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에 반대한다 - 무능한 민주주의를 향한 도전적 비판
제이슨 브레넌 지음, 홍권희 옮김 / 아라크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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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슨 브레넌은 1979년생으로, 미국 메사추세츠의 턱스베리와 뉴햄프셔의 허드슨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 소재한 사립 연구 대학인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과 뉴햄프셔 주 더럼에 있는 공공 연구 대학인 뉴햄프셔 대학을 거쳐, 애리조나 대학에서 데에빗 슈미츠의 지도하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이후 2006년부터 2011년까지 로드 아일랜드 프로비던스에 있는 브라운 대학의 연구 센터인 PTP (Political Theory Procject)의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같은 대학의 철학과 조교수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브레넌은 민주주의 이론, 유권자 투표 역량, 공공 정책, 미국식 자유주의 및 자본주의 사회의 도덕적 기초 등을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그의 논저들은 대부분 이론과 현실 정치의 괴리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유권자들의 무지성, 그리고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비판하고 그것의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포함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Against Democracy"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스스로를 '현격한 도구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는 저자는 민주주의가 더 나은 정치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지, 그 자체로 흡사 숭고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자신의 글에서 줄곧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 제가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과거 바이마르 공화국 이후의 독일이 유럽을 포함한 전세계에 어떠한 참화를 초래했는지 돌아봐야만 하고, 저자의 강조대로 민주주의 자체를 혹여 과도하게 신성시 할 필요는 없지만 기존의 체제를 그저 쉽게 생각하여 경우에 따라서 비상시에 '어떤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소위 '결단주의자들'의 지독하고 편의주의적인 논법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역시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저자는 꽤나 직접적인 수사로 분석되고 있는 우리 유권자들의 '무능'과 민주주의 체제 특유의 내재적 분열로 정치가 더 이상 누구에게나 이익이 되지 않는 작금의 모습을 고통스럽지만 거의 가감 없이 규명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현재 민주주의의 한계를 저자 자신이 분석한 여러 근거와 인용을 통해서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그동안 여러 민주주의자들과 공화주의자들이 현실과 일정 부분 괴리가 있던 민주적 이상도 회의적인 측면에서 동일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자는 어느 정도 현실과 타협한 대안으로 뒤이어 충분히 논증되는 '에피스토크라시'를 현실 정치의 대체제로 제안하며, 전체적으로 글은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에피스토크라시(Epistocracy)는 일종의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식인들과 주요 지식 체제 전반이 주가 되는 통치로, 현재의 전문가 정치 내지는 전문가들의 정치와도 비슷해 보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다수의 '위임된 주권'이 기반이 되었지만 그 속에서 질 좋은 교육과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특정 영역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사실상의 '엘리트 지배 체제'임을 감안해 본다면, 여기에서 민주주의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에피스토크라시가 이 엘리트 지배 체제와 과연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문득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에 저자는 현대 민주주의 정치의 한계와 그 불확실성을 비판하기 위해 해당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수많은 유권자들을 크게 3가지 성향의 부류로 나누고 있었는데요. 독특한 작명 센스 만큼이나 그 내용들도 충분히 평범하지가 않았습니다.

우선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지하며, 사회과학적인 지식도 거의 없는 '호빗'은 그저 일상 생활을 해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의 일반적인 비투표자들을 대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훌리건'은 정치적 광팬으로 이들 모두는 대체로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그룹입니다. 특히나 이들은 앞선 호빗들과는 달리 사회과학을 어느 정도 신뢰하지만 자료를 선별해서 자신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근거나 연구만 취합하려는 경향이 다분하고, 자신의 정체성과 자신이 속한 정치적 그룹의 일원임을 자랑스러워 하는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부분은 가히 배타적인 속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들은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고 때에 따라 혐오하기까지 합니다. 이 훌리건 그룹은 미국에서 매번 꾸준히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어느 정도를 포함하고 있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벌컨(아마도 미국 SF 드라마 '스타 트렉'의 모든 사적 감정을 배제한 채, 철저히 이성적인 삶을 지향하는 종족인 '벌컨 Vulcan'을 모티브로 삼은 듯 보입니다)은 정치를 과학적이고 이성적으로 여기며, 이들의 의견은 사회 과학과 철학에 강력한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벌컨의 특성은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편향되고 비합리적인 것을 피하려 하기에 냉정하지만, 유권자 그룹 전체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적습니다.

이렇게 2장에서 3장은 유권자들을 '3그룹'으로 나눠 분석한 내용들을 담고 있고, 저자의 분석은 어느 정도 날카롭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벌컨을 제외한 호빗과 훌리건은 어느 정도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그룹으로, 저자인 브레넌이 체제의 구성원들과 혹은 유권자들의 소위 정치적 기본 능력에 기반한, '역량 원칙'에 있어서도 이 두 그룹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특히 이들이 "정치에 관한 기본적인 질문조차 대부분은 아무것도 모르고, 이들이 아는 것은 그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과장이 섞이긴 했지만 그 맥락은 어느 정도 수긍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욱이 2장에서, 미국의 유권자들 가운데, 현직 대통령이 속한 정당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당하다는 자료 해석은 전세계에서 가장 고도화 된 대학 시스템을 보유한 국강의 시민들이 그와 같은 간단한 정치적 배경 지식도 갖추지 못하고 있는 실정으로 이는 꽤나 충격적으로 다가왔는데요. 기초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유권자가 민주주의 전반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기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겁니다. 또한 이러한 다수가 구성하는 민주주의의 불확실성 자체도 심각하다고 봐야 할 텐데요. 기존의 기득권층과 지식인 계급이 오랫동안 보여왔던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은 대중 자체에 대한 불신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저자가 거듭 분석하는 이런 비판은 "기본적인 기초 경제학 지식도 없는 사람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경제적 지식과 그렇게 확대한 주장이 근본적으로 타당성이 없다."고 해석하는 측면과 일맥상통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현대로 넘어오며 요구되었던 민주주의 정치의 기본은 시민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스스로를 위한 재교육과 이를 통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는 부분일 텐데요. 이러한 사고는 어느 정도 계몽주의에 기반한 것이고, 저자가 계몽주의를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그의 정치적 인식이 얼마나 회의적이고 부정적인지 짐작할 만하다고 생각됩니다.    


더불어, 저자가 진단하고 있는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들 중에 하나인 "숙의 민주주의"의 현실적 한계를 마찬가지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의 말대로 대다수의 시민들이 상당한 인지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는 자료적 증거와 함께 현실 민주주의에 있어 정치가 유권자들 대부분이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채로 있기를 심지어 부추긴다."는 2장 후반부의 도발적인 진술은 선연히 이해될 수 없었는데요. 이것은 정치와 그것을 구성하는 민주주의 체제 전반의 일반적이고 기초적인 지식도 갖추지 못한 누군가가 이 현실 정치의 진면목을 올바르게 이해하기란 어려운 법이며, 그런 유권자의 기본 자질이나 자격조차 없는 시민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어찌됐든 현실 정치에 관여하고 더 나아가 그런 '주권적 형태'를 저자는 그리 아름답게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유권자로서의 시민이 현실 정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를 관념상 무의미하다고 보는 장면은 저자에 대해 약간의 의구심을 갖게 했는데요. 이어지는 3장의 진술도 '시민들의 재교육'과 '스스로를 위한 학습'이 쉽지 않은 일임을 강조하고 있는데요. 현실 정치를 알고자 지식을 찾는 행위 자체가 많은 시민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저자의 분석은 이처럼 반박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일전에 알렉시스 토크빌과 존 듀이는 시민들 스스로의 역량 재고를 위해 광범위한 재교육이 체제에 있어 시급히 필요한 일임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런 명확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자의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 자체가 이들 개인에게 있어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저자의 논평은 꽤 흥미로웠던 부분인데요. 3장을 관통하는 주제를 대변하는 듯 보이는, "정치 참여는 타락시킨다"는 제목은 마치 옳은 방법으로 숙의하지 않는 다수가 정치를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그만큼 순진한 생각이라고 저자가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알고 있는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확증 편향과 인지적 편견에 쉽게 벗어날 수 없고, 특별한 정치적 각성이 전제되지 않는 이상, 재논의나 오류로 판명된 의견의 개선 역시 불행하지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이러한 맥락에서 공론장을 매개로 시민들 간에 건설적인 토의가 가능할 지는 이곳의 논증대로 라면 거의 회의적인 수준이라고 여겨지는데요. 예를들어 티파티와 같은 극단주의에 경도된 사람들이 자신들과 다른 방향성을 가진 정치 세력과 토론이 가능할지는 가히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공화주의자들은 저자의 해석대로, 민주주의를 강화하기 위한 공적 숙의와 시민들 사이에서는 더 큰 포용과 진정한 정치적 평등이 있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자는 이 부분을 현실에서는 상당히 달성하기 어려운 조건으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였는데요. 숙의의 개념은 앞선 부분에서 같은 맥락으로 한계가 있다 손 치더라도, 뒤이어 이어지는 저자의 '정치적 평등'에 대한 분석은 쉽게 수긍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회 내부적으로 모든 시민들의 정치적 평등이 개선되지 않기 때문에 시민 사회에서 소위 '정치적 효능'이 한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하는데요. 이를 단적으로 말해, 현재 미국 의회에 대한 정치경제적 금권 로비는 의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돈과 권력을 가진 소수의 계층이 전투적인 로비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워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정치적 평등이라는 기본 가치를 어떻게 개념적으로 수치화 할 수 있을지는 다소 불명확합니다만 이는 역으로 놓고 봤을 때,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적 평등과 현저히 거리가 있는 민주주의를 몸소 체험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의 논증적 한계는 현실의 이러한 불평등한 구조적 문제를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그저 정치적 평등에 대한 모호성을 다소 빈약한 근거로 확대 해석하여 이것이 시민들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단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요. 더욱이 앞선 숙의 민주주의가 인간의 원초적인 불합리성으로 인해 시민들이 편견에 빠진 상태에서 숙의 자체가 시민권을 가진 개인에게 어려운 과제임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촘스키가 분석한 지식인에 대한 몇 가지 분석과 맞물려, 어느 특정 지식인들은 시민들이 정치와 국가에 대해 너무나 많이 알게 되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는 진실의 공개는 사회의 지식인 그룹과 권력층이 어느 정도는 다수의 시민들이 정치와 관련된 직접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일을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습니다.    

뒤이어 4장에서 저자는 우리의 정치적 참여가 "도덕적이고 인식론적인 성격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있지만, 이보다 큰 다른 이점을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상 필요할 수도 있다."고 실로 어정쩡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정치적 참여가 그 자체로 정부에 대한 견제이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자유와 자율성을 증명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런 맥락이 기반이 된 정치적 투표 행위 자체가 현실에서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인식은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에서 우리의 한 표가 정부의 내각을 구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다소 불확실한 측면이 있다는 점도 저 역시 쉽게 동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양자'에서 주권 개념이 중요한 가치 수단으로 작용해 왔다는 점과 시민이라면 마땅히 공직에 지원할 수 평등한 자격이 주어져 있겠으나 현재 대다수 시민들이 공직에 지원하여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기회가 사실상 제한되어 왔다는 점에서 '주권 개념에서 도출된 공화주의적인 정치'가 얼마간의 시대를 거치며 변질되어 왔다는 부분도 우선해서 인식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더욱이 저자는 필립 페팃이 주창했던 '비지배 자유'를 특별히 인용하면서 앞서 진술했던 정치적 평등과 이 전자가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 정치적 평등과 관련해, 자체 의미와 개념을 애써 재단한 부분은 조금 문제가 있어 보였는데요. 민주주의 하에서 정치적 평등이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저자가 강조하고 싶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과거 냉전 시기에 신자유주의적인 '시장 자유'에 어느 정도 협력한 민주주의에서 반이데올로기적이든 태세를 바꾼 능력주의의 신봉이든 간에 어느새부턴가 '평등'이 상당히 금기시 되었다는 점도 부정할 수가 없을 겁니다. 이는 일전에 지지 파파차리시가 인터뷰를 통해 도출된 결론이기도 한, "모두가 평등한 자유"가 현 시점에서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실질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일관된 논증 가운데 저자는 각각 시민들의 투표 역량 검증을 위해, 일종의 지식 테스트를 사회에 도입할 것을 제안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을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일정 부분의 점수에 도달한 유권자에게만 투표권을 주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저 역시 즉각적인 반감이 들기도 합니다만, 그의 앞선 주장을 단순한 '기호론'으로 국한해 해석할 수는 없기에 앞선 유권자들의 역량을 측정해 보겠다는 아이디어의 발상 자체는 아마도 에피스토크라시가 민주주의에 반해 고유한 의견을 갖는 핵심적 내용으로도 읽힙니다. 제가 맨 처음에 언급 했듯이, 저자는 철저한 도구주의자로 현실 정치가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면 민주주의든 권위주의든 현실에 잘 부합하는 체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입장이기도 한 데요. 그가 제안하는 에피스토크라시 역시 이러한 맥락 가운데에 놓여 있는 동시에 쉽게 말하자면 현실에서 간단히 취사 선택이 가능한 정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5장 후반부에서 저자가 이 에피스토크라시가 일종의 엘리트주의적인 것으로 인정한 진술은 우리가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 논저에서는 엘리트주의와 에피스토크라시를 구분하여 독자들에게 인식 시키고 있진 않지만 에피스토크라시 역시 엘리트주의적인 한계를 갖는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 점은 어떻게 보면 저자가 서두에 존 스튜어트 밀을 인용하면서도 '공리주의'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 것이 의도된 차원인지 의심을 갖게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저자가 말하는 시민들의 이익이라는 것이 매우 모호하게 그려지고 더 나아가 힘없는 다수와 권력을 가진 소수의 지배 체제에서 어떻게 하면 모두의 이익을 지켜낼 수 있을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저자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유권자들의 성향, 그들 본질에 대한 회의적인 분석 역시,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설득력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겨집니다. 이는 6장에서 유권자들을 불합리하고, 제 역할을 못하고, 부도덕하며, 부패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분석하면서 이들이 주가 된 민주주의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유지하는 것으로도 이해됩니다. 결국 이 논저의 원제가 의미하는 'Against Democracy'는 어떻게 보면 민주주의를 적대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중 정치'전반에 대한 확고한 반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글에서 짧게 언급되는 도덕적 원칙은 민주주의에서 정의의 관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앞선 '시민들의 이익'이 사회가 보장하는 정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보여지는데요. 인류가 구축한 여러 정치 체제 가운데 민주주의 만큼 다수의 이익을 보장하는 시스템은 현실적으로 그만큼 규명하기가 어렵다고 봐야 할 텐데요. 민주주의의 근원적 가치인 다양성과 다원주의는 저자가 인정하는 시민들의 인지적 다양성과도 맞닿아 있으며, 비록 현실 민주주의에서 여러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 정체 자체를 경험한 시민들이 과두제나 혹은 엘리트 지배체제와 비슷한 에피스토크라시를 수용할 지는 그만큼 예측하기 어렵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브레넌의 이 책이 일관되게 유권자와 이들이 갖고 있는 명백한 한계를 드러내고 상대적으로 다른 시대와 비교해, 질적으로 고등 교육의 사회임에도 시민들의 정치와 경제에 대한 기본 인식에 대한 무지와 그런 이들이 절대 다수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또 다른 한계라고 볼 수 있는 오늘날 왜곡된 자본주의가 초래하는 만연된 경제적 불평등과 맞물려, "오늘날 민주주의가 왜 불공평해졌는지"에 대한 근본적이 대답이 결여되어 있는 상황은 스스로 견고한 지식인 계급에 속한 사회 주류로서, 대중들에게 알릴 수 없는 금기시 되는 문제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인식적 한계는 명확합니다. 결국 그의 최종 결론이기도 한, 정치가 앞선 부정적 요소들로 인해, 시민들을 서로 적대하게 만들고 정치 전반이 시민들을 교묘히 충동질시킨다는 진술은 어느 정도 비극적이라고 볼 수 있을 텐데요. 굳건한 권력을 갖고 있거나, 충분한 자원을 가진 소수의 기득권층이 절대 다수의 무지한 시민들을 손쉽게 다룰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 몇 세대 앞의 민주주의는 전망 그 자체는 상당히 암울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자 자신이 인식하고 있는 일반 유권자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분류를 적어보고자 합니다. 제가 보기에 이것은 대중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배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투표권을 역량의 수준에 따라 유권자들에게 부여하자는 아이디어도 그렇고 논증과 주장의 과격함은 제가 읽었던 여느 논저들에 비해 가장 극단적인 글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불합리한 유권자 : 대다수는 선거의 세부 사항과 쟁점에 어느 정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와 동시에 증거에 근거하지 않고, 희망적인 사고와 타당성 없이 우연히 믿게 된 평판 나쁜 다양한 사회과학 이론에 근거해 투표한다.

제 역할을 못하는 유권자 : 대다수는 선거의 세부 사항과 쟁점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논의는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을 뛰어 넘어, 가진 것보다 더 많은 지능을 요구한다.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한 명의 후보를 선택한다.

부도덕한 유권자 : 대다수는 인종차별주의에 따라 흑인보다 백인 후보를 선택한다. 아니면 피상적으로, 더 잘생긴 후보를 선택한다.

부패한 유권자 : 대다수는 어떤 정책이 소수자에게 심각한 해를 끼치거나 그럴 위험이 매우 커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정책을 선택한다.

              





"일반적인 시민은 정치 분야에 들어오자마자 정신적 수행 능력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자가기 정말 관심 있는 범위 내에서 어린애 같은 방식으로 논쟁하고 분석한다. 다시 원시인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내가 길게 주장하겠지만) 보통 선거가 대다수 유권자에게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정치적 결정을 하도록 부추기고, 이러한 무지하고 비합리적인 결정을 무고한 사람들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에피스토크라시는 지식인에 의한 통치를 의미한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정치체제는 역량, 기술, 그리고 그 기술에 따라 행동하는 선의에 의해 공식적으로 분배되는 정치권력의 정도만큼 에피스토크라시적이다.

먼저 어떤 형태의 에피스토크라시가 현실적인 결함이 있더라도 민주주의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낸다면, 우리는 민주주의 대신 에피스토크라시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명사에서도 대부분 정치권력은 도덕적으로 자의적이고 혐오스럽고 사악한 이유 때문에 불평등하게 분배됐다.

시민 개개인은 정부에 관한 힘이 거의 없고, 개인의 투표는 기대 가치가 거의 없다. 시민들은 정치 지식을 얻는 일에 투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지식은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정치적 선호가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상관없이, 정치를 잘 알기 위해 시간을 쓸 가치가 없다.

그 결과는 많은 피실험자가 집단에 순응하기 위해 실제로 세상을 다르게 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료의 압박은 의지뿐만 아니라 시력까지 왜곡시킬 수 있다.

반면에 나는 당신의 정치적 자유와 참여가 당신이 정부에 동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당신의 이익을 증진하지 않으며, 어떤 의미에서도 당신의 자율성을 증가시키지 않고, 지배로부터 당신을 보호하지 않으며, 당신이 자유롭고 평등한 사람으로 도덕적 발전을 하는 데 기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민주주의의 상징적 힘에 광범위한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를테면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주는 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 동등하지 않은 정치적 권리를 주는 것은 또 무엇을 표현하는지, 그러한 표현이 사람들의 자부심과 사회적 지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같은 것들이다.

제2장에서 보았듯이 정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에서도 대부분의 시민은 아무것도 모르고, 많은 이들이 아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못하다는 사실이 경험적 증거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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