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복종에 관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승진 옮김 / 마농지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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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독일계 유대인으로써, 전세계에서 인정받는 사회심리학자, 사회학자, 인본주의 철학자 그리고 사회 민주주의자였습니다. 특히 그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그가 살았던 시대에서 여기 프롬 만큼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면밀히 연구한 학자는 보기 드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1900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정통 유대교 부모 밑에서 태어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을 거쳐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습니다. 이후 독일에서 나치가 권력을 잡은 이후, 여느 유대인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위스 제네바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 대학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비로소 미국에서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 주게 되는 정신 분석과 심리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되고 동일 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기에 이릅니다. 이 책은 원제, "On Disobedience : Why Freedom Means Saying 'No' To Power"로 지난 1981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6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프롬도 이미 장 자크 루소를 접했을 수도 있겠으나, 단편적으로 이 글의 제목과 관련되어 떠오른 것은 루소의 "인민은 자신들의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물론 프롬의 이 책이 시민들의 일반적인 야생성을 단순히 고취시키고자 쓴 글은 아니었는데요. 그가 버틀란드 러셀을 줄곧 인용하면서 우려하고 두려워했던 것은 무분별한 핵전쟁으로 인한 전세계의 절멸이었습니다. 결국 이렇게 첨예한 종말을 위해 대결하는 사실상의 맹목적 군사주의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심도있게 고찰해 보는 것이 그의 일관된 학문적 목적이기도 할텐데요. 그의 확신대로 러셀이 단순한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누구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무엇보다 긍정하고 중요시하게 여겼던 휴머니스트로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봐도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바로 이런 우리의 삶을 위해 모든 시민들이 최소한의 어떤 노력을 해야하는지를 명확히 한 것이 바로 이 책의 꽤 숭고해 보이는 목적이라고 판단됩니다.

글의 2장에서 프롬은 과거 한정된 자원으로 인한 견고한 계급주의적 체제에 어떻게 소수의 지배자들이 다수의 피지배자들을 억압하고 제압해 왔는지를 잘 드러내고 있는데요. 그것은 일반적인 수준의 '복종'이라는 관념을 넘어서는 거의 세뇌에 가까운 '만연된 복종'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부분의 개념적 도출은 다음 3장에서 드러나는,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사색하고 생각을 진행시킬 수 있는 분위기"를 과연 이를 자본가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를 단편적으로 추측해 볼 수 있기도 한데요. 프롬은 논리적 전개 과정에서 과거 자본주의적 관리 체계와 공산주의적 관리 체계의 양대 관리 체계가 실상은 많은 인류의 삶에 실질적으로 기여한 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그러한 측면에서 저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인 3장의 시스템적 모순이라고 할 수 있는 "우리는 더 부유하지만, 덜 자유롭다"에 이르게 됩니다. 사실 배타적인 시장 자유에 경도된 자들은 오늘날 이룩한 자본주의가 아무런 결점이 없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2008년의 대몰락을 차치하더라도 이런 자본주의가 '합리주의라는 만능의 잣대로 시민들을 세뇌'시킴으로써, 과거 소크라테스와 같은 현인들의 스스로의 양심에 따른 불복종과 저항을 거세시켜 버린 비극적 작용을 추동한 바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먹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그따위 사회 정의와 불평등의 개선이 뭐가 중요하냐는 것과 같은 주장들 말입니다. 이에 프롬은 프로메테우스의 불과 같은 우리의 불복종의 정신이 너무나 터무니없게 죄악시 된 것을 '권위주의적 양심'에 빗대고 있기도 한데요. 그래서 그가 강조하는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들은 19세기의 공공연한 권위주의를 극복했다고 자랑스러워 한다"고 비꼬고 있기까지 합니다. 과연 우리가 이 권위주의를 극복했는지는 그 실상에 대해 이미 모두가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프롬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해 크나큰 애정을 갖고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과거 권위주의적인 관리주의자들이 마땅히 누려할 시민의 자유와 권리들을 사회를 통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계층들을 위해 적절하게 관리해 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오늘날 우리의 사법제도가 과연 모두의 시민들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오늘날 심지어 내면화 되었다고 판단되는 자본주의 체제가 민주주의를 시녀로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마찬가지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사법제도가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모두가 다시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죠. 대다수의 시민들이 보다 자유롭게 사회에 대해 혹은 체제 전반에 대해 인간이 지닌 이성의 권리로써 마땅히 사색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입니다. 또한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지만 프롬의 우려대로 인류와 인류 문명 전반을 절멸에 이르게 하기 충분한 핵무기의 위협에서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를 방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단초로서, '시민의 불복종'이 매우 시급한 상황입니다. 단언코 미국을 포함해, 순간 감행될 수 있는 군사주의적 모험을 얼마나 견제할 수 있는지가 우리의 의무이기도 할텐데요. 이렇게 암울한 냉전의 시기에서도 모든 인간의 삶과 자유를 위해 노력하고 경주했던 러셀과 프롬과 같은 소수의 지식인들이 있었기에 우리가 이 정도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끝으로 저자인 프롬은 3장과 4장에서 앞으로 우리에게 벌어질 경색된 시장 자유가 초래할 사회의 양상을 경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단순히 노동자들이 자본을 제어하는 것에 이르는 것을 추종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는 "물질적 목적이 삶의 주요 관심사가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속박으로부터 삶이 해방되게 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언급하게 되는 것이지만 작고한 지그문트 바우만이 현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그토록 강조했던 화두였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진정한 합리적 이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불복종 정신이야 말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건전해지는 선결 조건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저는 지금도 특히, 최상위에 위치한 자본가들과 엘리트주의자들이 시민들이 스스로 사색하고 자신의 삶을 위해 견실히 학습하고 사회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적인 관념에 노예가 되어 있는 저들의 인식론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 자본주의가 어떤 집단의 이해 관계에도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측면에서 그 속성 자체가 공익과 별반 상관없이 배타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에리히 프롬의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역자의 번역이 거의 군더더기 없이 좋았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향후 5년에서 10년 안에 인류가 인간 문명을,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절멸시킬 가능성이 존재하며, 그것도 상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에 복종한다고 할 떄 대개 그것은 권위주의적 양심에 복종하는 것이다

자유와 불복종의 역량은 분리될 수 없다

세상의 좋은 것들은 소수에게 돌아갈 만큼밖에 없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부스러기만 가질 수 있었으므로 불가피하게 이러한 규칙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인류의 역사에서 예언자들은 가끔씩만 나타난다, 그들은 죽은 뒤 메시지를 남기며, 수많은 사람들이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소중히 여긴다. 그런데 바로 이 점 때문에 그 사상은 대중을 지배하고 통제하려는 사람들에게 악용되기 쉽다

지난 150년 동안 우리는 정치 사제들을 넘치도록 보아왔다. 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라는 개념을 관리하고 집행했다

대부분의 사회체제에서 복종은 최고의 미덕이고 불복종은 최고의 죄악으로 여겨진다

버틀란드 러셀은 인간의 마음에 자리 잡은 사악함과 어리석음의 깊이를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산업 시스템이 지나온 경로를 그대로 계속 밟아간다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할 것이며 인간은 어떤 상태가 될 것인가?

거대 기업은 피지배자들에게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생산물이 우리 위의 객관적 요인들과 결합해 우리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점점 더 거대해지면서 우리의 기대를 꺠뜨리고 우리의 계산을 무력화한다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이야기하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유와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저 배불리 먹는 로봇 같은 노예가 되고 싶어 한다

연대와 사랑이 아니라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모두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원칙, 인간의 의지와 비전과 계획이 아니라 비인격적 메커니즘인 시장이 사회의 삶을 조절해야 한다는 믿음 등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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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
도나 저커버그 지음, 이민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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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국 뉴욕 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소재한 도브스 페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도나 저커버그는 근래 이름을 알리고 있는 고전 학자입니다. 이쯤에서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바로 그녀의 오빠가 페이스북의 창립자로 유명한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웹상에서는 그녀와 오빠인 마크 저커버그 간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잘 찾아볼 수 없기에 어떻게 보면 두 남매가 각자가 서로 다른 분야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요 근래 등장한 SNS 인터넷 기업에 대해 상당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의외인 측면이라 생각되는데요. 더불어 그녀는 여성 지식인답게 넷상에서의 여성혐오와 남성 우월적인 인식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글을 언론에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그녀의 학문적 경로는 미국의 사회과학 명문인 시카고 대학에서 예술학 학사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고전 문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외에도 저커버그는 대안 우파 Alt-right 에 대한 비판과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마찬가지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지금 서평을 작성할 이 글 역시 이러한 학문적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Not All Dead White Men"으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커버그의 이 글은 일종의 '사회학적인 르포르타주가 가미된 일부 사회계층에 대한 폭로성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의 주된 대상은 대안 우파와 여성 혐오주의자 및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픽업 아티스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레드필'이라는 반젠더적인 공간에서 "여성과 이민자들, 유색인들 그리고 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어떤식으로 표출"하고 있는지에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작성했던 케이트 만의 논저에서도 그렇듯이, 이 글에도 등장하는 '인셀 Incel, 즉 비자발적 독신'들이 어떻게 죄없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분노로 점철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권리가 여성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는 측면의 인식이 그녀에 의해 가감없이 논증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들이 현재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성평등주의를 옹호하고 특정 인종만을 향하는 특권에 반대하는 소위 계몽적 태도에, 어떻게 저들이 논리적 근거 없이 거의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주장들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글 전반을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극심한 차별에 놓여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내재되어 있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정치적 신념을 무슨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 마냥 '커밍 아웃'하는 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노정을 기울여 온 사회적 진보에 대한 저런 터무니없는 분노와 혐오는 이 지점에서 저들을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 포용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철지난 이데올로기화를 시도하여 그것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모든 계층을 극좌나 강고한 좌파로 몰아가는데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저들의 현재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인 저커버그는 경제사회적 체제의 해석에서 당시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용인한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스토아 철학'을 현재의 인셀과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앞뒤 맥락없이 자신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의 근거로서 무분별하게 내면화시킨 점을 2장 전반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는데요. 아주 단적으로 말해, 전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스토아 철학 전반이 성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직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이렇게 드러난 성차별주의가 "오늘날 다수의 여성 혐오주의자들에 의해 공명한다"는 점은 학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레오 스트라우스의 고전 연구가 그 양가적 측면에서 네오콘들에 의해 일종의 교리적인 측면으로 지지받은 것과 제법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순수 학문조차도 어긋난 이데올로기화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늘날의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파급에도 이러한 왜곡된 학문의 인용이 분명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나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전체주의의 논법을 적극 차용하고 있는 점을 과연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에 대해 시민 모두가 고심을 해볼 시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들이 이 시점에도 '파시즘'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할 시민적 의무에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이 될 것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저커버그가 스토아 철학을 오용하는 이들의 행태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소위 '자기 길을 가는 남자들과 픽업 아티스트 혹은 여성 혐오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인 학문적 인용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상세히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꽤 높은 팬덤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용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3장과 4장은 스토아 고전 철학의 대표격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이미 원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심각하게 여성차별적이고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강간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과 남성들에게 강간을 권유하는 등의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저열한 시도의 근거로까지 삼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수의 인용을 통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거의 '강간 노트'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인정하는 고전의 향취가 지금에와서 어디까지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꽤 중요한 바로미터로 취급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페미니즘의 철저하고 가차없는 성평등주의로 치부하지 말고 시대상에 따라 우리의 계몽주의가 그것을 면밀히 구분해 낼 수 있는 당위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단순히 남녀의 문제라서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 아니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간답고 평등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게 하는 인식적 차원에서 이러한 원칙을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본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사회 전반이 인정하는 시장 자유의 논법이 가미된 '능력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인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의도된 사탕발림으로 결코 왜곡하거나 한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앞선 부분에서 이러한 "레드필 남성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학과 역사를 자기들 멋대로 인용해 자신들만의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로 강화시키는 것은 과거 히틀러의 나치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백인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 자체가 파시즘과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근거의 제시는 고전 철학을 연구한 전공자답게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여성 고전 학자라는 점을 색안경끼고 보지 않는다면 꽤 논리적인 비판이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텐데요. 이 뿐만 아니라 주요한 비교 분석 대상으로 인용되고 있는 픽업 아티스트와 관련해서도, 이들의 행동과 주된 목적이 여성의 성을 트로피로 삼아 보통 인셀들로 규정되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적 상이한 측면의 인식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저자인 그녀가 '픽업 아티스트'라고 규정된 여성의 성과 섹스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의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분석은 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실제로 현역(?)에 있는 어느 픽업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의 일화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까지 받게 되었는데요. 이는 온전히 글을 쓰기에 앞서, 치밀한 자료수집을 선행한 그녀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와서, 대부분의 픽업 아티스트들이 일반적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성을 쟁취'하는 방법을 교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 이들의 명백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인셀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성관념 자체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종속시키는 작업에 이들은 왜곡된 노력을 경주하게 됩니다. 이는 픽업 아티스트들이 다소 이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해, 후자들이 '여성의 인정'을 광범위하게 거부하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체제의 복귀와 여성의 성을 남성들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하는 계몽주의 시기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터무니 없는 열망을 보이는 것과 유사한 인식적 체계를 짐작하게 되었는데요.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사실상 거부하는 것과 "남성에게 성적인 욕망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원래 여성에게 내면화된 욕망이기도 하다"는 그들의 해석은 이들 픽업 아티스트들이 분명한 왜곡된 성관념을 보통의 남성들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는 극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사회적 관념에 있어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무슨 컬트와 같은 개념으로 용인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분명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사회구조가 "오로지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한 토대"로서 발전되어 왔다고 믿고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의 관념 체계로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작게는 여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마땅히 섹스를 제공해야하며, 과거의 남성 권리를 비롯한 전근대적인 사회 관념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점은 단순히 그들의 일관된 신념을 넘어 익히 부정적인 관념론 자체로 심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겁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의 주장들을 사회 전체에 관철시키기 위해 이론적 근거로 '스토아 철학을 경쟁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마땅히 키스를 해야하고, 자신은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기까지 하였는데요. 이들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신들의 이상향으로써 여기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왜곡된 논법들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트럼프가 일개 사인이 아니라 한때 미국을 좌지우지 했던 정치인이었던 측면에서 미국 시민들의 정치인에 대한 변별력이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한편으론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여성을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고 계몽주의와 그로인한 민주주의가 이룩한 사회적 진보를 오히려 남성 권리의 심각한 후퇴로 여기기까지 하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인식은 실로 우려스럽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건전한 성평등주의 자체가 남성의 권익을 침해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또한 민주주의 정치 자체에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여성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를 기치로 제도적 정치 무대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몽의 가치로 시민의 삶을 위해 발전시켜온 남녀 평등과 다원주의적 가치를 또 한번 짓밟힐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낱 음모론 따위로 여겨서는 안될 겁니다. 과거 네오콘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로에 대한 근거로 고전 철학을 이용했던 점은 시민들 개개인이 이를 마찬가지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치부했던 역사적 근거를 지금도 찾고 있는 어용 지식인들과 극단주의자들 또한 우리가 마땅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3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약간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역자가 본문에서 여성의 성기를 '음부'라 하지 않고 '보x'라고 지칭하고 심지어 '보슬아치'라는 번역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일개 독자로서 역자의 고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대안 우파'를 알트라이트로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아마도 역자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대안 우파 자체가 갖는 의미가 다소 온건하게 보여, 저들이 극우주의자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망각하기 마련인데요. 다만 알트라이트 역시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데 마찬가지로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단순한 저의 해석을 언급하는 것 뿐입니다.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낸 여성은 레드필 커뉴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로부터 악성 트윗과 이메일을 받게 된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극우 세력이 고대를 전유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공간을 침해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이지 의무라고 믿는다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인종주의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역사의 모든 여성들이 기만적이고 통제적이고 문란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가 여성중심적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양육법이 남성에게 압도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앵글린은 한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남성이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다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런다고 하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궁은 곧 우리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라는 문장은 구조적인 성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이 흔히 하는 대답으로, 자신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포스트는 "사회정의의 전사들이 대학을 가장 허접한 이들과 영합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제일 징징거리고 안쓰럽고 멍청한 루저들 말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스토아 철학이 레드필 커뮤니티에 입성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왜곡이 필수적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국수주의자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해, 스토아 철학은 세계주의적인 관점을 지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무소니우스는 스토아철학이 오늘날의 남성계에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기본적인 전제를 둔다. 바로 남성이 태생적으로 여성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한다는 가정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덜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 남성들은 미국의 노예제가 남긴 유산과 그것이 흑인에게 장기적으로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드필 스토아주의자들이 볼 때, 가부장제를 복원하려는 구조적 변화의 시도는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여성과 유색인은 비이성적이고 지도를 필요로 하기에, 이성적인 백인 남성이 책임자가 된다면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오비디우스는 독자에게 오늘날이라면 성폭력으로 간주될 만한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에 따르면 성공적인 픽업은 힘을 가진 남성잉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남성의 가치는 높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일련의 전략으로 이루어져 있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인종의 테스토스테론 수치, 성기 사이즈, 성격에 대한 고정돤념을 전시한다

"허락을 구하지 말라. 지배적인 태도를 가져라. 당신의 접근을 상대 여성이 거절할 때까지 밀어 붙여라. 허락을 구하지 말라. 여성의 손을 잡아끌어서 당신의 거시기 위에 올려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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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된 위기 - 북한은 제2의 쿠바가 될 것인가?
안병진 지음 / 모던아카이브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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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쓴 안병진 교수는 1967년 대구 출생으로 서강대 사회학과 서울대 정치학과를 거쳐, 한나 아렌트와 에릭 홉스봄이 몸 담았던 미국 뉴욕의 사회학 명문 뉴스쿨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뉴욕 시립대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다 2003년 귀국해 현재 경희사이버대학의 미국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안병진 교수는 최근까지 TV토론 방송을 비롯 시민들을 위한 정치 프로에 간간히 출연해, 대중들에게 얼굴을 알린 바가 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안 교수가 소위 미국내에서 리버럴이라고 불리우는 좀 더 상식적인 중도와 유사한 지형의 지식인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최근에 안교수의 발언을 담은 기사들을 봐도 민주당쪽에도 쓴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여느 학자들과는 다른 스탠스를 보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안 교수의 활동에 일정 부분 지지하는 편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동안 그가 자신의 여러 논저를 통해, 미국과 한반도를 둘러싼 틀에박힌 정치외교적 해석에 반대하면서 객관적이고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점은 꽤 신선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동일한 제목으로 지난 2018년 1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미국 외교학계에 극명한 현실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이엄 앨리슨을 다소 '순진한 생각의 소유자'로 여기게 만드는 듯한 제목은 단순히 저자가 학계 주류를 관통하는 학자를 폄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런면에서 이 글 2장에서 인용된 딘 러스크의 어느 대학 강연 자리에서 "여러분은 저처럼 유화책과 고립주의의 유혹에 빠지면 안 됩니다"라고 호소하며 눈물까지 보였다는 일화는 실로 복잡한 기분을 느끼게 만듭니다. 마찬가지로 2장 전반에서 논증되는 "전세계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고간 1962년의 13일의 위기"에 피델 카스트로가 뜬금없이 흐루쇼프에게 "최후의 전쟁이 남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삶의 불확실성" 자체를 몸소 깨닫게 만듭니다. 이처럼 미국과 소련이 핵전쟁을 감행해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못하는 듯 보이는 카스트로라는 정치인의 존재감은 핵전쟁의 위협이 과연 제대로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합니다. 이와 관련해, 안 교수는 여느 정치학자와는 다른 관점으로 글 서두에서 의미심장한 '베두인의 전설'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칠면조를 훔쳐간 자들이 자신의 딸까지 강간하고야 말았다"는 베두인 족의 교훈은 1962년의 카리브해 쿠바섬에서 초래된 어쩌면 세계를 파멸로 이끌고 갈 수 있었던 "핵전쟁의 문턱"을 곱씹게 만듭니다. 저자의 고유한 해석대로 이 베두인 전설의 딜레마가 '쿠바 미사일 위기'를 통해, 당시 미국과 소련이 서로를 신뢰할 수 없던 문제와 매우 닮아 있는데요. 역시나 2장 말미에 등장하는 "국가간의 위기는 불완전한 정보에 기반한 상호 오인의 무덤이다"와 일맥상통한다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중차대한 불확실성을 단순히 그레이엄 앨리슨과 같은 현실주의에 경도된 학자들이 무슨 과학 법칙과도 같은 단순한 논법으로 해석해 마지 않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단적으로 드러난다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은 마치 막 서막이 펼쳐지려고 하는 미중간의 패권 투쟁에도 한치의 어긋남 없이 오버랩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2차 대전의 예측하지 못했던 결과로 망망대해의 외로운 섬과도 유사한 처지가 된'서베를린'은 미국과 서유럽에 있어 전세계에 자유 체제를 담보하는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세우려는 의도와 그 목적 자체를 광범위하게 이해하기 위한 원인들 가운데 하나로서, 충분히 근거를 세울 수 있기도 한데요. 당시 케네디 정부에게 있어서 베를린 문제는 매우 중요한 외교적 문제였고, 동시에 소련의 봉쇄 이후에도 미국과 서유럽이 서베를린을 정치적으로 지켜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을 봐도 이 도시의 존재 가치가 얼마나 중대했는지 미뤄 짐작하게 합니다. 이처럼 쿠바섬의 13일 사태에 대한 많은 외교 문서가 각국에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만 흐루쇼프가 그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동이 베를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미국에게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하는데요. 동일하게 3장에서 보여지는 당시 워싱턴은 이러한 소련의 복합적인 도발에 일견 분노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외부에 다소 온건해 보이기까지 한 케네디 대통령이 "분노를 참을 수 없었다"는 후일담은 막대한 핵무기를 보유한 양국에 의해, 우발적 핵전쟁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 생각됩니다. 물론 혹자들은 터키의 미사일 배치를 언급하며, 흐루쇼프 역시 자신의 인내심을 시험받을 수밖에 없었다고 대변합니다만 냉혹한 전쟁광으로 이해되기까지 하는 르메이가 당시 맥나마라 국방부 장관과 자신의 상관인 케네디 대통령까지 끝내 경멸했던 것으로 보아, 미국의 매파와 소련의 호전광들이 양국에 엄연히 존재하는 위험 요소였으며, 최근 국내 정치인의 주장만큼이나 "대통령의 자리는 전쟁이나 선제 타격을 위한 자리가 아니라, 얼마만큼 위기 관리를 잘 해 낼 수 있느냐"를 매번 시험 받는 자리라는 해석이 실로 정확해 보이기까지 하는데요. 바로 상반된 이 지점에서 케네디의 정치적 미덕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것은 그에 관한 정치적 호불호의 감정과는 별개로 스스로 패권국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을 짓밟힌다 하더라도 파국으로 몰고갈 수 있는 핵전쟁을 최종적으로 기피하기로 했던 결심이 포함된 정치적 결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국내외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최근의 북한 미사일 문제의 해법을 위한 '바로미터'로 살펴보고자 하는 사례가 여럿 있었습니다. 안 교수에 의해서도 꽤 훌륭한 논저로 평가받고 있는 마이클 돕스의 논저, "1962"년 또한 국내에서 높은 판매고를 올린 것은 바로 이러한 점에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돕스의 이 글을 접해본 많은 독자들도 조차도 "설마 핵전쟁이 그렇게 쉽게 일어날 수 있겠어?"라고 당연한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강조하고 부분은 북한의 핵문제를 앞선 단순한 논법과 같은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나섰던 여러 정치적 해결 방안들은 분명 북한의 그것과는 현저히 다른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과거 카스트로의 이익과 현재 김정은이 추구하는 이익은 그 본질이 꽤 유사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카스트로가 소련 대사를 향해 "최후의 전쟁이 남았다"고 에둘러 말한 것은 자신이 권좌를 차지하고 있는 쿠바가 설사 미국에 의해 잿더미가 되더라도 마치 전세계의 안위 따위는 나는 신경쓰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은 김정은의 평양 역시 핵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는 것과 거의 동일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잃을 것이 북한보다 현저하게 많은 중국이 사실상 북한을 후견하고 있는 것은 북한의 미사일을 제거하기 위해 중국이 자신들의 군대를 북한에 투입할 가능성이 희박다는 것과 관련있습니다. 많은 중국인들은 북한의 핵무기가 자신들을 향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이처럼 중국은 1962년의 소련보다 더 많은 불확실성을 갖고 있는 정권이고, 무엇보다 군사적인 측면에서 과거의 소련보다 더 호전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배경들은 국제정치에서 현실주의 이론들이 쉽게 설명해주지 못하는 부분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저자인 안교수도 역시 이러한 인식을 전제로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당사자들에게 진지하고 신중한 접근을 요구하는 것에 이릅니다. 이는 1962년의 케네디 행정부가 선보인 '쿠바에 대한 전면적인 해상봉쇄'와 같은 방법이 항상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점과 최근에 조지 W. 부시가 맹신했던 설익은 '북한붕괴론'과 같은 성급한 예측에 거리를 두는 것으로 북한의 핵무기를 머리 위에 두고 있는 현실에서 악화를 막기 위해 최소한 고려해야 하는 점들을 4장 말미에 몇가지 사례를 들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 논의된 안교수의 제안들이 하나같이 설득력을 갖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제안하고 싶은 것은 북한의 김정은을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외길 낭떠러지로 몰아서는 안되며, 이것이 실패했을 때 벌어지는 핵미사일을 통한 전쟁 뿐만 아니라 재래식 전쟁의 참혹한 댓가 마저도 결국은 전적으로 우리만의 몫이라는 가정입니다.

미국과의 평화협상이 어찌하여 시간 끌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사실상의 답변을 담고 있는 4장은 북한 핵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매번 워싱턴의 주인이 바뀔때마다 벌어지는 일관되지 않은 국제외교적 정책과 특히 쿠바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 정치와는 거리가 먼 권위주의 국가들을 대화 상대로 조차 취급받지 못하게 만드는 미국의 혐오감정과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중남미 아메리카에 대한 그동안의 놀라우리 만큼 비열했던 CIA를 통한 공작 정치의 유산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과거 미국의 이러한 '공작과 작전'들은 이것을 면밀히 연구한 미국의 적성국들에 의해 미국에 대한 신뢰를 답보하기 어려운 요인으로 치부됩니다. 여기에는 제2차 이라크 전쟁을 위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수행한 '후세인이 각종 생화확 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허위 주장이 나중에 어떠한 평가를 받았는지 고려해 보면 저들이 어떤식으로 교훈을 얻었는지 대략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이러한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쿠바와 북한 등에 있어 미국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결과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리처드 닉슨의 '미치광이 전략'과 같은 오인의 문제는 단순히 우스개 소리로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엄연히 현재까지도 미국내에 각종 외교적 현안에 있어 군사적 개입을 주장하는 매파가 존재하고 있고, 국내 정치 전반에 있어 상당 부분 해를 끼치는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미국에서 나날이 영역을 넓히고 있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대로 행정부와 양당의 엄연히 구분되는 정책 때문만으로는 반자유주의 국가와의 신뢰와 평화 문제의 딜레마를 이해하기란 다소 어려운 법입니다. 여기에서 거듭 논의되는 북한 정권의 문제는 만약 중국의 지원이 없었다면 그저 핵무기 만으로 북한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기란 매우 어려웠을것이라 추측됩니다. 그만큼 북한의 문제는 쿠바와는 비교할 수 없는 복잡한 요소가 잔존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글의 대단원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대로 한반도 평화를 위한 여러 제언들 가운데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대화 창구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점은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우리 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이며, 적대국에 준하는 국가와의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군사적 개입에 대한 손쉬운 유혹에 있어 세계 패권을 갖고 있는 유일무이의 민주주의 정부가 오로지 자신들의 국익만을 위해 이를 방편으로 삼는 것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느냐"에 대해 끊임없이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이와 관련해서도 미국이 인도와 파키스탄의 일례를 통해 핵확산 원칙을 스스로 어기는 선례를 만들었고 이러한 과정에서 이란과 북한의 핵보유 시도는 전세계에 미국의 국제외교적 정책에 의문을 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알게된 한가지 충격적인 사실은 미국 정보 당국이 파키스탄의 핵 물리학자 압둘 카디드 칸과 북한의 핵무기 커넥션을 오래전에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연유에는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었습니다. 한편으론 뭔가 음모론으로 읽혀지기도 했습니다만 과거 이삼성 교수의 논저에도 이와 같은 부분이 언급되었기에 충분히 숙고해볼 만한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이미 여러 글들을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그와 같은 우려가 전혀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님을 입증했던 바가 있는데요. 예를들어 도널드 럼스펠드와 딕 체니가 군산복합체와 관련 깊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 글의 여러 교훈들 가운데 제가 극명하게 느낀 점은, "일개 국가의 위신이 세계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핵전쟁의 참혹한 결과물보다 명백하게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일부 정치인들의 끝모를 당위였습니다.   



베를린 대전략 가설에서도 드러났지만 케네디와 같은 리버럴 엘리트는 합리적 사고와 이를 근거로 한 설득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필자는 카리브해 위기의 책임을 소련과 쿠바의 군사모험주의 탓이라고 하는 우파의 시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지배 탓이라고 하는 촘스키 같은 좌파의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1962년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에 충격을 받은 김일성은 강대국에 대한 배신감을 키우면서 자주 노선과 핵무기 개벌에 박차를 가했다

특히 인지심라학적 개념 중 국제정치학에서 널리 알려진 개념인 오인은 위기 사례 분석에 매우 유용하게 쓰이는 도구다. 로버트 자비스는 "부정확한 추론, 결과에 대한 계산 착오, 정책에 대한 상대방의 반응에 대한 판단 착오" 같은 내용을 포함하는 오인이 의사결정에서 중여한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다

쿠바 미사일을 둘러싼 위기의 핵심 교훈은 앨리슨의 주장과 같은 전쟁을 각오하는 태도의 중요성이 아니라 강압 전략이 우발적 전쟁의 가능성과 얼마나 맞닿아있는가다

로버트 케네디의 자작극 제안은 후에 린든 존슨 행정부가 베트남 침공 명분을 만들기 위해 조작한 통킹만 사건 당시 미국 리버럴이 보여준 비윤리성이 예외적이라기보다는 통상적이라는 점을 시사해준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평화적 해법에 대한 흐루쇼프의 답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의 신‘인 핵무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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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의 귀환 - 자유주의 세계질서는 붕괴하는가
로버트 케이건 지음, 홍지수 옮김 / 김앤김북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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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아테네에서 태어난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후손인 로버트 케이건은 역사가로 알려진 친부의 영향으로 예일대와 하버드 대를 거쳐, 연방 공인 연구 대학인 아메리칸 대학에서 미국 역사와 관련한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이 책의 저자나 그의 논저를 번역한 출판사는 저자인 로버트 케이건의 한가지 수식어를 빼먹고 있는데요. 그것은 그가 네오콘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케이건이 공화당 당적을 포기하고 무당적으로 있는 것을 흡사 네오콘의 노선에서 벗어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왜 그가 '네오콘'이라는 사실을 적시하지 않았는지 매우 의문이 듭니다. 물론 그가 공화당 당적을 정리하고 같은 당의 정책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에 대해 스스로의 정치적 노선을 바꾼 것으로 취급될 지도 모르겠지만 '무지의 베일'도 아니고 그러한 사실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는 2010년 9월 브루킹스 연구소의 미국과 유럽 센터의 선임 연구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가지 특이한 부분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한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하지 않고, 힐러리를 지지했다는 점입니다. 이 책은 원제, "The Jungle Grows Back : America and Our Imperiled World"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역자와 관련해 한 가지 개인적으로 언급하고 싶은 부분은 어느 극우 유튜버의 방송에 출연한 역자를 발견한 것인데요. 그래서 한동안 출연한 사람이 역자와 동일 인물인지 여러모로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그 동영상은 소위 유럽의 좌파 사회학자들에 대한 언급과 더불어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비판이었는데요. 그곳의 내용들은 거의 대안 우파들이나 주장할 법한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저의 블로그에서 역자의 정치적 성향을 논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역자가 번역한 책들을 찾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그래서 소위 뻔해 보이는 신자유주의적 보수주의자들의 논저를 누구보다 잘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은 같은 진영을 지지하는 번역가인가 라는 고심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케이건의 이 글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저자가 분명하고 확고하게, "자유주의와 자유주의 세계"에 대한 믿음과 신념을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 부분은 충분히 이해가 될만합니다. 작게는 미국에서 자유에 대한 인식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고, 크게는 미국 자신이 국제 사회에 항상 강조하고 투영하는 것이 소위 자유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이와는 별개로 자유주의가 이룩한 역사적 진보라는 것 또한 거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은 글 전반에 흐르는 논리적 맥락에서 소위 '민주 정체(마땅히 민주주의로 불려야 합니다만)' 역시 원대한 자유주의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뭔가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에 의해 그 소명을 다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는데요. 제가 이론적 현미경을 들이대고 일일이 다 따지고 들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 부분도 역시 실망스러운 지점이었습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 이 글의 9장에서 저자는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을 위한 발언으로 보이는 "개입주의와 제국주의는 엄연히 다르다"는 문법에 일정 부분 동의할 수 있었는데요. 많은 진보 좌파들이 미국의 패권 개입을 가지고 제국주의라는 맥락으로 비판을 가하는 것은 저 역시 다소 논점을 벗어난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만, 오늘날의 자유주의적 세계가 오로지 미국의 지대한 헌신과 어떤 역사적 사명에서 비롯되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과거의 냉전이 저자가 인용한 존 르 카레의 "절반의 천사와 절반의 악마"와 같은 초월적인 선악론이 아니라 그런 대결에도 인간적인 이기심과 도덕적 무절제의 한계가 담겨 있는 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글의 5장에서 "선한 명분에도 이기적이고 타락한 측면이 있고 적도 적 나름의 사연이 있으며,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고충들이 줄줄이 이어진다"는 서술은 이를 명확히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되는데요. 자유주의가 갖는 인상으로 말미암아 여기에 고매한 이상과 순결한 도덕론 따위를 언급할 사람들도 분명 있겠지만 '미국이 선도한 자유주의 세계' 자체가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는 사실이겠지요.

2차대전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전에 전세계가 유럽에 암운을 드리우던 전체주의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던 것은 실로 문제였던 것은 확실합니다. 케이건은 이에 정치권의 무분별한 '파시즘의 전도'는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자본주의 체제에서 이익을 얻고 있던 자본가들과 산업 기반 소유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동경은 빼먹고 있습니다. 저자가 1920년대의 자본주의에 다소 경도되기 시작한 자유주의의 본질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 그랬던 것인지 아니면 이쯤에서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별개의 문제로 인식하고자 한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습니다만 3장부터 일관되게 논증되고 있는 이 '자유주의'가 대전 이후의 유럽에 만연되어 있던 민족주의와 국수주의의 망령을 미리 억제한 공로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적으로 모든 유럽인들과 자유 세계의 공통된 이익을 위해 경주하게 된 원인이라 저자는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확신하고 있는 연유에는 오늘날 점차 머리를 들고 있는 인종주의적 극우주의와 이슬람 이민을 상대로한 배타적 민족주의가 어떻게 보면 자유주의의 위기로까지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는데요. 케이건이 다소 흥분이 담긴 어조로 쓰고 있는 듯한 인상까지 받은 "이 자유주의가 과거 인류의 '계몽과 이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자유주의가 어떻게 배타적 이데올로기들을 시민들 사이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고 있는지 그러한 연관성에 누구나 설득당하게 될 것 같습니다.

많은 미국인들이 지금까지도 불필요하게 막대한 국방비를 투입하면서까지 전세계의 안보에 미국이 희생을 해야하는 하느냐에 볼멘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종래의 고립주의와도 유사한 미국 국민들의 이러한 불만은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다만, 전후 구축된 미국과 서방 그룹의 이 자유주의적 세계는 인간 본연의 숭고한 가치에 대한 믿음 때문이 아니라 '이런 재구축된 세계 자체'가 미국에게 더할나위 없는 이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냉전 시기에 자신의 앞마당이라 할 수 있는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 대한 CIA의 더러운 군사작전과 정치적 개입을 자신들의 동맹과 일절 상의도 없이 자행했던 것입니다. 물론 저자인 케이건은 이러한 문제와 직면해, 여느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필요한 일이었다"고 마무리짓고 있습니다만 적지않게 도덕적 신뢰에 타격이 되었던 비민주주의적 행태를 안고 갈 수 없을 만큼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던 것이죠. 뭐 큰틀에서야 저자의 강조된 문구처럼 미국이 자유주의 체제를 지탱하게 만드는 유일한 패권국이라는 논법이 논리적인 프로파간다의 입장에서 필요한 것도 분명합니다. 후쿠야마식대로 냉전의 종말을 눈으로 경험했던 많은 세대들에겐 미국이 서방세계라고 불리우는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자유를 지지하는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해 남들도 하기 쉽지 않은 국방력의 총투사로 이러한 토대를 지켜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다만, 냉전의 훌륭한 종결이 근 40여년간의 전세계에 대한 핵전쟁의 위협을 깡그리 잊게 만들정도는 아니며, 인류를 몇번이나 절멸에 이르게 할 핵무기를 머리 위에 놓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몰빵하면서 그룹 모임에 있는 이들이 앵무새처럼 내뱉는 것과 같이 '그래도 적당히 안전한 세계'였다고 자위할 정도가 되는 것일까요.

이즈음에서 우리가 자유주의 체제에서 다시금 발견해 낼 수 있던 것은 이 체제가 일견 보여주는 어감처럼 실제로 나약하지는 않다는 사실일겁니다. 미국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유 세계의 리더가 나약하지 않다는 것을 전세계에 보여줬고 관타나모에서의 포로들에 대한 고문은 이 점을 아주 명확히 했습니다. 저자인 케이건은 스스로 네오콘이라 불리우는 것을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디서 본 기억이 납니다만 사실 그에게 리버럴적인 양심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비도덕적인 문제에 대해 과거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중동 관여를 언급하면서 위에 언급한 점들을 꺼내지도 않은 것은 적잖이 실망스런 기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맥락이 경멸까지는 아니더라도 진보주의와 민주당과 같은 리버럴에 대해 그 이중성을 지적하면서도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여서가 아니라 최소한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첨단의 미국 군대에게 아무런 비판조차 하지 않는 것은 앞선 존 르 카레의 논법을 그가 맹렬히 추종하고 있기 때문일까요. 뒤이어 글 3장에서, "자유주의 질서에 속한 국가와 사회들은 자국의 국민을 대할 때, 그리고 심지어 범죄인을 대할 때조차도 보다 인도주의적인 태도를 취했다"라는 진술은 그런 것을 잘 알고 있는 미국은 왜 그러지 못했는가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은 되지 못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로서는 이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숭고한 의미를 단순히 먹고 살만해지고 자유롭다고 해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된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국제 외교와 같은 것들에 논리적 선명성 따위를 지지할 생각은 없지만 최소한의 기준은 갖고 있어야 하겠죠.

새뮤얼 헌팅턴의 '미국이 없는 세계'에 대한 비관적 전망의 "미국이 월등한 지위를 유지하지 않는 세계"는 폭력이 난무하고 무질서하고 민주정체와 경제 성장이 후퇴하는 세계로 이어진다는 논법은 과거 영국이 가진 패권과 지금의 미국이 얼마나 입장이 다른지 짐작하게 합니다. 물론 그럼에도 인도와 파키스탄의 핵보유를 용인하고 이스라엘의 핵무기를 묵인하는 것처럼 미국 자신도 스스로의 국익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패권국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더이상의 핵무기 확산을 억제하고자 했던 오마바 행정부의 노력은 이미 수포로 돌아갔고 아마도 기존의 질서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요리하고자 하는 수동적인 러시아와 매우 적극적인 중국의 부상은 말 그대로 다음 세대의 확실한 위협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자의 강조래도 "자유주의 체제가 중국을 번영케 했다"면 이것의 양면성은 마찬가지로 미국의 기업들과 유럽의 자본가들에게도 마땅히 이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중국의 강대국 지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자유주의가 이에 산파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보기에 따라 이들 권위주의 국가들의 행동에 대한 논리적 예측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정말 미국이 자신들의 국민들에게 강요했던 것처럼 '개인과 시민의 자유'가 그토록 귀중하고 숭고하다면 중국의 배타적 부상을 제대로 관리할 필요가 있을겁니다. 제가 평소에도 미국의 외교 정책과 정치 일반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나 중국이 주도하는 세계 체제에 대해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의 이익계산에 따라 대만을 희생할 건지 아닐 것인지와 같은 주변의 동맹국들에게 매우 잘못된 신호를 보내는 것만큼은 자제하는 편이 미국의 국익에 옳다고 여겨집니다. 저자가 인용한 라인홀드 니버의 "미국인들이 자신들이 하려는 행동에 대해 '안일한 양심'을 지니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것이 만약 정론이라면 정말 작금에는 치열하고 아주 명확한 대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인들과 미국 정부가 자신들이 이룩한 이 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확고하고 변치않는 지지를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말입니다.


-케이건은 글 중간에 노엄 촘스키를 인용하고 있었는데요. 저로서는 뭔가 자명한 기분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단순히 진영 논리에서가 아니라 촘스키에 대한 과거 네오콘들의 수많은 공격들을 되짚어 본다면 말입니다.



-최근 우크라이나의 불행은 미국과 소련의 '부다페스트 메모랜덤'이 무력화 된 것과 더불어 앞으로 부상할 러시아에 대한 위협을 미국이 주저한 댓가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자국의 방위와 생존은 스스로가 답보해야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사정은 그러한 당위를 거의 불가능하게 하는 지정학적 문제가 있다는 것이 '제한된 국가'의 전형일겁니다. 국제체제 역시 이들에게 등을 돌리려고 하는 작금의 시점은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와 뭐가 다른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오늘날 미국인은 자국이 무엇 때문에 세상만사에 그토록 깊이 관여하고 중동과 같은 구제불능의 지역에 인명과 돈을 쏟아부어야 하며, 무엇 때문에 독일, 일본, 남한과 같은 부유한 동맹국들이 자국을 지키기 위해서 국방의 부담을 더 짊어지지 않으며, 미국은 무엇 때문에 자국의 경제와 안보 이익과 직결되지도 않은 문제들 때문에 전쟁을 감수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해리 트루먼 같은 이들은 1930년대에 세계질서가 붕괴한 까닭은 미국이 "세계 강대국으로서의 책임"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미국은 건국 이래로 늘 독재체제 정부가 민주정체 정부보다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생각해왔다

영국이 지탱해왔던 기존의 자유주의 질서는 사라졌다. 따라서 세계는 무질서로 빠져들든가, 미국의 국익과 원칙에 적대적인 나라들의 지배를 받든가 둘 중 하나였다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려는 시도를 사전에 분괘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과 비밀 작전을 수행했는데, 보통 자유주의 세계질서에 참여한 다른 나라들의 승낙을 구하지 않았고, 때로는 많은 동맹국들의 반대를 무릅쓰기도 했다

그해 새뮤얼 P. 헌팅턴은 "미국이 월등한 지위를 유지하지 않는 세계"는 "폭력이 난무하고 무질서하고 민주정체와 경제 성장이 후퇴하는 세계가 된다.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월등한 지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만 미국 국민의 복지와 안보, 그리고 세계의 자유와 민주정체와 개방경제와 국제질서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미국과 자유 세계가 이들이 "핵무기와 생화학무기, 그리고 이러한 무기를 발사할 미사일"을 갖지 못하게 막지 않으면 이들은 "한층 더 치명적인 적"이 될지 모른다고 했다

오늘날 문제는 지정학이 귀환한 게 아니라 러시아와 중국이 한동안 중단했던 과거의 야망을 다시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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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은 죽음의 처방전인가 - 불황, 예산전쟁, 몸의 정치학
데이비드 스터클러 외 지음, 안세민 옮김 / 까치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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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시니어 리서치 리더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터클러는 본디 옥스포드에서 정치경제학을 수학했으나 의외로 보건 의료쪽에 관심을 보인 학자입니다. 현재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에 있는 사회과학과 경제학 전문 대학인 보코니 대학에서 경제학, 정부조직 및 헬스 케어 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같은 공저자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는 산제이 바수는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의학과 조교수로 만성 질환에 대한 연구와 동시에 역학자로서 명성을 알라고 있는 학자입니다. 앞선 데이비드 스터클러가 바수와의 이와 같은 혐업에 큰 만족을 느꼈다는 소회를 비친것으로 보아 그가 해당 분야에 상당한 역량이 있는 사람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또한 바수는 유엔을 비롯해 세계보건기구, 세계심장연맹, 미국심장협회 등에 전문가 조언을 비롯한 자문 패널로 일하고 있으며, 의외로 의료인치고는 경제 불평등과 빈곤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번에 소개해 드릴 이 책은 원제, "The Body Economy : Why Austerity Kills"로 지난 2013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동년 1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일반 독자들이 보기에도 국역된 책 제목을 다소 자극적으로 느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동일하게 책에 대한 이슈와 판매고를 위해, 원제와 거의 상관없는 맥락으로 번역된 제목들의 사례가 우리 출판계에 많이 널려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책의 국역 제목은 아주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 없을정도로 일정 부분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기도 한데요. 이른 결론일수도 있겠지만 거의 의문형이라 봐도 다를바 없는 제목의 문법에 대한 답변은 역시 '그렇다'입니다. 요즘 아예 외래어의 의미로 정착한 '밸런스'라는 단어에 제가 일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경제학자와 의학 분야의 권위자가 함께 노력을 기울인 이 책의 가치는 실로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체적인 글의 형식은 각국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보건 의료 르포르타주'라 지칭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에 공저자들은 약간의 겸손의 의미로 이런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논저가 사회와 출판계에 혁명적인 문법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조심스러워 하고 있지만 분명 이 글은 충분히 출판의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입장에서 1997년 당시의 IMF의 '독약 처방'에 대한 일종의 사회경제학적인 본질을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익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선 부분에서 제가 '독약 처방'이라고 한 것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2012년에 IMF 측에서 인정한 부분을 언급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경제적 처방이 상대국에 가혹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을 말합니다.

2008년에 시작된 전세계적 금융 위기의 원인과 결과 모두 익히 알고 계시리라 생각됩니다. 여기에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경제 위기들은 1997과 1998년 전후에 시발된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의 동아시아 사태와 2007년 전후 아이슬란드와 그리스를 그리고 공산권 붕괴 이후, 진행된 전방위적인 자본주의화에 따른 과거 폴란드와 같은 동유럽 국가들의 사례인데요. 당시 경제 위기속에서 해당국들의 보건 의료의 추이를 분석함에 있어 이들 공저자들은 실질 데이터를 기반으로 글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이 글에서 보이는 논증들의 대부분은 사실적이고 한 국가의 경제 붕괴와 그로 인한 강제된 개혁의 상황에서 어떻게 국가의 보건 의료가 사치제의 범주에 들어가 시민 보건 자체를 극단으로 내모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시민들을 위한 광범위한 보건 의료 지원에 대해, 아이슬란드의 경제적 개혁을 주도했던 IMF가 정부의 의료 지원 자체를 사치제로 규정하고 비용 절감과 같은 개혁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이후 어떠한 결과를 초래될 수 있는지에 대해 예측할 수 있는데요. 물론 아이슬란드의 경우는 여기서 논의되는 그리스와는 달리 외부의 개혁 논법에 대한 실행 여부를 '국민 투표' 넘겨 개혁 전반이 해당국의 여건과 상황을 고려하는 쪽으로 반전되기도 하는데요. 이것은 1997년에 말레이시아가 IMF의 개혁 프로그램을 일절 수용하지 않았던 사례와 대척점에 있기도 합니다.

일전에 밀턴 프리드먼은 자신의 입으로 "소련 체제의 소멸 이후, 앞으로 러시아인들이 무얼 해야하는지에 대해, 첫째도 민영화, 둘째도 민영화, 셋째도 민영화"라고 대답합니다. 이는 후에 자신이 틀렸다고 소회를 보이기도 했습니다만 "위대한 민영화주의자"라고 이 글에서 강조되는 대처의 수식어를 보더라도 신자유주의적 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다수의 이익과 동떨어져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여전히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사회 보장 프로그램과 공중 의료를 삭감시키며 공공 기업들을 민영화하여 전반적인 시장 자유 체제를 구축하는 것'에 대한 아주 일관된 매커니즘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금융 자본주의하에 주주적 자본주의의 배타적 이익을 강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강고한 신자유주의에 어떠한 민주적 토론도 수용하지 않겠다는 폐쇄성을 엿볼 수 있겠는데요. 대처의 '대안은 없다'는 이것의 또다른 의미로서 자리하는 것이고 자유주의 사상 전반이 변질되고 왜곡되어 특정 계층만을 위한 이데올로기로서 강화되어왔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이들 경제 엘리트들에 의한 공중 보건 의료의 대대적인 후퇴는 일차적으로 공익과 공공성에 대한 일개 분야의 엘리트들의 과도한 권한이라 볼 수 있으며, 금융 위기 당시 그리스의 많은 국민들이 경제적 고통에 처해있으면서 다수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마약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는 상황에 대한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제가 마약의 터무니없는 유용성을 여기서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이 불안 계층이 비위생적인 주사기 사용으로 말미암아 HIV 바이러스까지 그리스 국내에 만연하게 된 것은 순차적으로 이러한 파행이 기름을 부은 결과라고 할 수 있게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공저자들은 이 글의 결론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었는데요. "민주주의의 진정한 회복, 즉, 소수가 아닌 모든 이들을 위한 회복을 달성하기에 실업률은 여전히 높다"고 말하는 것에 작금의 보건 의료 사태의 중요한 함의가 담겨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도 미국식 신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이들이 미국의 보건 의료 체계의 전반적인 민영화에 따른 사기업들의 엄청난 수익에 감명을 받은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국 정부 당국에 의한 '각 제약회사들의 특허권 보장과 배타적 권리'등을 옹호하는 것을 자본주의적 개혁으로 보는 관점에는 이와 같은 졸견들이 기반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미국 의료 체계를 순전히 '개인의 문제'로 만들고 자신들의 오래된 '개인의 자유라는 함의'에 몰빵해서 어떠한 반론이나 토론을 거부하고 오로지 의료 민영화의 장미빛 상황을 확고부동하게 유지해 온 사회적 역사가 외형적으로는 이러한 쳬계에서 막대한 부를 쌓아 올리는 의료 사기업들의 안정적인 무대로 자리매김했는데요. 사실상 많은 의료인들 조차 "의사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대체 뭐가 문제냐"는 개인의 직업 선택권에 완전히 매몰되어 의료 체계 전반이 그 사회나 국가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위치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스스로 사회학적 편협함과 이와 같은 사회 안전 보장이 결국 무엇보다 엘리트들에게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빈곤과 사실상의 기회의 박탈 상황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사람들이 술을 구입할 돈이 없어 공업용 알콜로 하루를 연명하거나 앞선 그리스의 사회 문제화가 된 시민들의 마약 중독 상황이 '무엇보다 중요한 민영화'의 이행 가운데 발생한 '부수적 피해'로 치부해야 되는지 소위 IMF와 같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엘리트들에게 다시금 되물어 보고 싶군요.

그레이스 블레이클리는 자신의 지난 논저에서 금융 시장의 안정을 위해 투입된 공적 자금이 수십억 파운드에 달하는데, 왜 그보다 더 중요한 사회 보장과 보건 의료에 그 만큼의 돈을 투입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언급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어 있는 1997년 당시 우리 한국의 사례에서 제대로 된 사회보장 프로그램이 준비되지 않은 한국은 IMF의 강력한 개혁 프로그램에 사회 안전망이 유명무실해졌으며, 이 당시에 유아사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점을 일례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들 IMF 관료들조차 당시의 한국 국민들을 고통에 이르게 한 것을 뒤에 인정하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개혁 프로그램과 시장에 대한 규제를 철폐하는 등의 이 '워싱턴 컨센서스'를 역사의 사례로 남아 베이징이 이를 회피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오히려 중국이 미국에 준하는 국력을 서서히 갖추는데 이득이 되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즉, 이 시대의 중국의 굴기라든지 중국의 열망은 거의 반절 이상은 신자유주의가 조장한 것이며, 초반 중국의 본격적인 자본주의적 공장화에 미국을 연고로한 막대한 다국적 기업들이 이득을 취한 것을 거의 부정할 수 없을겁니다. "이익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소위 명징한 가치주의는 그 국가의 군사와 보건 및 전반적인 시스템 전반에서 오늘날까지도 위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공저자들 역시 이와 같은 배타적 관념에 대해 저항하면서 오히려 더 많은 민주적 통제와 종래와 같은 시장에 대한 터무니 없는 자유는 이제는 시급한 토론과 그것의 주제로서 정상적인 정치경제적 차원에서의 전면적인 재검토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발트해 연안 국가의 애주가들은 남성용 로션, 구강 세정제처럼 알코올을 함휴하지만 음용에는 부적합한 제품에 이용되는 알코올로 만들어진 술을 마셨다

공산주의의 몰락은 "이례적인 정치학"의 시가를 낳았다. 세계은행의 이행기 경제팀에 따르면, 이 시기에는 정치인들이 국민들에게 커다한 희생을 요구할 수 있다고 했다

민영화 프로그램은 논란을 가장 많이 일으키고 고통이 따르는 정책이기도 했지만, 경제학자들은 이를 시장 경제로의 이행의 핵심으로 간주하고 있다

영국의 위대한 민영화주의자 마거릿 대처 총리는 충격요법이 무엇인지를 실제로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재임 기간이 11년 동안에 약 20개에 달하는 영국의 거대 공기업을 민간에 이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부패는 급진적인 민영화 이후에 더욱 만연했다

IMF의 처방은 워싱턴 컨센서스에 근거한 것이었으나, 동아시아의 공중보건 전문가들은 이후에 나타나게 될 결과를 우려했다

월스트리트의 태도는 17세기 철학자 존 로크와 도처에 존재하는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사람의 사상을 대변했다

아이슬란드 은행업자들은 "대마불사"를 믿었으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그들의 이런 믿음을 외면했다

기자들은 그리스 정치 지도자들이 그리스가 지난 10년 동안 EU로부터 실제로 빌린 금액의 규모를 감추기 위한 거래를 주선하는 조건으로 투자은행인 골드만삭스에 수억 달러를 지급했던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스 스위대는 아이슬란드와 마찬가지로 구제 금융에 관한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2012년아 되자, 동아시아와 아이슬란드의 금융 위기에서와 마찬가지로, IMF는 긴축 정책이 초래할 피해를 과소 추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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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8 00: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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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8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