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스 캘리니코스 시사논평 - 양극화, 극우, 좌파
알렉스 캘리니코스 지음, 이정구 엮음 / 책갈피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디지아 남부 솔즈베리에서 태어난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영국의 정치 이론가이자 동시에 좌파 사상가입니다. 그는 옥스포드의 발리올 컬리지에서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그곳에서 그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크리스토퍼 히친스를 만나게 됩니다. 이후 요크 대학의 정치학 교수를 거쳐, 2009년 9월, 킹스 컬리지 런던의 유럽학 교수로 임명되는데요. 캘리니코스는 경우에 따라 미국을 오가곤 했지만 주로 영국에서 활동한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특히 영국 정치권이 미국의 요구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행태에 있어 이를 강하게 비판해 왔으며, 유럽의 신자유주의와 이것을 통해 광범위한 이익을 얻는 '극단적 중도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최근 벌어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서도 "자본주의 경쟁에 의해 앞으로 나아가는 제국주의 라이벌 국가들 사이의 진행 중인 전투"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캘리니코스를 로베르트 웅거와 자주 비교 분석해 보기도 합니다. 참고로 그의 이 책은, 일종의 시사 논평집으로 영국의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에 그가 쓴 시사 논평들 가운데 일부를 편역해 출간한 것이기도 한 데요. 따라서, 국내에는 지난 2021년 1월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캘리니코스의 이 책은, 미국 정치와 유럽 정치의 양극화와 최근의 브렉시트와 전세계적 코로나 19 사태 등을 다루고 있는데요. 대략 2002년부터 2019년 사이에 쓴 다양한 논평 들을 주제 별로 편집하여 엮은 것입니다. 그가 전세계적으로 드문 좌파 사상가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미국 오바마 정권부터 도널드 트럼의 집권, 그리고 최근 코로나 19 사태에 있어 어떠한 비평을 보였을지 어느 정도 짐작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더군다나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의 맹렬한 비판자임을 감안해 본다면, 미국과 유럽을 비롯한 기득권 정치와 이를 지지하는 정치 세력과는 완연히 다른 정치적 스탠스를 취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특히 신자유주의의 전반적인 실패와 시장 자유라는 맹목적인 신뢰에 대한 그의 날선 비판은 유독 이 글에서도 도드라져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의 이 논평에서 제가 주목한 부분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극단적 중도파'라는 대목이었습니다. 이는 유럽의 현체제를 빗대어 여실히 분석한 것이기도 한 데요. 이를 약간 돌려 생각해 본다면, 최근 미국의 정치에도 마찬가지로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비슷한 시기의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상황에서 이 정권을 지지했던 유권자들을 분석해 보면 어느 정도 극단적 중도에 대한 개념이 도출되는데요. 캘리니코스는 이미 1장에서 인정하고 있듯, 도널드 트럼프는 여성 차별주의자이자, 인종 차별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트럼프를 강고하게 지지하는 세력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집중 공격한 이유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일전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 정치 무대에 등장한 정치인이 대놓고 인종 혐오와 여성의 성적 취급과 같은 최악의 것들을 거리낌 없이 대놓고 드러내는 행위에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머릿속에만 들어 있는 그와 같은 것들을 감히 입 밖으로 드러내는 시도 자체가 (정치적으로) 매우 잘못된 행위라는 것입니다. 하여튼 이러한 트럼프의 집권이 기성 정치의 실패와 체제 전반의 과오를 '분노 정치'로 돌려,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그야말로 양심이 구축된 정치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한마디로 극우 포퓰리즘의 명확한 실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문제적 실체에 대해 캘리니코스 역시 동의하고 있었는데요. 트럼프를 '비이성적 인종차별주의자'로 언급하는 대목에서 선동하는 정치와 기득권 정치의 실패를 분노로 돌리는 교묘하고 무책임한 행태임을 독자들은 다시 한 번 목격할 수 있을 겁니다.

사실 본질적으로 미국 정치의 실패도 거의 맹목적으로 사회에 신자유주의를 이식한 결과라고 여겨집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2009년의 전세계적 금융 붕괴에 있어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경멸하는 '국가의 지원, 즉 국민들의 세금'으로 자신들의 이익적 기반인 '금융 시장'이 구원을 받았지만 여기까지 이르는 동안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음으로써 미국의 주택 시장의 몰락과 더불어 평범한 시민들의 극심한 고통을 무시하였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정치의 무책임한 방기'리고 볼 수도 있겠지만 핵심적인 사항은 '시장 자유 담론'에 우리 모두가 여지없이 인질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캘리니코스는 엄중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이후 벌어진 충격적인 '코로나 19 사태'에 있어서도 다시 한번 그는 다시금 신자유주의가 실패했다고 단언하고, 이 시기 제한적인 통제에서 벌어진 거리 두기에서 "시민들이 자신의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너무 아끼는 것이 문제"라는 유럽과 미국의 대기업과 우파 정치인들의 망언은 대체로 경제적 이익이 얼마나 그들에게 중요한 문제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캘리니코스는 이에 대해, "죽음에 맞선 삶이란 (극명하게) 이윤에 맞선 삶"이라고 일갈하기도 하는데요. 신자유주의 체제가 과연 이 코로나 19 사태에서 위태로운 전염병에 노출된 시민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제대로 하기 위한 일말의 노력이라도 기울였는지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빈국이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가용 자원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 시기에 혹독한 긴축을 겪어", 이 시기에 선진국과 빈국의 실질적 사태 해결은 그만큼 '돈'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우리가 과거 경험한 2009년의 대붕괴에서 G20과는 달리. 최근의 미국과 유럽, 그리고 중국이 이 사태에서 제대로 협력하지 못했다는 그의 분석은 실로 뼈아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이 3개의 권역이 자신들의 이기심 때문에 결국 협력할 시기를 놓쳤다는 것이 보다 타당한 분석이라 여겨집니다.

마찬가지로 최근 브렉시트와 관련해서도, 영국 정치 내에 극심한 사회 분열은 캘리니코스가 분석한대로 유럽의 '첨예화 된 양극화 정치'와 매우 연계되어 있습니다. 이는 신자유주의를 통한 금융 자본들의 막대한 이익 유지라는 관점에서 브렉시트는 어느 정도 결부되어 있는데요. 시티 오브 런던이 뉴욕의 월스트리트에 버금가는 전세계적 금융 중심지라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영국의 기존 정치권이 브렉시트와 관련된, '국론 분열'에 있어 일반 시민들에게 왜 무능해 보일 수밖에 없는지 대략 이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을 거치지 않는 금융 거래에 집중한 영국 금융 엘리트들이 현재의 정치권과 결탁해, 브렉시트를 (잠정적으로) 원했다는 것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더욱이 시티 오브 런던에 대한 이들 엘리트들의 무한한 자부심과 캘리니코스가 비판하는 '사모펀드 경영자들'과 맞물려, 체제를 지탱했던 소위 극단적 중도파들의 행태는 끝내 사회를 어떻게 분열로 이끌었는지, 그 논리적 맥락 또한 짐작케 합니다. 아무리 브렉시트가 캘리니코스가 언급하는 대로 유럽 연합과 영국 정계의 온갖 행위자들이 내린 정치적 선택의 결과라고 할지라도 최근에 더 심각해지고 있는 유럽에서의 양극화 정치가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앞서 언급했듯, 극우주의 혹은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우리 모두가 심각하게 바라봐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물론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시민의 파편화와 극단적 개인화를 조장하면서 사실상 시민 사회가 유명무실해졌다는 캘리니코스의 분석은 거의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그만큼 이는 현 시대의 부정적인 자화상이라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즉, 이는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와 시민권의 총체적인 부실로 이어진 것이라 추측되는데요. 아무리 자본주의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켜준다 하더라도 상업화 된 개인주의적 맥락은 그것의 양면성 내지는 부정적 측면이 단순한 서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글 말미에서 제가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신자유주의 실패로 인한 극우 포퓰리즘의 대두는 절대 현실 정치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점입니다. 극우 포퓰리즘을 배경 삼아 기성 정치에 들어간 인물들 모두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으며, 이보다 더 심각한 자들은 유대인 혐오나 이슬람 증오와 같은 인종주의 정치를 강화해 나가고 있습니다. 일전에 어느 정치 유튜버가 평가한 대로, 현 시대를 개선하기 위한 '똑똑한 시민' 내지는 '깨어있는 시민'이라는 제한적인 담론은 이미 상당한 정치적 변별력을 잃은 다수의 시민들을 고려했을 때, 상당히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는 일 조차 평범한 시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기득권의 저항에 노출될 수밖에 없고, 이에 캘리니코스가 제안하는 '민주적 계획 경제' 혹은 이를 좀 더 탈이념적으로 분석한 '시장에서의 민주적 통제'가 앞선 세기에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는 만연된 분노 정치에 있어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왜냐하면 금융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무조건적인 붕괴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에 누리엘 루비니가 거듭 경고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장미및 미래 만을 갖고 그저 단기적인 이익 추구에 매몰된 금융 자본주의 자체를 지금과 마찬가지로 전적으로 시장에 맡긴다면 우리의 정치가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 수밖에 없다 생각됩니다.


빌 클린턴은 미국 민주당이 이른바 ‘레이건 혁명‘을 수용하도록 해서 미국 공식 정치의 지형을 우경화시키는 데 핵심적 구실을 했다.

지금 벌어진 일(트럼프의 당선과 브렉시트 결정)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질서가 빚은 결과에 반발해 유권자들이 일으킨 커다란 반란이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 시기의 금융 투기로 성공한 인물로 그 질서와 결별하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의 당선을 보면, 신자유주의와 경제 위기의 결과들에 맞선 반란에 우파 포퓰리스트가 올라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 공화당과 영국 보수당의 주장과 달리, 코로나 19 방역과 경제 지탱 사이의 ‘균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부가 생명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대응한 나라들은 경기 수축의 폭이 더 적었다.

자율주의는 사회운동이 정치에서 독립적이어야 하며, 정당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운동의 요구들을 표현할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어떤 것으로 나타날지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영국 노동당과 프랑스 사회당은 신자유주의를 수용한 탓에 지금은 "사회자유주의자들"로 불리고 있다.

유대인 혐오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인종적 음모에 의한 왜곡이 문제라는 자본주의에 대한 피상적 비판에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강한 대처가, 신자유주의가 위기에 빠지면서 자신이 임명한 내각과 소속 정당의 지지를 잃고 한없이 몰락했다.

각국의 자본주의는 국민국가의 경계선을 따라 불균등,결합 발전을 해왔으며, 각국의 정치 지형과 계급투쟁의 양상도 상이하다.

이는 부분적으로 빈국이 선진국보다 가난해서 가용 자원이 부족하고, 상대적으로 취약한 의료 서비스가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시기에 혹독한 긴축을 겪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