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은 백인 남자들이 다 그런 건 아니겠지 - 소셜미디어 시대의 고전과 여성혐오
도나 저커버그 지음, 이민경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5월
평점 :
절판
미국 뉴욕 주 웨스트체스터 카운티에 소재한 도브스 페리에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도나 저커버그는 근래 이름을 알리고 있는 고전 학자입니다. 이쯤에서 눈썰미가 있는 분들은 짐작하셨을 수도 있겠는데요. 바로 그녀의 오빠가 페이스북의 창립자로 유명한 마크 저커버그입니다. 웹상에서는 그녀와 오빠인 마크 저커버그 간의 사적인 이야기들을 잘 찾아볼 수 없기에 어떻게 보면 두 남매가 각자가 서로 다른 분야의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요.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그녀가 요 근래 등장한 SNS 인터넷 기업에 대해 상당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기에 의외인 측면이라 생각되는데요. 더불어 그녀는 여성 지식인답게 넷상에서의 여성혐오와 남성 우월적인 인식에 대해 꾸준히 비판적인 글을 언론에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그녀의 학문적 경로는 미국의 사회과학 명문인 시카고 대학에서 예술학 학사를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 고전 문학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외에도 저커버그는 대안 우파 Alt-right 에 대한 비판과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마찬가지로 경고하고 있는데요. 지금 서평을 작성할 이 글 역시 이러한 학문적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원제 "Not All Dead White Men"으로 지난 201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5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저커버그의 이 글은 일종의 '사회학적인 르포르타주가 가미된 일부 사회계층에 대한 폭로성의 글'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이것의 주된 대상은 대안 우파와 여성 혐오주의자 및 인종차별주의자들과 픽업 아티스트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소위 '레드필'이라는 반젠더적인 공간에서 "여성과 이민자들, 유색인들 그리고 자유주의 엘리트들에 대한 혐오와 분노를 어떤식으로 표출"하고 있는지에 낱낱이 파헤치고 있습니다. 제가 일전에 서평을 작성했던 케이트 만의 논저에서도 그렇듯이, 이 글에도 등장하는 '인셀 Incel, 즉 비자발적 독신'들이 어떻게 죄없는 일반 여성들에 대한 터무니없는 분노로 점철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들의 권리가 여성들에 의해 짓밟힘을 당하고 있다는 측면의 인식이 그녀에 의해 가감없이 논증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저들이 현재의 자유주의적 가치에 기반한 성평등주의를 옹호하고 특정 인종만을 향하는 특권에 반대하는 소위 계몽적 태도에, 어떻게 저들이 논리적 근거 없이 거의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주장들로 일관하고 있는지를 글 전반을 통해 명확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는 "대다수의 남성들이 극심한 차별에 놓여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내재되어 있는 비정상적이고 비도덕적인 정치적 신념을 무슨 정치적 박해를 당하고 있는 사람들 마냥 '커밍 아웃'하는 꼴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 끊임없는 노정을 기울여 온 사회적 진보에 대한 저런 터무니없는 분노와 혐오는 이 지점에서 저들을 민주주의적 가치 아래 포용해야하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를 느끼게 하는데요. 뿐만 아니라, "정치적 올바름"에 대해 철지난 이데올로기화를 시도하여 그것을 지지하고 인정하는 모든 계층을 극좌나 강고한 좌파로 몰아가는데 온갖 정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저들의 현재 모습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저자인 저커버그는 경제사회적 체제의 해석에서 당시 합법적으로 노예제를 용인한 고대 그리스에서 비롯된 '스토아 철학'을 현재의 인셀과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앞뒤 맥락없이 자신들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의 근거로서 무분별하게 내면화시킨 점을 2장 전반에서 비판적으로 논증하고 있는데요. 아주 단적으로 말해, 전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스토아 철학 전반이 성차별주의와 엘리트주의를 직간접적으로 강조하고, 이렇게 드러난 성차별주의가 "오늘날 다수의 여성 혐오주의자들에 의해 공명한다"는 점은 학문적으로 매우 불행한 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마치 과거 레오 스트라우스의 고전 연구가 그 양가적 측면에서 네오콘들에 의해 일종의 교리적인 측면으로 지지받은 것과 제법 유사하다고 여겨집니다. 이처럼 순수 학문조차도 어긋난 이데올로기화에 의해 철저하게 이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늘날의 포퓰리스트들에 의해 확산되고 있는 '반지성주의'의 파급에도 이러한 왜곡된 학문의 인용이 분명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점은 분명합니다. 즉, 백인 우월주의자들이나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전체주의의 논법을 적극 차용하고 있는 점을 과연 어디까지 용인해야 할지에 대해 시민 모두가 고심을 해볼 시기라고 생각되는데요. 저들이 이 시점에도 '파시즘'과 더욱 가까워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민주주의적 가치와 그것을 발전시켜 나가야할 시민적 의무에 상당히 좋지 않은 영향이 될 것은 거의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저커버그가 스토아 철학을 오용하는 이들의 행태를 낱낱이 지적하면서 소위 '자기 길을 가는 남자들과 픽업 아티스트 혹은 여성 혐오주의자들'의 아전인수격인 학문적 인용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있는지 상세히 독자들에게 알리고 있는데요. 이들에게 꽤 높은 팬덤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인용은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후 3장과 4장은 스토아 고전 철학의 대표격인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와 '사랑의 기술'을 통해, 이미 원전이 말하고자 하는 의미 자체가 지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심각하게 여성차별적이고 좀 더 자세히 들어가면 강간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과 남성들에게 강간을 권유하는 등의 여성을 성적 도구로 삼는 저열한 시도의 근거로까지 삼고 있습니다. 저자는 다수의 인용을 통해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를 거의 '강간 노트'라고까지 주장하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인정하는 고전의 향취가 지금에와서 어디까지 이를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한 꽤 중요한 바로미터로 취급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페미니즘의 철저하고 가차없는 성평등주의로 치부하지 말고 시대상에 따라 우리의 계몽주의가 그것을 면밀히 구분해 낼 수 있는 당위를 많은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 어느 정도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데요. 단순히 남녀의 문제라서가 아니라 여성의 권리, 아니 누구나 인간이라면 인간답고 평등하게 자신의 삶을 누리게 하는 인식적 차원에서 이러한 원칙을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자본주의적 이행 가운데서 사회 전반이 인정하는 시장 자유의 논법이 가미된 '능력주의' 같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가 인정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의도된 사탕발림으로 결코 왜곡하거나 한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의 앞선 부분에서 이러한 "레드필 남성들"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문학과 역사를 자기들 멋대로 인용해 자신들만의 가부장제와 백인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로 강화시키는 것은 과거 히틀러의 나치와 매우 닮아 있습니다. 이처럼 백인 우월주의와 여성 혐오를 인정하고 찬양하는 것 자체가 파시즘과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겠는데요. 이러한 논증 과정에서 저자의 날카로운 분석과 근거의 제시는 고전 철학을 연구한 전공자답게 큰 설득력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여성 고전 학자라는 점을 색안경끼고 보지 않는다면 꽤 논리적인 비판이라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텐데요. 이 뿐만 아니라 주요한 비교 분석 대상으로 인용되고 있는 픽업 아티스트와 관련해서도, 이들의 행동과 주된 목적이 여성의 성을 트로피로 삼아 보통 인셀들로 규정되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적 상이한 측면의 인식을 소개하고 있었는데요. 저자인 그녀가 '픽업 아티스트'라고 규정된 여성의 성과 섹스만을 목적으로 삼는 이들의 매우 현실적이고 치밀한 분석은 꽤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마치 실제로 현역(?)에 있는 어느 픽업 아티스트가 직접 자신의 일화를 기록하는 것과 유사한 느낌까지 받게 되었는데요. 이는 온전히 글을 쓰기에 앞서, 치밀한 자료수집을 선행한 그녀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다시 앞선 논점으로 돌아와서, 대부분의 픽업 아티스트들이 일반적인 남성들을 대상으로 '여성을 쟁취'하는 방법을 교수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것이 이들의 명백한 목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인셀들과 마찬가지로 소위 '가스라이팅'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의 성관념 자체를 남성에게 전적으로 종속시키는 작업에 이들은 왜곡된 노력을 경주하게 됩니다. 이는 픽업 아티스트들이 다소 이질적이라고 볼 수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비교해, 후자들이 '여성의 인정'을 광범위하게 거부하면서 전통적인 가부장적 체제의 복귀와 여성의 성을 남성들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하는 계몽주의 시기 이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터무니 없는 열망을 보이는 것과 유사한 인식적 체계를 짐작하게 되었는데요. 일반적인 남녀 관계에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사실상 거부하는 것과 "남성에게 성적인 욕망을 제공하는 것 자체가 원래 여성에게 내면화된 욕망이기도 하다"는 그들의 해석은 이들 픽업 아티스트들이 분명한 왜곡된 성관념을 보통의 남성들에게 전이시킬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합니다. 이는 극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건전한 사회적 관념에 있어 분명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들을 무슨 컬트와 같은 개념으로 용인하는 것은 문제가 될 소지가 분명하고, 이에 대한 지속적인 학문적 연구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사회구조가 "오로지 여성들의 권리만을 위한 토대"로서 발전되어 왔다고 믿고 있는 여성 혐오주의자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들의 관념 체계로 사회 전반을 변화시키는 것이 현재로선 거의 불가능하게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작게는 여자들이 자신들을 위해 마땅히 섹스를 제공해야하며, 과거의 남성 권리를 비롯한 전근대적인 사회 관념을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점은 단순히 그들의 일관된 신념을 넘어 익히 부정적인 관념론 자체로 심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겁니다. 어쩌면 이러한 측면에서 자신들의 주장들을 사회 전체에 관철시키기 위해 이론적 근거로 '스토아 철학을 경쟁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마땅히 키스를 해야하고, 자신은 여태 그렇게 살아왔다는 자랑스럽게 고백하기까지 하였는데요. 이들 여성 혐오주의자들이 도널드 트럼프를 지신들의 이상향으로써 여기는 것을 차치하더라도 이러한 왜곡된 논법들이 다수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는 점은 심히 우려스러운 상황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이 트럼프가 일개 사인이 아니라 한때 미국을 좌지우지 했던 정치인이었던 측면에서 미국 시민들의 정치인에 대한 변별력이 어느 정도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한편으론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여성을 일종의 소유물로 여기고 계몽주의와 그로인한 민주주의가 이룩한 사회적 진보를 오히려 남성 권리의 심각한 후퇴로 여기기까지 하는 이런 반지성주의적 인식은 실로 우려스럽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건전한 성평등주의 자체가 남성의 권익을 침해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적 비약은 또한 민주주의 정치 자체에 있어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여성 혐오와 백인 우월주의를 기치로 제도적 정치 무대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무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계몽의 가치로 시민의 삶을 위해 발전시켜온 남녀 평등과 다원주의적 가치를 또 한번 짓밟힐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낱 음모론 따위로 여겨서는 안될 겁니다. 과거 네오콘이 자신들의 정치적 행로에 대한 근거로 고전 철학을 이용했던 점은 시민들 개개인이 이를 마찬가지로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민주주의를 전반적으로 부정적으로 치부했던 역사적 근거를 지금도 찾고 있는 어용 지식인들과 극단주의자들 또한 우리가 마땅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30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약간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역자가 본문에서 여성의 성기를 '음부'라 하지 않고 '보x'라고 지칭하고 심지어 '보슬아치'라는 번역까지 한 것으로 보아 일개 독자로서 역자의 고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대안 우파'를 알트라이트로 지칭하고 있었는데요. 아마도 역자의 의도적인 선택으로 여겨집니다. 대안 우파 자체가 갖는 의미가 다소 온건하게 보여, 저들이 극우주의자들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망각하기 마련인데요. 다만 알트라이트 역시 숨겨진 본질을 드러내는데 마찬가지로 부족하다고 생각됩니다. 원론적인 입장에서 단순한 저의 해석을 언급하는 것 뿐입니다. 오해가 없으면 좋겠습니다.
온라인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드러낸 여성은 레드필 커뉴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로부터 악성 트윗과 이메일을 받게 된다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극우 세력이 고대를 전유한다는 점을 우려한다
이 남성들은 페미니스트 공간을 침해하는 것이 자신들의 권리이지 의무라고 믿는다
흑인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는 사실이 인종주의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역사의 모든 여성들이 기만적이고 통제적이고 문란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가 여성중심적 사회에서 살기 때문에 양육법이 남성에게 압도적으로 불공정하다고 생각한다
앤드루 앵글린은 한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남성이 다른 인종과 관계를 맺는 것은 그다지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아무런 차이도 만들어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이 그런다고 하면 화가 난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궁은 곧 우리의 자궁이기 때문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라는 문장은 구조적인 성차별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남성이 흔히 하는 대답으로, 자신은 성차별주의자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의 일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 포스트는 "사회정의의 전사들이 대학을 가장 허접한 이들과 영합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제일 징징거리고 안쓰럽고 멍청한 루저들 말이다"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스토아 철학이 레드필 커뮤니티에 입성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이런 왜곡이 필수적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은 국수주의자이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데 반해, 스토아 철학은 세계주의적인 관점을 지향하는 철학이기 때문이다
무소니우스는 스토아철학이 오늘날의 남성계에 무척이나 매력적으로 느껴질 만한 기본적인 전제를 둔다. 바로 남성이 태생적으로 여성보다 감정 절제를 더 잘한다는 가정이다
레드필 커뮤니티에 드나드는 남성들은 자신이 누구보다도 이성적이고 덜 감정적인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
이 남성들은 미국의 노예제가 남긴 유산과 그것이 흑인에게 장기적으로 미친 영향을 인정하지 않는다
레드필 스토아주의자들이 볼 때, 가부장제를 복원하려는 구조적 변화의 시도는 모두에게 이득이다. 이들의 관점에서 여성과 유색인은 비이성적이고 지도를 필요로 하기에, 이성적인 백인 남성이 책임자가 된다면 사회는 더 나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 속에서 오비디우스는 독자에게 오늘날이라면 성폭력으로 간주될 만한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그에 따르면 성공적인 픽업은 힘을 가진 남성잉 여성으로 하여금 자신의 가치를 절하시키고, 남성의 가치는 높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일련의 전략으로 이루어져 있다
픽업 아티스트들은 다양한 인종의 테스토스테론 수치, 성기 사이즈, 성격에 대한 고정돤념을 전시한다
"허락을 구하지 말라. 지배적인 태도를 가져라. 당신의 접근을 상대 여성이 거절할 때까지 밀어 붙여라. 허락을 구하지 말라. 여성의 손을 잡아끌어서 당신의 거시기 위에 올려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