많은 서적을 읽으며, 사고를 확장하고 사색하는 일에 몰두했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사회에 해악이 되지는 않았다”고 돌아보고 오히려 이러한 학생들은 분명 소수였지만 주변에서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었다고 그는 회상합니다. 더불어 “생각과 이론은 우리의 머릿속에서 우리가 계속 깨어 있도록 한다”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그즈음 도래한 포스트 모더니즘에 분개하고, 다 같이 치열하게 토론하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그것이 사회와 지배논리에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모습이기도 했다고 돌이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미지크는 우리의 자본주의가 모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어떤 부분은 나아갔고 어떤 부분은 후퇴했다고 특히, 좌파는 이를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오늘날 내면화된 자본주의가 개인의 창의력과 성취욕, 개성에 있어 이바지한 부분은 확실해 보입니다. 다만,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식대로 냉전 이후의 세계 유일의 무결점 이념이라는 식의 해석은 물론 과도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애초에 우리가 좀 더 건전한 자본주의를 기대한다면, 미지크의 주장대로 “좌파에게도 적당한 표를 줄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겠죠. 그전까지는 많은 좌파는 혁명 담론에 매몰되어 현실적으로 거의 가능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다른 좌파와의 갈등도 심화시켜 왔습니다. 수많은 연결된 시민들과의 연대를 그동안 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들이 존재합니다만 1장에서 표명한 대로 좌파가 여러 사람들과의 연대에 관심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이 점은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와 연계해서도 매우 중요한 행동 양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예전처럼 다양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방식의 의견 교환이 구시대물이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세계에서 토론하고 서로의 의견을 확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온라인상에서의 수많은 사람들과의 연결 만큼이나 오프라인에서는 우리 스스로가 끊임없는 의구심과 의문을 갖고 많은 지적 탐구를 병행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부속품’이 되지 않는 길임은 명확해 보입니다.

다음, 우리의 비판, 좌파의 비판은 이렇습니다. 저자인 미지크의 말대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반대하기, 흠잡기를 일컫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방식의 해부, 개념에 대한 분석, 전제 근거와 비난에 대한 분석, 숙고와 이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것을 뜻”하는데, 여기에는 오로지 비판만 있었으며,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패착이 숨겨져 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에 근거한 이런 비판 인식이 자본주의의 오류에도 불구하고 ‘선명성을 견지하는 좌파들의 도덕적 측면’이 반대편에 있는 이들에게 어떤 우월감을 가져다 주웠을 뿐, 좌파 자체가 시민들과 괴리되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우리의 노동을 어떤식으로 규정지어야 할지에 대해 폭넓은 의견 제시도 하지 못했을 뿐더러 개개인의 개성의 표출이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소비 지상주의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하지 못했던 것은 ‘좌파의 정신’이라는 것이 과연 우리들 주변에서 선명하게 존재하는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만드는 증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민 개개인들의 삶이 전체적인 체제의 측면에서 ‘품위있는 삶과 마땅한 행복 그리고 도덕적 건전성’을 마땅히 답보해야 되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프레카리아트’라는 신조어가 만들어질 당시에 좌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에 대해서도 역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지크가 강조하는 대로 푸코가 우리가 얼마나 권력에 취약한지에 대해 예견했던 것은 뭔가 계시로까지 여겨지기도 합니다. 자본주의가 있는 그대로 여러 모순을 안고 있다는 점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음에도 체제의 권력과 또한, 그 체제의 권력 마저도 누가 휘두르고 있는지 불명확한 시대에 우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권력에 대한 사안은 매우 복잡하다”는 그의 평가는 이렇게 정확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권력의 문제를 차치하고서는 찾을 수가 없으며, 마땅한 시민의 권력을 정치 엘리트들과 경제 엘리트들의 야합에서 빨리 되찾아야만 하는 당위를 이 글 6장과 7장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인간 소외’를 좌파 역시 짐작해 냈지만, 앞선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스스로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더욱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심각한 인종주의적 오류에 빠져 있었고, 자신들의 역사 이외에는 다른 역사는 상종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이기까지 했는데요. ‘이 겹겹으로 축적된 이데올로기’에 의해 오히려 인간 소외와 식민주의는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화해를 막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민해봤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의 화해는 이처럼 어려운 부분이 존재한다고 봐야하겠죠.

이처럼, 좌파가 관심을 가지로 지켜봐야 될 사회의 여러 이면은 아직도 많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마지막 이 글의 결론에서 “의문을 품으며 우리는 전진한다”는 끝맺음은 다음 세대의 좌파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어떠한 믿음이라도 최소한 세번 정도는 의심해야 한다”는 어떤 비범한 개인의 통찰은 앞선 미지크의 논법과도 매우 부합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끊임없이 의심하는 마음이 다른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저자인 미지크의 숨겨진 의도가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그가 왜 좌파일 수 밖에 없는지는 이 글을 통해 약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럴때는 그와 같은 용기가 매우 부럽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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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DP의 정치학 -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절대숫자
로렌조 피오라몬티 지음, 김현우 옮김 / 후마니타스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이탈리아 로마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인 로렌조 피오라몬티는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프리토리아 대학에서 정치학 교수로 일하고 있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헤르티 커버넌스 스쿨의 연구원이면서 동시에 뉴욕 타임즈 및 가디언 지 등에 칼럼을 기고 하고 있는 정치경제학 계통의 전문가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연구를 하고 있는 관계로 현지의 지역 경제에 관심이 많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연구 분야 중 하나인 전반적인 GDP 경제학이 세계의 다른 빈곤 국가들에게 어떻게 별다른 소용이 없었는지에 대해서도 학자적 호기심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이 책의 중요한 주제장인 3장, ‘GDP 퇴위를 위한 지구적 모색’에서 GDP와 아프리카 및 남아메리카 국가들의 GDP 사조에 따른 부작용 사례들과 상대적으로 빈곤국인 부탄과 코스타리카 국민들의 행복 지수 등을 제시하며 실질적으로 이 GDP가 시민의 안녕과 삶의 질을 설명해주는 지표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3년에 “Gross Domestic Problem”이라는 원제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6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다만, 현재 피오라몬티의 이 책은 절판된 상태인데요. 책의 재간행을 앞두고 있는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다른 번역본은 아직 판매되는 것으로 보아 꽤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우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자인 피오라몬티가 본문에 언급한 중요한 문장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자유 시장 경제학자들은 시장 메커니즘은 상황에 따른 가격 조정을 통해 희소한 자원을 대체하도록 인도하고 발명가와 기업가들이 다양한 기술적 해법들을 개발하도록 촉진함으로써, 결국 붕괴를 예방하게 할 것이라고 보았다”는 일종의 평가는 꽤 명백한 결론을 갖고 있습니다. 일찍이 멜서스가 낙태와 과감한 인구 계획 및 전쟁 상황을 경제상황에서 이용하자고 주장했던 것과 같이 효율성과 효용 및 경제 시스템하에서의 인간과 사회를 사실상 부속으로 취급한 것은 일련의 경제학 발전과정에서 매우 무분별하게 인용되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애덤 스미스도 자신의 그 유명한 논저가 모든 상황과 환경에서 무조건적인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하리라는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특히 2008년에 일어났던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가 당시에 고도화된 금융 시장을 선도했던 경제 엘리트들이 과연 합리적이었는지는 모든 경제학자들이 스스로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자 역시 GDP의 도덕적인 측면이 전무하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 있고, 성장 일변도의 경제적 논법이 겉으로 보이는 규모의 경제는 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일면에는 수많은 문제점을 근대 이전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키워 왔다는 것은 모두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짧은 분량의 서론과 1장에서는 어쩌면 냉전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이 GDP가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간략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전시 계획의 일환으로 효율적인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마련한 쿠즈네츠의 이 경제 도표는 프랭클린 루즈벨트 행정부가 대공황을 벗어나는데 기여를 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그전까지는 전년이나 10년전의 통합적인 경제적 지표가 불분명해 당시 기준으로 내각에서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도 인정될 만합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쿠즈네프의 역할은 지대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그가 1941년에 “국민소득의 계측은 항상 암묵적인 또는 명시적인 가치판단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과정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고 인정했습니다. 이 부분이 그가 갖고 있던 GDP에 대한 부정이라고 볼 필요는 없으나, 한가지 명확해 보이는 것은 2차대전 이후 권력층과 엘리트들에 의해 자신들이 주도한 경제 정책의 당위성을 보장해주는 지표로 이 GDP를 이용해 왔으며, 소위 양적인 측면의 외형적 성장이 그 내실이 어떠하던 간에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는 데 이용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마르티아 센과 더불어 GDP에 비판적인 세르주 라투슈 역시 “이 GDP에 대한 믿음”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저자인 피오라몬티는 이렇게 질문합니다. “경제가 2퍼센트 또는 3퍼센트 성장할 때 마다, 우리의 삶의 질 역시 같은 정도로 향상되는가?”라고 말이죠. 여기서 GDP 수치의 가장 큰 문제점은 “권력의 지배의 도구로 널리 쓰였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정부가 민주주의적 가치를 잘 떠받든다 하더라도 경제에 있어서는 경제 자체와 정치간에는 범접할 수 없는 경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행은 근대의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세계 경제를 주도하고 이것이 시민의 삶 깊숙이 들어오자 마자 시장을 마땅히 견제해야 하는 정치의 역할이 축소되고 말았습니다. 이를테면 경제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이윤을 얻는 활동 모두는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유일주의 말이죠. 물론 자유 경제 시스템하에서 기업과 개인이 경제 활동을 하면서 이윤을 얻는 것은 중요합니다. 다만, 수많은 개인들의 체제를 뒤흔들지 않는 이윤 추구는 마땅히 지켜볼 만하나, 거대한 다국적 기업들과 거의 반독적점 지위를 악용하는 기업들의 매우 쥐어짜내는 이윤 추구와 영리활동 그리고 반면에 사회적 책무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 이러한 자본과 경제의 고삐풀린 이행은 아마도 현재의 많은 문제를 촉발시킨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가 강조하는 “게임을 지배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는 것”은 이래서 중요한 것이며, “재화와 서비스에 지불되는 가격들이 경쟁 시장이라는 틀 속에서 반드시 결정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앞선 서술한 측면에 들어맞는 이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GDP로 해석되는 경제 담론에서 “사람의 마모에 대한 경제적 적용”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과 “한 사람의 노동가치를 과연 경제적으로 측정할 수 있겠는가”와 “GDP에서는 소위 ‘역량의 고갈’이라는 지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GDP를 설명하는 수많은 기업들의 잘못된 관행등과 로비 움직임과 같은 것들을 여기에서 더 서술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현재 지속적으로 시민의 삶을 측정할 수 있는 세계 공통적인 지표를 특히,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다음 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이 책에서는 총수입계정체계 TISA와 물질적 삶의 질 지수 PQLI 및 국제적인 인간 고통지수 HSI 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스티글리츠와 아마르티아 센의 공동 작업 등도 꽤 개선된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여기에서 문제는 이러한 연구 작업과 개선 움직임이 어떤 소수의 단체나 초도 단계에서 시도되는 것보다 현재 세계 주류 경제학에 있는 학자들이 “그 시장의 합리성” 문제를 다시 저울위에 올려보는 것으로 시작해야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바마 행정부 때 세계은행 총재로 추대받은 김용이 성장 지상주의자들과 여러 언론에서 비판 받았던 것을 고려해봤을 때, 아직도 주류와 다수 시민들의 요구와 해석에는 그 견해차가 상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보통의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해석수단과 도표와 숫자들로 증명에만 힘썼던 나머지 현실을 도외시한 측면이 있다고 비판한 것은 귀담아 들을만합니다. 더욱이 이들 경제학자들이 자신들의 전문 분야에 대한 비전문가들의 비판을 매우 억울해 여겨왔던 것을 비추어 봤을 때, 과연 이들에게 다수의 이익이 과연 존재하는지에 대해 다소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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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자유주의 양심 현대의 고전 12
마이클 하워드 지음, 안두환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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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에 의해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라는 평가를 받은 전쟁사가 마이클 하워드는 옥스포드 대학의 치첼리 전쟁사 교수를 역임하고 미국 예일대의 러벳 해군 역사학 교수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런던 킹스 칼리지의 전쟁 연구 담당 교수로서도 명성을 떨치기도 했는데요. 마찬가지로 영국 내에서 양차대전에 대한 연구로도 명성이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잉글랜드 버크셔에 소재한 웰링턴 대학을 거쳐 옥스포드에서 수학한 그는 앞선 대학 교수와 연구자의 이력을 통해 유럽 전체 학계에서도 전쟁사 분야에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학자였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그는 2019년 11월 세상을 뜨고 말았는데요. 97세에 이르렀던 나이를 생각하면 노환으로 숨을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만 이렇게 노련한 학자가 세상을 등진 것은 어찌됐든 매우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의 이 책은 지난 1977년 초도 출판되어, 최근인 2008년에 일종의 개정판으로 신판이 출간되었습니다. 원제는 “War and the Liberal Conscience”로 국내에는 2018년 10월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특히 “마이클 하워드의 전쟁과 국제정치 3부작”이라는 시리즈로 그 가운데 ‘평화의 발명’은 절판인 상태지만, 나머지 ‘유럽사 속의 전쟁’과 이 책은 현재 시중에서 구하실 수 있습니다.

처음 책장을 넘기면서, 앞쪽에 문고판 서문이 있길래 처음에는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색인을 포함해 약 478페이지의 분량이 어떻게 문고판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었는데요. 결국 책을 다 읽고 나서야 그 의문이 풀렸습니다. 주를 포함한 원래의 본문은 203페이지고, (아마도) 옮긴이가 특별히 수록한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명색인이 250여페이지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일반 위키백과에서 찾아 보기 힘든 고트프리트 헤르더와 같은 인물의 상세 정보가 있어 일종의 보론으로 충분히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봐도 일견 무방해 보이기도 했는데요. 다만, 이 ‘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이 먼저인지, 아니면 그에 따른 ‘인물 색인’이 먼저인지는 분량상 불확실해 보이긴 합니다만 보는 분들에 따라서 출판사의 이런 분량 추가는 마냥 즐거워보이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 추가된 분량 때문에 그만큼 책가격이 올랐기 때문입니다.

다시 책 내용으로 돌아와서, 마이클 하워드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주제는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15세기 이후의 자유주의가 그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제정치에서 어떠한 결과를 낳았고, 이들이 혐오해 마지 않았던 군비경쟁과 세력 균형보다 못한 파급을 초래한 것을 꽤 객관적으로 비평”하고자 하는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선 결과물은 칼 포퍼의 몇줄 통찰과도 상당히 일치하는데요. 천국으로 만들려는 노력이 결과적으로는 사회의 지옥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죠. 더불어, 여기에는 칼 포퍼 역시 자유주의를 신봉한 학자라는 것이 매우 흥미로운 점인데요. 뭐 거창하게 역사의 장난이라는 것으로 뭉뚱그려 쓸 필요는 아마 없을겁니다. 이어서 전제 권력에 의한 개인의 자유 증대라는 가치의 15세기 자유주의 태동은 유럽의 일반 전제 군주들이 상업적인 목적이나 자신의 위신을 위해 혹은 복잡한 혼맥에 따른 요인 등으로 당시 국민들의 의사와는 다르게 전쟁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이러한 전쟁을 방지하고 어떻게 하면 평화를 구축할 수 있겠느냐에 대한 기본성찰과 그에 따른 평화의 일반적인 이론을 상기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1장과 2장에 등장하는 에라스무스와 벤담, 밀, 루소 등의 발자취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열렬한 계몽주의자였던 몽테스키외 조차도 “군주정의 정신은 전쟁과 지배의 확대에 있다”는 평가 또한 동일한 범주안에 있는 해석일겁니다. 이러한 이념의 발전 가운데 임마누엘 칸트는 자신의 ‘영구 평화론’에서 “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시민이 되는 국제 사회로의 발돋움으로 공화주의적 헌정 체제에서의 책임 있는 정부가 주가 되는 정체”가 평화 상태의 구축에 필요한 요소로 꼽은 바가 있습니다. 물론 저자인 마이클 하워드 역시 사실상 민주주의와 이를 따르는 국가들이 더 많아져야 국제정치가 평화로울 수 있다고 동의하고 있는데요. 다만, 5장 파시즘의 도래에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1943년 당시 히틀러에게 체코의 할양을 승인했던 “뮌헨 회담”을 지지하는 소위 자유주의적 양심이 히틀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었는지는 매우 명백합니다. 여기서 한가지 구별되어야 할 점은 정치를 주도하는 영국의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이때의 평화를 반겨했으나, 다수의 시민들은 이에 대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졌다는 점은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닌가 싶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국제주의적 이상주의에 탐닉했던 우드로 윌슨과 그의 추종자들이 고안한 국제 연맹 체제가 1935년 이탈리아가 같은 국제 연맹 회원국인 에티오피아에 대해 야욕을 드러냈을 때, 영국이 주도한 협의체가 이탈리아에 에티오피아 할양을 승인한 이 아비시니아 위기와 그 이전인 1933년 동유럽 소수 민족의 자치와 민족주의를 무시한 4국 회담이 어떠한 결론에 이르렀는지 역시 자명합니다. “집단 안보의 유일한 보장책은 여론의 힘”이라는 벤담의 견해가 얼마나 순진무구했는지는 “일본의 만주 침공과 독일에서 히틀러의 등극은 아비시니아 위기 이전부터 이미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 것인지 암시했다”는 저자의 판단에도 예측되고 있습니다. 일찍이 많은 자유주의자들은 민주주의 정권이 군사력을 증대하고 전쟁 준비를 하는 것을 일종의 비도덕적인 문제로 폄하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에서 증대되었던 민족주의적 위기는 아직은 세계가 “평화보다는 자유가 더 필요하다”는 뼈아픈 현실을 드러내었다고 여겨집니다. 즉, 권력의 주체라고 불리거나 이를 뒷받침하는 자유주의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이 세력 균형 자체를 도덕적으로 혐오했으면서도 외형적으로는 그것을 답습해 나갔다는 점은 이론과 현실은 엄청난 격차를 보인다는 증명이겠죠. 개인의 자유라는 기본적인 개념과 이를 확대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일종의 보기 힘들었던 개혁적 상황이 그러한 이상적인 상태를 고려하더라도 무조건 평화를 가져다 주지 않았다는 점도 역사의 비참함인지 아니면 그 자유주의 양심의 순진함인지는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한 승전국들이 독일을 국가 상태로 나둬야 하냐는 불확실한 두려움에도 독일을 일반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개조시킨다는 의지는 꽤 흥미로웠습니다. 물론 국제정치학적 지점에서 독일을 영국과 프랑스의 방파제로 만든다는 핵심이 들어가 있었지만, 결국엔 제국주의적 대결에 지나지 않았다는 2차대전의 비판에도 스탈린의 소련을 제외한 승전국은 자유 민주주의가 독일에 필요하다는 공감대에 긍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신봉하고 있듯이 시민이 주가 되는 공화주의적 정부들이 평화 구축에 도움이 된다는 이념에 동의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논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선 3장의 1차대전과 관련해서 저자가 일부 역사가들이 오도하고 있는 자본주의 대 사회주의 대결 내지는 자본가와 노동자들의 대결에서 비롯되었다는 오해를 비판하고 “적어도 유럽 대륙에서는 평화가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해야만 하는 전쟁을 더 치러야만 도래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는 해석은 꽤 의미심장하기도 합니다. 1차대전을 뭔가 이념대전으로 매몰시키지 않고 국가간의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자유주의적 열정과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은 1차대전 전후의 가장 큰 문제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과거 E. H. 카가 1차대전 즈음에 흘렀던 전쟁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와 동경은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우리가 역사를 통해 대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각 국가들간의 광적인 군비 경쟁이 최소한의 갈등의 조절 능력을 상실하게 만든 연유가 아닌가 짐작해 보기도 하는데요. 따라서, 국력 확장의 시기에서 서로간의 이해하는 군축의 필요성과 갈등을 이성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동등한 국가들간의 협력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지난 1차대전의 경험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계몽주의적 담론의 확대와 시민 사회의 자유를 함양시켰던 자유주의 자체의 이념은 충분히 근대의 맥락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무분별한 이상주의에 근거해 윌슨의 국제적 협력주의를 허무하게 끝내게 되었고, 특히 당시에 부상하고 있던 동유럽과 유럽 각지의 민족주의를 백안시한 점은 자유주의의 패착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민족주의가 자유주의와 함께 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꽤 면밀한 논의가 있어야만 했으나, 이성이 없는 민족이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민족주의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것이 결국 유럽에 엄청난 파급효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크나큰 실책입니다. 물론 1차대전 이후 급격하게 붕괴한 세계 경제 상황에도 대전이 한번으로 끝나지 않고, 혐오스런 전체주의를 잉태했던 것은 자유주의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한편으로는 얼마나 순진함에 가득차 있었는지는 이것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개인 뿐만 아니라 민족의 생존 문제는 그것의 영향력이 지대할 수 밖에 없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하고 과연 ‘국가 이성’이라는 것이 실존할 것인가에 대해 뭔가 깊은 고찰이 더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보다 이성적인 측면에서 그리고 객관적인 근대와 자유주의를 바라보고자 하는 한 역사학자의 이 글은 단순한 전쟁사가의 논법이라기 보다는 꽤 노련한 철학자의 연구물로 느껴질 정도로 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곧 마이클 하워드의 번역된 다른 글도 찾아보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만큼 시대의 이성과 시민들의 합리성 그리고 자유에 대한 전반적인 양심에 대해 역사적 기록으로 탐구해 볼 수 있는 훌륭한 글이 아니었나 판단해봅니다.




-156페이지의 헨리 모겐도는 헨리 모겐소로 수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173페이지의 뮌헨 협정과 관련된 문장에서 뮌헨 옆에 ‘협정’의 표기가 없었습니다. 양장본으로 만든 이 책에 이런 자잘한 편집 오류를 수정하지 않은 것은 매번 하는 말이지만 실망스런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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