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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의 역사 - 한반도 정전체제와 비무장지대
한모니까 지음 / 돌베개 / 2023년 11월
평점 :
- 대한민국 평화기행'의 공저자 중 한 분인 한모니까님의 'DMZ의 역사'. 저자에 의하면 DMZ를 만들자고 제안한 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이 아닌 영국이었다. 미국 다음으로 한반도에 달려온 영국의 내각과 참모부는 중국군이 참전한 1950년 11월 확전을 막을 방안의 하나로 북위 40도선 정도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완충지대를 만들고 이 지대에 공산군이 재침략을 위해 집결하면 공중폭격으로 분쇄하자는 의견을 냈다. 영국 외무부가 구상한 완충지대 범위는 정주~흥남 라인에서 한만(韓滿) 국경까지였다.(1980년대까지 한만국경이라 불렸고 그 이후 북중(북한 중국) 국경이라 불린다.)
'대한민국 평화기행'의 공저자 중 한 분인 한모니까님의 'DMZ의 역사'. 저자에 의하면 DMZ를 만들자고 제안한 나라는 미국이나 중국이 아닌 영국이었다. 미국 다음으로 한반도에 달려온 영국의 내각과 참모부는 중국군이 참전한 1950년 11월 확전을 막을 방안의 하나로 북위 40도선 정도에서 진격을 중지하고 완충지대를 만들고 이 지대에 공산군이 재침략을 위해 집결하면 공중폭격으로 분쇄하자는 의견을 냈다. 영국 외무부가 구상한 완충지대 범위는 정주~흥남 라인에서 한만(韓滿) 국경까지였다.(1980년대까지 한만국경이라 불렸고 그 이후 북중(북한 중국) 국경이라 불린다.)
영국은 연합국이 중국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고 미국은 군사적 우월을 자신했다. 미국과 한국은 비무장지대를 만드는 것은 자유진영의 패배라고 강력 반대했으나 대세는 설치쪽으로 흘러갔다. 미국이 비무장지대안을 검토한 것은 자체적으로 비무장지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유엔의 확전 우려와 비무장지대에 대한 지지 분위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군사 전문가 마샬 콘월은 정치적 경계선과 그에 평행하는 두 곳의 중립지대를 설정해 거기에 무기와 군대를 제한하거나 금지시키는 원칙이 필요하다고 하며 그런 비무장지대를 지리적 군축이라 표현했다.
1950년 10월 중국이 참전했고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은 핵무기 사용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영국, 프랑스, 캐나다, 인도 등은 핵 사용 및 확전 반대를 표명했다. 12월 중국군은 철수하는 미8군의 뒤를 따라 38선까지 내려왔다. 군사적으로 전황이 유리하던 중국은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통해 정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및 서유럽 국들과 인식을 같이했다. 4km 폭의 비무장지대를 제안한 것은 공산군 측이었다. 현재의 전선에서 양측이 2km씩 후퇴하고 그 사이의 지대를 비무장지대로 둘 것을 제안한 것이다.
양측은 처음 비무장지대 가 32km(유엔군) 또는 20km(공산군)는 되어야 한다고 보았지만 방어의 관리와 효율을 고려하여 폭을 좁혀갔다. 양측은 모두 개성을 차지하고자 했다. 개성 문제는 공산군 측이 38선이 아니라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하는 문제를 수용하게 된 결정적 이유였다. 38선을 고수하면 개성을 남측에 돌려주거나 최소한 비무장지대 안에 두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군사분계선 표식물은 7피트 높이의 금속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말뚝 형태였다. 군사분계선은 말뚝 형태로만 표시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흔히 군사분계선은 선이 아니라 1292개의 점이라고 알려졌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300-500미터 간격으로 표식물이 있다고 해도 월경의 가능성은 충분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표식물과 표식물을 연결하는 가는 선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물론 이때의 선은 오늘날 철책처럼 공고하게 전면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말뚝과 말뚝을 단순히 연결하는 정도였다. 더구나 말뚝과 말뚝을 연결하는 선도 관리가 되지 않으면서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던 선은 없어지고 말뚝도 훼손되어 갔다.
군사분계선과 더불어 식별 가능한 비무장지대 남북 경계선도 설치했다. 표지판 형태의 접근 경고용 선이었다. 성근 철조망을 잇는 비무장지대 경계선이 곳곳에 표시되었다. 북. 중측이 주장한 비무장지대 내 질서 유지를 위한 민정 경찰 배치가 받아들여졌다. 민정 경찰이 무기를 휴대할 수 있게 되자 후에 이는 비무장지대 무장화의 시작이 되었다. 북한은 비무장지대에 지하갱도(땅굴)를 만들었다. 1950년대 말 미국의 신형 무기(특히 핵무기) 도입 때문이었다. 북한의 지하갱도는 1974년 연천, 1975년 철원, 1978년 파주, 1990년 양구 등에서 발견되었다.
1960년대 북측 비무장지대에서 땅굴과 같은 지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면 남측 비무장지대는 감시초소 형태의 요새화가 추진되었다. 경계초소 또는 감시초소가 등장한 것인데 이는 관측용인 전초(op; outpost)였다. 일부 전초가 군사분계선에 가깝게 나아가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전진배치된 전초가 전진 관측소로 분류되고 군인들이 주둔하면서 경계근무를 하는 초소가 되었다. 그리고 비무장지대 남쪽 경계 즉 남방한계선상에 있는 전초는 관측소(observation post; OPs.)라 불렸다. 이 과정에서 특히 전진 관측소의 요새화가 진행되었다. 이 전진 관측소가 경계초소(guard post; GP)다.
북측은 1963-1965년 군사분계선 북쪽의 자신들의 초소들을 광범위하게 연결시키는 요새화된 진지를 구축하고 그것을 식목(植木)으로 위장했다. 남측은 경계 강화를 위해 진지를 구축했다. 1960년대 후반 비무장지대가 무장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철책의 설치였다. 이전에도 남북방한계선에 철조망이나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끊기거나 제 기능을 하지 못하던 목책이나 철조망을 포함하여 비무장지대에서는 1967년 후반부터 대대적인 철책 교체 작업이 진행되었다. 지뢰, 트립 플레이와 부비트랩 등으로 강화된 100미터 폭의 이중 철조망이 설치된 것이다.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철책 설치와 같은 시기의 일이다. 철책 공사는 1968년 1, 21 사태 이후 피치를 올려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철책 구축과 함께 대침투체계의 하나로 초목 통제 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 고엽제가 살포되었다. 군 경계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철책 주변의 시야를 가리는 풀과 나무를 제거한 곳을 불모지 지역이라 한다. 비무장지대의 자연생태는 군사적 통제 덕분에 확보되었지만 동시에 이를 훼손하는 군사작전 또한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1966년 비무장지대 생태 연구는 스미스소니언 생태 프로그램의 일부로서 미 공군과학연구실의 지원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철책선 주변 불모지는 사계청소(射界淸掃)라는 이름의 군사적전의 결과다. 비무장지대의 무성한 식물은 자연생태 회복의 상징적 존재이지만 군사작전의 측면에서 보면 시야를 방해하는 요소다. 비무장지대 안에는 두 개의 마을만이 존재한다. 남측의 대성동, 북측의 기정동이다. 대성동과 기정동은 장단(長湍) 사천강(沙川江)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인접한 마을이다. 대성동은 마을에 있는 대성(臺城; 봉화대 주위에 들러 쌓은 성)에서 유래한 이름이고 기정동(機井洞)이란 한자 표기에서 알 수 있듯 옛날 기계(방아)로 물을 퍼 올린 마을이란 의미다. 행정상 대성동은 경기도 장단군 군내면에 속했고 기정동은 대성군 동면사무소가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다. 두 마을 모두 사천강 줄기를 수원으로 이용한 논이 발달했고 서울보다는 개성 권역에 가까운 경제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었다. 대성동 주민의 법적 지위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라 유엔군 사령관 통제하의 주민이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냉전이 응축된 공간이자 냉전의 전형적인 양상이 담긴 공간이다. 이곳은 세계 냉전의 형성기에 벌어진 열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것도 중국의 참전으로 한국전쟁의 양상이 한. 중국 국경을 넘어 확전의 조짐을 보였을 때 서방의 강대국들이 전쟁을 한반도에 국한시키기 위해 구상한 것이었다. 70년전에는 정전(停戰)의 조건으로서 정전을 유지하기 위해서 비무장지대의 역할이 필요했다. 이제는 평화의 조건이 되고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 될 비무장지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