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 세계금융위기와 자본주의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성호 옮김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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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대학을 거쳐 현재 영국 런던 대학의 버크벡 연구소의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 더불어 미국에 소재한 뉴욕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중이기도 한데요. 그는 라캉 연구에 대한 명성과 함께 프로이트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도 학문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세계에 알린 것은 세계화 된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왜곡된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보였던 첨예한 공격이었습니다. 특히 우파에 대한 그의 비판은 스스로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일부에게는 보수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이 꽤 완벽해 보이는 한쌍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오늘날 사회 전반의 불안전성을 고려해 봤을 때, 그동안 제대로 된 비판이 전무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지젝은 강요된 이데올로기의 본질을 분석해 비판하고 그 실상을 널리 알리는 데 노력한 지식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First As Tragedy Then As Face˝로 지난 200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6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먼저 이 책이 다루고 있는 배경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데요. 모두가 짐작하고 있다시피 전세계에 충격을 가져다 준 2008년 뉴욕 발 세계 금융위기를 주제로 방만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중점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 라구람 라잔이 금융 엘리트들의 거대한 ‘도덕적 해이‘를 언급하며 이와 같은 금융 위기를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여기에 지젝은 이 ‘도덕적 해이‘에 대해 좀 더 노골적이고 흥미로운 정의를 내리고 있었는데요. 앨런 그리스펀의 철지난 큰 깨달음을 언급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언급합니다. ˝그가 깜박 잊고 계산에 넣지 않은 것은, 금융 붕괴가 발생할 시에는 국가가 자신들의 손실을 보상해 줄테니 위험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으리라는 금융 투기꾼들의 매우 합리적인 기대였다˝는 폭로입니다. 이들 경제 엘리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경제학에서 오로지 국가가 시장에 개입할 명분이 딱 한 번 있는데 그것은 위기에 빠진 시장을 구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해 나설 때일 뿐입니다. 일찍이 밀턴 프리드먼은 ˝시장이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다˝고 믿었고 그러한 신념으로 ˝사회에는 정의 따위는 필요 없다˝고 일갈했는데요. 물론 그의 믿음은 상당 부분 현실과는 거리가 있음이 밝혀졌지만 아직도 그의 추종자들이 존재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언급되는 기 소르망이 이 프리드먼주의자들에게 공산주의자라는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무슨 훈장처럼 여긴다는 스스로의 고백은 꽤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지젝에 의해 적잖게 인용되고 있는 소르망의 주장들은 보통의 경제학자가 말할 법한 시장주의적인 언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시장주의자들과 국가 개입주의자들의 대비가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에는 둘 다 유사해 보인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시장 자유에 대한 믿음이 일부 시민들에게는 깊이 체화되어 있고 그것의 진위 여부, 실현 가능성을 떠나 무의식적으로 추종하게 되는 현실은 우려의 차원을 넘는 안타까운 일면이라 생각됩니다.

어제 서평을 쓴 ˝천하대혼돈˝에서도 지젝은 일관되게 좌파들이 적확한 피아 구별을 통해 좀 현실적인 비판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이념의 구분을 떠나서 지식인의 의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수의 공익에 기여해야 하는 점은 명백합니다. 이와 관련해서도 지젝은 ‘도덕적 의무‘를 철지난 이론 정도로 격하시키는 세태 내지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그 보존을 제외한 다수의 도덕적 의무에만 열을 올리는 자본가들과 그 추종자들의 도를 넘는 왜곡 행태가 있어 왔는데요. 여기에는 다수의 시민들이 이를 면밀히 구분하고 비판할 수 있는 분별력이 전무하다는 것에 있어 마찬가지로 현실과 이상의 분명한 괴리라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이렇게 교묘하게 감춰진 권력 문제가 달린 이데올로기들은 정확히 규명하지 않는다면 실체를 벗겨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다수의 자본가들이나 소수 기득권층에 있어 ‘약탈 경제가 자신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이익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여기에 일언반구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는 것˝은 사회 전반의 여러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조차 시도하기 어려운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2008년의 대위기는 이러한 고착화 된 사회경제적 분위기와 투자 은행들의 방만한 경영 및 한탕주의가 몰고 온 비극이라 할 수 있을 텐데요. 이 파국을 수습하기 위해 나섰던 오바마 행정부에 대해 공화당 내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국가가 시장에 나서는 것을 무슨 공산주의적 기법으로 확대해석 하면서 그것에 대한 어떠한 대책도 내놓을 수 없었다는 것은 당시 사태의 숨겨진 본질일겁니다. 즉, 이익을 둘러싼 이데올로기만을 비판적 분석없이 맹종하는 행태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오바마 행정부가 의회를 설득해 7천억 달러가 넘는 공적 자금을 지출하게 되었을 때, 이 파국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금융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노후 자금을 따내기 위해 이 공적 자금을 유용해 왔으며, 어떠한 금융인도 기소되지 않고 예전과 다름없는 예우와 명성을 존치시킨 것은 지젝이 보기에도 불합리한 모습임에 분명했을 겁니다. 심지어 이러한 비판 의식을 갖고 있는 정상적인 시민들을 반자본주의자로 몰고 갔던 수많은 보수주의자들과 보수적 지식인들이 존재했다는 것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게 됩니다. 사실 저들이 믿고 있는 바대로 ˝경제학이 스스로 자신들이 사회를 지배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1장에서 나오는 ˝우리가 민주주의나 정의를 믿지 않아도 그것들은 작동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 참여하고 그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다˝라는 맥락은 일종의 소극적인 내면화의 증거로 이해됩니다. 이처럼 기 소르망이 피력하는 대로 ˝자본주의가 인류의 비참한 조건을 구원해 낸 것˝을 일언지하에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다수의 시민들을 자본주의에 있어서 맹목적인 상태로 만들어 내고 심지어 그것에 일절 반항 조차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민의 운명인지 아니면 자본주의가 그렇게 설계되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서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자연적 고리를 주장하는 자들이 이런 사실들을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극 방식이란 가톨릭 교회가 전체주의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자연적‘수호자로 자처할 때의 사기 방식과 똑같다˝고 저자인 지젝은 비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진술은 아주 명확하게 경제학자들과 시장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에게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와 연관이 깊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논리에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봉사를 할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하였습니다. 시장이 인간에게 마땅히 필요한 모든 것을 해줄 것이라는 믿음과 그것에 따라 행동해야 될 시민의 의무라든지 민주적 합의를 다소 희생시키더라도 시장의 선택을 보장하는 쪽으로 진행되는 규모적 움직임에 권위까지 얻게 된 것은 아마도 적극적인 우파의 항복과 수동적인 좌파의 합류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보수 우파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본주의와 화해 했지만 좌파는 민주주의의 보존과 (믿기지는 않지만) 시민들의 삶을 위해 같이 행동하기로 하였으나 결국 그것은 패착으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일반적인 보수 우파들보다 좌파들에게 끊임없이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일겁니다. 일전에 저도 샹탈 무페를 인용하며 신자유주의 시기에서 좌파의 실패를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도덕적인 의무 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삶에서 조차 좌파는 그냥 지리멸렬 했던 것이었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신선 놀음과도 같은 관념적 조언은 시민들에게 어떠한 기대도 갖게 하지 못했던 것이죠. 이러한 맥락의 인식이 꽤 오랫동안 자리했던 나머지 전세계 진보주의 세력에게 지금까지도 이들의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글 초반에 지젝은 이러한 사회적 뷸균형 상황에서 2001년과 2008년의 위기 가운데 전세계에 ˝극우 포퓰리즘˝ 정치가 태동할 것이라 예견했던 것입니다. 이 책이 쓰여진 때가 2008년인데 지젝은 이미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즘이 나타날 것을 예측했던 모양입니다. 이를 명확히 드러내는 진술로 ˝포퓰리즘은 결국 언제난 보통사람들의 좌절 섞인 격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더는 못 참겠어! 이대로는 안돼! 이젠 끝을 봐야 돼!˝라는 외침에 의해 지탱된다 강조하고 포퓰리즘 운동 자체가 기존의 체제 전반을 부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어떠한 대안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시민들이 프로파간다에 의해 그저 이용당하고 심지어 사회 전반을 증오와 혐오로 이끈다는 점에서 실로 반동주의 정치라고 할만합니다. 이 포퓰리즘을 반동주의 정치라 규정한 지젝의 인식은 글 곳곳에서 드러납니다. 물론 도식적으로도 부유한 자들 대 근면한 보통 사람들의 대결 구도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이것이 민주주의 자체에 있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였으나, 트럼프와 같은 포퓰리스트들이 언론을 통해 몇 번이나 내비쳤던 주장들은 실제로 금융 시스템과 금융 엘리트들에게 있어선 전혀 적의 조차 드러내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한 기만의 정치라 할 수 있을겁니다. 포퓰리스트들이 입으로 주장하는 것이 힘이 없는 자들의 권리를 위해 나서게 되었고 이를 위한 민주주의의 확대를 일견 주장하고 있지만 그 내심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핵심이겠죠. 결국 저들은 그저 자신의 정치 권력을 위해서 입을 놀린 것이며 ˝자유로운 섹스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저 자유주의자들을 증오하기에 급급한 평범한 노동자들˝이 철저하게 포퓰리스트들에게 이용당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자유주의적 보편주의는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던 사상이었습니다. 보편성 자체가 모두를 위한 가치로서 수렴하는 것임에도 자유 자체가 실질적으로 시민 모두가 누릴 수 없는 것임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도 지젝은 ˝우리가 위험한 선택의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사회에서는 소수만이 선택하기 choosing 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쓰기 risking 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앞선 ˝천하대혼란˝에서도 지젝은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많은 시민들은 그저 덜 나쁜 것을 선택하기에 급급하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능력주의에 기반한 저 알량한 선택의 권리는 모두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처럼 명백합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자유를 위치는 자들은 이러한 차별적 기반을 언급하지도 않습니다. ˝모두에게 실질적 자유˝가 아니라 ˝평등은 절대 안되는 자유˝를 부르짖고 있으니 이것은 다수 시민들을 기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공화주의 전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그저 예전에는 평등을 공산주의로 몰아가기가 쉬웠으나 이제는 탈이데올로기 시기에 교묘한 화법으로 평등 자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교묘한 언설로 선동하기까지 합니다. 심지어 이제는 ˝공익˝을 사회주의로 몰고가는 지식인까지 있으니 탈이데올로기의 변화는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실패한 사회주의가 못한 것을 지금의 우리 민주주의가 해낼 수 있다는 확장된 인식은 꽤 신선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보수주의자들보다 오히려 진보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민주주의를 부르짖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더 많은 민주주의와 함께 ˝좌파 포퓰리즘˝을 한쌍으로 제시한 샹탈 무페의 인식론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앞으로 20년 내의 진보주의의 성쇠는 얼마만큼 시민들에게 확대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심어줄 수 있겠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주주의는 높은 확률로 폭주한 자본주의를 제어할 수 있으며, 모두가 적절한 수준의 자유와 충분한 수준의 권리를 누릴 수 있는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젝의 다음 2부는 이러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부의 핵심 단어인 ˝민중에 대한 신뢰˝는 건전한 시민의 전제를 바탕으로 현재의 질서 전반을 재구축하고 좀 더 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한 틀 잡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지젝처럼 평등이 해방주의적 관점으로 사회를 크게 변혁시킬 수 있다 보지는 않지만 자유와 평등의 균형적 발전과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민주적 합의를 바탕으로 시장의 건전성을 답보하는 것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오판을 막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다시 1부로 돌아가서 ˝오도된 경제학˝이 이미 시민들의 삶을 크게 뒤흔들었듯이,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모든 시민들이 마땅히 품위있는 삶을 이룩해 나갈 수 있도록 모든 체제의 균형적인 진보가 수반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와 더불어 더욱 파급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대응과 정치 전반의 불신을 포퓰리즘으로 해소하길 원하는 평범한 사람들의 오판을 좀 더 개선시킬 수 있도록 국가와 사회가 현명하게 대처를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잠시 오판과 오해를 하고 있는 시민들을 대적으로 여기지 말고 좀 더 제 2의 교육에 나서는 것을 추천합니다. 아주 확대해석해서 얘기하자면 존 듀이는 이러한 미래를 염두해 두고 교육의 문제를 다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가지 지젝에게 조언하고 싶은 부분은 좀더 너그러운 언설로 자신의 이야기를 해줬으면 합니다만 과격함˝이 빠진 지젝은 지젝으로 살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재 지그문트 바우만이 없는 시점에서 그가 자신의 역할을 오랫동안 수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외래어 표기에 있어서 된소리로 강조하는 표기법이 이 출판사의 특징인 모양입니다만 엄연히 규정된 표기법이 있음에도 이런식으로 출판되어 나오는 것은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국가와 경제적 자유주의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으며 오히려 둘 사이에는 복잡한 동맹이 있다. 나는 자유사회가 복지국가를 필요로 한다고 보는데 이는 우선 지적 정당성과 관련된다. (기 소르망의 인용)

이에 그린스펀은 답했다 "저는 제가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을 규정하는 결정적 작동구조로 보았던 모델에서 결함을 발견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린스펀은 "백년에 한번 찾아올 만한 신용 쓰나미"가 금융 시작을 덮쳤을 때 규제를 멀리 하려는 자신의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결함을 지닌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인정한 것이다

‘지배 계급‘은 비록 포퓰리스트들의 도덕적 의제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하층계급을 억제하는 수단으로서 ‘도덕적 전쟁‘을 용인하기는 한다

지난 몇달간 교환에서 그 아래로 이어지는 공인들은 과욕과 소비의 문화에 대항해 싸우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폭탄처럼 퍼부었다. 값싼 도덕화의 이런 역겨운 광경이야말로 이데올로기 공작이라는 범주에 딱 들어맞는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자연적 고리를 주장하는 자들은 이런 사실들을 놓고 사기를 치고 있는데, 그 방식이란 가톨리교회가 전체주의 위협에 대항하는 민주주의와 인권의 ‘자연적‘ 수호자로 자처할 때의 사기 방식과 똑같다

우리의 정치적 풍경이 관대하고 자유주의적인 테크노크라시와 근본주의적 포퓰리즘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면, 베를루스코니의 위대한 업적은 이 둘을 통합해낸 데에, 둘을 동시에 붙잡은 데에 있다

일상생활상의 소외, 소비의 상품화, 우리가 ‘가면을 쓰도록‘ 강요되고 성적 억압과 그밖의 억압을 당하며 사는 대중 사회의 비진정성 따위 말이다

자본이 우리 삶의 실재, 사회적 자연적 현실의 가장 긴급한 요구보다도 훨씬 더 절대적인 명령을 내리는 실재라는 데 대해 더이상의 증거가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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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1-06-26 12: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비만의 외래어 표기법이 있는가 봅니다 ㅎㅎ 다른 창비에서 나온 책들도 그렇더군요...

베터라이프 2021-06-26 15:14   좋아요 1 | URL
외래어 표기법은 되도록이면 지키면 좋을텐데 아쉽긴 하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