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의무의 한계
허버트 스펜서 지음, 이상률 옮김 / 이른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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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프랑스 백과전서의 디드로와 약간 다른 성격이지만 19세기의 허버트 스펜서 역시 다방면의 학문을 섭렵하여 당시 다양한 주제의 접근을 통한 학문 기여에 이바지 한 사람입니다. 이에 위키 백과에서는 20세기에 그와 견줄 수 있는 사람을 버틀란드 러셀이라 규정하고 있기도 한데요. 후자인 버틀란드 러셀의 명성을 고려했을 때, 이와 견주게 되는 스펜서의 학문적 성과를 과소 평가하기에는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 사실입니다. 다만, 스펜서는 생물학적인 다윈주의에 심취해 이를 바탕으로 사회학에서의 ‘약육강식‘을 옹호했고 사회적으로 약자에 위치해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사실상 도태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한 인물로 악명이 높기도 한데요. 특히 애덤 스미스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자들에게 대거 인용됨으로써 스펜서 본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언급하려 합니다. 따라서, 지금 소개할 이 책은 허버트 스펜서가 집필한 ‘윤리학 원리‘의 국가론 부분을 발췌 편집해 후에 놓은 그의 논문인 자발적 개혁을 함께 실어 국내에서 편역한 논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영국이나 미국에 따로 원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임의로 만들어진 복잡한 편역본이 국내에 출시된는 것처럼 비슷한 맥락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아마도 역자 역시 국내에서 스펜서가 상당한 악명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를 특별히 옹호하기 위해서 스펜서가 자유방임주의자 보다는 ‘자유주의자‘에 가깝다고 평가를 하고 있기도 한데요. 사실 18세기의 계몽적인 자유주의의 전통을 고려한다면 일반적인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마땅히 보장받게 하기 위한 일련의 지식인들의 활동은 충분히 존경을 받을 만한 일이기도 합니다. 18세기를 거쳐 19세기에 이르러 당시 유럽이 큰 변화의 길목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며, 스펜서가 이 글에서 자주 언급하고 있듯이 ‘산업개발‘에 따른 국가사회적 패러다임의 변화가 소위 ˝수요와 공급에 따른 자연스런 이익 활동을 인위적으로 개입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스펜서는 아마도 시장의 이러한 활동 구조 자체가 흡사 자연 상태의 규칙과도 일맥상통한다고 여겼던 듯 싶은데요. 전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이러한 관념을 바탕으로 20세기에 넘어와 시장 자유에 대한 강력한 옹호를 내비쳤으며, 이것은 후에 신자유주의자들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사상적 토대 혹은 사상적 기반‘이라는 맥락으로 어떤 검증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사실 스펜서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 ‘공정한 사회 질서‘를 기반으로 ‘동등 자유의 법칙‘을 이 글에서 광범위하게 논증하고 있지만 신자유주의가 과연 저런 맥락에 맞는 사조인지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터무니 없는 비교라고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즉, 이러한 스펜서에 대한 맹목적인 신자유주의자들의 인용은 마찬가지로 애덤 스미스의 사례와 유사하게 본인에게는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글의 초입부터 스펜서는 ˝동등 자유의 법칙˝을 논하면서 모든 개인들의 공정한 자유, 권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진짜 이 얼마나 아름다운 주장입니까. 다만, 경제학의 기조 자체가 신자유주의적 논법으로 강화된 현재의 우리 상황은 스펜서의 저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자원을 가진 부유층과 기득권들의 자유가 어찌 일반 시민들의 자유와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저들은 능력주의의 강화라는 일환으로 자신들이 더 많은 자원을 갖게 된 연유에 이론적인 방호막까지 갖추지 않았습니까. 능력주의의 인식적 기반에 따르면 개인의 성공 여부는 오로지 각 개인들의 노력에 달려 있는 것이며, 그것은 정말로 성스럽고 진정한 사회의 진보라고 믿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시 원전으로 돌아가서 이 동등 자유의 법칙을 생각해보면 당시의 스펜서는 이 동등한 자유를 해치는 원인을 아마도 국가라는 개념에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공화주의 정부라 할지라도 국가가 전쟁에 돌입하게 될 경우 이런 개인들의 자유가 심각하게 훼손될 가능성이 있으며, 이 전쟁의 상태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 국가이기 때문에 국가가 본연의 사회와 시민을 보호하는 기본의 의무를 떠나서 전쟁 상황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개인의 자유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여겼던 듯 싶습니다.

따라서, 스펜서는 국가의 기본적인 목적은 ˝그 구성단위들의 복리˝로서 강조하기에 이르는데요. 이것은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정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연계되면서 그와같이 인식되는 것에 저로서는 크게 반대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스펜서 역시 이미 사회구조상 권력의 차이를 깊이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앞으로의 산업 개발 시대를 다소 예측하면서도 시장 지배의 관념과 부의 편중을 미리 감안하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문제를 너무 과대평가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더욱이 19세기 이후에 그가 말하는 완전한 산업 개발 시대로 유럽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전쟁의 명분만을 찾는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하게 됨으로써, 그가 그토록 경고했던 국가의 전쟁 행위가 반대로 제국주의 시대에 무차별적으로 발생한 것은 너무 극심한 국가 체제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스펜서는 이러한 국가론에 대한 홉스의 소극적 인용을 통해 국가 자체의 비효율성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비용에 따른 낭비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기도 한데요. 물론 기본적인 비용의 활용 측면에서 전쟁의 수행 보다는 자신이 피력하고 있는 동등 자유의 법칙을 위해 쓰이는 것이 논증으로 보아 설득력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앞서 제가 언급한바대로 이 산업 개발의 잉여 생산품의 문제가 결국 제국주의의 총구를 앞당긴 결과로 나타난 점은 그도 미처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라 봐야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스펜서의 정치 인식 역시, ˝정치인의 목적은 일반적으로 시민이 그의 소득에서의 공제를 부분적으로든 전체적으로든 의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후에 이러한 주장의 기반은 ˝각각의 시민은 살고 싶어하며, 그 것의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하게 살고 싶어한다˝는 3장의 인식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그는 정치 자체가 세금 징수가 얼마나 저항 없이 혹은 전혀 생각지도 않을 정도로 시민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행해질 수 있느냐에 정치의 정당성이 달려 있다 여기고 있으며 이것을 국가로 확대해서 분석해 보면 국가가 시민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이외의 비용 청구를 시민들에게 할 수 없다는 식으로 해설될 만한 여지가 있었습니다. 국가가 너무나 낭비하는 비용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스펜서는 일관되게 하고 있었는데요. 국가를 온존시키는 사회계약적 측면에서 아무리 그 존재의 필요성이 최소한의 목적이라고 할지라도 국가 자체가 효율적인 측면으로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의 광범위한 인식이기도 합니다. 이를 무슨 복지 국가의 논법이라고 비판하는 자들조차도 현대의 국가 개념은 너무나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민 각자가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히 살고 싶어한다는 앞선 주장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를 위해 지켜야 한다˝는 주요 맥락과 더불어 국가의 존재 필요성은 큰 틀에서 옹호될 수 있도록 반증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스펜서가 국가의 비효율적인 측면과 무리한 전쟁 행위 자체에만 요점을 두고 이를 비판하면 비판할 수록 국가의 필요성은 다른 측면에서 강조되는 것과 유사한 논리 체계가 진행된다고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스펜서는 사회 진화의 측면에서 국가 스스로가 호전성이 쇠퇴하고 산업주의가 상승하게 되면 수많은 계약 체제가 성립됨으로써 긍정적이 변화를 초래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한데요. 많은 시민의 결사체와 같은 인식을 통해 시민들이 스스로의 자결권을 얻게 된다는 점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국가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오히려 시민들이 각자의 의회에 호소하고 단체를 결성해 일종의 압력 단체 수준으로 진보하게 된다면 이것 자체가 스펜서가 옹호하는 시민사회적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한가지 제가 동의하기 힘들었던 부분은 노동자들의 이익 단체화에 대해선 사실상 그는 반대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노동자들의 궤멸적인 주장이라고 수식되는 일련의 행동들이 사회주의에 물들은 파괴적인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습니다. 이를 조금 소급해 이해해 본다면 스펜서는 노동의 문제 자체가 시장의 문제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를 의회에 호소해서는 안된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즉, 스펜서의 일관된 정치 영영의 한계 짓기는 이처럼 위험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가 신자유주의자들에게 이용을 당하는 것은 분명 억울한 측면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지만 18세기의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학 진보와 인간 삶의 전반적인 향상 등) 주장과 논증이 이상하게 상반되는 부분도 많아서 오해와 원용의 괴리가 크다는 점을 여기에서 밝혀두고 싶습니다.

최종적으로 스펜서가 인식하고 있는 국가론은 실제로 다음과 같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국가가 수행하는 그 밖의 활동 중에서 한 가지 종류는 몇몇 개인들의 자유를 다른 개인들의 동일한 자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이 제약하는 활동 항목에 들어간˝다는 주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이 동등 자유의 법칙에 따른 맥락은 다음에 ˝공공 지출로 얻게 되는 이익이 세금을 내는 모든 이들 사이에 골고루 분배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익이 공정한 사회 질서라는 근본적인 원칙과 모순된다는 것˝의 인식도 그가 주장하는 공정한 질서가 무엇인지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6장 후반부에서 ˝동정심으로 인해 만일 우리 자신이 겉보기 만의 ‘사건의 시비곡직‘이라는 틀의 위험성˝을 강조하게 된 것은 그가 말하는 공정의 의미가 어떤건지 다시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사회진화론의 논법은 실로 비인간적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능력주의의 해악보다도 더 심대한 것이며 사실상 사회 전부를 파편화 시키는데 이바지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더 논의해 볼 문제겠지만 ‘복지 국가 혹은 사회 부조‘에 대한 전반적인 이 사회진화론의 공격은 시민들을 오도하고 체제 전반을 간편하고 손쉬운 쪽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공익에 대한 반대와 공격 그리고 부조에 대한 몰이해를 양산시켜 시민들 스스로가 이를 공격하게 하는 데 이바지해 왔습니다.

끝으로, 역자의 스펜서에 대한 약간의 다시 읽기와 다소 주장과 근거가 상충되는 스펜서의 논법들이 그를 일정부분 오해할 가능성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는 사회진화론에 심취한 인물이었으며, 그런 토대로 진행된 결과물이 ‘엄연한 사회 진보‘라고 인식했으며 그것이 설사 개인들의 자유와 권리의 맥락이라는 절묘한 길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국가와 개인의 논법으로 인식된 연계였으며 따라서 그런 한계는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시민들은 분명하게 사회 부조에 대해 긍정하고 있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함의 역시 분명한 형태의 주장으로 일관되어 왔습니다. 즉, 사회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회의 파편화는 실로 위험할 수준으로 진행되는 것이며, 이를 시민들이 망각하게 된다면 사실상 사회 전반이 ‘엘리트 과두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고도화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데 왜냐하면 시장 경제에 대한 우월적인 예외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가 이미 국가 전반을 거리낌없이 주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삼 대니 로드릭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동침의 한계가 결국 파국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생명과 활동이 지속될 수 있는 조건을 유지하는 것이 최고의 목적이다

모든 사람이 정치 권력을 소유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정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정부를 원시적인 유형의 군사독재로 변형시키는 게 필요한 것은 계속되는 전쟁뿐이다

실제로 공정한 제도의 성공적인 확립고 그 타당성을 증명하기 전에는 조롱 받는 것처럼 말이다

각각의 시민은 살고 싶어하며, 그것도 그의 환경이 허용하는 한 충분하게 살고 싶어 한다

국가의 통제력이 제한된 영역안에서만 올바르게 행사될 수 있다는 학설은 완전히 발전된 평화로운 산업 사회 유형에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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