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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은 이렇게 -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
마이클 왈저 지음, 박수형 옮김 / 후마니타스 / 2021년 4월
평점 :
미국의 저명한 정치 이론가이지 공공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 마이클 왈저는 노엄 촘스키와 하워드 진과 비견될 정도로 행동하는 양심으로도 유명한 학자입니다. 그는 매사추세츠 월섬에 있는 브랜다이스 대학을 거쳐,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금으로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한 후에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로버트 노직과의 논쟁에서 드러나듯 사회 정의와 체제안의 구조화 된 소위 '복잡한 평등'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는 다른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보편적인 민주 정치를 비교적 현실적으로 바라보고 있으며, 그런 연계에서 시민의 사회 참여를 위한 지식인의 의무와 시민 정치의 확대 필요성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 이론과 관련해서는 레오 스트라우스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 독보적인 학자로 여겨지는데요. 그만큼 왈저의 사상적이고 학문적인 영향력을 인정하는 이들이 많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Political Action"으로 지난 197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왈저는 한국어판 서문을 통해, 이 글의 주요한 목적 의식에 대해 일정 부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전쟁의 종식과 부패하고 전제적인 리더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이는 마치 2016년 한국의 촛불집회를 떠올리게 하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운동의 선명한 정치적 목표를 짐작하게 할 만한데요. 이는 글의 17장에서 거의 주제 의식과 맞닿아 있는 "일상에서든 급진적 의사표시에서든, 시민 정치는 성격상 총체적 이데올로기의 반대편에 있다는 사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는 문장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저는 앞선 문장이 이 글의 주제 뿐만 아니라 시민 정치의 중요한 목적 의식을 아우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측면에서 아무리 시민들 개개인의 의지가 모인 힘이 별반 보잘것이 없어 보이더라도 사회와 우리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그것은 매우 필요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에 반해 시민들의 과도한 이데올로기화가 '급진주의 세력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왈저의 경고는 특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그동안 많은 정치 이론가들에 의해 시민들 각자가 갖고 있는 정치적 인식과 관련해, 이를 명확히 규정하는 수단에는 '도덕적 명분 혹은 도덕주의'가 기본적으로 바탕이 되어 있음을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즘 현실정치에서 꽤나 시대착오적인 인식으로 매도되기도 하는데요. 민주 정치에 있어서 다원주의와 더불어 이 도덕적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정치 전반의 건전성이 매몰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앞선 주장들의 맥락들이 특히 신자유주의의 개인주의적 이기심의 옹호와 사회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있어 '돈과 자본'이 중요한 기준으로 순위에 오르게 하는데 기여한 수많은 경제학자들과 엘리트 지배체제의 책임이 막중하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런 부분에서 마이클 왈저의 이 글은 현시대의 정치 문제를 과거와 비교하여 분석할 수 있는 현실의 인식 차이가 상당하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미국의 많은 대학생들이 이 책에 대해 꽤 놀랐던 감정과 마찬가지로 충분히 이 글이 번역되어 널리 읽혀져야 하는 것은 분명하고 사회에 깔려있는 막연한 정치적 의견들이 어떻게 합치되어 앞으로의 체제를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독자나 시민이라면 이 책의 일독이 꽤 유익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되고 있듯이, 왈저는 오늘날의 SNS를 비롯한 온라인 상에서의 활발한 의견 개진과 교환을 딱히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민들의 정치 참여라는 이 명분과 실효적인 가능성이 이러한 인터넷 공론장이 아니라 '직접 대면'에 있다고 그는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요즘의 MZ세대들은 이러한 저자의 강경한 원칙론에 반대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사실 여론의 형성이라는 것이 요즘의 정치에서는 제법 중요한 화두이지만 막연한 구호나 주의 정도로 온란인에서의 정치적 각성 내지는 감화가 본질적인 의미를 갖기에는 한계가 명백하고, 이른바 정치적 운동이 스스로 생명과 실천성을 갖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이 이슈에 대한 공감대, 정치적 의견의 상호 교환으로서 그런 전제를 우선시하기 때문입니다. 혹자들은 이를 가볍게 아날로그적 감성 정도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그것의 진정성은 충분히 공감이 될 정도입니다. 애초에 이러한 운동들이 명백하게 '정당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 좀 더 명확한 사람과의 관계가 필요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 글 1장과 5장까지의 운동에 대한 기본적인 사항들이 정치적으로 유사한 사람들이 모인 조직을 우선적인 갖추는 것이 운동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왈저는 일개 시민이 기존 체제의 불만이나 심각한 불평등으로 인한 정치적 각성이 수반되었을 때, 흔히 운동에 관심을 갖게 마련인데. "하지만 세상은 거의 변하지 않을 것이며 기존 제도와 관행 또한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하에 운동을 계획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언급합니다. 이상과 현실의 차이를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현실에 좌절하게 되어 끝내 극단적인 혁명에 심취하게 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으로도 읽히는데요. 왈저는 사회운동가와 혁명가의 비교를 통해, 과거의 혁명이 사회에 별 반 도움이 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폭력으로 치닫게 한 역사를 반면 교사로 삼고 있었습니다. 위와 같은 맥락은 현실 정치 개선을 위한 사회 운동이 끝내 좌절에 이르렀을 때, 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자포자기 할 그 시점에 급진주의와 극단주의의 망령이 끼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인종주의와 극우적 사고에도 마찬가지로 급진주의가 폭력을 획책할 가능성이 있기에 사회운동가라는 의미에 미리부터 좌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뒤이어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나 불의에 대응하려는 운동" 자체에 대해 왈저의 설명이 다소 부족하지만 이러한 사회적 흐름 전반이 일종의 도덕적 불감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전자는 앞선 진술과 일관되게 "운동이 사회 내에서 생명력을 갖게 하는 요인"으로 볼 수 있는데요. 이런 사회적 공감대와 불만과 불평에 대한 공감이 정치 운동으로서의 세력화에 이바지하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왈저의 언급대로 "유독 중산층들에게 보이는 도덕적 감정에 대한 일관되지 않는 사항"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열위한 계층의 도덕적 인식론보다 민주주의를 위해 그만큼 중요한 맥락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느 정도의 사회적 자원을 획득하고 있는 이들 중산층들이 민주주의의 중요한 요소인 다원주의와 도덕주의를 백안시 한다면 체제 전반의 미래가 암울한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상의 시민 정치가 이들 중산층의 공통된 정치적 함의와 목표 의식에 달려 있는 만큼 최소한 자신들의 사적 이익과 관련된 행동들이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지 않는 수준에서 균형감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내에서 중산층의 의무와 역할이라는 것이 이러한 맥락에 맞닿아 있다고 봐야하는 것이죠.
왈저가 글의 전개 과정에서 거듭 언급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갈등론이 그것 자체로 그가 민주주의에 회의를 갖고 있따고 인식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민주적 통제가 도달하지 않는다고 느끼는 노동단체들과 같은 경우와 실제적인 정당 조직에 가까워진 '일부 운동 조직'이 수직적인 명령 하달 방식 등을 민주적 방식의 위협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들은 이슈에 대한 공감대와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경우일텐데요. 이들이 기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하부로서 그리고 여론을 이끄는 주체로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으로 '민주주의적 갈등론'으로 치부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저자인 왈저의 이론은 이 점을 다소 명확하게 언급하면서 일부 운동 조직에 대한 비 민주성에 대해서도 순순히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13장 이후에 인정되는 '조직 내의 분파주의'에 관련된 문제에 이관될 수도 있지만 '공통된 이슈'에 대한 논의가 끝내 '공동의 정책 프로그램'으로 연결되어 모두가 만족하는 수준으로 이르는 것은 꽤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왈저는 일개 시민의 정치적 각성과 그에 따른 행동과 조직에 대한 참여 및 나중에 정당과 연수하게 되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무엇보다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현실 바깥에서 일부의 선의라도 그것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는 그의 발언은 이를 잘 설명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아마도 이 부분은 과거 키신저에 의해 추진된 캄보디아 침공에 따른 반대 운동에서 그가 맞닥뜨린 냉엄한 현실이라고도 여겨집니다. 마이클 왈저의 이러한 인식은 마누엘 카스텔이나 노엄 촘스키와도 다르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따라서 맹렬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꽤 견고한 현실주의적 입장이라 이 글의 논증들이 그만큼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 글의 전반적인 논증에 있어 12장은 약간의 첨언과도 같은 부분이라 따로 서평에서 언급하지는 않았는데요. 여기에선 과거 미국 정치가 여성들을 어떻게 수단화 했는지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유독 여성들이 현실 정치에서 남성들과 달리 배제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한 한나 피트킨의 여러 글들이 하루빨리 국내에 번역이 되었으면 합니다.
정치운동의 목표가 괌범하고 긴급할 때, 이를테면 전쟁의 종식, 혹은 부패하고 전제적인 리더의 퇴진을 요구할 경우, 운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불러 모아야 한다
인터넷에서는 매일 수천수만명의 사람들이 글과 이미지를 남기고 교환한다. 참여민주주의처럼 보이는 것이 극단적 양극화와 끝없는 논쟁을 낳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 사회 내부에서 벌어진 부정이나 해외에서 우리 정부가 자행한 불의에 대한 분노, 개탄, 슬픔이 정치활동을 낳는 경우다.
침묵하고 운동에 나선 사람들은 자신의 분노, 즉 오랫동안 참다가 이제부터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의 중요성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경우든 운동이 벌이는 활동은 사회 변화를 셜멍하는 ‘참된 이론‘에 의존하지 않으며 의존할 수도 없다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 감내하고 있는 피해나 불의에 대응하려는 운동은 바로 그 집단에서 지지를 구하고자 한다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 조직되어야 한다는 좌파들 사이에 만연해 있는 인식은 조직가의 오만을 보여 주는 가장 분명한 사례 가운데 하나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있다 해도 협력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 현실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작은 선의에도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이 가운데 어떤 것이 도덕적으로 더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여러 주장이 제기될 수 있고, 그런 주장들이 운동에 관한 논쟁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나는 시민정치가 성공하려면 (특히 지역 수준에서) 시민 리더의 육성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말뿐이고 글뿐이라며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말과 글은 효과, 심지어 중요한 효과를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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