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상식을 뒤엎는 돈의 심리학 - 돈을 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
저우신위에 지음, 박진희 옮김 / 미디어숲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돈은 일상의 좋은 일과는 20퍼센트만 관계하고 비극과는 80퍼센트 관계한다고 한다. 좋은 일은 대부분 돈과 무관하게 일어나지만 슬픈 일은 대부분 돈 때문에 일어난다는 의미다. 돈은 예술과도 밀접하다. 후원 제도가 그것이다. ’상식을 뒤엎는 돈의 심리학‘은 돈을 보는 관점이 그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저자인 저우신위에는 심리학자가 아니라 경영학자다. 그에 의하면 돈은 교환의 매개 이상이다. 거기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다. 저자는 그 사람을 알려면 그의 돈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라는 경제학자 머턴 밀러의 말을 상기시킨다.

 

책은 1장 돈에도 감정이 있다; 돈과 인간 심리, 2장 돈을 알면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보인다; 돈과 사회생활, 3장 합리적 소비일까, 함정에 빠진 걸까; 돈과 소비 행위, 4장 모든 일은 돈과 관련 있다.; 돈과 행복 등으로 구성되었다. 나와 돈 사이의 심리적 거리, 돈은 죽음의 공포도 물리친다, 돈이 아닌 시간을 기부하는 즐거움, 왜 바닥의 동전은 줍지 않고 할인쿠폰은 챙길까?

 

비싼 것이 좋다는 말의 진실, 이익보다 손실을 더 크게 받아들이는 이유, 시간은 금이 아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물건보다는 경험을 사라, 착시 현상이 만든 부자들의 행복, 개천에서 용 나오던 시절은 이제 끝이 난 걸까? 부자와 빈자 중 누가 더 인색할까, 돈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기적이 된다 등의 챕터가 흥미를 끈다. 소비를 제어하지 못하면 자유를 잃는다,

 

소비가 주는 즐거움은 잠깐이다 등의 말을 기본으로 하고 넘어가야겠다. 하우스 머니 효과라는 것이 있다. 도박에서 얻은 돈을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남의 돈을 얻은 것이라고 느껴 그 돈을 다시 도박에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2014년 메릴랜드 로욜라 대학교의 트럼프 연구진이 이와 같은 효과를 발견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돈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더욱 모험적이 되고 자신의 돈으로 결정을 내릴 때는 더 보수적이 되는 것을 말한다.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빈부격차가 큰 사회일수록 신분을 드러내는 상품에 대한 관심도가 올라간다. 당연히 이는 가난한 사람들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저자는 사람은 돈 때문에 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으로 인해 변한다고 말한다. 불황일수록 립스틱 판매가 늘어나는 현상을 립스틱 경제 효과라고 한다. 이는 여성에게 아름다움이란 상대를 유혹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성공을 돕는 도구로 인식된다는 의미다.

 

사람들에게는 심리계좌가 있다. 이는 돈을 분류하는 마음 속 서랍이다. 돈을 얻게 된 계기가 돈의 심리계좌를 정한다. 돈의 용도도 심리계좌를 정한다. 돈을 저장하는 방식도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사치품에 실용성이 가미된 최강의 유혹이란 말이 있다. 오래전부터 동양에는 사치를 멀리하고 근검절약을 추구하는 문화가 존재했다.

 

소비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을 심리적 리스크라고 한다. 저자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불행해진다고 말한다. 연구에 따르면 시간을 돈으로 환산하면 가족이나 친구 등과 보내는 시간을 줄인다.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에도 인색하게 한다.

 

저자는 경험은 시간을 꽃으로 만들고, 경험은 비교가 되지 않고, 인생은 무엇을 했는지로 정의된다고 말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난한 집 아이와 부유한 집 아이의 언어 능력과 기억력에는 차이가 난다. 부(富)는 뇌구조도 바꾼다. 가난한 사람일수록 사회적 관계에 의지해 돈을 벌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동정심을 더 느낀다고 한다.

 

부자들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능력에 따라 수익이 달라지기 때문에 자신의 욕망과 행복을 중요시한다. 관계, 심리학, 상식, 그리고 상식 초월의 기제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 ’상식을 뒤엎는 돈의 심리학‘이다. 일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낭만 고고학
김선 지음 / 홍림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발굴도 하고 보고서도 쓰고 논문도 발표하는 고고학자의 책이다. 석사 논문은 신석기를 썼고 사찰이나 폐사지를 중심으로 발굴을 하는 저자다. 본문에 나오는 원주 부론면의 법천사지 이야기를 접하고 페이스북에 내가 월 1회 다녀오는 원주 문막의 한 기도원 이야기를 했더니 “남한강 따라 폐사지 답사 코스가 참 좋습니다~”란 댓글을 달아주신 분이다.

 

낭만 고고학이란 제목과 달리 낭만 고고학은 없다는 챕터가 있는 책이다. ‘연천 전곡리 유원지를 아시나요?‘란 챕터가 포함(첫 번째 챕터)된 책이어서 기대를 했으나 전문 고고학자가 아니어도 알 수 있는 내용이란 점에 적당량의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챕터들은 전문적인 내용을 꽤 담고 있어서 좋다.

 

전문적인 내용이란 “땅을 파는 고고학자에게 도시의 땅은 오염된 현장이다. 어느 지층이든 시대를 품고 있지만 한 나라의 수도는 그것에 더해 더 많은 시간과 역사가 쌓이고 덮이면서 오염된 채로 발굴자에게 노출된다.”(33 페이지) 같은 구절이다. 저자는 자신을 답사로 다져진 인생(70 페이지)이라고 설명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고학 즉 발굴이란 나라에서 자격을 부여한 사람들이 허가된 장소에서 진행하는 조사다.(92 페이지) 저자에 의하면 무덤 주변에 막걸리를 뿌리는 것은 땅을 파기 전에 지신에게 “우리가 땅을 열겠습니다.”라고 인사드리는 것과 같다. 저자가 답사를 다닐 때 주로 주의 깊게 보는 것 중 하나는 배수 체계와 우물이다.

 

저자는 예술성이 뛰어난 자료만이 아니라 깨진 토기 조각이나 자기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고고학이라고 말한다. 저자에 의하면 고고학으로 뜬 인디아나 존스는 문화재계 사람들에게는 보물 사냥꾼으로 불리는 사람들이다. 둥근 크라운에 챙이 아래로 처진 토피(topee) 모자는 유럽 식민주의의 물리적 또는 문화적 첨병이었던 군대나 탐험가 등이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서 활동할 때 썼던 모자다.

 

2018년 트럼프 부인이 케냐, 이집트 등의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 이 모자를 썼다. 당시 영국 가디언지가 이를 비판하는 글을 실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었다. 저자는 AI 세상이 와도 고고학은 살아남을 것이라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근거는 고고학은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이 50대 50을 차지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용산으로 이전하는 현장에 있었다. 당시 엄청난 규모의 유물을 포장, 해포(포장 풀기),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을 본 덕에 어느 박물관을 가든 그곳의 큰 그림을 보는 안목 또는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시선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자신의 신체 사이클은 도시 및 발굴 현장에 맞게 시스템화된 지 오래다.(발굴 현장은 화장실이 없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고고학은 극한 직업이라 말한다. 저자는 공리(공유와 이해)라는 소규모 공부 모임에도 참여한다. 미술사, 건축사, 조경학, 과학사 사진학을 전공한 분들과 함께 하는 모임이다.

 

저자는 고고학자들이 고단한 가운데서도 일련의 작업을 이어가는 이유는 스트레스가 주는 긴장을 즐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사찰 고고학, 건물지 고고학 개설서는 아무래도 자신이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책을 통해 저자가 열심히 연구하고 발굴하고 공부하고 글 쓰는 분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배운 것이 많다. 저자가 관계하는 고고학에 대해 쓴 것처럼 해설사로서 그런 글을 써야 한다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하여준 책이기도 하다. 다른 고고학 책들을 읽어야겠다. 아니 저자의 다음 책이 벌써 기다려진다. 일독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챗GPT, 질문이 돈이 되는 세상 - 이미 시작된 AI의 미래와 생존 전략
전상훈.최서연 지음 / 미디어숲 / 202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챗 GPT 시대가 열린 것일까? 2022년 12월 이후. 생성 인공 지능(AI)의 시대라 할 만한가. Generative Pre-trained Transformer의 이니셜인 GPT는 자가학습'하여 답변을 '생성'하고 대량의 데이터와 맥락을 처리할 수 있는 트랜스포머(변환기) 기술을 의미한다. 책은 말을 주고받을 수(대화할 수) 있다는 의미다.

 

1인 1 AI 시대가 오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회 변화에 맞춰 적응해야 하므로 챗 GPT의 혁신과 변화를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챗 GPT는 기존의 모든 아날로그 및 디지털 시스템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것이다. 저자들은 7년 뒤인 2030년 모든 것이 변할 것이라 단언한다.

 

2016년에 상상한 일들이 7년 후인 2023년 상당 부분 현실이 되었듯 다시 7년 후인 2030년에 예상하는 모든 일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라 말하는 것이다.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슈로더 보고서에 의하면 2030년 은행, 교통, 유틸리티 등을 거의 모두 또는 전적으로 정부가 소유하거나 통제하고, 투자는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플랫폼 기업의 독점적인 부의 편중을 보완하기 위해 기본소득(UBI; universal basic income 또는 unconditional basic income)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챗 GPT가 빠르게 발전하면 그것을 운영할 수 있는 1%의 자본가 및 핵심 기술자와 이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99%의 사람들로 나뉠 것이다. 대안(代案)이 마련되어야 한다.

 

챗 GPT는 지식 노동자의 일자리까지 침범한다. 그럼에도 가상 공간 디자이너, 윤리 기술 변호사, 디지털 문화해설가, 프리랜서 바이오해커, 사물 인터넷 데이터 크리에이티브, 우주 여행 가이드, 개인 콘텐츠 제작자, 생태복원 전략가, 지속가능한 전력 혁신가, 인체 디자이너 등의 직업이 새로 부상할 것이다. 긱(gig) 경제라는 말이 나온다. 긱은 임시로 하는 일을 의미한다.

 

전통적 개념의 임금 체계가 무너지고 소득을 바로 현금으로 지급하는 인스턴트 급여 방식의 경제를 말한다. 미래가 원하는 인재상은 다르다. 창의성 계발의 핵심은 질문이다. 저자들은 챗 GPT 시대를 살려면 트레일블레이저가 되라고 말한다. 개척자, 선구자 등이 되라는 의미다. 이제 세상은 챗 GPT를 활용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나뉠 것이다.

 

미래를 위해 교육도 바꾸어야 한다. 지식 기반 교육에서 창의성, 문제해결 능력, 글로벌 역량 강화 중심으로 개편되어야 한다. 물론 영어 실력은 더욱 중요해진다. 챗 GPT 언어 데이터의 92%가 영어다. AI와 차별화되는 인간의 상상력을 키우는 것으로 사색, 토론, 휴식을 들 수 있다.

 

저자들은 챗 GPT가 정보를 찾아 준다고 해서, 우리가 지식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바보가 될 것이라 단정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암기력이 아닌 다른 능력으로 인정받는 시대를 맞이했다. 챗 GPT를 이용해 여러 정보를 융합하는 능력이 실용적 지식이자 미래 AI 시대의 유일 생존 전략이다. 중요한 것은 AI 윤리 교육이다.

 

도전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AI 반도체는 국제 관계를 바꾸는 트리거다. 챗 GPT는 양날의 칼이다. 주식 등 투자나 중요 결정 등 개인의 판단력이 많이 필요한 분야에서는 사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저작권 문제는 챗 GPT의 그늘이다. 저자들에 의하면 챗 GPT 시대는 기회이자 도전이다. 변화의 맨 앞에 서라. 이것이 결론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생명을 묻다 -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
정우현 지음 / 이른비 / 202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과학이 놓치고 있는 생명에 대한 15가지 질문이라는 부제를 가진 책이다. 생명은 메이지 유신 때 처음 만들어진 단어다. 그 이전까지 동아시아 문화권에 생(生)과 명(命)이란 단어는 있었지만 생명이란 단어는 없었다.

 

오직 인간만이 정신을 가지며 동물은 영혼 없이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자동인형에 불과하다는 기계론적 생명관을 가진 데카르트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흥미를 부른다. 데카르트는 어린 시절 앙리 4세의 궁정을 방문해 정원에서 목욕하다 사람들이 쳐다보면 숨는 다이애나 여신과 삼지창을 휘두르며 따라오는 포세이돈 자동인형을 보고 모든 생명체가 사실은 기계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36 페이지)

 

데카르트는 모든 생명체는 부품으로 만들어진 기계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개념이 환원주의다. 전체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품들을 분리해서 연구하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를 말한다. 저자는 생명을 하나의 기계로 바라보는 관점이 오늘날까지 이토록 오래 이어져왔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면이 있다고 말한다. 기계는 스스로 자신을 복제해 후손을 만들 수 없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생명이란 자신을 잘 보존하고 복제를 통해 증식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의도를 가진 존재라고 전제한 뒤 우연적인 존재가 어떻게 의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묻는다. 다윈의 진화 이론을 발전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영국의 진화생물학자 홀데인은 목적론 없이 생명을 이해할 수 있는 생물학자는 사실상 없다고 말하며 생물학자들에게 목적론은 내연 관계의 애인과 같은데 그것은 목적론과 함께하면서도 그것을 공공장소에서 보여주고 싶어하는 생물학자는 없을 테니까라고 말했다.

 

일본의 분자생물학자 후쿠오카 신이치는 독일의 생화학자 루돌프 쇤하이머가 행한 실험을 소개했다. 쥐에게 일반 질소원자보다 약간 무거운 중(重) 질소 동위원소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여 그 무거운 질소원자들이 어디로 가는지 추적한 실험이다. 다 자란 성체 쥐도 섭취한 음식의 1/3만 배설되고 2/3는 몸속 이곳저곳으로 들어가 남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새로 흡수한 원소들이 오래된 원소를 대신해 자리를 바꾸면서 몸을 구성하는 새로운 입자로 사용된 것이다.

 

신이치는 이를 보고 생명이란 동적평형 상태에 있는 입자의 끊임없는 흐름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몸은 전체적으로 일정한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지만 세부 입자는 부단히 새롭게 바뀌는 것이다. 이는 높은 수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저자는 생명을, 스스로를 항상 일정하게 유지하고자 하는 성질 즉 항상성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파괴하고 재설계하는 동적평형 상태로 정의한다. 생명은 구조나 형태라기보다 현상 또는 상태에 더 가깝다는 것이다.(75 페이지)

 

줄리언 제인스의 ‘의식의 기원’에 의하면 소마는 원래 시신(屍身)을 의미하는 단어였다. 이 단어가 신체를 의미하게 된 것은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생명은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의미하는 단어였다는 의미다. 알프레드 월리스는 다윈과 달리 뇌에서 의식이 만들어지는 경로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월리스, 다윈 공히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를 주장했으나 월리스는 인간은 다른 생물들과 달리 자연선택에 의해서만 진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물질과 정보로 치환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는 사실이 자명하다면 영생은 무엇을 위함이며 전지전능함이 다 무슨 소용일까라고 묻는다.(95 페이지) 저자는 오늘날 과학이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인문학이나 예술 등 다른 분야 학문과 통합적으로 교류하려 노력하면서도 물질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면 이것은 어불성설이지 않을까라고 말한다.

 

저자는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나오는 패러다임 개념으로 오늘날 과학계의 지배적 경향에 이의를 제기한다. 오늘날 과학계를 지배하는 듯 보이는 물질적 생명관은 그것이 생명을 설명하는 최고의 길이며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추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급격하게 발전된 현대 생명공학 기술에 힘입어 유전자와 뇌를 중심으로 한 물질적 패러다임이 유행했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이란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문제 해법에 관한 특정 시대 과학자 집단의 공통된 이해를 가리키는 말이다.(97 페이지)

 

저자가 보는 현대과학은 환원주의적 생명관에 사로잡혔다. 저자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는 것이야말로 과학이 할 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닭을 냄비에 넣고 끓이면 닭고기 수프가 만들어질 수 있겠지만 지금껏 닭고기 수프를 냄비에 넣고 끓여서 닭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는 낭보가 들려온 적은 없다고 말한다.

 

DNA 이중 나선 모형은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그것은 실제 유전자의 구조를 시각적으로 단순화한 모형에 불과하다. 짤막한 DNA 조각들이 하나둘씩 모이면 점점 더 긴 DNA가 쉽게 조립되어 만들어질 수 있다든가 DNA 이중가닥은 저절로 자기복제가 가능하다든가 연약한 수소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는 염기들이 단백질의 도움 없이도 세포 내에서 쉽게 열리고 닫히며 작동할 수 있다든가 하는 심각한 오해를 초래할 수 있다.

 

이중나선 구조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혼자서는 일하지 못한다. 유전자가 그 속에 담긴 정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단백질이 있어야 한다. 어느 것 하나가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가 작동하려면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해야만 한다. DNA는 특정 단백질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자신의 정보를 가진 단백질을 만들 수 없고, 단백질은 자신을 암호화하는 특수한 DNA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는 스스로 생성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그뿐 아니다. DNA로부터 정확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려면 또 하나의 중요한 존재인 RNA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리보솜은 DNA에 새겨진 암호를 번역해 단백질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고분자 복합체다. 이것은 생명체마다 매우 잘 보존되어 있어야 할 거대한 RNA 분자가 없이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 더구나 이들이 서로를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완벽히 작용해야 한다.

 

생명이 완벽해서 결코 돌연변이를 허용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보는 지금과 같은 세상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생물학에 진화라는 용어를 도입한 사람은 스위스의 박물학자 샤를 보네다. 그는 ‘종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종은 불변한다.’고 주장했다. 의아하게 들리는 부분인데 이는 애초 진화란 개념이 미리 정해져 있는 어떤 현상이나 사실이 드러나거나 성취되는 것을 뜻하기에 드는 의문이다.

 

진화란 말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 의미가 배아 상태에서 일어나는 신체 각 기관의 발생이란 의미와 더 가까웠다. 다윈은 진화라는 말을 쓰기를 꺼렸다. ‘종의 기원’에 이 말이 나온 것은 초판이 나온 지 13년이 지난 6판에서였다. 현대 유전학의 지원사격을 받은 다윈의 진화론을 신다윈주의이론이라 한다. 신다윈주의는 1) 진화는 실제 일어난다. 2) 진화에 의한 변종은 점진적인 유전적 변화를 통해 일어난다. 3) 생명의 새로운 형태는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나는 것처럼 하나의 계통이 둘 또는 그 이상으로 갈라짐으로써 생긴다. 4) 진화는 대부분 자연선택을 통해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 모든 주장이 언제나 옳다고 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이를 하나하나 입증할 증거들을 차곡차곡 손에 넣어왔다. 우리는 흔히 생명이 있기 전에 자연환경이란 것이 먼저 존재한다고 가정하지만 실은 생명이 없다면 환경이라는 개념도 있을 수 없다. 뜨거움, 습함, 어두움, 시끄러움 같은 개념들은 그것을 인지하고 측정할 감각기관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오로지 생명만이 환경을 인식하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생명이 진화한 환경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일방적이고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한 생물 집단의 진화는 환경을 적극적으로 변화시키고 이어 이와 관련된 다른 생물 집단의 진화를 유발할 수 있다. 이를 공진화라 한다. 훗날 다윈의 이론을 대체할 더 강력한 증거를 제시한다 하더라도 생물이 진화한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진화는 사실이다. 진화란 생물에게만 적용할 수 있는 개념이다. 그것은 변이와 선택에 의해 결정되는 문제다.

 

진화를 사상, 인간의 심리, 사회현상 등에 폭넓게 적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특히 더 신중해야 한다. 유전학자 스티브 존스는 “진화란 어디로 가게 될지도 모른 채 미래를 향해 몸을 뒤로 돌려 (거꾸로) 걷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진화에 대한 믿음이 신에 대한 믿음과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가 증명되었다고 해서 신이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연의 진화는 창조의 개념과 충돌하지 않는다. 그것은 진화가 일어나려면 존재들이 창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진화는 과학이지만 최초의 생명에 대한 이론은 추측이자 믿음이다. 저자는 말한다. 과학이 논리적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과학에 논리의 옷을 입혀놓았기 때문이라고. 만유인력의 법칙, 케플러의 법칙, 열역학 법칙, 질량 보존의 법칙 등 무생물로 된 자연에는 법칙이 많지만 생명에는 멘델의 유전 법칙 외에는 법칙이 없다.(멘델의 유전법칙은 법칙이라기에는 너무 예외적이다. 그가 이렇게 단순하고 깔끔한 법칙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운이 좋게 완두콩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마음에 드는 결과만 일부러 선별했기 때문이다. 우열의 법칙, 분리의 법칙, 독립의 법칙으로 구성된 것이 멘델의 유전 법칙이다.)

 

일본 유전학회는 최근 우성과 열성을 각각 현성(顯性; 드러난 성질), 잠성(潛性; 잠재된 성질)으로 새롭게 표현하기로 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에 나오는 우성과 열성은 유전자 자체의 우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형질로 나타나는데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나뉘는 성질이다. 과학혁명기 이래 19세기까지 과학법칙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20세기에는 법칙이라 부를 만한 새 발견들이 부쩍 줄었다. 20세기에는 상대성이론, 불확정성원리, 파울리의 배타 원리 등 법칙이 아닌 이론 또는 원리가 자주 쓰이고 있다.

 

물리학과 화학 법칙은 전 우주 차원에서 성립하지만 생물학 법칙은 지구 위 생명에 국한될 가능성이 있다. 생물학에는 패턴을 벗어나는 예외 사례가 너무 많다. 유전자 재조합으로 인해 어떤 자손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유성생식의 불확실성은 역설적으로 환경의 불리한 변화와 유해한 병균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면역학적 다양성을 만드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성이란 주어진 환경에 더 잘 적응하고자 짜낸 생명의 고육지책이었다.

 

대다수 질병은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유전자가 관계하여 일어난다. 유전자 하나의 작동 여부에 따라 형질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수정 후 8주를 경계로 배아(embryo)에서 태아(fetus)로 이름이 바뀐다. 배아란 신체 각 기관으로 발달을 시작하지 않은, 미분화 상태의 세포 덩어리를 가리킨다. 물리학이나 화학에는 정상, 비정상이란 개념이 없다. 이런 구분은 오직 생명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사람들이 신체 이상에 대해 말하고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이 통계적 일탈을 보일 때가 아니다. 해롭거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거나 고통스럽거나 두려움이 생겨날 때다. 생명은 끊임없이 변화(진화)한다. 저자는 세계를 만나고 인식한 것은 오로지 책을 통해서였다고 말한 사르트르를 언급한다. 책을 읽으며 세상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사물의 직접적인 인식보다 문자를 통해 사색된 관념이 훨씬 더 현실적이었다는 의미다.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객관적 세계란 과학이 만들어낸 허상이라고 지적했다. 세상은 생명체가 감각하는 구성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원자를 쪼개 알아낸 양성자, 중성자, 전자라는 존재, 그리고 그들을 더 쪼개 발견한 십여 개의 소립자들, 그들의 존재를 아무리 다시 짜맞춰 보아도 물질의 성질은 이해되지 않고 세상의 모습은 포착되지 않는다. 소립자들 사이의 빈 공간은 우주만큼이나 크고 허무하다. 무량(無量)의 입자들이 만드는 공간의 의미를 생각하다 보면 존재의 무상함마저 감돈다.

 

오늘날 환원주의의 믿음을 따라 분자 수준에서 생명의 신비를 읽어내는 연구방법은 사실상 생물학 고유의 방식이라기보다 변형된 방식의 고전 물리학이라 할 수 있다. 법칙이란 것에 얽매이기에는 생명은 너무 경이롭다. 사람의 유전자 수는 2만개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염색체는 23쌍으로 되어 있고 다른 모든 유인원의 염색체는 24쌍이다. 그래서(염색체 수가 다르기 때문에) 인간과 유인원은 공통의 자손을 낳을 수 없다. 낳는다 해도 말과 당나귀 사이에서 나온 노새처럼 생식력이 없을 것이다.

 

굴드는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생물학적 결정론을 만들어내는 서구의 뿌리 깊은 네 가지 철학적 오류를 들었다. 환원주의, 물화, 이분법, 계층화가 그것들이다. 환원주의는 복잡한 현상을 최소한의 결정론적 요소로 환원해 분석하는 것이고, 물화는 추상적인 개념을 정량적인 물질로 설명하려는 것이고, 이분법은 연속적인 실체를 엄격히 분리하는 것이고, 계층화는 모든 가치를 서열화하려는 자세를 의미한다. 인간을 만드는 것이 본성인지 양육인지 하는 논쟁은 네 가지 오류에 모두 관계된다.

 

르원틴은 3중 나선이란 말을 썼다. 2개는 선천적이고 유전적인 요소고 나머지 한 개는 환경으로 통칭되는 비유전적 요소다. 일반 심리학과 달리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생물학적인 요인을 먼저 찾아내려 노력하는 것이 사회생물학이다. 진화심리학은 여기에서 파생된 학문이다. 다윈은 어째서 자연에 이타주의가 존재하는지 끝내 설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다윈이 죽은 지 80년도 더 지난 1960년대에 이르러 유전학자들이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다. 이타주의의 기원은 다름 아닌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타주의라는 찬사를 받을 만한 성향이 유전자의 이해관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주장은 과학사에서 가장 불온한 사상이라 할 만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야기를 한다. 욕심을 부려 과도한 이익을 보려 하거나 불법적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먹고 살기 위해 스스로 열심히 일하는 것을 이기적이라 해석하는 것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 상황을 이기적 유전자가 이타적 행위를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데 가져다 쓰는 것도 적절한 인용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유전체 분석에 의하면 인간과 가장 가까운 유인원이 보노보다. 1.3% 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궁금한 것은 유전체의 차이가 거의 나지 않는 침팬지와 보노보의 행동 사이에는 왜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가, 이다. 사회생물학에서 말하는 생물학적 이타주의는 호혜적 이타주의다. 매트 리들리는 "인간에게 동물적인 면이 있다고 해서 인간이 모든 면에서 동물적인 것은 아니다. 모든 동물종이 고유한 면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르듯 인간도 고유한 면을 가지고 있고 서로 다르다. 생물학은 단일 법칙성의 과학이 아니라 예외의 과학이며 거대한 통합의 과학이 아니라 다양성의 과학이다. 개미가 공산주의적이라는 사실은 인간의 본능적 미덕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자연선택의 잔혹성으로부터 잔혹이 미덕이라는 결론은 나올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물리학에서는 태양이 존재하는 목적이나 중력의 이유 따위를 묻지 않지만 생물학에서는 목적이나 이유를 물을 수 있다. 우리가 속한 사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 필요한 이타주의가 정말로 우리 본성에 새겨진 이기심에만 의존하는 거라면 그보다 위태로운 외줄타기는 없다.(272 페이지) 저자는 자연세계에서 우리는 이기적으로 행동할 자격이 없으며 그럴 수도 없다고 말한다.

 

저자는 생명은 거대한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라 말한다. 노벨상을 수상한 분자 생물학자 귄터 블로벨은 "생명의 연속성에서 보면 우리의 나이가 스무 살이라느니, 서른 살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잘못 되었다. 우리의 나이는 모두 35억살이기 때문이다."란 말을 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다양한 생명이 시공간을 초월해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가족이라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

 

수쿼미 족의 추장 시애틀의 이름에서 미국의 항구 도시 시애틀이라는 이름이 유래했다. 그는 강압적으로 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백인들에게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들꽃은 우리의 누이이고 순록과 말, 큰 독수리는 우리의 형제들이다. 강의 물결과 초원에 자라는 풀의 수액, 조랑말과 인간의 땀은 모두 하나다. 모두가 한 가족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대지에게 일어나는 일은 대지의 아들들에게도 일어난다. 사람이 삶의 그물을 짜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 역시 한 가닥의 그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가 그물에 무슨 짓을 하든 그것은 반드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기 마련이다."란 말을 했다.

 

생물학이 오랜 기간 자연학(관찰로 얻은 지식을 서술하는 학문)이나 박물학에 머물렀던 것은 핵심 실체인 유전자의 실체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자 생물학의 태동이 생물학을 질적으로 바꿔놓았다.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톱니바퀴처럼 연결된 화학반응으로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세포를 하나의 기계로 보는 관점이 우세해졌다. 문제는 어떤 기계도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으며 스스로를 설계할 수 없다는 점이다. 생명이 기계를 닮아갈수록 기원은 더욱 불분명해진다.

 

뉴턴이 위대한 것은 그가 처음으로 천상의 역학과 지상의 역학을 통일했다는 데 있다. 조선인 중 처음으로 뉴턴의 중력 이론을 접한 최한기는 그의 이론을 죽은 수학이라 폄하했다. 뉴턴 이전의 과학은 '왜'를 탐구했지만 이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과학이 '어떻게'만을 탐구하게 된 것이다. 상상은 사라지고 계산만 남은 것이다. 생물학은 다윈 이래 '왜'를 묻지 않는다. 굴드는 생명이 진화를 통해 변화해온 경로를 전일적인 관점에서 복합적으로 분석하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모든 결과를 환경에 대한 적응이라는 단순하고도 편협한 관점으로 대하는 시각을 비판했다.

 

마이어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목적론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으나 필요하지 않음은 사실이 아님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사 필요하지 않더라도 합목적성은 생명 내부에 이미 존재한다. 베르그송은 진화론 자체를 폭넓게 수용하면서 진화의 의미와 인간이 걸어온 길을 사유하고자 했다. 그는 한 역사의 잇따르는 순간들에서 환원 불가능하고 비가역적인 것은 과학에 의해 포착될 수 없다고 말했다. 생명의 고유한 작용을 물리화학적 요소들로 나타내는 것은 그 일부분만을 표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과학도 그 해석에 통일성이 담보되지 않는 한 하나의 신앙일 수 있다고 말한다. 과학적 진실이 언제나 결정적으로 입증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말과 같다. 목적 없는 정보는 없기 때문이다. 생명이란 기계적이라기보다 복잡계적인 현상에 더 가까우며 단독적이기보다 여러 구성 요소간의 의식적이고도 협력적인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유전자에 담긴 정보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한다 해도 전체의 집단이 만들어내는 복잡성과 의외성을 예측하기 어렵다.

 

생명이 가진 정보, 그 정보가 가진 목적이 기계적일뿐이라면 생명현상이 이처럼 조화롭게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객관적이며 가치 중립적이라는 기대를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과학에는 연구를 수행해 얻은 결과를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주관적 판단이 개입할 수 있다. 과학에는 논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과학적으로 얻은 결과를 어디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 가치도 달라질 수 있다.

 

합성생물학 분야에서 커다란 전진을 보이고 있는 하버드대의 유전학자 조지 처치는 멸종된 매머드뿐 아니라 멸종 인간종인 네안데르탈인의 복원도 꿈꾸고 있다. 저자는 멸종한 그들을 복원하는데 성공했다고 쳐도 우리는 그들을 데려다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라고 묻는다. 저자는 에토스(ethos)의 순수한 목소리를 거부하는 크라토스(kratos; 힘의 의인화)는 스스로 파멸하기 쉬운 서툰 힘을 뿐이라 말한다.

 

2018년 세계보건기구는 노화를 자연현상이 아닌 질병으로 규정했다. 막스 플랑크는 과학은 장례식이 치러질 때마다 한 번씩 진보한다는 말을 했다. 새로운 발견에 따른 과학의 진보는 반대 의견을 가진 기존의 세력을 설득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세력이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진리를 친숙하게 여기는 젊은 세대가 사회를 구성하고 나서야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는 과학 외의 영역에도 해당하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뒤섞여 영원히 사는 세상에서는 어떤 진보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다른 것들보다 더 위중한 인간의 큰 죄가 있으니 하나는 조급함이고 다른 하나는 게으름이다. 인간은 조급했기 때문에 낙원에서 추방당했고 게으르기 때문에 다시 낙원에 들어가지 못했다." 카프카가 쓴 일기다. 생명공학 기업가인 후안 엔리케즈는 TED 강연에서 호모 사피엔스에서 진화할 다음 단계의 인간종에게 호모 에볼루티스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자연스러운 변이와 자연선택에 따라 생겨나는 새로운 종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으로 만들어진 초인류를 뜻하는 이름이다.

 

어떤 유전자가 우월한지는 변화하는 환경이 선택한다. 유전자를 지닌 당사자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완벽한 인간이라는 개념은 허상이다. 세계를 판단할 단 하나의 절대적 기준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만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여전히 이동중이다. 생명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의식이라는 초강력 핵무기를 탑재한 인간에게 이제 자연선택에 따른 진화는 아이들의 장난감 권총 놀이처럼 무의미하다.

 

우리가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변해가고 있는 과정 중의 존재를 의미할 때 그것은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 되어야 한다. 이 세계 거의 모든 문제는 의식의 문제다. 본문에 민들레 원칙(dandelion principle)이 언급된다. 같은 민들레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잡초가 되기도 하고 명약이 되기도 한다는 의미다.

 

물리학에 사건의 지평선이란 개념이 있다. 어떤 물체가 블랙홀로 떨어질 경우 우리는 그 물체가 사건의 지평선에 무한히 가까워지는 것을 볼 수 있을뿐 그것이 블랙홀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순간 빛도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물학적 사건의 지평선은 우리가 모든 생명의 궁극적 공통 조상이 무엇이었는지 결코 알 수 없다는 점을 말할 때 사용되는 개념이다. 박테리아는 DNA를 자신의 직계 후손에게만 전달하는 게 아니라 수평이동을 통해 옆 동료들에게도 전해주기 때문이다.

 

윌리엄 깁슨의 말대로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았을뿐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생명은 개체이면서 그물망이기 때문에 인간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연이나 환경이라는 개념은 생각할 수 없다.우리 자신도 생태계에 포함된다. 랩걸이란 책에서 저자 호프 자런은 인류 문명은 4억만년 동안 지속되어온 생명체를 식량, 의약품, 목재의 세 가지로 분류해 그것들을 더 많이, 더 강력하게, 더 다양한 형태로 손에 넣고자 함에 따라 식물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고 지적하며 세상은 조용히 무너져 내리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프리카 연안의 모리셔스 섬에 서식했던 도도(dodo)라는 이름의 새를 아는가? 도도는 포르투갈어로 바보라는 의미다. 날지도 못하면서 사람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도도가 날지 못하게 된 것은 천적이 없어 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새가 포르투갈인들이 섬에 발을 들여놓은 지 100년만에 멸종되자 도도가 매개가 되어 발아시키던 칼바리아란 나무가 멸종 위기에 놓였었다.(이 사실을 안 사람들이 도도와 유사한 칠면조를 데려다 칼바리아 열매를 먹게 해 어렵게 나무의 싹을 틔우는 대 성공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생물학의 현상을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물리학과 화학의 법칙에 새로운 내용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라고도 말했다.

 

저자는 자연은 비약하지 않는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말한다. 자연은 두 번 비약했다. 한 번은 물질을 구성하기 위한 양자 도약이고, 한 번은 그 물질이 존재의 의미를 갖도록 하기 위한 생명의 도약이다. 생명의 탄생은 위대한 도약이었다. 무생물과 생물 사이에는 우연으로는 차마 건널 수 없는 거대한 불연속의 심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데카르트와 베이컨 이래로 모든 자연과 생명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굳어졌음을 언급한다. 저자는 인류의 진보를 위해 환경 파괴와 동식물의 희생을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로 생각한다면 그것인 미궁 속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스스로 끊어버리는 행위가 될 것이라 말한다. 과학이 알려주는 진리는 그 자체로 삶의 지침을 삼을 만한 것들이 아니다. 거기에 해석이 필요하고 가치가 부여되어야 한다.

 

저자는 생명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살릴 줄 아는 것만큰 멋진 일도 없을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대중을 위해 과학을 쉽고 재미 있게 전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는 태도라 말한다. 쉽고 재미 있는 것은 과학의 매우 기초적인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과학은 대체로 어렵고 복잡하다. 과학은 지난한 논재이고 설득이다. 한순간 나를 잡아끄는 매력, 그 놀라움과 아름다움이 없다면 포기하기 쉬운 학문이다. 저자는 가장 심오한 통찰은 늘 그렇듯 쉽고 재미 있는 말로 표현할 수 엾다고 말한다. 저자는 계속해서 묻고 궁금해하는 사람만이 근사한 답을 얻을 가능성이 놓다고 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권우집 - 심산 한국학
홍찬유 지음 / 심산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권우집(券宇集)은 권우 홍찬유 선생의 문집이다. 시(詩), 서(序), 기(記), 발(跋), 비문(碑文), 묘표(墓表), 잡저(雜著), 부록(附錄) 등으로 구성되었다. 짧은 시간도 다투듯 아껴 써야 한다는 의미의 촌음시경(寸陰是競)이란 휘호(揮毫)를 받은 제자 정후수 교수가 ‘책을 펴내면서’란 글을 썼다.“2005월 3월 은사 권우 선생께서 세상을 버리셨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다. 세상을 버렸다는 말은 연관(捐館)이란 말로 바꿀 수 있다.

 

‘책을 펴내면서’에 의하면 선생은 미좌 정기, 우정 임규 선생 문하에서 배웠고 위당 정인보 선생에게서 인정을 받았다. 연천 출신의 한학자로 유도회 부설 한문연수원을 설립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강좌를 개설하셨다. 미좌 정기 선생에게서 교육 받은 곳이 연천 미산의 미좌 서당이다. 미수 허목 선생께서 많은 곳을 유람한 것처럼 여러 곳을 다닌 뒤 쓴 시들이 많다. 봉황정에 올라란 작품에 나오는 바에 의하면 선생은 눌재(訥齋) 양성지의 외손이다. 송파(松坡)라는 호를 쓰기도 했던 양성지는 세조 - 성종 시기의 학자로 지리학, 역사학에 능했다.

 

가을 강 뱃놀이란 의미의 추강범주(秋江泛舟)란 글에 범범(泛泛)이란 말이 나온다. 중류범범여난수(中流泛泛與亂收)란 글로 중류에 흥겨워 어쩔 줄 모르네란 의미다. 유유범범(悠悠泛泛)이란 글이 있다. 무슨 일을 다 잡아 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글이다. 유(悠)는 한가하다, 멀다, (멀기에) 생각하다란 의미의 글자다. 범(泛)은 뜰 범이란 글자다. 본문에 관수(觀水)란 말이 나온다. 물을 본다는 의미이지만 단지 본다기보다 물의 속성을 배우는 것이다.

 

송언개(松偃蓋)란 말이 나온다. 소나무는 나부끼듯 일산처럼 자신을 덮어(가려)준다는 의미다. 나부낄 언이기도 하고 쉴 언이기도 하다. 언기식고(偃旗息鼓)란 말이 있다. 전쟁터에서 군기(軍旗)를 누이고 북을 쉰다는 뜻으로 휴전(休戰)함을 이르는 말이다. 두보의 시 구절인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닦는다는 만하세병(挽河洗兵)과 같은 말이다. 반암언중신(盤巖偃仲伸)은 너럭바위는 누워 뒹굴기 알맞다는 의미다.

 

연천 한탄강에서 지은 '한탄강에 배 띄움'이란 글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삼팔선은 누가 갈라놓은 것이며(산하유선분삼팔; 山河有線分三八)란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는 바다. 정전협정은 누가 주도한 것인가?란 의미의 글이다. 정전협정을 지칭하는 말이 용주(龍酒)다. 용주무단설일쌍(龍酒無端說一雙)에 나오는 말로 화(華)가 이(夷)를 침범하면 황룡 한 쌍을 주어야 하고 이(夷)가 화(華)를 침범하면 청주 한 잔을 주어야 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화양동을 유람하며(遊華陽洞; 유화양동)란 글을 보자. 숭정 때 벌써 중국이 망했는데 만동묘가 우리에게 무슨 아랑곳이냐 존양 대의라는 게 다 무슨 잠꼬대냐? 가짜 명나라 사람도 이젠 다 지나갔네 자기도 속았고 남도 속았다. 그때 북벌론은 더욱 우스워라.

 

선생은 연천 한탄강에서 시를 지은 데 이어 철원 고석정, 순담계곡 등에서도 시를 지었다. 연천의 명소인 재인폭포를 유람하고 쓴 재인폭포를 구경하며(관재인폭포; 觀才人瀑布)란 시도 있다. 선생은 누구보다 분단을 안타깝게 여겼다. 모름지기 남북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으면(수령남북일환전; 須令南北一環全)이란 구절이 있다. 선생은 문치를 숭상하는 귀한 보배를 만인이 머금는 것이 정치에서 가장 급한 일이라고 말했다.

 

선생은 십청원에서 더위를 씻으며(十靑園消暑)에서 우뚝 솟은 용마산 검푸른 기운으로 가렸으나(용수차아옹취미; 龍岫嵯峨擁翠微)란 말을 했다. 비문(碑文) 가운데 미강단소 개수 비명이 눈에 띈다. 미수 허목 선생을 모신 미강서원 자리의 단소(壇所)에 대한 글이다. ”엎드려 생각건대 우리 우의정 문정공 미수 허 선생은 학문은 천(天)과 인(人)을 궁구하셨고 도는 체(體)와 용(用)을 체득하셨으며 예교(禮敎)를 열어 밝혀서 나라의 맥을 굳게 지키셨으니 뚜렷이 백세의 스승이 되신 분이시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첩설(疊設)이란 말이 나온다. 한 분을 여러 서원에 모시는 일을 말한다. 서원 철폐의 기본원칙은 한 분을 가장 중요한 곳에 모시도록 하고 나머지는 철폐하는 것인데 미강서원이 철폐된 것은 소인배들이 간사한 짓을 하고 그 일을 맡은 신하들이 임금의 명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는 요지의 글이다. 선생은 단소를 설립하려는 것이 다만 제사 드리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언젠가는 시대의 형편을 보아 가며 서원을 복원하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이라 썼다.

 

“아무리 작은 땅이라도 주인은 있는 것, 여기는 바로 문정공의 터전이다.”란 글이 눈에 띈다. 선생은 “돌이켜 보면 시원찮은 자질로 겨우 몇 글자나 알게 된 것은 모두 선생님께서 잘 가르쳐 주신 결과니 그 은혜를 생각하면 어찌 감히 문장을 못한다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라고 썼다. 선생은 매양 베풀기를 좋아하면서도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 의로움이 아니면 비록 만종(萬鐘)으로 녹봉(祿俸)하여도 돌아보지 않으셨다.

 

선생의 아들 사성(思成)은 어머니 단양 우씨에 대해 선생으로 하여금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학문에 뜻을 오로지 할 수 있게 했다고 썼다. 아들은 부군(府君)께서 20세의 나이에 망국의 한과 신문화의 성황으로 경향 각지로 방황하다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 분야에서 남달리 뛰어난 사람)인 우정(偶丁) 임규(林圭; 1863 - 1948) 선생을 뵙고 학문의 심오함과 애국의 뜻을 승수(承受)하셨다고 썼다. 아들은 선생께서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좇지 않았으며 그 묻는 것에 따라 답변을 극진히 하는데 미칠 때까지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부군에 대한 대체의 말이라고 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