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 세상을 조종해온 세 가지 논리
앨버트 O. 허시먼 지음, 이근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앨버트 오토 허쉬먼은 제1차대전이 한창이었던 1915년에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도 교육받은 유태인으로서 당시 독일에 팽배해 있던 파시즘에 대항해 파리로 이주했고, 파리 소르본 대학과 런던 정경대를 거쳐,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에 항복한 비시 프랑스 체제 하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는 유럽의 많은 예술인과 지식인들을 미국으로 탈출시키는 협력자로서 활동하기도 하였는데요. 이후 도미해,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록펠러 재단에서 일을 하며, 미국애 정착하게 됩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CIA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략 사무국인 OSS에서 1943년부터 1946년까지 복무합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1952년부터 1954년까지 콜롬비아 국가기획위원회의 재무 고문으로 일하게 된 연유가 이 때의 OSS 경력이 일조하지 않았나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앨버트 허쉬먼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각계 각층에서 꽤 상반되는 평가를 보이고 있는데요. 그의 생전 저서들을 좀 살펴보더라도 보편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한 경제학자이기도 했지만 하이에크로 대표되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를 풀어서 해석해 보면, 민주주의가 시장 원리와 자본주의에 대해 협력하는 형태를 취해야만 한다는 당시 냉전시기의 논리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에 섰던 것으로 추정되는데요. 특히 그는 개혁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세계에 대한 면밀한 통찰을 경제학자 치고는 꽤 중요하게 여겼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은 원제, "The Rhetoric of Reaction : Perversity, Futility, Jeopardy"로 지난 199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아쉽게도 현재 이 글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이 글의 원제를 생각해 본다면, 독자들은 국역으로 번역된 제목을 약간 글의 의도와 맞지 않는다고 느끼실 수도 있겠습니다. 원제의 '레토릭'을 허쉬먼의 주장대로 '반동에 준하는 레토릭'으로 이해한다면 보수주의가 어떻게 1800년대 계몽의 시기의 진보에 이르는 마땅한 인간의 권리를 어떻게 무력화시키려고 했는지를 꽤 상세히 분석한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허쉬먼이 보수의 반대가 반동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논하고 있진 않지만 앞선 언급대로 인간의 문명이 계몽주의적 입장에서 인간의 권리와 사회의 진보를 마땅히 요구하거나 이룩해 나갈 수 있는 그러한 '나아감'을 문제의 '레토릭'으로 시민들을 오도하려는 시도로 읽혀진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이것도 꽤 온건한 어조로 돌려 말하는 것입니다. 뭔가 칼 포퍼의 유명한 경구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 보수 아니 반동에 가까운 자들의 "자유를 얻으려는 시도는 사회를 노예 상태로 떨어뜨릴 것이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면 과두정치나 전제정치를 만들어낼 것이고, 사회 복지 프로그램들은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게 할 것"이라는 에드먼드 버크가 생존해 있던 시기의 설득력이 전혀 없는 허위적 인과와 다름없는 이 프로파간다가 허쉬먼이 비판하고자 하는 골자의 중심입니다. 오늘날 건전한 보수의 대부로 여겨지고 있는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을 통해, 일어난 민중들이 스스로의 자유를 쟁취하게 된 것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단두대 정치를 이끌었고 끝내 나폴레옹의 군정을 잉태시켜 그 혁명이 어떻게 자유와 하등 상관없게 되었는지를 냉소했던 바가 있습니다. 혁명에 대한 그의 경멸은 덤으로 말이죠. 이런 버크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하기 전에, 저자인 허쉬먼은 이 글 4장에서 프랑스 혁명으로 인한 시민 대부분의 참정권 확대가 민주주의 역사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인용을 통해서 말입니다. 1920년대까지 민주주의가 당시 사회주의와 동급으로 치부될 만큼 위험한 것이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당시에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다는 귀스타브 르 봉의 냉소처럼 프랑스 혁명의 영향은 때론 잘 보이지 않을수가 있습니다.

국내의 적지 않은 정치학자들 가운데,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이뤄지는 선거와 시민들의 선거권에 대해 제법 경멸을 보이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 평가하기 앞서, 유럽 역사의 획을 그었던 계몽주의적 흐름에서 조차 평범한 시민들에게까지 확대하는 참정권 투쟁 역사는 너무나 지난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 체제에서 선거권이 마치 휴지조각처럼 치부가 된 것은 민주주의가 엘리트 지배체제의 한 방편으로 전락한데 있습니다. 이것이 오로지 민주주의의 폐해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책에서도 인용되고 있지만, 르 봉은 군중은 위협적일정도로 강하고 저급한 생명체라고 일갈을 했었죠. 그와 생각을 같이한 허버트 스펜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심대한 냉전의 갈등시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더라도 1900년대 초반까지도 보수라고 불리우는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참정권의 부여"를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여겼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일정 부분 재산을 가진 자들만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하자는 논리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겠죠. 그래서 허쉬먼이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목적이기도 한 거의 반동세력 혹은 이에 동조하는 자들의 '반동적' 주장의 요체인 '위험론과 역효과론 및 무용론'이 특히, 복지 국가 담론과 민주주의의 기본 핵심인 평등, 그리고 이에 상반되게, "과연 민주주의가 자유를 효과적으로 보장할 수 있겠느냐?" 혹은 "자유가 민주주의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느냐?"에 대한 무늬만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하이브리드화 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시민들의 관념체계에 성공적으로 스며들었다는 점을 저자는 밝히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이는 경제학자의 논리 치고는 꽤 색다르다고 볼 수 있겠죠.

제가 일전에 홉하우스의 서평을 통해, 전통적인 자유주의의 자유 개념과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자유는 그 맥락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전자는 보편적 자유에 가깝고, 후자는 경제적 자유에 가깝죠. 이를 동일한 맥락으로 풀어본다면 이 글에서 허쉬먼이 말하는 바와 같이 전통적인 보수주의와 최근에 '신보수주의'가 왜 다를 수밖에 없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제가 예전에도 글을 통해 강조한 바가 있습니다만 자칭 보수주의자라고 하는 자들은 그들이 경멸하는 진보주의자들보다 더 열심히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있어야만 하죠, 물론 보수주의가 에드먼드 버크 이후로 3단계의 진화를 거쳤다고 가정한다면 제가 말하는 보수주의는 냉전시기의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를 옹호했던 그 보수주의를 말하는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현재는 이들 신보수주의자들이 이미 신자유주의자들과 한 몸이 되어 '하이브리드화'가 되었기 때문에 어쩌면 맞지 않는 개념일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허쉬먼은 4장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의 주요 논리인 "평등이 자유주의적 자유와 갈등관계에 놓일 것"이라는 이 유명한 우려를 마찬가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도 그들 스스로의 중요한 레토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한데요. 이 부분은 로버트 달을 언급할 필요도 없이,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동일한 맥락으로 "단언코 평등은 민주주의적 가치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복지와 관련된, 복지 국가 담론에 대해 보수주의자들이 느끼는 감정을 백분 이해할 수 있다 치더라도 평등을 자유의 무슨 해악으로 여기는 행위는 민주주의자라면 참을 수가 없는 것이죠. 복지와 관련된 저들의 레토릭을 보더라도, 허쉬먼은 이렇게 단언합니다. "복지 국가 담론이 자본주의에 대한 위협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복지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그들의 주장은 사실상 증거가 없다"는 것이 그의 비판적 평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다수 보수 혹은 보수주의자들은 이처럼 민주주의에 별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 앵무새처럼 자신이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기본적인 논리 조차, 혹은 어떤 가치에 어떻게 위협이 되고,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를 건전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것이죠.

다시금 강조하지만 18세기 계몽주의 시기로부터 지금까지, 허쉬먼이 다루고 있는대로 좀 더 인간적인 삶을 위한 진보에 대한 가치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진보를 안 믿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어찌됐든 사람들의 권리가 허버트 스펜서가 주장한 것처럼 "마땅히 사회에 필요없는 자들은 도태시켜야 한다"는 인간 이하의 논법들이 공감대를 받지 않는 사회가 되었으니까요. 물론 이러한 가운데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 또한 마땅히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자본주의가 어떤 비판도 용납할 수 없는 성역이 아님을 인정해야만 하고, 민주 정치가 당연하게 시장을 보호하는 데만 책임을 다하고 시장 자유를 맹렬하게 지켜내야한다는 신보수주의자든 신자유주의자든 뭐라 불리던 간에, 그러한 주장들이 터무니 없는 '반동 레토릭들'을 배경으로 재생산되어 왔다는 점은 꽤 우려할만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전개로 인해, 민주주의가 경멸을 당하고 있는 상황인데, 과연 전세계는 민주주의가 과잉인 상황일까요? 가까운 미래에 민주주의가 과두제에 이를 수밖에 없다면 그것은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득세가 원인일 것입니다. 개혁의 문제를 혁명의 방편으로 여기는 흐름이 이처럼 아직도 강고하기에, 시민들의 변별력 자체가 어떤 측면에서는 소용이 없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의 진보를 위한 개혁과 더 나은 민주주의를 위한 행동은 진보주의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는 것이죠. 좀 더 풀어서 말하자면 그것은 오히려 보수주의자들이 더 옹호해야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반동적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허쉬먼의 이 놀라운 글은 제게 무엇보다 두 가지 부분에서 이채를 느끼게 하였는데요. 그것은 허버트 스펜서와 귀스타브 르 봉을 보수주의자로 꼭집어 지칭했다는 것입니다. 스펜서와 르 봉을 그런 식으로 보수주의로 스펙트럼화 하는 것이 뭔가 우습다고 해야할까요. 이 지점에서 스스로 보수주의자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이런 허쉬먼의 주장에 격렬히 반대해야하는 것이 아닐까요. 

현재의 여러 논쟁들에서는 일부 ‘진보적‘ 혹은 ‘선의의‘공공 정책이 시행 과정에서 반직관적이고 반생산적이거나 혹은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다는 지적들이 제기되곤 한다. 자유를 얻으려는 시도는 사회를 노예 상태로 떨어뜨릴 것이며, 민주주의를 추구하면 과두정치나 전제정치를 만들어낼 것이고, 사회복지 프로그램들은 빈곤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늘어나게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버크는 메피스토의 말에서 선과 악을 뒤집어, 공공의 선을 추구하는 혁명가들의 노력이 사회적으로는 악과 재앙을 초래할 것이며, 이는 그들이 말하는 목적과 희망에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주 초보적인 형태의 보통선거권이라고 해도, 대중의 정치 참여라는 개념이 유럽의 대다수 엘리트 계층에게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였는지에 대한 증거는 쉽게 더 모을 수 있다

르 봉은 인간의 우둔함을 체념하며 바라보는 기록자의 태도를 자처하며, ‘시간만이 그 폐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홉스와는 정반대로, 계몽주의 시대에는 사회를 변화시키고 개선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좀 더 높은 평가를 하고 있었다

토크빌, "(프랑스 혁명) 이후에 우리가 절대권력을 타파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우리는 노예와 몸 위에 자유의 머리를 얹는 일에만 성공했을 뿐이다

군중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 그중에서도 특히 르 봉과 같은 학자들은 직접적으로 재앙을 예견했고, 좀 더 ‘신중하고‘보다 신랄한 부류는 무용 명제를 차용했다

즉 복지 급여가 가난한 사람들의 행동 양식에 자신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 돈이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못한다고 주장하려면 상당한 수준의 궤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무용 명제는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용 명제는 민주적 선거를 통해 권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준다거나 복지국가의 제도들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어준다는 것을 내세우는 정책들이 그런 일을 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기존의 권력 및 부의 분배를 유지하고 강화해 왔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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