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인의 자격 - 지식인의 책임과 그 후편
노암 촘스키 지음, 강성원.윤종은 옮김 / 황소걸음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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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는 1929년 미국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이스트 오크 레인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유대인 이민자 출신으로, 부친인 윌리엄은 1913년, 징병을 피해 러시아 제국에서 미국 볼티모어로 이주를 해왔습니다. 촘스키가 16세가 되던 해인 1945년,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일반 학습 프로그램을 시작하여 철학, 논리학, 언어학을 공부하고, 특히 아랍어에 대한 관심을 키웁니다. 그런 그의 지적 호기심은 젤리그 해리스를 만나 꽃을 피우게 되고 그런 해리스의 인도 하에,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 분야에 발을 디디게 됩니다. 그리고 1955년에 촘스키는 MIT에서 조교수를 시작으로 강단에 서게 되는데요, 특히나 '통사론의 측면','생성 문법 이론의 주제'와 같은 논문들은 그에게 큰 명성을 가져다 줍니다. 미국 내부의 정치적 혼란기였던 1967년 이후의 시기에, 촘스키는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 노선을 걷기 시작합니다. 여기에는 같은 해에 출간된 "지식인의 책임"이 그를 대표적 반체제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데요. 더욱이 직접적인 반전 운동으로 여러 차례 당국으로부터 체포되었으며,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반대자 명단에도 포함되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유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공개적으로 반유대주의를 피력하고 1985년에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가 개입한 니카라과 콘트라 사건에도 큰 관심을 기울이며 미 정부를 강하게 비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이 노년기에 접어 들었을 시기에는 9.11 테러로 촉발된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을 멈추지 않았으며, 일련의 그의 활동으로 친정부 지식인이 아닌 저항하는 대중 지식인이자 좌파 지식인으로서 전세계 자본주의 문제, 미국이 저지른 타국에 대한 불법적 군사 개입,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문제 등을 언론과 평단에 끊임없이 제기하는 그야말로 미국의 실천하는 양심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esponsibiltiy of Intellectuals"로 지난 2017년 출간되었고, 일종의 합본 형식으로 추가된 후편은, "The Responsibiltiy of Intellectuals, Redux"로 "누가 세계를 지배하는가? Who Rules The World?"의 발췌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4년 3월 이뤄졌습니다.

편의상 촘스키의 이 글을 전편과 후편으로 나눈다면, 전편은 1964년 통킹만 사건으로 촉발된 미국의 베트남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이 시기의 촘스키는 반전 운동으로 비롯된 반정부 운동으로 유명했고, 스스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대표적 인물로도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지식인의 개념이란 무엇인가?"로 시작되는 도입부는 당시 출판된 비평가 드와이트 맥도널드의 거의 동일한 제목을 가진 에세이로부터 글이 전개됩니다. 지금도 '통킹만 사건'에 대해 말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물론 이 사건과 배경과 사건이 상이하지만 1961년의 '피그만 침공'을 고찰해 본다면, 1960년대의 미국이 과연 어떤 국가였는지 대략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촘스키가 이 글을 통해 일일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미국의 행정부의 권력 조직이라는 것이, 헌법을 통해 의회의 견제를 받는다고 하지만 로널드 레이건 시절의 위법한 '이란-콘트라 사건'을 기억한다면, CIA와 국방부 엘리트 관료들이 주축이 된 비공개 군사 작전 같은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나날이 첨예화 된 냉전 시기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 진영 간의 소위 극명한 이념 전쟁을 다른 영화나 드라마로 접해본 분이라면, 자신들의 사활적 이익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았던 이 거대한 자유주의 정부가 어떤 식으로 법과 정의 위에 있었는지 분명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헌법을 거의 국체로 여기는 국가인 미국은 의회의 권한이 상당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다소 도식적인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의회가 행정부를 견제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권력 분립 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그런데 행정부의 오판이라든지, 외부에 대한 과도한 군사력 투사, 타국에 대한 불법적인 개입, 인접 국가들의 군사 쿠데타 지원 등은 의회의 견제 만으로는 '행정부의 일방주의'를 방지하기 어렵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지점에는 시민들의 입을 통한 여론이 필요한 부분이고, 이를 보장하기 위해 언론의 의무 또한 포함됩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지식인의 책무와 더 나아가 이들의 양심이 무척이나 중요한 지점인데요. 이에 촘스키는 이 글의 후편에서, 일반적인 지식인들은 '체제 순응적 지식인'과 '가치 지향적 지식인'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후자는 특히 역사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을 받는 일이 벌어진다고 단언하는데요. 그만큼 가치 지향적 지식인들은 행동에 따른 대가가 그 발언과 비판에 비례하여 처벌이 가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전자의 체제 순응적 지식인이야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촘스키가 말하는 "지식인은 특권을 갖고 있다"는 설명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원하면 권력에 합류할 수 있고, 엘리트 지배 정치에서 전문가 그룹의 정치와 같이 사회 내부의 존경과 개인적 이익을 쉽게 거둘 수 있다는 단편적이고 평면적인 내용일까요. 촘스키는 독자들을 위해, 정확한 답변 없이 그저 '진실의 여백'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일찍부터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협력(이것의 수사는 아마도 다양할 겁니다.) 아래 지속적으로 헤게모니를 확장하면서, 그렇게 지식인들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땅히 이익을 추구할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했는데요. 그래서 보통의 지식인들이 사회의 공익과 다수의 이익에 소위 기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더 어려워진 부분이 있습니다. 물론 위의 얄팍한 진술로 그저 지식인들을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단순히 도덕론에 근거한 입장과 양심의 문제로만 추동하기 어려운 그야말로 '능력주의와 개인의 이익 추구'가 미덕인 사회로 진화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본주의가 개인의 자아 실현과 사적인 이익 획득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는 촘스키의 '지식인의 자격'은 아마도 권력과 가깝고, '미국의 국익을 우선'하는 조직과 그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지식인들을 냉정히 비판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스스로에게 자신의 치열했던 삶을 어쩌면 내면의 목소리로 확인 받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글 서두에 등장하는 아서 슐레진저의 사례는 촘스키가 '함량 미달의 지식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그의 말대로 지식인의 책무라는 측면에서, 마땅히 해야 될 말을 하고, 권력에 대한 비판이 주가 되어, 사회를 위해 양심의 소리가 적시적소에 전달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정부의 오판을 충분히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을 겁니다. 이것은 단순히 저의 순진한 생각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슐레진저와 같은 내각에 참여했던 지식인이 시민을 오도할 수 있는 베트남 전쟁과 같은 일련의 군사적 개입 사태에서 미국 시민 뿐만 아니라 베트남 국민의 운명까지 포함해, 가감 없이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촘스키가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명분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그 추악한 본질을 드러냅니다. 다시 한 번 '굴절된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것이 사회에 얼마나 해악이 될 수밖에 없는지 곧이어 등장하는 논증들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겠는데요. 권력에 봉사하고 권력과 함께 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을 마냥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그 힘에 굴복하는 동물의 날 것 만큼이나 유리된 시민 다수의 이익과 안전은 추방되고, 그렇게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존재하게 되는 것이 과연 우리의 미래일지 진지하게 궁금할 따름입니다.

미국의 현저한 국익과 관련해, 1954년 미국 정부가 과테말라를 침공했을 때, 그리고 1973년 합법적으로 들어선 칠레 아옌데 정부를 미국이 무너뜨리기 위해, 시카고 보이스(시카고 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들)와 불법적인 CIA의 개입은 일전에 브레진스키가 남아메리카를 꼭 집어 '미국의 앞마당'이라고 한 언급을 새삼 떠오르게 만듭니다. 당시의 지식인들이 정의와 권리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미국에 의해, 아르헨티나, 엘살바도르, 콜롬비아 등지에서 벌어진 비극을 '국익'이라는 이름으로 눈을 감지는 않았을 겁니다. 이에 촘스키는 "요컨대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지배에 열려 있으면 그 나라의 정부 형태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꼬집고 있는데요. 더욱이 1973년 9월 11일의 칠레 피노체트에 의한 군부 쿠데타는 묘하게도 28년 뒤의 9월 11일과 불길하게 매치가 됩니다. 저자인 촘스키는 마찬가지로 이 23년전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서도 당시 미국 정보 당국이 충분히 사전에 방지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은 여러 정황들을 포함해, 설득력이 높은 논증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에게 보일 '답변'과 비극적인 테러 이후, 2011년 5월, 미 특수부대에 의해 그가 살해되고 시신이 바다에 버려진 사건에 대해서도 "왜 그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하지 않았는지"에 합리적 의심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물론 빈 라덴의 처리를 둘러싼 여러 현실적 요건을 고려해, 이런 자에게 알량한 재판 따위는 필요 없다고 윗선에서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당시 국제정치학적인 배경에서 빈 라덴을 그렇게 처리했을 수도 있을 텐데요. 그럼에도 오사마 빈 라덴에게 중요한 법의 단죄가 내려지지 않은 점은 재판에서 '그날의 비극과 참상'이 빈 라덴에 의해 오염되고 훼손될 것을 두려워해서였을까요.


촘스키는 평생에 걸쳐, 미국의 헤게모니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행된 불법적인 군사 개입과 은폐된 작전에 대해, 자신의 목숨을 걸면서 비판했던 지식인입니다. 만약 그가 미국 시민이 아니라 중국이나 러시아의 시민이었다면 쥐도새도 모르게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그가 말하는 지식인의 자격과 책무란 참으로 무거운 의미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텐데요. 후편의 결론에서 지식인은 특권이 있다고 단언하는 부분에서 촘스키 자신은 사회로부터 얻은 그 특권에 보답하기 위해, 그런 고난의 길을 서슴지 않고 걸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지금도 티파티를 비롯한 극우 포퓰리즘 세력에 의해 '미국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촘스키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를 전형적인 좌파 지식인이라는 틀을 씌워 그의 경력과 양심을 애써 폄하하기도 합니다. 촘스키 이전에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언급했던 쥘리앙 방다는 지식인은 양심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어야만 한다고 그 당위를 강조했는데요.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유복한 자본주의의 시대에는 양심에 목숨을 걸기에는 지식인 개인이 '잃을게 너무나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더욱이 자칭 지식인이라는 벼슬로 자신의 입장과 스스로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이나 조그만 이익을 가져다 주는 기득권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며, 진실을 오도하고 더 나아가 대안적 사실과 같은 궤변으로 이 세상을 아주 재미난 곳으로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과연 지금의 이 시대는 어떤 식으로 귀결이 될지 참으로 음울한 생각이 드는데요. 1960년대부터 미국에서 '과잉된 민주주의'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것처럼 '모두에게 평등하지 않은 자유가 사람을 고르는 시대'를 우리는 곧 목도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하고 널리 알려진 헨리 키신저는 전문가의 책임을 자세히 설명했다. 키신저에 따르면, 전문가는 자기 선거구민의 합의를 "높은 수준으로 구체화하고 정의"하여 선거구민이 세운 틀 안에서 주어진 일을 수행함으로써 자격을 갖춘다.

독일과 일본 국민은 자국 정부가 저지른 만행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가? 그리고 아주 당연히 맥도널드는 이 질문을 독자에게도 던진다. 전쟁 중 민간인을 잔혹하게 폭격한 데 영국과 미국 국민은 어느 정도로 책임이 있는가?

지식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정부가 내세우는 명분과 동기, 숨은 의도를 파악해 정부의 행동을 분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진실을 말하고 거짓을 드러내는 것은 지식인의 책임이다. 이는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는 진부한 말로 들릴지 모른다.

자신이 내세우는 명분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 명분을 위해 기꺼이 거짓말하는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에 반해 미국의 동기는 순수하며 분석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종교적 믿음이나 다름없다.

‘전문 지식‘이 세계정세에 영향을 끼치는 한, 정직성을 갖춘 사람이라면, 그 지식이 타당한지 어떤 목적에 쓰이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고,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이는 더 논할 필요도 없을 만큼 당연한 사실이다.

아무리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도 미국의 공격적 행보가 세계정세를 좌우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으며, 미국의 정책은 그 이면에 있는 명분과 동기를 가지고 분석해야 한다.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고 어느 정도 권력을 누리는 사람이라면 이런 문제에 신경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벨이 던진 물음으로 돌아가자. "민주적 제도를 구축하면 새로운 사회가 성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회변혁은 전체주의적 수단으로만 이룰 수 있는가? 나는 정직한 사람이라면 이 물음을 제삼세계의 이데올로그보다 미국의 지식인에게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미국은 자국의 경제적 침투와 정치적 지배에 열려 있으면 그 나라의 정부 형태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는다.

버틀란드 러셀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센 비난을 받았으며, 최근에 나오는 전기에서도 여전히 욕을 먹는다.

닉슨 행정부의 표현을 빌리면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린 목적은 "외국인이 우리가 엿 먹도록", 즉 국내 자원을 장악하고 더 넓게는 미국 정부가 싫어하는 노선에 따라 독자적인 발전 정책을 추구하도록 부추길 가능성이 있는 "바이러스"를 죽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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