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촌을 걷는다 - 과거와 현재를 잇는 서울역사산책
유영호 지음 / 창해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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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촌(西村)’을 걷는다는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통일학 박사 과정을 수료한 북한 전문가가 쓴 이례적인 책, 역사적 배경에 충실한 책이다. 책은 전체 5장 구성으로 이루어졌다. 1장 느리게 걸어보자 서촌, 2장 역사와 문화의 보물창고 서촌, 3장 수많은 예술가들의 둥지 서촌, 4장 도심의 살아 있는 박물관 서촌, 5장 우리가 몰랐던 서촌 등이다.

 

저자에 의하면 서촌이란 엄밀히 말해 북촌의 일부이다. 그런데 책에서 말하는 곳이 서촌이라 불리게 된 것은 2000년대 들어 종로구 가회동 일대가 북촌 한옥마을로 알려지면서 옥인동 일대를 북촌이라 이름하기 어색한 까닭이었다.

 

현재 책이 말하는 곳은 경복궁 서쪽 마을이란 의미로 서촌이라 불리고 있다. 일제때 청계천이 복개(覆蓋)된 것은 조선을 대륙 침탈의 병참기지로 삼으려는 총독부의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재정문제로 일부만 진행되었을 뿐이다.

 

세종문화회관편에서 우리는 서울이라는 메트로폴리스는 고도로 발달한 과학기술을 이용해 자연에서 독립한 것으로 보이지만 도시설계자들은 대자연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도록 끊임없이 고민하는바 일반인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른다는 점을 알게 된다.

 

한편 저자가 주시경의 집터여서 용비어천가 빌딩으로 불리는 곳을 논한 자리에서 우리는 한글 띄어쓰기를 처음으로 시행한 문헌이 한 외국인이 쓴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책은 영국인 목사 존 로스가 쓴 ’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이다.

 

저자는 조선이 전조후시(前朝後市)를 완전히 따르지 않고 시장을 궁궐 뒤가 아닌 종로와 남대문로에 세웠다는 점, 성곽을 네모나 원으로 짓지 않고 산을 기준으로 분지에 성을 지었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이 같은 유교문화권이었지만 자기 환경과 조건에 맞는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성곽 축조의 관념을 보유했다고 말한다.(62 페이지)

 

저자의 설명을 통해 우리는 영추문(迎秋門)이 경복궁의 대문들 중 유일하게 콘크리트(로 복원된) 문이라는 사실도 접하게 된다.(82 페이지) 이 역시 일본의 조선 궁궐 훼손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이런 슬픈 역사는 영추문 앞 보안여관에도 깃들어 있다. 서정주 시인이 투숙한 뒤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과 함께 시인부락을 창간한 보안여관 이야기인데 일본에서 건너온 부락(部落) 즉 부라쿠(ぶらく)란 말은 신분적사회적으로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 온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동네의 고유 명칭을 부락으로 명명한 것 역시 영추문 사건처럼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의한 것이다.(85 페이지)

 

오감도의 시인 김해경이 이상(李箱)이란 필명을 쓰게 된 사연이 역사적 무게로 다가오는 것이 서촌을 걷는다의 특징이기도 하다. 화가 구본웅이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들어간 김해경에게 사생상(寫生箱: 화구畵具를 담는 상자)을 선물했다. 가난했던 김해경은 감사의 표시로 자신의 필명에 상자를 의미하는 상()을 넣겠다고 했다. 더 나아가 앞 글자는 흔한 성씨이되 사생상이 나무이니 나무 목()자가 들어간 성씨를 사용하기로 했다.

 

연애로 이름을 알린 이상은 후에 구본웅의 이모 변동림을 세 번째 여자로 맞는다. 변동림은 이름을 김향안으로 바꾼 뒤 화가 수화(樹話) 김환기와 결혼했다. 그녀는 김환기 사후 부암동에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변동림의 이복 언니가 변동숙이고 변동숙의 호적상 증손녀가 발레리나 강수진이다.(101 페이지) 구본웅은 우리 나라 최초의 야수파 화가였다.

 

이상의 집과 2 3분 거리에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노천명의 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수묵화의 거장 청전 이상범의 집이 있고 바로 옆에 그의 화실이 있다. 이상범의 집 처마 아래로 누하동천(樓下洞天)이란 친필 편액이 보인다. 동천이란 산천으로 둘러싸인 경치 좋은 곳 또는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을 말한다.(115 페이지)

 

서촌의 또 다른 명소인 대오서점 이야기도 흥미롭다. 대오서점은 조대식, 권오남 부부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딴 이름이다. 자식들을 교육시킨 서점인 대오서점을 지금은 다섯 째 딸이 북카페로 리모델링 해 계승하고 있다.

 

서촌의 맛집 골목인 통인시장은 일본인의 생활 편의를 위해 만든 시장이다. 통인시장의 일부가 옥류동천 상류의 물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본래 통인시장은 일본이 19416월 효자동 일대에 살고 있던 자국인들을 위해 개설한 제2공설시장이다.

 

서촌에서 가장 많이 방문객이 몰리는 곳은 옥인동이다. 옥류동과 인왕동에서 따온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인 1927년 옥인동 면적의 반 이상을 소유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마지막 황후인 순정효황후의 큰 아버지 윤덕영이다. 그의 저택인 벽수산장은 16천평의 대지를 차지했었다.

 

박노수 미술관은 윤덕영이 시집간 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기도 하다. 벽수산장 본채와 정원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박노수 미술관이 있다.(132 페이지) 자수궁(慈壽宮)은 문종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문종이 선왕 세종의 후궁들을 거처할 수 있게 마련한 공간이다. 후에 성종의 비()이자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윤씨가 빈()으로 강등된 후 거처했고 중종 비 단경왕후도 궁에서 쫓겨난 뒤 생활했다.

 

재혼할 수 없었던 왕의 후궁들은 비구니로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한때 자수궁은 5천여명의 여승을 수용한 국내 최대 승방이었다.(164 페이지) 자수궁 터인 군인아파트 정문을 마주보며 서 있는 세종아파트는 사회주의자 이명건의 집이 있던 곳이다.

 

이명건은 친구 김원봉, 김두전과 함께 1948년 이승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이명건은 여성(如星), 김원봉은 약산(若山), 김두전은 약수(若水)란 호를 가졌다. 김원봉의 고모부가 지어주었다. 별과 같이, 산과 같이, 물과 같이란 의미이다. 민족해방 운동을 위해 중국에 가는 그들에게 이국땅에서도 조국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지어준 것이다.(167 페이지) 이명건의 동생이 화가 이쾌대이다.

 

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곳은 옥인동 보안수사대이다. 조선 최악의 매국노 이완용과 윤덕영의 가옥 바로 옆이다.(195, 196 페이지) 마지막 5장은 우리가 몰랐던 서촌이다. 전체 다섯 장(), 44편의 글 가운데 40번째 글이 왕을 낳은 후궁들의 사당 육상궁(毓祥宮)이다.

 

()은 기를 육인데 같은 자로 육()이 있다. 김포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를 모신 능)에 가면 인종의 어머니가 묻혔던 육경원(毓慶園)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육경원과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의 흥경원(興慶園)이 합쳐져 장릉이 된 것이다.

 

마지막 44번째 글은 혈흔처럼 남은 인조반정의 역사 창의문(彰義門)’이다. 청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깊고 수석이 밝게 빛나는 모습이 개성의 자하동을 연상하게 한다고 해서 자하문(紫霞門)이라 불리기도 하는 창의문은 태종 13년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 일대는 경복궁의 두 팔에 해당하므로 길을 열지 말고 지맥(地脈)을 온전하게 하소서라는 상소를 함에 따라 늘 폐쇄되어 있었는데 어명에 의하지 않고 창의문을 출입한 경우가 단 한 번 있었으니 바로 인조반정을 말하는 것이다.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이루어진 인조반정으로 명청 중립외교를 펼치던 광해군과 대북파가 제거되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이 세력들이 일제 강점기를 거쳐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역사의 계승과 세월의 무게를 무겁게 느끼게 된다. 이렇듯 서촌 순례를 통해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역사를 배우는 현재적 의미이리라. 역작(力作)임을 실감하며 책을 덮는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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