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는 무엇을 욕망하는가
우치다 타츠루 지음, 김석중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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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의 프랑스 문학에 대한 권위자이자 번역가로서 그리고 사회사상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우치다 타츠루는 그의 저서와 발언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꽤 개혁적인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평화 헌법에 대해 뚜렷하게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나 2011년 3월 대일본 지진 이후, 일본 내에서 강하게 불었던 원자력 발전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입장을 표명하며 명확한 의사 표시를 한 것으로 보았을 때도, 도쿄 전력이 일본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기업인지 잘 알고 있는 그가 그러한 발언을 그치지 않는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현재 정부가 주도하거나 견고한 보수 여론이 주가 되고 있는 여러 의견에 반대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일본 사회학계가 비판의 원동력을 이미 상실했다는 측면에서 단순히 그를 리버럴 지식인으로 폄하할 수도 없는 것인데요. 뿐만 아니라 기존의 상아탑 체계에서의 권위있는 지식을 다루는 것보다는 시민들을 위해 끊임없이 글을 써 나가고 있는 부분도 그의 사회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문화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비판을 가한 이 책은 원제, "女は何を欲望するか?"로 지난 2002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이 책을 일독하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주디스 버틀러의 학문적 명성이 최근 뿐만 아니라 꽤 오래전에도 지속되어 왔다는 점일텐데요. 버틀러에 대한 페미니즘 운동 일각의 평가가 다채로운 것은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나, 특히 그녀가 페미니즘에 대해 꽤 객관적인 태도 보여왔다는 점은 역시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일 겁니다. 그럼에도 그녀 역시 여러 공격을 당했으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리고 알렉상드르 코제브가 헤겔 강의로 당대의 프랑스 사회학계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서도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요. 그런면에서 마크 릴라가 왜 코제브를 굳이 다룰 수밖에 없었는지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핵심 주제를 담은 장(章)이라 할 수 있는 2장에서 이미 보봐르는 배타적 페미니즘 운동의 비타협적인 노선을 차치하더라도 코제브에 상당한 영감을 얻은 그녀가 남성과 여성간의 사회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치열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는 그 계획이 1970년대 이후 전세계 페미니즘을 일정 부분 변질되게 한 원인이 아닌가 추정해 봅니다. 물론 이러한 화살을 전적으로 보봐르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사상인던지 그것을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에 맞게 때론 왜곡도 불사하는 취사 선택의 행위를 하는 바로 그 수용자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겠죠.

이에 우치다 타츠루 역시 현재의 페미니즘 및 페미니즘 운동이 고유한 사회학 이론이 늘 그렇듯이, 페미니즘으로 모든 사회 현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려는 오류를 범했으며, 전적으로 그런 측면에서 일본 내의 페미니즘이 몰락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그러한 유혹에 손쉽게 빠져들어 자신들의 이론에 대한 정밀하고 실용적인 검증 과정을 아예 도외시하게 된 것이 바로 래디컬 페미니즘과 같은 극단주의를 초래한 원인들 중 하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저자의 지적대로 페미니즘 자체가 건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초석으로서 충분히 그 필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는 '부권주의'로 이해되고 있지만 가부장제도의 폐해 또한 분명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페미니즘 운동에서 대부분이 거부하고 반감을 갖고 있는 '여성성'에 대해, 저자는 푸코를 인용하면서 어떻게 보면 여성성 자체가 사회학적 개념으로 명확한 실체가 보이지 않는 문제로서, 그것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자본주의의 노골적인 성상품화에 가로막혀 오로지 사회적 쾌락에 힘쓰고 있는 상황을 꼬집고 있습니다. 즉, 자본주의적 성상품화에 마땅히 반대하고 개선을 요구해할 당사자들이 반대로 돈과 사회적 자원의 획득이라는 표면적인 이유에 매몰되어 오히려 이를 여성들에게 피치못하게 권유하게 하는 웃지못할 상황까지 이른 것이죠. 그런 점에서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1980년대 이후, 전세계 민주화 운동의 주류가 견고한 민주주의를 정착시켜 여러 획기적인 개혁의 소산으로서 자본주의의 폐해를 불식시켜 이를 통해 진정한 여성주의 운동을 사회에 뿌리 내리게 하겠다는 기획이 100 퍼센트 이상주의에만 경도된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뭐, 우선은 2장에서의 보봐르에 의한 초기 페미니즘의 이론적 고찰로서 당시 남성이 전반적으로 주도하고 있던 사회적 자원을 어떻게 하면 여성들에게도 기회가 돌아갈 수 있을지를 강구하면서, 그러한 기존의 기득권 체제에 진입한 뛰어나고 현명한 여성들이 다른 여성들을 위해 체제 전반을 개선시켜 나간다는 이러한 야심찬 계획들이 보기좋게 무산된 사회적 역사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기존 체제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여성들이 결국 킹즐리 브라운의 해석대로 '권위주의적인 또다른 남성화'로 스스로 변질된 것이었죠. 그러니까 기존 사회 체제의 자원을 획득한 유능한 여성들이 결국은 다수의 여성들을 위해 체제를 개혁하는데 힘을 전혀 보태지 않은 상황은 사실상 견고한 자본주의적 계급화를 개선시켜 나가는데 결국 중대한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페미니즘이 사회적 운동의 크나큰 축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실패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단순히 사회적 자원의 분배라는 공정성 문제에 국한 해 생각해 본다면 그동안 수많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어느 정도 성과를 얻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이 여성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높은 지위 획득에 몰입하게 됨으로써 거의 완벽하게 개인주의적인 자본주의화가 달성된 것입니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이러한 흐름 자체를 거부하기는 커녕 이러한 과정들이 사회가 자본주의를 내면화시키고 그 구성원들인 시민들이 저항을 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에서 저자인 우치다 타츠루는 전세계 페미니즘 운동이 앞서 언급한 대로, 스스로의 이데올로기와 확신된 신념을 기반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이해하려 들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두의 공감대를 얻지 못했다고 판단합니다. 오로지 단일적인 이데올로기를 강요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를 획일화로 이끌고, 더 나아가서는 민주주의에 반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런 부분에서 '래디컬 페미니즘'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요. 이후 3장과 4장은 이러한 기본적인 언어 사용과 학문적 맥락에서 페미니즘적 이론에 정통한 쇼샤나 펠먼과 같은 이론가들의 '진정한 여성으로서의 언어 혹은 말하기'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구사되기가 어려운 것인지를 규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기존의 말하기와 언어 구사의 모든 것을 일방적으로 남성 문화의 전유물로 규정하고 이를 타파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페미니즘의 발로인지는 불명확한 일이기도 한데요. 문학 이론에서 독서와 말하기는 스스로 자아와 작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마저도 외부 요인으로 규정될 정도로 글과 독자와의 관계 자체는 매우 내밀하고 진지한 성찰에 가깝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독자들이 남성주의적인 언어로 점철된 글을 그저 수동적으로 인식해 나가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이미 내면에서 그 수많은 글자들의 행로에 자신의 자아가 반응하게 되는 것이죠. 이를 간단히 풀어보면 루카치식의 문학적 수용 정도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고로 저자의 요점은 페미니스트들이 무분별하게 말하는 성화(性化)의 인식을 강요하여 그것을 오로지 수용하게끔 만드는 그런 이론들이 검증조차 되지 않은 주장들이라는 것입니다.

초기의 페미니즘 운동이 애초에 남성성에 대한 배격으로 시작되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 전반을 남성주의로 해석하고 이것을 구축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라는 미명으로 배타적인 노선에 들어선 것이 적지 않은 페미니스트들의 사상적 행로일텐데요. 순전히 여성을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객체로서 열화시키는 행위 자체가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갖고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차라리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지언정 여성들이 보봐르 식의 사회 변혁에 한 팔 거드는 것이 자본주의적 계급에서 하층에 있는 여성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을텐데요.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하층에 위치한 남성들을 구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각자가 사회를 개혁할 수 있는 힘을 얻어 그것을 가지고 모두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변혁에 나서는 것, 이것이 전도유망한 방법입니다만 현재의 자본주의는 역시 만만한 대상이 아닙니다. 이미 많은 시민들을 '상업적 태도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해제시키고 있기에, 소비 문화주의라는 그 일면의 본질을 빨리 깨닫지 않는다면 진정한 페미니즘이 사회에 발현될 길은 매우 요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제가 이 지점에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남성성 및 남성주의 혹은 그 기반에 대한 거부와 비난'에 힘쓰기 보다는 시민을 괴물로 만드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내면화를 공격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골적인 여성들의 성 상품화에 대한 진지한 액션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해석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공기와도 같은 것이 되었기에 이것을 사회에 분리해 내어 규명해 나가는 것이 앞으로의 건전한 사회와 시민의 삶에 대한 안위가 달려 있는 것이겠죠.



-저자인 우치다 다츠루 역시 건전한 페미니즘이 올바르다고 인정하고 있고 사회를 좀 더 건전하게 하는 데 있어 이러한 페미니즘이 충분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적이 아닌 해석을 ‘부권제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해석‘이라는 딱지를 붙여 내치자 거의 누구로부터 반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상력을 결여한 편협함, 비관용성, 독단적인 테제, 공허한 용어, 찬탈된 이상, 경직된 시스템, 내게 정말로 두려운 것은 그런 것들이다

남성과 여성 간에 주체로서의 이니셔티브와 사회적 자원의 배분을 둘러싼 치열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이 전개되고 있다고 하는 이 보부아르의 계획은, 유감스럽게도 그녀가 창안한 것은 아니다. 보부아르는 이것을 알렉상드르 코제브의 헤겔 강의를 통해 학습했다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서 우리는 모두 우의식중에 ‘우리 안에 박혀 있는 남성적 정신‘에 사로잡혀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열의를 담아 이러한 등장인물을 묘사하고, 우리는 그 허구의 인물에 깊이 빠져들어, 그들의 보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접한 것을 접한다

독자가 읽어내는 ‘의미‘는 텍스트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권제 사회에 있어서, 모든 독자는 남성중심주의적인 의미만을 읽어내도록 제도적으로 강요되고 있고, 독자 개인에게 ‘읽기의 자유‘는 주어지지 않으므로, ‘읽기의 자유‘는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페미니즘 언어론의 기간을 이루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페미니스트가 실행하는 읽기만이 ‘자유롭고 올바른 읽기‘이고, 그 외의 모든 읽기를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에 사로잡힌 오독‘으로서 배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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