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인간 - 팬데믹에 대한 인문적 사유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문정 옮김 / 효형출판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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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조르지오 아감벤은 카를 슈미트의 '예외 상태' 연구로서 그리고 민주주의적 삼권 분립에 대한 명료한 인식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그는 어느 지식인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한데요. 과거 역사에서 무솔리니를 몸소 체험한 이탈리아 인으로서 이러한 그의 믿음이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물론 아감벤의 이런 정치적 신념을 차치하더라도 현재 세계 학계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대단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작고한 움베르토 에코와 더불어 전세계인이 그의 이름을 한번쯤은 들어봤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그는 평생에 걸쳐, 미셸 푸코와 발터 벤야민 그리고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학문적 영향을 받았고 이러한 기반으로 현재에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해박한 분석을 통해 대중들에게 자신의 고유한 정치적 의견을 피력하는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최근에 아감벤은 여러 외신들을 통해 전세계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 대한 일종의 비판적 분석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는데요. 이탈리아 내에서도 그에 대한 여러 비판이 있었고 여기에는 슬라보예 지젝까지 일정 부분 동참하기까지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유와 인권의 측면에서 각국의 봉쇄 정책이 씁쓸한 뒷맛을 남길 수도 있다는 가정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데요. 바로 이런 맥락에서 아감벤이 인문학적이고 정치사회적인 비판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 것이 지금 소개할 이 책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글과 관련해 구글 검색으로 원전을 찾아보려 했지만 정보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아시는 분은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우선, 아감벤의 이 책은 2020년 5월 경부터 2021년 1월 경까지의 짤막한 시론을 모은 글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서두에 경희대 이택광 교수의 추천사가 있어서 내심 반갑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아감벤의 일관된 논지와는 별개로 그가 2020년 10월 이후에 같은 맥락으로 글을 썼다면 어조가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최근에 그에 대한 논란으로 인해 저 역시도 이 책을 다른 글보다 좀 더 꼼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으로 아감벤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점은 "생존 외에 다른 인류의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를 명확히 대변한다 생각합니다. 그는 초지일관 작금의 과학 기술주의에 대한 맹신으로 주도되고 있는 각국의 사회 격리와 이를 바탕으로 권력이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헌법의 명령 없이 제한하게 될지도 모르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갖고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파시즘의 나치의 학살자 아이히만을 언급하면서까지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어떤 측면에서는 너무 과하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많은 정권이 소위 '공중 보건'이라는 핑계로 권위적인 테크노크라트 정치를 시도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경계를 가질만 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연상시키면서도 한편으론 마스크를 써야만 하는 오늘날의 상황을 적절히 잘 묘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의 이와 같은 우려를 클로드 르포르 식으로 해석해 본다면 '인간의 자유를 어떤 식으로도 희생해 본 적이 없는 미국과 프랑스'와 달리 독일과 이탈리아는 이미 전체주의의 경험을 갖고 있기에 아감벤이 이탈리아 인으로서 우려하는 바는 지극히 온당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에밀 뒤르켐이 오래전부터 분석해 왔던 이런 경험주의적 인식론은 전체주의적 종말을 그려보지 않더라도 일말의 정치사회적 가능성 하나만으로도 시민들을 위해 먼저 선행적인 고찰을 해야만 하는 지식인의 의무일 수도 있습니다. "이 전방위적인 펜데믹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에 대한 냉엄한 질문 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보건 관료들과 의료진들에 대해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일종의 정치사회적인 헤게모니로 너무 확대해석하는 것은 분명 거부감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 지식인들이 인문학의 쇠퇴와 종교가 과학 기술의 맹종을 견제하는데 실패한 부분을 우려스럽게 보기도 했습니다만 인류가 무분별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끝내 종말을 맞이하게 될지에 대해서는 확실히 여러 의견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의 기본적인 우려대로 기술 과학이 민주주의나 보편적인 인권 및 자유를 침범해서는 안되는 것은 명확하며, 의학 전반이 인간성과 도덕적인 의무를 저버리고 단순한 수단화에 이르게 된다면 마땅히 이를 견제해야만 할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가 매번 사회에 옳은 결과만을 가져다는 것은 아니며 이들이 사회 전반의 비판적 의견을 수용하지 않을 때 파시즘의 준하는 정치가 도래할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것을 음모론이나 과도한 회의주의라 공격할 수도 있지만 일말의 가능성을 두고 성찰하는 것 또한 미래 세대를 위한 우리의 의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비판들 가운데 아감벤은 특히 법학자들에 대해 더욱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삼권 분립의 가치를 사실상 훼손하는 행정부에 의한 입법부를 대체하는 긴급한 수단들이 처방되는 지금의 상황을 법을 전공한 많은 학자들이 입을 닫고 있는 것에 대해 일정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하는데요. 여기서 그가 히틀러 시대의 카를 슈미트를 오버랩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정 부분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있다 보는 듯 했습니다. 이와 같은 예외 상태를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는 법률학자들의 침묵이 아감벤의 의견대로 도덕적 인식의 종말을 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와 시민이 필요할 때 이상하게 입을 닫는 지식인들이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 '바이오 보안'의 정치가 시민을 관리하는 정부들의 손쉬운 정치적 획득물로 여겨질 수도 있기에 지금과 같은 '중요한 보건 위기'의 시대에서 인문학 분야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 있는 지식인들의 관심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됩니다.

끝으로, 최근의 아감벤에 대한 논란은 기자의 양심을 망각한 일부 언론인들에 의해 과도화 된 측면이 있습니다. 공중 보건에 대한 그의 관심이 충분한 함의를 갖고 있음에도 이를 언론이 반사회적 논법으로 과장해 온 것은 일개 시민 대 언론의 비균형적인 힘의 논리를 일견 떠올리게 하는데요. 아감벤과는 약간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장 지글러 역시 유사한 고초를 겪은 바가 있습니다. 다행히 프랑스나 영국의 많은 언론들이 최근에는 공중 보건에 대해 균형잡힌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만 저 역시도 부분적으로는 봉쇄에 대한 자유와 개인의 기본권의 제한이라는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가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틀에서는 시민의 자유와 권리가 마땅히 헌법의 제한을 제외하고 이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민들에게 자유라는 가치는 충분히 중요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현대의 정치사회적인 메커니즘이 민주주의의 확대와 더불어 시민들의 자유와 권리 증진에 있어왔던 것은 분명 부정할 수 없으며 그런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나 독재와 공존할 수 없음은 확실합니다. 이에 펜테믹 사태에 따른 각국의 정부가 보여온 보건 정책에 대해 자신들이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시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마땅히 필요해 보입니다.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신성화 된 의료 과학은 이단과의 불협화음이 있다

그렇게 개인의 두려움, 집단적 패닉의 악순환의 고리를 통해 정부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안전에 대한 욕구를 받아들여지도록 만들었다

역사는 모든 사회 현상에 정치적 의미가 있을 수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울러 자신의 책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또 다른 부류는 법학자들이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삼권 분립의 원칙이 훼손되고 행정권이 실질적으로 입법권을 대체하는 긴급 명령이 무분별하게 사용되는 경우를 오래전부터 익숙히 봐 왔다

나는 분명 도덕적 명분을 위해 뒤따르는 거대한 희생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들에게 나는 나치의 장교 아이히만을 말해 주고 싶다

거짓으로 밝혀진다 해도 반드시 참이어야 하는 거짓은 사실처럼 여겨질 것이다

여전히 다수의 이탈리아인이 은연중에 사용하는, 문화 곳곳에 퍼져 있는 반유대주의에 동조하는 유대인 박멸이라는 소재를 전염병 사태와 같은 선상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최근까지 음모와 작당 모의, 비밀 조직이 만연했던 이탈리아와 같은 나라에서 보건 긴급 사태를 향한 비판적 시각을 음모라고 완고하게 치부하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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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6-25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생존 외에 인류가 추구하는 다른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란 어떤 것인가?

오늘도 베터라이프님의 서재와 왔다 얻어 갑니다.

베터라이프 2021-06-25 10:46   좋아요 0 | URL
부족항 글 항상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감벤도 역시 바우만과 비슷한 어조였는데 분명 희망은 있겠지요 ^^;;

chaos 2021-07-09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는 내내 불편했는데 아마도 아감벤의 논의가 인간 혹은 인류라는 이야기로 돌아가기에 그 어디서도 자본주의비판 또는 이 문제에 대한 계급적 관점은 보여지지 않았습니다

베터라이프 2021-07-09 01:59   좋아요 0 | URL
현재의 펜데믹 사태로 인한 사회 부조의 불확실성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행을 주요한 관점으로 아감벤이 다루고 있는데 쓰신 글이 어떤 관점으로 비판을 하시고 있는지 저로서도 이해가 안되네요. 혹여 쓰신글을 제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유럽과 미국의 의료 붕괴와 그러한 시민들의 고통은 신자유주의적 이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바로 이부분을 아감벤은 일관되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chaos 2021-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연한 신자유주의 비판은 아감벤 아니라도 널려있죠. 한데 현재 팬더믹과 관련하여 정말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인류 일반인가요? 정치경제학 비판이 빠진 자본주의 문화비판이란게.. 신자유주의 비판이라셨는데 신자유주의 극복 대안이 인류의 자유인가요? 삼권분립이 민주주의인가요?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끔직히 싫어하겠네요? 아감벤은.. 현학적인 말투로 유럽의 현자인듯 글을 써서 도대체 글을 읽고 무얼 생각해 볼 수 있는건지 전혀 모르겠던데요.

베터라이프 2021-07-09 13:24   좋아요 0 | URL
종래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저 막연한 비판들로 채워져 있다 생각하시는지요? 아감벤은 이 글에서 펜더믹 사태로 인한 정부의 대응과 결과물에 대해서 파시즘의 그것과 비슷한 관점을 보이고 있는데요. 그것의 동의 여부를 떠나 현재의 펜데믹으로 인해 얼마간의 공공 의료가 준비가 안된 것은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의한 것은 확실합니다. 반대로 님께 되묻고 싶은것이 자본의 축적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론적 차원의 문제를 떠나서 인류가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인간답게 영위하는데 신자유주의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회적 안전망과 부조, 공공성 및 도덕적 근거의 사회적 책임 모두를 앗아간게 신자유주의인데 이것 조차도 긍정을 하시지 않는다면 달리 드릴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저 뿐만 아니라 아감벤 역시 민주주의의 확대와 좀 거 건전한 정치 인식을 주장하고 있고 이에 선결 조건이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개선 즉, 공공성을 회복시키고 더 나아가서는 바우만이 말한대로 모두가 모두를 책임지는 일종의 미래지향적 목표라도 가져야하는것이죠. 이렇게 후기 자본주의 상황에서 극심한 불평등을 초래한 것은 신자유주의이고 저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식하고 있는것입니다. 그리고 거의 사회가 테크노크라트의 과두제에 가까워지고 있는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권력의 균형추가 이미 너무 기울어진 상태라 기득권과 부유층의 기존 세력화에 일반 시민들이 비벼볼 틈이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단 아감벤의 이 글은 정부의 공중 보건 개입에 대한 권력의 남용을 우려한 글로서 이 부분은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이해하고 있는것이 좋겠죠. 일반 민주주의 체제에서 이런 비상 대책은 그 후이든
어떻든 간에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전적으로 아감벤의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슈미트의 과거를 떠울리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은 철학자의 양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기본적인 민주주의적 가치를
지지합니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오로지 시민이 더 많은 사회적 변별력을 갖추고 어느 정도 실질적인 정치조직화 선행되어야 하겠죠. 지금처럼 엘리트 위임 방식이 아니고요. 이 모든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님은 분명합니다. 저의 글 논조가 딱딱하실수 있는데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핸폰으로 쓰다보니 너무 두서없이 쓴 것 같아 송구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