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퓰리즘 커뮤니케이션 이해총서
정병기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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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정치학과 사회학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영남대학교 정병기 교수는 한국에서는 드물게 포퓰리즘 연구를 해오고 있는 학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그는 문학에 있어서도 시집을 발표하는 등 꽤 다방면의 활동을 지속해오고 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전반적인 포퓰리즘 정치에 대한 꽤 원론적인 개론서라 할 수 있겠는데요. 1980년대 이래로 포퓰리즘을 연구한 해외 학자에 대한 연구 결과도 요약해서 친절히 소개하는 등의 일반 독자들에도 꽤 유익한 글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포퓰리즘‘과 ‘포퓰러리즘‘에 대해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제가 그동안 포퓰리즘에 대한 서평을 많이 썼기에, 다른 서평에서 별다른 비판없이 포퓰리즘을 ‘대중 인기 영합주의‘로 써왔던 점은 저의 큰 오류라고 생각됩니다.

카스 무데는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에서 현재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어떻게 좌절한 수많은 시민들에게 파고 들었는지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이 글에서도 포퓰리즘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견고하지 않은 약한 측면을 갖고 있어서 민족주의와 인종 혐오, 배외주의 등에 숱하게 결합하는 등의 일종의 그 폐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는 따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포퓰리즘 자체를 사회학 내에서의 고정되고 인식되는 학문의 범주로 넣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그동안 많은 논의가 있어 왔는데요. 포퓰리즘 현상 자체가 학자들 사이에서 잘 규명이 되지 않았고 ‘시민 대 엘리트 기득권 정치‘를 구도로 거의 기존의 정치 체제를 불신하는 등의 파행적 언행들이 흡사 반정치의 논법과도 유사해 보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의 이 포퓰리즘 정치는 이 글 3부에서 논의되고 있는 바와 같이 소위 이들 정치 세력이 집권에 성공하게 되면 기존의 정치적 입장은 사라지고 체제에 대한 대부분의 강경 발언이 사라진다는 점은 포퓰리즘 정치를 현격한 정치 현상으로 인정해야 될지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다 생각됩니다. 예를들어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는 백악관에 입성하기 전까지는 그토록 현 체제와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해댔으나 그가 기존 시스템에 들어와서는 특별히 엘리트들과 각을 세운일이 없었다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자신의 확실한 의견을 피력한 바가 없었고 임기 중에는 오히려 월스트리트와 별 문제없이 잘 지내왔다는 점에서 이 포퓰리즘적 정치인들은 오로지 권력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서 ‘민주주의‘와 시민들을 이용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포퓰리즘 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범은 시민들이 이들에 대한 엄격한 분별력을 갖추는 것 일 텐데요. 그러므로 토크빌과 듀이의 경고는 이처럼 중요한 맥락으로 다가온다 여겨집니다.

또한, 4부에서도 유럽의 극우 포퓰리즘이 인종적 선동과 혐오를 방관하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데 비슷한 역사와 보편성을 띠는 동일 민족의 민주주의적 함의가 중요하다고 인식한 유발 하라리의 입장을 차치하더라도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 유입된 이슬람인들의 노동력을 시의적절하게 이용해 왔으면서도 이제는 다른 말을 하는 정치인들의 논법은 유럽의 합리주의와는 거리가 먼 발언일 텐데요. 이슬람 이주민들 자체가 유럽 산업에서 단물만 빤 것이 아니라 이들이 유럽인들 대부분이 기피하는 산업 노동에 기여한 것은 분명하며,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등의 이중적 행태를 스스로 돌아보지도 않고 종교 갈등, 민족적 차이 등만을 내세워 사회의 불안심리를 더욱 자극하는 것은 이 극우 포퓰리즘을 과연 정치의 카테고리로 편입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파시즘을 인정하고 배려해야할 대상으로 여길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기준이라 첨언드리고 싶습니다.

보수주의가 관련된 시장 자유의 논법과 관련해 저자는 객관적인 논법으로 신자유주의적 포퓰리즘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요. 보수주의가 일찍이 자본주의와 화합한 것은 일전에도 언급했습니다만 ‘보수주의-신자유주의-기득권 정치‘가 견고하게 결합되어 직간접적으로 그동안 대의 민주주의의 훼손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며, 이에 부역하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시민은 전문 관료와 지식 엘리트들의 전문성을 굳게 신뢰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목에 핏대를 세워 강조해왔습니다. 이러한 전반적인 흐름 자체가 기존의 시민들의 정치 불신과 맞물려 자본주의 하에서 엘리트 지배체제가 의심을 받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똑똑하고 대단한 경력의 엘리트주의가 유능하지 않고 무능할 수 있다는 불신을 포함해서 말입니다. 따라서 대의 민주주의 건전성은 시민들의 건전한 참여가 뒷받침 되어야 하며, 엘리트 지배 체제가 민주 정치의 일부분을 떠안으면서 ˝너희들은 스스로의 생업에만 중시해라. 그리고 다소 생활 여건이 힘들더라도 참아보도록 해라˝라는 대책없는 요구를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강요해 왔던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이 부분의 역할을 신자유주의가 주도적으로 맡았던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글 초입에 저자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그림자˝라는 캐노밴의 주장을 인용하는데요. 저는 미처 글을 다 읽지 않고 저자에 대해 분통을 터트릴 뻔 했습니다. 이후에 포퓰리즘은 사실상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저의 성질 급함을 반성하였는데요. 이처럼 포퓰리즘이 아무리 민주주의를 신물나게 강조한다 하더라도 이들은 이 민주주의와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4부에서 ˝포퓰리스트의 성격이 주요 고객인 시민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언급되는 것은 이를 잘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보수에 있는 정치인이든 진보에 있는 정치인이든 일정 부분 시민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이를 완벽하게 부인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스스로 각자의 대의를 주장하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정치인들 스스로 여러 갈래로 얽혀 있는 사익을 절대 거스를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명확한 한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신자유주의가 이렇게 정치인들의 가려운 곳을 적극적으로 긁어 주었으나, 그 반대급부로 저들이 가져간 것은 시장에서의 민주 정치였습니다. 우리의 대의 민주주의가 쇠퇴한 것은 이들 직업 정치인들에 의해 왜곡된 것이 거의 절반 이상의 책임을 갖고 있으며, 이를 반대로 시민들의 마땅한 정치 관심의 결여라고 반론을 펼치는 자들은 거의 회색분자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나 그 기반을 이렇게나 왜곡 시킨 것은 생산성이 없는 이데올로기 싸움 자체가 아니라 전문적인 직업 정치인들이 자신의 권력을 위해 시민들을 이용만 했던 것에 크게 기인합니다. 영민하고 머리가 잘돌아가는 정치인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맹점을 파고들어 이러한 정치적 불신을 조장한 것은 부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포퓰리즘은 바로 이러한 맥락 가운데 등장한 반정치의 냉엄한 현실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현재의 포퓰리즘이 우려스러운 것은 끝내 파시즘을 다시 정치 무대에 등장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일겁니다.

엘리트들에 대한 포퓰리스트들의 공격은 정치 엘리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경제 체제를 장악하고 있는 경제 엘리트와 학계 및 언론 엘리트를 포함한 지식 엘리트도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되며, 이들의 무능, 탐욕, 부패의 피해자인 나머지 인민을 이들과 구별한다

하지만 이들의 논리에는 국적이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따른 사회적 열패자라는 점이 핵심적 근거로 제시된다

포퓰리스트들은 기득권 질서에 반발해 침묵하는 대중을 동원하지만, 자신들이 현실 정치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회피하는 언술을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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