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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쓰는 조경학개론
이규목 외 지음, 김연금 엮음 / 한숲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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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造景)을 영어로 landscape architecture라 한다. 건축, 산업, 도시 분야는 협력이 긴요한 분야임에도 제도적으로나 공공사업 시행에 있어서 영역간 침범이 자주 일어난다. 조경의 기본 성격이 포괄적이고 범위가 유동적이기 때문이다. 조경은 자연을 다루고 건축은 인공물 즉 건물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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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은 외부 공간을 다루고 건축은 내부 공간과,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부분을 다룬다. 조경은 수평적이고 건축은 수직적이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대개 환경을 개발하고 이용하고 고치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조경가들은 친환경적이다. 조경은 나무의 생리적 특징 등을 공부하는 유일한 분야다. 조경의 주요 설계 대상이 정원이라면 건축의 주요 설계 대상은 주택이다.

 

조경가들이 하는 일은 광범위하다. 이런 점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1. 외부 공간에 어느 정도 관심과 흥미를 느끼는까? 2. 실용적 도면을 그리는 데 흥미와 숙련도는 어느 정도 갖추었는가? 3. 미술과 조각 등에 대한 흥미도는 어느 정도인가? 4. 식물, 수학, 지리, 역사, 사회학 등에 대한 흥미는 어느 정도인가?

 

5. 쓰기와 말하기의 숙련도는 어느 정도인가? 6. 타인으로부터 얼마나 신뢰를 받는가? 7. 문제해결의 논리성을 갖추었는가? 8. 대중의 욕구에 얼마나 민감한가? 9. 예술적 욕망에 대한 민감도는 어느 정도인가? 10. 독립심을 갖추었는가? 11.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경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는 어느 만큼인가? 12.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가?

 

조경도 예술적 측면이 있어서 양식(樣式: 예술적 풍조)이 있다. 조경 분야에서 양식이 성립된 것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다. 르네상스 양식이 전 유럽으로 퍼질 무렵 프랑스는 대담한 바로크 스타일을 취했다. 앙드레 르노트르란 조경가가 유명하다. 보르비콩트 성()의 정원을 만든 사람이다. 이 정원을 보고 루이 14세가 의뢰해 설계한 궁전이 베르사유 궁전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정원 양식은 풍경식이다. 프레데릭 옴스테드와 캘버트 보가 영국 리버풀 버큰헤드 공원을 참고해 설계한 공원이 센트럴 파크다. 중정(中庭)을 스페인 말로 파티오라 한다. 중정은 건축물로 싸인 정원을 말한다. 서양이 인본주의적이었다면 동양은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추구했다. 서양에서는 풍경화라 하고 동양에서는 산수화라 한다.

 

서양화에는 감상자가 그림에 그려져 있지 않지만 동양에서는 그려져 있다. 외국에서는 정원 설계가가 정원을 설계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사대부들이 담당했다. 사대부들은 정치에도 관여했고 시서화에도 능했고 성리학에도 정통했고 정원도 만들었다. 중국 정원은 대비 효과가 상당히 크다. 음양 대비가 그것이다.

 

일본 정원의 대표적 특징은 가레산스이(고산수양식). 마른 산수란 의미다. 돌을 세워 폭포를 만든 뒤 모래로 물 흐름을 표현했다. 건축 분야에서 모더니즘이 나타난 것은 기술 발달의 결과다. 철근 콘크리트를 만든 사람이 조제프 모네다. 도축장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만든 것이 프랑스의 라빌레트 공원이다.

 

고분벽화를 통해 알려진 이집트의 정원은 현세가 아닌 내세로 가지고 갈 정원이다. 테베 시장을 역임한 센네페르가 무덤에 그린 정원은 포도밭 정원이다. 중앙에 포도밭이 있는 유일한 예이다. 기독교 정원 양식은 없다. 종교와 관련한 정원 양식은 이슬람 정원이 유일하다. 중세 정원인 수도원의 약초원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성경의 에덴동산을 재현한 것은 오히려 이슬람 정원이다.

 

비스타는 보이는 시점이 강조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양쪽을 폐쇄하는 공간 구성 기법이다. 미적 구성 원리에서 가장 지배적인 것은 통일성과 다양성이다. 공간에 사람이 들어가 무언가를 하면 환경이 된다. 반면 경관은 사람들이 어느 시점에서 보는 한 덩어리의 대상이다. 경관을 영어로 landscape라 한다. 지리학에서는 사람이 손댄 경관을 문화경관이라 부른다.

 

미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는 상충할 수 있다. adscape란 광고 간판만 보이는 경관을 말한다. wallscape는 방음벽 사이를 다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답답한 경관을 말한다. flatscape는 무미건조한 경관을 말한다. 현재의 경관에 인간이 개입하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에 오늘이라는 켜를 덧대는 일이다. 경관이란 과거부터 수많은 변화를 거치며 쌓아온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계획은 글로 하는 것이고 설계는 도면으로 하는 것이다. 여러 필자 중 한 사람인 최정민은 논리와 직관은 이분(二分)의 대립적 사고 체계가 아니라 호혜적 사고 체계라고 말한다. 조경에도 생태학적 접근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생태학이란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에른스트 헤켈이다.

 

생태학(ecology)과 경제학(economy)은 집, 생활의 장을 의미하는 eco라는 공통의 단어를 어원으로 한다. 장혜정은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욕구 피라미드 이론을 다른 각도로 본다. 즉 안정화 욕구, 사회적 욕구, 자기표현 욕구, 미적 욕구, 자기실현 욕구를 위계 서열로 볼 것이 아니라 자아를 겹겹이 둘러싼 피부층으로 이해하자는 것이다.

 

동진(東晉)의 곽박(郭璞)이란 사람이 쓴 장서(葬書)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죽은 이는 생기에 의지해야 한다. 땅속에 묻힌 사람은 정기를 받아야 하고 그 정기는 자손에게로 이어진다.” 이규목은 풍수란 죽은 사람의 묘자리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땅을 이해하고 읽고 해석하는 방법이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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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 - 소진사회의 인간과 종교
김화영 지음 / 나다북스(nada)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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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산문집을 읽고 난 느낌은 좋은 소설이나 시를 읽고 느끼는 기쁨 이상일 수 있다. ‘이론과 이론 기계‘, ’힘의 포획등을 쓴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과 나다 공동체 대표인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가 그런 책들이다. 오길영 님은 에세이의 뿌리는 감상적 체험의 글이 아닌 지성과 개념이며 에세이의 문체는 현란한 글재주가 아니라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라 말한다.

 

김화영 님은 자신의 책이 목표로 하는 것은 지금까지 내려오는 통찰과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려 장치들에 포획당하지 않는 길을 모색하는 것, 신자유주의가 제시하는 비극적 자본 논리에 잠식당하지 않으면서 웃음의 여유를 가지고 새로운 생명 가치를 모색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 말은 에세이는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글과 공명한다. 새로이 등장하는 사유의 힘을 빌린다는 김화영 님의 말과 과거의 생생히 살아 있었던 것을 새롭게 다시 배열하고 정리한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의미다.

 

김화영 님은 주체(subject)라는 라틴어가 주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툼과 종속된 것 또는 하인을 의미하는 수브엑투스라는 두 개의 어원을 갖는다는 말을 한다. 자발적 복종 주체가 되기도 하는 주체의 역설에 대해 말한 것이다. 오길영 님도 주체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곧 체제의 신하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두 저자의 주체론은 배경이 다르다. 김화영 님은 장치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모색하는 차원이고 오길영 님은 유아론(唯我論)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 위한 차원이다. 장치란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인간 주체의 행동을 특정 방향으로 유도하는 모든 것이다.

 

김화영 님은 장치를 설명하는 장에서 그것은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 말하며 내부는 외부에 의해 규정되고 외부도 내부에 의해 규정된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내부와 외부는 상대방 없이 정해지지 않으며 둘을 나누는 기준도 모호할뿐더러 서로 연속적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오길영 님은 사람이 배우는 것은 오직 낯선 기호와의 마주침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나하고 다른 사람을 만날 때, 나하고 생각이 다른 책을 읽을 때, 익숙치 않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사유가 생성된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의 비극을 견디고 주체로 농담하기는 오길영 님이 말한 지성적 사유의 전형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에 실린 마음 공부라는 장을 통해 나는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가 어떤 사유 관계로 만나고 헤어지는지 알게 되었다. 김화영 님의 마음론은 색다르다. 김화영 님은 마음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앎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김화영 님이 제시하는 대안은 지성에만 의존해오던 공부를 지양하고 지성과 마음이 하나가 된 온전한 시각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칸트, 후설, 하이데거, 메를로 퐁티의 서로 다른 문제의식이 드러난다. 칸트는 물() 자체(自體)는 보이지 않기에 알 수 없고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나오는 입력된 코드 그대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물 자체는 우리의 인식 능력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사물 자체다; 진은영 지음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70 페이지)

 

후설은 장미를 보면 감각기관에 수용된 그대로 장미가 인식된다는 칸트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한다. 즉 만일 그렇게 기계적으로 인식이 이루어진다면 장미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그렇게 제각각일 리가 없다는 것이다. 후설의 말을 풀어보면 우리는 마음의 지향성에 따라 세계를 본다는 말이 된다. 후설이 강조하는 것은 의식의 지향성이다. 의식이 무언가를 지향한다는 것은 이미 무언가 갈망을 가지고 있어서 이끌림에 반응함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후설이 말한 의식의 지향성에 대해 논하며 일상의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를 지향하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일상에서 습관적으로(별다른 지향 없이) 행동하고 사유하는 우리에게 지향성은 특수한 경우에만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걸을 때 오른발, 왼발의 순서를 의식하지 않는다. 또한 너무 친숙한 것들은 자동적으로 인식한다. 이렇게 습관화된 세계가 깨지는 것은 세계를 지탱하던 방식이 무용해지는 순간이다.(기존 세계가 존속되도록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우상이다.)

 

후설의 제자인 메를로 퐁티는 마음의 지향이 이미 몸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했다. 하이데거가 세계 - - 존재인 우리가 늘 지향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면 퐁티는 우리의 마음의 지향 작용은 그다지 순수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김화영 님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있는 것은 순수하게 우리 마음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 경험을 전제하고 있는 것, 어쩌면 신체 경험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오길영 님은 물 자체를 새롭게 해석한 진은영 님의 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거론한다. 진은영 님은 선험철학의 기본 아이디어는 매개성이라 말한다. “우리는 물자체와 직접 만날 수 없고 단지 감성과 오성(悟性)이라는 형식의 매개를 통해서만 사물과 관계할 수 있다. 이질적인 것은 항상 매개되어야 한다는 사유는 선험적 도식론에서도 계속된다.”(’순수이성 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 211 페이지)

 

네그리와 하트를 인용해 진은영 님은 매개 없이 우리는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아이디어는 철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 철학적으로 칸트에 의해 확고하게 정립된 매개 메커니즘은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서는 의회나 합의기구라는 대표제를 작동시킨다.”는 말을 한다.

 

오길영 님은 진은영 님이 주로 기대는(의거하는) 니체, 들뢰즈, 네그리 등의 탈근대적 철학자들은 각기 다른 답을 시도하고 그 답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말하며 자신에 찬 모든 직접적 형식의 가능성을 내세우는 이들보다는 우리 인식의 근원적 한계를 탐색하는 칸트의 겸손함에 마음이 쏠린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오길영 님의 견해에 공감한다.

 

그런가 하면 김화영 님이 언급한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누구일까? 칸트, 후설, 하이데거, 퐁티 가운데 이론의 여지 없이 가장 정치적이었던 사람은 하이데거다. 송강 정철, 고산 윤선도, 약천 남구만 등 조선의 문인 - 정치인 가운데 누가 가장 두 영역에서의 괴리가 적은지를 논할 때 우리는 남구만을 들지만 위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단연 하이데거를 들 수밖에 없다. 차이가 있다면 하이데거는 부정적인 경우라는 점이다.

 

오길영 님의 아름다운 단단함에 하이데거 이야기가 나온다. 박찬국 님이 쓴 하이데거와 나치즘을 읽고 쓴 서평 형식의 글인 사상과 정치라는 글에서다. 박찬국 님은 나치에 협력한 하이데거를 그의 정치적 견해와 행위는 악성의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지만 하이데거의 정치적 견해와 철학 사이에는 필연적 관계는 없고 양자 사이에 우연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취했다.

 

하이데거는 현실 정치로서의 나치즘이 아니라 근대 기술 문명과 그것의 이념적 표현인 니힐리즘, 그리고 니힐리즘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을 극복할 대안으로 나치즘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를 말한다. 그것은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번쩍 혹은 아하 하는 초월과의 만남을 통해 삶의 전환점을 만들어낸 경험이다.

 

김화영 님은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규칙적인 종교생활과 다르다고 말한다. 전환된 세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마치 유희와 같아서 그것은 초월적인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놀이이기도 하고 삶에 자리한 고통들을 유유히 견뎌내며 약속의 땅을 향해 가는 희망이기도 하다. 다시 주체의 역설을 말했던 김화영 님은 우리는 더 이상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여분의 존재도 아니고 세계에 종속되거나 의존하는 존재도 아니라고 말한다.

 

새로운 삶은 그저 나의 길을 함께 가며 웃는 것, 비극을 통과한 후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운명과 자유의 놀이터다.“, ”모든 것이 있게 하라! 다만 모든 장치를 무효화시키는 새로운 창조적인 일이 벌어지게 하면서.“ 김화영 님에 의하면 마음은 우리의 지향성을 새롭게 할 수 있는 창조적 근원지이고 기도는 마음의 통로로 걸어내려가 그 안에 깃든 신성을 만나는 문이다.

 

김화영 님의 결론은 영성(靈性) 신학자의 해답답다. ”비극을 침묵으로 견디고 마침내 눈을 뜬 이들이 모든 존재 안에서 신을 보는 날, 비로소 삶의 수수께끼들이 풀리며 빛을 보게 되는 그 날이 바로 우리의 시간, 영원한 지금이 될 테니까.”란 결론은 신비한 만큼 희망적이다.

 

노력하는 건 우리의 자유이다. 그게 인간답다. 그러나 가 하는 노력의 중요한 전제는 그런 노력을 한다고 욕망이 이뤄질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말로 유몰론자의 윤리를 설명한 오길영 님의 결론도 좋고 영성 신학자 김화영 님의 결론도 좋다.

 

칸트의 겸손에 마음이 쏠린다는 오길영 님의 말이 생각해본다. 맥락이 일치하지 않지만 나는 적어도 나보다 공부가 깊고 영성에 접()한 김화영 님의 인도를 따라 내 인식 밖의 영역에 열린 유보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 점이 김화영 님의 책을 읽고 얻은 결실이라면 결실이다. 묵직한 중수필, 지성과 사유의 깊이를 느낀 책을 읽게 해준 두 분께, 특히 내게는 영성이라는 새로운 영역에 눈뜨게 해준 김화영 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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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단단함 - 세상.영화.책
오길영 지음 / 소명출판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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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를 실험하는 글쓰기, 감성적 체험의 글이 아닌 엄정한 성찰에 바탕을 둔 진실의 정신이 작동하는 글은 어떤 장르의 글일까? 바로 에세이다. 에세이에 필요한 것은 현란한 글재주가 아닌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다. 저자 오길영 교수는 신영복 선생을 거론하며 에세이를 예술적 글쓰기의 독자적 형식이라 표현한다.(92 페이지)

 

그는 이런 정리된 글로 에세이 모음집인 아름다운 단단함을 시작한다. 책 제목인 아름다운 단단함은 김수영 시인이 사랑의 변주곡에서 운을 뗀 아름다운 단단함이란 표현에서 비롯되었다. 세상, 영화, 책 등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문학평론가이지만 좁은 의미의 문학보다 더 중요한 일이 세상에는 많다고 생각(57 페이지)하는 저자는 문학을 주어진 도덕에 물음을 던지고 더 나은 삶을 사유하고 상상하는 장르로 본다.(19 페이지)

 

저자가 배격하는 것은 작품 물신주의(작품을 작가와 분리해 바라보는 태도), 그리고 문학자족주의다. 저자는 삶과 분리되지 않은 아름다움의 가치를 긍정한다. 저자는 말한다. 삶과 분리된 작품의 아름다움은 공허하다고.(19 페이지) 저자가 생각하는 훌륭한 문학은 극한적인 삶에서 발생하는 극한적 사유의 표현이다.

 

저자의 글에서 나는 물적 토대 또는 생산력의 중요성이 강조된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이런 문장에서 그런 점이 드러난다. “한국사회의 물적 생산성이 과연 다수 시민들이 즉자적 생존을 걱정할 정도로 낮은가? 그렇지 않다면 답은 다른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다른 사회를 상상해야 할 것이다.”(33 페이지)

 

이는 먹고사니즘에 매몰된 우리 대학의 현주소를 논하는 자리에서 발해진 말이다. 다른 사회란 말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저자는 문학사의 평가에서 남는 것은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는 작품뿐이라는 자신의 말이 구태의연하다면 그런 비평가로 남겠다는(27 페이지) 비평가, 불화나 고독감에 더 친화감을 느끼는(38 페이지) 비평가다.

 

저자는 대상의 핵심을 파악한 정확한 시를 좋은 시라 말하는 비평가, 시에서도 관건은 감각적 지성이라 말하는 비평가다. 같은 맥락에서 문학에 필요한 것은 감성, 감상, 감각만이 아닌 더 많은 냉철함, 자기 객관화, 지성(58 페이지)이라는 말이 읽힌다. 저자가 세상을 보는 주요 키워드 중 하나는 고통이다. 주체(the Subject)는 체제의 신하(the subject)이기에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말에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인간은 주체가 되는 과정에서 하나를 얻는 대신 하나를 잃는 존재다. 저자가 의거하는 원칙은 유물론적 원칙이다. 이는 유아론(唯我論)과 대비된다. 유아론은 아몰랑의 현학적 버전이다. 저자에 의하면 유물론자는 자기변명을 하지 않는다. 저자에게서 느껴지는 바는 쿨함이다. 냉정이라고 표현해도 무리는 없겠다.

 

그런 점은 세상을 실상 그대로 본다는 의미의 여실지견이라는 말을 연상하게 할 만큼 불교적이다. 물론 저자의 그런 점이 의도의 결과인지는 모른다. 쿨함이라 했지만 저자는 에게 타자는 냉엄한 존재이고 그것이 의 마음에 들고 안 들고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세상의 냉엄한 이치라고 말한다.(103 페이지)

 

유아론은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의 논리를 따른다. 상상계의 아이에게 주체와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상상계의 아이에게 욕망이 유예되거나 성취되지 않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저자는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란 라캉의 말을, 타자들은 나의 욕망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말로 풀이한다. (105 페이지)

 

그에 의하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나의 욕망이 아닌 타자의 욕망이라는 시각에서 현실을 보는 것이다. 세 부분(세상, 영화, ) 가운데 나에게는 여전히 낯선 장르가 영화다. 그래서 저자의 영화론을 눈여겨 보았다. 저자는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 문학평론가로 자신을 소개한다.

 

저자는 사바하(娑婆訶)라는 영화 - 원하는 바가 이루어지소서란 의미의 불교 영화 - 를 통해 높고 고귀한 곳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낮고 비천한 짐승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그 짐승들의 구원을 위해 자신을 던지는 것에 종교의 숭고함이 있다고 말한다. 이어 그런 숭고함이 사라져 가는 제도권 종교를 생각하게 된다고 결론짓는다.

 

곁에 두고 싶은 영화, ’바닷마을 다이어리란 제목의 글을 보자.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몇 편을 함께 논한 글이다. 데뷔작인 환상의 빛과 최근작(2016)바닷마을 다이어리를 연이어 보았다고 말하며 저자는 그의 영화에서 지속되는 것과 달라진 것들을 비교하게 된다고 덧붙인다.(그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겠다. 영화를 분석하는 형식 또는 방식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품에 대한 가치 판단을 떠나 그냥 소장하고 싶은 책이나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살벌해져 가는 세상에 마음이 우울하거나 낙담할 때 다시 보고 읽으면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책이나 영화라는 말이다. 책 가운데 흥미롭게 본 작품은 내가 18권이나 소장하고 있는 이정우 교수의 책 가운데 한 권인 영혼론 입문을 소개한 글이다.

 

저자가 본 영혼론 입문은 영혼이라는 화두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통념을 해체한 책이다. “서구 근대 철학에 오면 영혼의 개념은 점차 사라진다. 그리고 그 자리를 정신 혹은 마음, 의식 등이 대체한다. 이제 영혼이라는 말은 거의 자취를 감춘다.”(249 페이지) 일정한 실체로서의 영혼/ 정신이 아니라 인식론적 능력/ 기능으로서의 마음, 의식이 문제가 된다.

 

그리스 철학에서는 감각과 지각이 구분되지 않았다. 감각과 지각 신체와 결부되어 있다. 책편에 실린 글들이 역시 묵직하다는 느낌을 준다. 사상과 정치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박찬국 교수의 하이데거와 나치즘을 소개한 글이 대표적이다. 박찬국 교수는 하이데거의 정치적 견해와 행위는 악성의 것이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철학에 근거한 것이라는 입장을 따르되 그것을 수정한다.

 

하이데거의 정치적 견해와 행위와 그의 철학 사이의 필연적 관계는 부인하되 양자 간에 우연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박찬국 교수는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가 비록 그것이 사후적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치명적 오류였지만 자신의 시대와 사유를 결합시키려는, 시대와의 진지한 대결의 결과였다고 보는 것이다.(274 페이지)

 

저자는 하이데거 철학의 의미를 서구 형이상학의 극복이라는 추상적인 담론의 차원에서만 이해하려는 하이데거주의자들이 새겨 들을 주장이라고 정리한다.(277 페이지) 진은영 교수의 순수이성비판, 이성을 법정에 세우다‘(를 소개한 글)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매개라는 말이 그 중 하나다. 매개 없이 우리는 경험할 수도, 사랑할 수도, 소통할 수도 없다는 칸트의 아이디어는 철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는 말이다.

 

대중들이 스스로 실천하는 자기 운동은 언제나 미리 구성된 질서, 보편적인 선험적 매개체에 굴복할 때에만 타당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칸트의 정언명법을 다른 누구의 도움 없이도 네 스스로 무언가를 결정하며 행위해야 한다는 사실 즉 자기입법의 사실이 의무로 정해져 있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가장 중요하기에 가장 끝에 배치하게 된 진술은 맥락과 분리된 작품의 이름다움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작품 물신주의는 문제적이란 사실이다, 또한 맑스나 들뢰즈 같은 철저한 유물론자에게서 배운 사고의 관점은 원래부터의 아름다움, 작품만의 아름다움은 없다는 점이라는 말이다.

 

에세이에 현란한 글재주가 아닌 지성적 사유의 표현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대로 저자의 문제는 간결하고 지성적이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설명하며 한 대상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한 시가 좋은 시”, “시에서도 관건은 지성, 다시 말해 감각적 지성이란 말이 인상적으로 읽힌다. 정확한 감정을 정확한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좋은 시라 생각하는 저자의 시론(詩論)을 보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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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친일파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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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이 공유하는 부분이 있을까?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답은 뉴라이트(한국)와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일본)의 역사 인식이라 해야 한다. 잘 알려졌듯 역사 왜곡의 당사자들인 그들은 일본이 한국에 가한 폭력과 수탈의 역사를 왜곡하려고 애쓰고 있다. 지난 해 나온 이영훈의 반일 종족주의란 책도 바로 그들 뉴라이트와 자민당 내 극우 세력이 지닌 논리적, 역사적 잘못을 되풀이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일부 생각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반일 종족주의라는 논리를 내세우는 세력들을 신친일파로 규정한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의 거짓을 파헤친다는 부제를 가진 신친일파란 책을 냈다. 저자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 체류 15년만인 우리나라에 귀화한 사람이다. 2011년 독도 공로상 등의 상을 수상했다. 세종대 교수이자 독도종합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책은 세 파트로 이루어졌다. 1강제징용 문제에서 드러난 노예근성’, 2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최전선 성노예 제도’, 3일제강점은 원천적으로 범법 행위였다등이다. 이영훈은 일본 우파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서 다 끝난 것을 뒤집은 이상한 판결이라 말한 201810월 말의 강제징용 한국인 피해자에 대한 한국 대법원의 확정 승소 판결을 거짓말로 규정함으로써 종주국을 능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영훈에 의하면 한국인의 정신문화는 샤머니즘이라는 반일 종족주의에 긴박(緊縛)되어 있다. 그의 전제는 종족은 이웃을 악의 종족으로 감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사카 유지 교수가 말했듯 그는 종족이 이웃을 적으로 간주하는 경우는 이유가 있다는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이영훈의 논리를 일본 극우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는 이적행위이자 노예근성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일본 극우가 그렇듯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은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끌려간 우리 노동자들을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니 왜곡하고 있다고 해야 맞겠다. 문제는 일본 정부가 우리 개인이 일본 기업에 대해 보상이나 배상을 청구한 부분에도 나서서 전범 기업들을 보호하려는 데에 있다. 바람직한 것은 기업이 판결을 지키지 않는다면 기업의 한국 내 자산을 압류해 현금화한 뒤 피해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다.

 

강제 징용 문제도 주요 관심사이지만 그 이상으로 관심을 끄는 것은 위안부 문제다. 전쟁이 남자들도 희생자로 만들지만 가장 크게 희생자로 만드는 사람들은 노약자, 여성 등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문제는 참으로 가슴 아픈 문제이기 때문이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조선인 위안부 대부분은 매춘과 관계 없는 여성들이라고 말한다. 이영훈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가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위안부를 강제 연행했음을 상당 부분 인정했음에도 위안부가 성노예였음을 부정한다.

 

이영훈은 위안부들이 전쟁 특수를 이용해 한몫의 인생을 개척한 사람들로 보며 그들이 거금을 벌었다고 주장한다. 이렇듯 이영훈은 돈을 문제의 핵심으로 시종(始終)해 끌어들이고 있다. 일본군이 업자들에게 명령해 위안부를 동원하게 했다는 사실(137 페이지)이 중요하다. 이는 위안부 동원의 책임이 일본군에게 있다는 의미다.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아시아를 백인 지배에서 해방시킨 해방전쟁을 수행했다고 주장하는 나라, 난징 대학살이나 위안부 강제연행을 부정하며 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배하면서 근대화시켰다고 주장하는 나라다.

 

사실 이것만 보아도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어떤 나라가 일본에 대해 아시아 해방전쟁을 해달라고 요청했단 말인가? 어떤 나라가 일본에게 근대화를 시켜달라고 요청했단 말인가? 일본의 행태는 직관적으로 보아도 범죄가 명백하다. 그러나 그들의 억지를 논파(論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 많이, 정확하게 역사를 알아야 한다. 사실 뉴라이트 또는 그들을 능가하는 한국의 극우 친일 인사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의아하다. 일본의 지원을 받고 호사도 누리고 욕된 것일망정 명예를 누리려 하는 것일까?

 

일본은 자신들의 범죄행위를 잘 가려주는 논리를 크게 환영했다. 20201월 출간된 일본어판 반일 종족주의38만 부 이상 팔렸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일본인들이 한국인 스스로가 노예근성으로 한국을 폄하시켰다고 크게 환영한 것이라 평한다. 물론 양식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논리가 억지이자 왜곡이라는 것을.

 

책의 하이라이트는 3일제강점은 원천적으로 범법 행위였다. 이영훈은 독도를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으로 간주한다. 이영훈은 조선 시대에는 독도에 대한 인식이 없었는데 지난 20년 사이에 급하게 반일 종족주의의 상징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지리지가 독도를 우산도라 표기했고 날씨가 맑은 날에만 보인다고 적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울릉도에서 날씨 좋을 때만 보이는 섬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독도 외에는 없다. ’세종실록지리지는 독도를 울진현 소속으로 적어놓았다.

 

숙종실록에 의하면 안용복은 독도를 조선의 우산도라고 주장하며 일본인들을 독도에서 쫓아냈다. ’숙종실록은 대마도주의 말을 빌려 두 섬(울릉도, 독도)을 조선 땅이라 적었다. 이 밖에 독도가 한국에 속한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 문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한국의 입장이 분명한데도 신친일파들은 일본 측 입장을 옹호한다고 비판하며 한국에서 일본법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결론짓는다. 최종 결론은 반드시 이뤄져야 할 신친일파 청산은 국가 존망과 연결되는 문제라는 말이다.

 

*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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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펭귄은 북극곰과 함께 살 수 없을까? - 북극과 남극의 모든 것 내인생의책 자연을 꿈꾸는 과학 1
일레인 스콧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내인생의책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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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에서 가장 춥고 가장 높고 가장 바람이 많이 부는 대륙이 남극 대륙이다. 남극은 대륙이지만 북극은 여러 대륙의 해안에 둘러싸인 얼어붙은 바다다.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와, 히말라야가 있는 아시아 대륙의 평균 높이가 884미터인 데 비해 남극 대륙은 평균 2500미터다.

 

남극 대륙은 바다에 둘러싸여 고립된 거대한 얼음 땅이다. 극지방에는 동쪽도 서쪽도 없이 남극에서는 항상 북쪽을 보게 되고 북극에서는 항상 남쪽을 보게 된다. 극지방에서는 겨울과 여름 밖에 없다. 적도에서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여름 낮 시간이 길어진다.

 

북극(북위 66.5)에 이르면 한밤에 해가 뜨는 땅이 나타난다. 하지에는 아예 해가 지지 않는다. 북극점에서는 6개월 내내 해가 지지 않는다. 남극은 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적도에서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낮의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남위 66.5도인 남극권에 이르면 해는 언제까지나 지평선 아래에 가라앉아 있고 대륙은 어둠에 잠겨 있다.

 

1600년 윌리엄 길버트란 과학자가 지구 자체가 거대한 자석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지구는 막대자석이라기보다 전자석에 가깝다. 지구 중심에는 철과 니켈로 이루어진 단단한 내핵이 있다. 내핵의 바깥쪽인 외핵은 너무 뜨거워 액체 상태로 있다. 여기서 지구의 자성(磁性)이 생겨난다.

 

극지방의 과학자들은 태양풍과 지구 대기의 관계, 지구와 태양의 관계를 알아내기 위해 오로라를 연구한다. 오로라는 태양풍과 함께 날아온 대전입자(플라스마)가 지구 대기의 공기 분자와 충돌하면서 다채로운 빛을 발생시키는 현상이다.

 

오늘날 남극과 북극에는 탐험가보다 과학자들이 더 많이 있다. 북극 지방에는 이누이트와 바이킹이 정착해 살았지만 남극대륙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인류가 세계 곳곳으로 이주하기 전 이미 남극 대륙은 꽁꽁 얼어 있었고 변덕스러운 바다에 고립되었다. 동물들은 달랐다.

 

펭귄은 남반구에만 산다. 현재 펭귄이 서식하는 지역 가운데 가장 북쪽이 갈라파고스 제도(諸島). 갈라파고스 제도는 적도에 가깝고 남극에서 832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남아프리카에도 펭귄이 산다. 펭귄들은 자신들을 잡아먹던 공룡, 악어 등이 기후에 적응하지 못하고 멸종하자 날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펭귄은 작은 물고기와 크릴(작은 새우)처럼 생긴 생물들을 잡아먹고 범고래와 바다표범 같은 새로운 적들을 경계하는 법들을 배웠다. 유럽의 탐험가들은 큰바다오리를 펭귄이라 블렀는데 그것은 핀 윙(핀처럼 작은 날개)이라는 뜻이었다. 훗날 탐험가들은 남극대륙에서 그와 비슷하게 생긴 날개 없는 새를 펭귄이라 불렀다.

 

북극은 남극보다 기후가 온화해서 많은 동물들이 산다. 북극곰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는 바다표범이다. 북극곰은 동면하지 않는다. 북극곰은 먹이를 구하기 힘들어지면 걸어다니거나 사냥할 때조차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심장 박동이 느려진다. 과학자들은 북극곰의 이런 상태를 걸어다니는 동면이라 한다.

 

만약 북극곰이 남극대륙으로 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남극의 추위에서 꿋꿋이 살아남을 것이다. 잡아먹을 펭귄도 많다. 하지만 북극곰 암컷이 새끼를 키우기에 적당한 굴을 팔 곳이 없다. 남극대륙의 추위는 북극의 겨울보다 훨씬 혹독하여 새끼 곰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아남기가 힘들 것이다.

 

물론 북극곰을 남극대륙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새로운 종의 동물을 남극에 데려오지 못하게 하는 남극 조약 때문이다. 지리적으로 북극점과 남극점은 지구상에서 가장 명확한 장소다. 북극점은 북위 90, 남극점은 남위 90도에 위치한다. 두 극점은 광대한 얼음 벌판에 들러싸여 있다.

 

여름철 극지방은 해가 지지 않는다. 해는 하늘에서 수평 궤도를 그리며 돈다. 누구도 북극점에 계속 서 있을 수 없다. 북극점은 사실 북극해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이 얼어붙은 바다 위에 서 있을 수는 있지만 발밑 얼음 덩어리가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다.

 

북극점은 얼음이 떠다니는 바다에 있기 때문에 표지가 없지만 남극점은 표지가 있다. 하지만 남극점의 표지는 해마다 바꾸어야 한다. 남극점 표지는 하루에 2.8센티미터 움직이는 빙하에 못 박혀 있다. 해마다 남극점의 새 위치를 표시하는 행사가 열린다.

 

북극해에는 높이 솟아 있는 데번이라는 섬이 있다. NASA가 호턴 화성 계획이라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 섬에는 2300만년 전에 생긴 운석 구덩이가 있다. 과학자들은 데번 섬의 흙과 암석들이 화성과 비슷할 것이라 생각한다. 즉 화성이 어떻게 현재 상태가 되었는지 알기 위해 데번 섬의 암석 토양을 연구하는 것이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작가인 아서 클라크의 이름을 딴 아서 클라크 화성 온실도 있다.

 

북극에는 40만년 동안 얼음 밑에 고스란히 묻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보스톡 호가 있다. 북극의 만년설 위에 생긴 물웅덩이는 열을 흡수한다. 얼음은 열을 반사하지만 물은 열을 흡수한다.

 

이렇게 해서 만년설은 더욱 빠르게 녹는다. 물은 만년설을 갈라지게 한다. 결국 얼음장 전체가 떨어져 나가며 빙하분리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현상으로 지구 대기는 더욱 많은 습기를 품게 되고 지구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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