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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 - 역사평설 병자호란 1
한명기 지음 / 푸른역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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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청()과 명() 사이에서 현명한 외교를 펼치지 못했던 인조 정권의 실정(失政)을 거울 삼아 반면교사의 지혜를 얻어야 하는 시기다. 최근 최명길 평전을 쓴 한명기 교수의 책은 그런 지혜를 깨닫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조선사 그 가운데 17세기는 지난 216일 남한산성 해설 후 급격히 친근해진 느낌이 든다.

 

병자호란 이전의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광해군과 그를 몰아내고 왕이 된 그의 조카 능양군(인조)의 악연 등 배경 설명이 충분한 책이다. 물론 전황(戰況)도 상세하다. 인조는 반정 후 광해군대의 조선을 금수(禽獸)의 땅으로 규정했다. 명나라 장수 모문룡은 언급되어야 마땅하다.

 

요동 수복을 기치로 내세우며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진을 친 장수다. 배후에서 후금을 견제할 수 있는 위치여서 후금은 상당히 신경이 쓰였다. 광해군은 모문룡을 화근으로 여겼다. 후금을 자극해 역공을 초래하는 모문룡 부대에 대한 근심이었다.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바뀌자 모문룡은 반색했다.

 

광해군이 오랑캐와 화친하고 명을 배신했기에 의거(義擧)했다는 반정 세력들의 주장은 후금과의 대결로 나가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명은 인조 책봉 카드로 조선을 길들이려 했다. 정당성 없는 정권에 책봉이라는 은혜를 베풀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생긴 재조지은(再造之恩)에 봉전지은(封典之恩)이 추가된 것이다. 제후국의 임금으로 책봉해준 은혜를 의미한다.

 

명이 인조를 책봉하기 전까지 인조는 서조선국사(署朝鮮國事)로 불렸다. 임시로 조선의 국사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조선으로서는 모문룡을 도와 후금과 싸워야 했다. 기울어가는 명의 궤도 속으로 깊숙이 빨려들어가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반정 논공행상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이괄이 일으킨 난은 몇 가지 점에서 기록을 세웠다. 조선에서 반란군이 서울을 점령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이괄은 경복궁 옛 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인조의 숙부 흥안군(선조의 열 번째 아들)을 국왕으로 추대했다. 공주까지 피신했던 인조는 반란이 진압된 후 서울로 돌아와 백성들이 불지른 창경궁 대신 광해군이 막대한 재정을 들여 신축한 경덕궁(후에 경희궁으로 불린)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난이 진압된 이후 역모 사건이 터졌다. 북관대첩의 주인공 정문부(鄭文孚)가 억울하게 희생되었다.

 

이귀는 인조에 대하 호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어영군을 새로 창설했다. 이서(李曙)는 총융군(경기지역 병력)을 만들었다. 이서 등은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유사시의 국왕 피신처이자 전략적 거점으로 정비하려고 시도했다. 즉 적군이 침입하면 국왕은 훈련도감과 어영군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세자는 총융군을 이끌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증원군을 받아들여 항전한다는 계획이었다.

 

반정 세력들은 도성과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하고 상대적으로 적의 주요 침입로인 평안도와 황해도 방어는 몹시 소홀히 했다. 정권 안보에만 집중하고 국가 안보는 등한시 한 것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을 대비해 운영하던 해방(海防)을 중단하면서까지 명의 책봉사 접대에 매달렸다.

 

인조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세 가지 난정을 바로잡겠다며 등장했다. 난정이란 폐모살제, 궁궐 건설 등 과도한 토목공사로 민생을 도탄에 빠지게 한 것, 오랑캐 후금과 화친하여 명나라의 은혜를 배신한 것 등이다. 정권이 바뀌고 새로 등장한 정권이 또 다시 바뀔 뻔하는 격변(이괄의 난)을 겪으면서 민심은 크게 동요했고 그 와중에 권력을 지키는 것이 다급해진 인조 정권은 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는 동력을 상실했다.

 

거기에 명나라 사신들은 엄청난 은() 징색(徵索)을 했고 가도의 모문룡 진영은 항상적인 양곡 수탈을 했다. 인조 정권은 친명은 실천했지만 배금은 쉽게 실천하지 못하고 현상유지책을 시행했다. 이 상황에서 정묘호란이 일어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모문룡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모문룡 부대를 요즘식으로 말하면 주한명군(駐韓明軍)이라 할 수 있다.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막강한 후금과 싸워 요동을 수복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명은 가도를 조선과 후금을 견제하는 전략적 거점으로 보았다. 모문룡 부대 즉 모병(毛兵)은 조선이 명을 배반하거나 후금으로 기울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수단이었다. 모문룡은 요동 수복을 표방했지만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모문룡은 명 조정의 실력자 환관 위충현의 비호를 받고 명 황제를 속이고 조선에 온갖 민폐를 끼쳤다. 문제는 명 조정으로부터 모문룡을 감사(監司)해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거짓으로 후금을 공격하는 시늉을 했고 그 과정에서 조선에 큰 민폐를 끼쳤고 후금을 자극했다는 점이다. 인조는 그런 모문룡에게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천계 연간 극심한 당쟁과 환관들의 발호 때문에 명은 무너져갔다. 16193월 명군은 후금을 공격했지만 역습에 휘말려 참패했다. 명청 교체의 분수령이 된 이 전투를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이 가운데 명의 요구를 듣지 않을 수 없었던 광해군이 파견한 강홍립 휘하의 병력이 패한 전투를 심하(深河) 전투라고 한다.

 

15천 명에 이르는 강홍립 부대는 전투의 대세와 무관한 병력이었다. 영원성 원정에서 입은 부상으로 누루하치가 죽었다. 1616년 홍타이지는 국호를 대금(후금)으로 칭하고 칸이 되었다. 훗날 태종이 되어 병자호란을 일으켜 인조에게 치욕적 항복을 받아낸 인물이다. 1627년 일어난 정묘호란의 원인은 복합적이다. 경제 문제 해결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결정적인 것은 명 본토를 치기 위해 서진(西進)하려는 데 방해가 되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추대 형식으로 칸의 위치에 오른 홍타이지는 지위에 걸맞은 권위와 권력을 보여주려 했다. 정묘호란을, 투항한 강홍립이 오랑캐를 부추겨 일으킨 전쟁으로 본 송시열의 견해는 잘못이다.

 

후금이 투항자의 사주(使嗾)에 따라 동병(動兵) 여부를 결정할 만큼 간단한 나라인가? 서인은 정묘호란의 근원적 책임을 광해군과 강홍립에게 돌리고 광해군 정권을 후금과 같은 부류로 매도함으로써 자신들이 처한 명분적 곤경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평안병사(平安兵使) 남이홍은 방어선이 붕괴되어 성이 함락되기 직전 부하들과 함께 불붙은 화약더미 속으로 몸을 던져 장렬히 순국했다.

 

그는 죽기 직전 지휘관이 되어 습진(習陣: 진 치는 훈련)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는 말을 했다. 정권안보를 위해 기찰(譏察)에 혈안이 되었던 반정 세력들 때문에 빚어진 일이었다. 인조는 백성들에게 사과성명을 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터져 항복하고 나서도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잃어버린 10년인 셈이다.

 

정묘호란 때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했다. 이괄의 난이 터지자 공주로 피신했던 것처럼. 후금이 화의(和議)를 제의했다.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후금이 조선과 명의 관계를 용인해준다면 화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의견이 있었고 오랑캐 사신의 목을 베어 명으로 보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등지고 결전을 벌이자고 한 척화파들의 의견이 있었다.

 

실력을 갖추지도 못하고 비분강개만 하는 모습이라니...어떻든 두 나라는 화의했다. 이괄의 난이 남긴 후유증 등 내정의 난제들을 추스르기에도 여유가 없었던 조선과 배후의 원숭환(영원성 전투에서 누르하치를 타격한)의 위협을 고려하면서 조선으로부터 경제적 실익을 얻어내는 것이 절실했던 후금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후금은 형의 나라, 조선은 동생의 나라가 되었다.

 

홍타이지가 정묘호란을 일으킨 가장 중요한 이유는 모문룡을 제거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다른 섬으로 피해 목숨을 보전했다. 모문룡에게 후금군의 머리를 베어 바친 사람들(평안도 지역의 의병, 백성들)이 있었지만 조선 사람들의 수급(首級;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을 적과 싸워 얻은 것처럼 속여 바친 자들도 있었다.

 

모문룡은 이를 자신의 군공(軍功)이라며 명 조정에 천연덕스럽게 보고했다. 반정 세력들이 오랑캐와 화약을 맺음으로써 반정 명분을 스스로 크게 훼손했다고 찜찜해 하던 차에 명은 후금과의 화의에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화의 이후 곳곳에서 역모가 일어났다. 삼레의 유생 이기안은 능양군을 믿을 수 없다. 그가 오래 갈 수 있을까?”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라는 총체적으로 난국(難局)이었다.

 

인조는 오랑캐 토벌 의지는 대단했지만 구체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1630년 가평군수 유백증은 신은 광해(1575 - 1641)가 죽기 전에 종사가 먼저 망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기만 합니다란 직격탄을 날렸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극도로 혐오했다. 모문룡은 원숭환에 의해 최후를 맞았다. 참수(斬首)당한 것이다. 원숭환은 어제 그대를 죽인 것은 조정의 대법을 밝힌 것이고 오늘 그대를 제사함은 동료의 사정(私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뿌렸다.

 

황경원은 원숭환이 모문룡을 처단한 은혜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이여송에 못지 않다고까지 말했다. 원숭환은 홍타이지의 계략에 말려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후금군은 광거문 전투에서 원숭환에게 패했지만 마방태감 양춘과 왕성덕을 포로로 잡았다. 이 둘을 감금해 놓은 방 바로 옆에서 홍타이지의 부하 고홍중과 포승선이 밀담을 나누었다. 원숭환이 이미 홍타이지와 몰래 약속하여 북경을 탈취하기로 했고 곧 함락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의도적 연출이었다. 고홍중과 포승선은 홍타이지의 명령을 받고 양춘과 왕성덕을 풀어주었다. 양춘과 왕성덕 두 환관은 부리나케 자금성으로 달려가 숭정제에게 포로로 잡혀 있으면서 옆방에서 들은 사실을 고했다. 원숭환이 오랑캐를 사주하여 북경으로 끌어들였고 원숭환이 병력을 이끌고 북경 옆 통주에 이를 때까지 후금군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19살의 숭정제는 대국을 보는 눈이 없어 홍타이지가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원숭환은 책형(磔刑)을 당했다. 이는 동림당과 엄당의 격렬한 상쟁과 복수가 배경에 깔린 사건이다. 원숭환이 처형당한 뒤 명은 자멸의 길로 확실히 들어섰다. 원숭환을 제거하는 반간계를 구상하고 실행한 주체들은 이신(貳身)들이었다. 명에서 후금으로 귀순하거나 투항하여 벼슬했던 한족 출신 신료들이다.

 

홍타이지는 이신들을 우대하고 중용하여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제도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활용했다. 이신들은 명으로부터 무엇인가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신들까지 포용한 홍타이지는 탁월했고 사람과 대국을 볼 줄 몰랐던 숭정제는 어리석었다. 지도자의 국량(局量) 차이가 후금과 명의 운명을 갈라놓은 것이다.

 

원숭환은 모문령을 제거한 뒤 조선에 편지를 보내 모문룡 처단의 전말을 설명하고 모문룡과 부하들이 조선에 끼친 커다란 피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병력을 동원해 같이 후금과 싸우자고 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조선에 간절히 바란 것은 무역이었다. 명이 자신들에게 경제 제재를 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아우국 조선과의 교역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조선은 후금과의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후금이 조선에 요구한 물자 가운데 서적들도 있었다. 조선은 후금에 사서를 비롯 춘추, 주역, 예기, 통감, 사략 등을 넘겨주었다. 당시 후금은 홍타이지가 한인 신료들을 적극적으로 임용하고 문치에 입각한 국가 체제를 만들어가는 중이었다.

 

인조는 원종 추숭 문제로 10년을 싸웠다. 국력을 갉아먹은 사건이었다. 1633년 모문룡 휘하에 있던 공경(孔耿: 공유덕, 경중명)이 전함과 수군을 이끌고 후금으로 귀순하자 조선은 그들을 추격하던 명군에게 군량과 군수 물자를 제공하고 병력을 압록강 부근으로 파견했다. 163612월 홍타이지는 조선이 공경의 귀순을 저지하려고 후금과 적대한 것을 병자호란 도발의 주요 명분으로 제시했다.

 

1619년 명을 도와 후금을 공격한 것(심하전투 참전)이 후금에 정묘호란을 일으키게 한 원인을 제공했다는 사실로부터 조선은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같은 일을 되풀이한 것이다. 조선은 후금이 보유한 수군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후금은 1631년 보낸 국서에서 우리가 쳐들어가면 너희는 보나마나 섬으로 도망칠 것이라 조롱했다.

 

후금은 공경의 귀순을 계기로 전함과 수군까지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는 원종의 부묘(祔廟)를 밀어붙이느라 오버했다. 강학년은 인조에게 포악한 자가 포악한 자를 갈아치웠다고 비난했다. 이괄의 난 때 백성들 가운데 서울을 떠나는 인조의 가마를 뒤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말로 민심 이반을 통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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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20-03-03 10: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꽤 재미있는 책이죠. 2권을 기다리게 됩니다.

벤투의스케치북 2020-03-03 20:25   좋아요 0 | URL
아. 네.. 알겠습니다...
 
조선의 세자로 살아가기 돌베개 왕실문화총서 9
심재우 외 지음 / 돌베개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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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왕위 계승자인 세자(世子)의 세는 대를 잇는다는 의미다. 세자의 원어는 계세지자(繼世之子). 아버지의 대를 잇는 아들이라는 의미다. 고려시대에 태자로 불리다가 원 간섭기부터 세자 또는 왕세자로 불리기 시작했다. 원자(元子)는 왕의 적장자로 아직 세자에 책봉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적장자가 왕이 된 경우는 일곱 건이다.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순종 등이다. 세조의 장자 의경세자, 명종의 장자 순회세자,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 정조의 장자 문효세자, 순조의 장자 효명세자 등은 요절한 세자들이다. 원자는 특별히 책봉할 필요가 없었으나 태종은 양녕대군을 원자에 책봉했다. 세자의 자질이 의심스러워 지식과 인격수양을 위한 예비 기간을 두고자 했기 때문이다.

 

양녕대군은 원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문종은 세자로서 처음으로 성균관 입학례를 치른 사람들이다. 연산군은 부왕 재위시 태어난 첫 원자다. 성종 7년의 일이다. 의안대군은 1382년에 태어났고 부왕 태조는 1392년에 즉위했다. 양녕은 1394년에 출생했고 부왕 태종은 1400년에 즉위했다. 문종은 1414년에 출생했고 부왕 세종은 1418년에 즉위했다.

 

대리청정을 한 세자는 모두 일곱 명이었다. 문종(710개월), 예종(111개월), 광해군(610개월), 경종(210개월), 사도세자(135개월), 정조(3개월), 효명세자(33개월) 등이다. 대비의 수렴청정도 일곱 차례였다. 성종, 명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대에 이루어졌다.

 

세자시강원은 서연(書筵) 즉 세자의 교육을 담당했고 세자익위사는 세자 호위를 담당했다. 세자익위사는 태종 때 설치되었다. 성종 재위 중 원자의 양육과 교육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었다. 원자로 하여금 민간의 고통과 물정을 알게 하기 위해 사가로 내보내 교육시킬 것인가, 임금이 정사를 처리하는 것을 보고 배울 수 있게 할 것인가가 쟁점이었다.

 

세자 책봉은 대체로 6, 7세에 이루어졌다. 세자 책봉 방법은 임헌책명(臨軒冊命)으로 규정했다. 임헌책령이란 원자가 정전의 뜰에 나아가 절차에 따라 책봉 받는 방식을 말한다. 세자 책봉례는 왕통의 차기 계승권자를 천하에 포고하는 것이다. 백성을 복종시키는 것이다. 세자는 국본(國本)으로 인식되었다. 세자 책봉일은 길일을 택했다. 그 이전에 책봉 사실을 종묘에 고했는데 이때 세자의 이름이 정해졌다.

 

책봉례를 할 때 세자는 면복(冕服)을 갖추었다. 일곱 가지 무늬가 새겨진 칠장복(七章服)을 입은 것이다. 칠장복은 곤복(袞服)이라고도 한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점을 쳐 길을 택해 거행했다. 습의(習儀) 즉 예행연습을 행했지만 실수가 빚어지기도 했다. 세자가 성균관에서 입학례를 치렀다고 해서 성균관에서 공부를 한 것은 아니다. 양반 자제들과 함께 성균관에서 공부를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식은 유학의 스승인 공자에게 술잔을 올리고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의식을 통하여 세자 역시 유학을 학습하는 학생이라는 점을 만천하게 알린다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세자의 성균관 입학례는 대성전에서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한 후 유생복인 청금복(靑衿服)을 입고 명륜당에서 속수례(束修禮)와 입학례를 거행하는 순서로 이루어졌다.

 

세자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완결점에 세자빈이 있다. 왕실이나 일반민의 경우 집안의 주인은 여성이고, 그 주인 역할을 할 며느리의 존재는 중요하다. 세자빈이 집안에서 맡은 역할을 잘해주어야 세자가 후계자 수업을 잘 받을 수 있고 그 위치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왕들은 스스로 왕의 아름다운 덕화를 상고해보면 반드시 지어미의 유순함에 힘입어 이루어졌다고 말했을 정도다.

 

세자는 현왕을 이어 왕이 될 사람으로서 정치적 역량을 키워야 하는 한편 왕 자리를 절대 넘보아서는 안 되는 위치에 있었다. 세자 교육은 이 점을 늘 인식하게 하는 양면성을 띠었다. 법적으로 인정된 섭정으로 대비의 수렴청정과 세자의 대리청정이 있었다. 전자는 왕과 대비의 공치(共治) 차원이었고 후자는 왕의 통치를 보조하는 차원이었다.

 

첫 대리청정 주인공은 문종이었다. 세자의 대리청정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적장자로 대통을 이은 왕이 많지 않았고 장성한 세자가 있고 현왕이 노년기에 접어든 상황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은 대리청정을 시키려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인조는 장성한 아들 봉림대군이 있었음에도 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대리청정을 시작한 세자의 평균 나이는 20.8세였다. 나이는 적게는 열 살에서 많게는 서른 살에 이르렀다. 청정 기간은 1년에서 13년까지이다. 평균 기간은 5.2년 정도로 수렴청정 평균 기간과 비슷하다. 왕이 나이가 많거나 질병 등으로 국정 운영 능력이 떨어졌을 때 대리청정을 했고, 정국 전환의 의도를 가진 임금의 의도로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고, 전란 중 대리청정을 했고(광해군, 소현세자), 불안한 세자의 정치적 지위를 안정시키려는 의도로 왕이 대리청정을 명한 경우에 대리청정을 했다.(경종, 정조)

 

정조의 대리청정은 3개월에 불과해 그의 통치가 대리청정 효과에 힘입은 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대리청정은 세자가 정치적 희생양이 될 여지가 다분했다. 문종은 20년이나 세자로 있다가 28세의 장성한 나이에 청정을 시작했다. 경종은 29세의 나이에 대리청정을 시작했다.

 

영조가 사도세자(1735 1762)에게 부과한 대리청정은 양위 소동이 일어난 가운데 결정되었다. 영조 51년인 1775년 세손(이산)에게 내려진 대리청정 결정은 최초의 세손 대리청정 사례다. 당시 영조는 83세의 고령이었다. 1442년 대리청정기에 세종은 세자가 남면해 조회를 받고 신하들은 칭신(稱臣)해야 한다고 주장해 반발을 샀다. 결국 동쪽에 앉아 의식을 진행하도록(서향하도록) 했고 칭신은 포기했다.

 

세종(재위 1418 1450)144792일 신하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신하들의 세자에 대한 칭신, 세자의 남면, 신하들의 사배(四拜) 등을 관철시켰다. 사도세자는 13년 넘게 대리청정 했지만 부왕 영조에게 죽임을 당하였고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은 3년여만에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말았다.

 

세종은 대리청정을 수행하는 세자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떠돌이 생활을 감수했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정치적 권위를 주기 위해 노력했다. 두 차례 양위 소동을 일으킨 세종은 양위 선언 한 달 전에 연희궁(延禧宮)을 수리하도록 조처했고 수리가 끝나자 그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세종은 144512일 경복궁에서 연희궁으로 갔다가 313일 희우정으로 옮겼고 412일 다시 연희궁으로 옮겨 107일까지 그곳에서 기거하였다.

 

그리고 108일 아들 수양대군의 집에 가서 다음 해 126일까지 거처했다가 다시 연희궁으로 행차했다. 연희궁, 희우정, 수양대군가, 효령대군가, 양녕대군가 등이 세종이 머문 곳들이다. 23개월이 넘는 기간에 세종이 시어소(時御所) 생활을 한 것은 무려 690일이었다. 세종의 시어소 생활은 건강을 되찾기 위한 피병(避病) 목적도 있었지만 세자가 정궁을 장악하고 대부분의 국사를 담당하게 함으로써 대리청정을 통해 세자로 하여금 정치적 장악력을 확실히 갖추도록 하고 궁극적으로 양위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었다.

 

영조는 세자를 믿고 세자에게 왕에 버금가는 권한을 주려했던 세종과 근본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였다. 영조는 처음부터 전위할 생각이 없었고 다만 대리청정을 통해 양위 소동을 일으켰을 뿐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청정을 시키려 하자 노론보다 소론이 더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세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다. 영조는 세자를 정치일선에 내세웠지만 뒤에서 소론을 중용하여 노론을 견제하는 정책을 폈다.

 

당연히 노론이 소론에 대해 공세를 강화하게 되었고 이에 사도세자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영조는 세자를 심하게 책망했고 부자 사이는 갈등으로 치달았다. 17521129일 소론의 이종성이 영의정이 되자 노론계의 사간원 정언 홍준해가 상소를 올려 그를 극단적으로 탄핵했다. 당시 세자는 상소문을 돌려주며 타이르는 조처를 취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영조는 격노하여 홍준해를 제주도로 귀양보내는 한편 세자를 크게 책망했다.

 

이때 세자는 궁중을 휩쓴 홍역을 앓고 난 직후임에도 엄동설한에 눈 위에서 대죄(待罪: 죄인이 처벌을 기다리는 것)하였고 그 때문에 몸이 몹시 상했다. 다음 달 소의(昭儀) 문씨 문제로 영조의 선위 파동이 일어났다. 영조는 10세의 어린 나이에 죽은 아들 효장세자의 빈인 현빈궁 소속의 나인이었던 소의 문씨를 총애했다. 소의 문씨가 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선희궁)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다가 대비인 인원왕후 김씨(숙종의 계비)에게 질책을 당하고 종아리를 맞는 일이 있었다.

 

화가 난 영조가 항의의 뜻으로 선위하겠다고 하자 인원왕후는 그러라고 맞받아쳤고 이에 세자는 또다시 대죄하다가 머리가 돌에 부딪혀 망건이 부서지고 피가 나는 지경을 당했다.(인원왕후는 영조가 왕이 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인물이다.) 1755년 을해옥사(소론 일파가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일으킨 역모)가 일어나 소론이 대대적 타격을 받고 노론은 확실한 정치적 기반을 잡았다. 이에 영조는 친정체제를 강화했고 세자의 입지는 급격히 약화되었다.

 

17572월과 3월에 세자를 후원하던 영조비 정성왕후 서씨와 숙종의 계비 인원왕후 김씨가 잇달아 사망함으로써 세자는 더욱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고 세자는 폐위될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약원 도제조 김상로는 세자를 폐하자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 김상로는 세자를 진찰한 후 세자의 몸 상태를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고했다. 다음 해 8월 명릉(숙종, 인현왕후, 인원왕후의 능)으로 능행길에 나섰던 세자가 비를 맞아 몸이 몹시 좋지 않자 돌아오는 길에 잠시 겅기감영에 들렀는데 김상로가 이를 세자가 반기를 들고 군대를 일으킨 것으로 참소했다.

 

영조가 세자의 폐위 전교를 승정원에 내리자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계가 반대했다. 이에 영조는 이를 철회했지만 세자의 울화증은 크게 악화되었다. 이 이후 왕과 세자는 화합할 수 없는 단계로 들어섰다. 1760년 왕이 거처를 경희궁으로 옮겨가며 두 사람의 소통은 더욱 어렵게 되었다. 며칠 후 습종(濕腫) 치료를 위해 세자가 온양 온궁으로 행차하였는데 이로 인해 세자는 거병(擧兵: 쿠데타) 의심을 받았다.

 

다음 해 4월 세자가 관서 지역으로 미행을 떠나자 노론은 이 사건을 정치공세로 밀어붙였다. 1762년 액정별감 나상인의 형 나경언이 세자가 불궤(不軌: 모반)를 모의한다고 고변했다. 나경언은 동궁을 무고한 혐의로 참형당했지만 여파는 세자에게 떨어졌다. 사건 발생 20일이 지나자 영조는 휘령전 뜰에 세자를 불러 자진하도록 강요했고 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삼은 뒤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어린 세자에게 노회한 정치가 이상의 능력을 요구했다. 세자가 이에 부응하지 못하자 영조는 세자를 불신했고 이런 부왕의 태도에 세자는 더욱 위축되어 가는 등 마음의 병을 키워갔다. 붕당간의 갈등과 연결되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참사로 이어진 이 사건은 부왕의 신뢰가 전제되지 않은 대리청정은 교육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전형적 사례다.

 

효명세자는 자신의 정치적 모델을 할아버지 정조에게서 찾았다. 정조대에 시행되었던 능행 정치도 효명세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효명세자는 정치 운영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정조를 흠모해 그를 닮고자 했다. 효명세자의 죽음도 의문스럽다. 스무 살 전후의 똑똑하고 패기있던 효명세자는 비록 무능했지만 지지를 보내준 아버지 순조의 후원 아래 할아버지 정조를 자신의 모델로 삼아 안동 김씨 세력과 힘겨운 싸움을 했다.

 

조선시대 세자는 왕실의 대를 잇고 왕조의 영속(永續)을 위해 보위를 이어가는 존재로 비창(匕鬯)이라 불렸다. 비창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그릇의 명칭으로 대를 이어 종사를 받든다는 의미다. 조선은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아 국초부터 세자 교육에 효제충신(孝弟忠信)을 중요시했지만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혈연관계가 적대적 관계로 돌변하는 비극적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태조와 태종, 인조와 소현세자,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왕 외에도 왕비, 대왕대비, 친인척, 고위 관료 등 왕실을 둘러싼 대부분의 인물들이 세자의 정적이 될 수 있었다. 생모조차도 세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을 사도세자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복형 방원에게 살해당한 이방석, 세자 지위를 박탈당하고 동생에게 보위를 물려준 양녕대군 이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소현세자 이조, 할아버지 인조에게 버림받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철, 아버지에게 죽임당한 사도세자 이선, 보위에 오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떠돌던 영친왕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사연과 질곡은 다양하다.

 

이들은 왕이 되지 못한 세자들이다. 병사한 세자들이 아닌 쫓겨나고 죽임 당하고 떠돌아야 했던 세자들이다.(의경세자, 효장세자, 문효세자 등은 병사했다. 효명세자는 죽임 당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소현세자는 34세에 숨을 거두었다. 인조는 소현세자에게 침을 놓은 의관 이형익에게 어떤 죄도 묻지 않았음은 물론 이형익을 처벌하라는 관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 청나라에서도 소현세자의 죽음에 놀라 사신을 파견하여 조사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조선시대 세자의 문학을 살필 수 있는 대표 인물이 사도세자와 효명세자다. 사도세자를 양육한 상궁 나인들은 대부분 경종과 경종비 선의왕후를 모시던 사람들로 영조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고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에 대해서도 우호적이지 못했다. 효명세자는 조선 왕실의 가장 뛰어난 문인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서른 두 명의 세자가 있었고 이들에게는 서른 다섯 명의 적자 형제와 여든 아홉 명의 서자 형제가 있었다. 왕에게 세자가 없었던 사례는 단종, 덕종(추존왕), 예종(한명회의 딸 장순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인성대군. 인성대군은 세 살에 요절, 장순왕후는 인성대군 낳은 후 산후병으로 타계), 원종(추존왕), 헌종(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은 왕자 얻지 못하고 옹주 하나 얻고 사망), 철종(원자 이융준 생후 6개월만에 사망) 등이었다.

 

두 명이었던 사례는 태조에게 방석과 정종, 태종에게 양녕과 세종, 세조에게 덕종(추존왕, 의경세자)과 예종, 인조에게 소현세자와 효종, 영조에게 진종(효장세자)과 장조(사도세자), 정조에게 문효세자와 순조 등이다. 선조의 세자 광해군과 동복형 임해군, 이복동생 영창대군 사이의 갈등은 주목할 만하다. 선조와 광해군의 사이는 임진왜란이 진행되면서 점점 나빠졌다. 선조의 위기의식과 열등감 때문이었다.

 

서자인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전쟁 상황 때문이었다. 광해군은 전선을 누비며 군사들을 격려하고 인심을 안정시켜 신망을 얻었다. 전쟁 후 광해군의 입지는 좁아졌다. 광해군은 선조가 죽고 바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다, 선왕 사후 5일 후에 입관을 하고 즉위식을 치르는 왕실 관행을 어긴 것이었다. 불안감의 반영이었다. 서자 출신으로 인목왕후 김씨가 낳은 영창대군의 존재를 의식한 결과다.

 

광해군은 즉위 후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였다. 계축일기에 의하면 광해군은 영창대군이 자신의 세자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광해군의 세자는 영창대군에게는 조카였고 광해군이 영창대군과 자신의 세자의 관계를 생각한 것은 세조가 조카 단종을 죽인 것을 염두에 둔 결과다.

 

조선 시대의 서른 두 명의 세자에게 114명의 여자 형제(38명의 적자 형제, 76명의 서녀 형제)가 있었다. 사도세자의 동복 여동생 화완옹주가 남편을 잃고 궁으로 돌아왔을 때 영조와 사도세자는 악화일로의 관계였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편애를 받는 화완옹주를 질투하기도 했다. 화완옹주는 그런 사도세자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부추겨 영조를 경희궁으로 이어(移御)하게 했다. 영조는 신료들과 논의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왕비(정순왕후 김씨)만 데리고 경희궁으로 이어했다. 영조의 이어가 결정되자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불러 칼을 어루만지며 이후에 내게 무슨 일이 있으면 이 칼로 너를 벨 것이라 말했다. 화완옹주는 울면서 앞으로 잘할 터이니 목숨만 살려주세요라고 간청했다.

 

사도세자는 화완옹주를 믿고 평양에 행차하기도 했다. 사도세자는 여동생 화완 옹주를 통해 부왕 영조와의 갈등을 해소하기도 했지만 화완옹주로 말미암아 임오화변의 비극을 재촉했다고 할 수 있다. 세자 인종이 부왕 중종에게 폐서인된 이복 형제인 복성군, 혜순옹주, 헤정옹주(이상 경빈 박씨 소생) 등을 복권 요청한 것은 화려한 아가위 꽃송이처럼 우애 가득한 형제간의 사랑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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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 - 자연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박지형 지음 / 이음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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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거미란 거미를 관찰하던 스피노자의 만년에서 비롯된 제목이다. 저자는 제한된 자원이 소수의 생물에 의해 독점되기보다 비교적 고르게 배분되어 다양한 생물의 공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태계의 원리를 자연의 민주주의라 부른다. 저자는 환경생태학자다. 생물학이 세포나 분자 수준에서 생명현상을 다룬다면 생태학은 보다 긴 호흡으로 생명의 신비를 노래한다.

 

홉스는 나의 어머니는 쌍둥이를 출산했다. 나와 공포를이란 말을 했다. 공포는 홉스의 어머니가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영국을 침략하는 것에 놀란 것을 두고 이르는 말로 이로 인해 홉스는 조산아로 태어났다. 홉스는 왕과 국교를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왕당파와 의회를 통해 시민의 권리를 옹호하는 의회파 사이의 극심한 대립과 전쟁을 경험하며 공포의 시대를 벗어날 이성적 묘책을 궁리한 홉스의 화두를 이야기하며 저자는 자신의 책의 핵심 질문과 홉스의 이야기가 연결된다고 말한다.

 

홉스 같은 근대의 기획자들이 생각한 것처럼 자연은 실제로 항구적인 전쟁 상태인가?”(44, 45 페이지) 홉스는 인간 본성상 항구적인 전쟁 상태는 불가피하므로 사회적 안정과 번영을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를 위임받은 강력한 주권이 필요하다고 보았다.(187 페이지) 제한적인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개체들 중에 주어진 환경 조건에 더 잘 적응할 수 있는 개체가 살아남는 것을 찰스 다윈은 자연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약자가 항상 경쟁에 져서 완전히 도태된다면 지구상에는 소수의 강자만이 남아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장구한 진화 과정에서 생물다양성은 감소하지 않고 증가하였다.“(47 페이지)

 

네덜란드의 유대인 이민자 사회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무신론자라는 죄목으로 유대인 사회에서도 추방당한 스피노자는 유럽이 주도한 근대적 질서의 모순과 혼동을 자신의 개인사 속에 구현했다.(54 페이지) 스피노자가 태어난 해는 1632년이다. 이 해에 서양 근대사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이 여럿 태어났다.

 

미생물학의 아버지로 현미경을 개발한 레이우엔훅,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르, 존 로크 등이 그들이다. 17세기는 어떤 시대였는가? 중세적 현상으로 생각하기 쉬운 마녀사냥이 최고조에 달한 때가 바로 17세기다. 독일의 30년 전쟁이 일어난 때도 17세기다. 네덜란드의 17세기는 공화주의자 더빗을 살해하고 왕당파를 추종했던 네덜란드 대중의 광기와 노예적 이성의 시대였다.

 

경제 버블의 원조격인 네덜란드의 툴립 피버(tulip fever)17세기에 일어났다.(한국사 이야기여서 그렇지만 17세기 조선에서는 인조반정, 이괄의 난, 정묘호란, 병자호란, 기해예송, 갑인예송,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이 일어났다.) 1675년 페르메르가 숨을 거두었다.

 

2017년 세상을 떠난 존 버거는 발렌티너의 렘브란트와 스피노자를 인용하며 같은 시기에 암스테르담에 살았던 두 인물이 각자의 방식으로 교회의 권위에 저항하며 싸웠다고 말했다. 렘브란트가 파산 선고를 받은 해에 스피노자는 유대교회에서 추방당했다. 1656년에 일어난 일이다. 스피노자가 거미를 관찰하며 한 생각은 무엇이었을까? 들뢰즈는 스피노자가 파리를 잡아먹는 거미를 보며 죽음이라는 환원불가능한 외재성에 대해 사색했을 것이라 말했다.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다른 동물을 먹이로 삼지만 사는 동안에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에 억압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리라. 스피노자가 이 시대에 태어났다면 거미뿐 아니라 자연의 다양한 질서를 관찰하여 체계적인 생태 이론을 정립한 위대한 생태학자가 되었을지 모른다.(85 페이지)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이라는 유행어를 만들어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복잡한 다윈의 이론을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다. 복잡한 이론이 쉽게 이해되는 장점은 있지만 적자생존으로 단순화된 진화론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 사회를 항구적인 전쟁터로 오인하게 할 위험이 있다.(91 페이지) 다윈과 게오르기 가우스가 생물 간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알고 싶어 한 것은 경쟁배제 자체보다는 경쟁을 넘어선 공존의 비밀이었을지도 모른다.(102 페이지)

 

간디는 자신이 정말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받는 것도 도둑질이라 말했다. 그의 이 말은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을 생각하게 한다.(177 페이지) 그 자체의 필연성에 따라 존재하고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에는 넘치는 것도 모자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스피노자는 어둠을 직시하고 어둠 너머 어렴풋이 비치는 새로운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까지 누구도 진정한 인간해방과 절대민주주의를 상상하지 못했기에 스피노자의 사상은 네그리의 말처럼 너무 이질적인 야성적 파격이라 할 수 있다.(179 페이지)

 

홉스가 자연상태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대립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계약을 통해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고 보았다면 로크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도 개인의 권리를 상호 인정하는 사회를 인정하는 사회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했다.(187 페이지) 오직 계약을 통해서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끝내거나 타고난 권한을 신장시킬 수 있다고 믿은 사회계약론자들과 달리 스피노자는 인간은 본성적으로 공동체를 지향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묘사한 자연상태에서 개인들은 하나로 결합할 때 개인적으로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권리를 집단적으로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192 페이지) 기득권 세력이 보이지 않는 발로 뛰어다니며 시장 질서를 교란시키는 인간 사회보다는 자연생태계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더 잘 작동한다.(219 페이지) 홉스가 자연상태에서의 혼란과 폭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절대권력을 가진 왕권을 옹호한 것과 달리 스피노자는 개인을 모든 두려움에서 해방시킬 수 있는 다중의 지배를 꿈꾸었다.(224 페이지)

 

다중에 의한 자율적 사회 구성은 전통적인 계급론의 관점으로는 잘 파악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역사의 주요 고비마다 다중은 실체를 드러냈다. 저자는 사회의 올바른 구성 원리를 고민하던 스피노자에게 거미 관찰이 영감을 준 것처럼 자연에서 얻은 생태적 상상력이 한계에 봉착한 근대적 민주주의의 대안을 찾아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좋은 길 안내자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243 페이지) 이제 프레데리크 로르동의 정치적 정서를 읽어야 할 순서다.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이란 전통적 이원론을 전복하고 변용과 정서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운 스피노자에 대해 전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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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진화, 신의 출현 - 초기 인류와 종교의 기원
E. 풀러 토리 지음, 유나영 옮김 / 갈마바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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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학 박사 에드윈 풀러 토리의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은 원제(Evolving Brains, Emerging Gods)와 번역본의 제목이 일치하는 드문 책이다. 저자는 뇌가 진화함에 따라 신들이 출현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호모 하빌리스를 더 영리한 자아, 호모 에렉투스를 인식하는 자아, 옛 호모 사피엔스(네안데르탈인)를 공감하는 자아, 초기 호모 사피엔스를 성찰하는 자아, 현행 호모 사피엔스를 시간 속의 자아(를 가진 존재)로 분류했다.

 

신들은 약 200만년의 임신 기간을 거쳐 태어났다는 글로 포문을 연 이 책은 뇌 크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커진 뇌의 특정 영역들과 이 영역들을 잇는 연결의 밀도라고 설명한다. 호모 하빌리스의 뇌가 커진 이유를 설명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기후와 기타 환경 조건의 변화, 고기 섭취 증가와 같은 식단의 변화, 사회적 변화 등이다.

 

사회적 뇌 가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영장류는 그들의 유별나게 복잡한 사회 체계를 관리하기 위해 뇌를 더 크게 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호모 에렉투스가 자아 인식이 없는 상태로 전 세계로 퍼져나가 흔히 추웠던 기후에서 수십만 년 씩 생존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생존 기간을 헤아리면 호모 에렉투스는 지구상에 살았던 호미닌(현생인류의 근연종들) 중 가장 성공한 종이었다. 호모 사피엔스가 성찰하는 자아를 가졌다는 말은 그들이 남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인식했다는 의미다.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보인 행동 가운데 가장 획기적인 새로운 것은 시신을 의도적으로 매장하면서 부장품을 묻은 것이다. 현생 호모사피엔스가 약 4만 년 전부터 보이기 시작한 새로운 행동들 가운데 가장 뜨거운 관심을 모은 것은 예술의 등장이다.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갖춘 가장 획기적인 것은 자전적 기억이다. 정신적 시간여행을 통해 과거에 경험했던 개인적 사건들을 다시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 까닭에 자전적 기억은 자신의 미래 경험을 상상할 토대를 제공해주는 기억이다.(182 페이지) 이는 과거로부터 축적된 경험을 활용하여 자신을 미래에 온전히 - 이론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투사(投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189 페이지)

 

이 기억은 이점인 동시에 짐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알고 불안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전적 기억의 발달을 감안할 때 우리는 이 시기에 시각예술이 분출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란 말을 한다. 벽화 동굴에 동물이나 그 밖의 영이 존재했다면 이는 미지의 것을 설명하는 데도 활용될 수 있었을 것이다.(204 페이지) 동굴벽화를 좀더 복잡한 종교적 산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남아공의 인지고고학자인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가 대표적이다. 샤먼이란 원래 황홀경에 들어가서 병을 치료하는 시베리아 퉁구스 부족의 토착 주술사였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는 구석기 시대 동굴에 그려진 기하학적 문양은 샤먼이 황홀경 속에서 본 시각적 환각을 재현한 것이라 설명한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짓는 가장 중요한 특성으로 직립, 언어사용, 큰 두뇌, 작은 치아 등을 드는데 저자는 죽음에 대한 지식을 꼽았다. 강력 공감한다.

 

흥미로운 것은 과거의 자전적 기억에 의해 활성화되는 뇌 영역과 미래의 사건을 상상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에는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건망증 환자가 과거는 물론 미래에 대한 사고에서 결함을 드러내는 것과 차원이 같다.(214 페이지) 정착 생활을 할 때 고인을 주거지 인근에 매장할 수 있고, 그래서 선대 조상의 시신이 점차 축적되었다.(241 페이지)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관계에도 혁명이 일어나 사람들은 조상령을 가정에 들이기에 이르렀다. 농경과 조상숭배는 전자는 생계유지를 위한 차원에서, 후자는 위급할 때의 원조를 위해 함께 발달했다.(254 페이지) 원시사회에 대한 연구는 혼령과 신들의 연속체가 흔했음을 보여준다. 신의 범위도 인간적 특성을 띠며 특정 집단이나 부족에 국한된 신에서부터, 더 높고 심지어 더 멀리 있는 신, 세상을 창조했지만 세상사에 지속적으로 관여하지는 않는 신에까지 이른다.(255 페이지)

 

서유럽에서 신이 출현한 증거는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파키스탄, 남동부 유럽에 비해 모호하지만 내세에 대한 강박이 보편적이었음은 분명하다.(299 페이지) 5, 000년 전 4, 000년 전 중국 북부에서 룽산문화가 발달했다. 이 문화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조상숭배다. 조상과의 소통은 갑골을 이용한 점술을 통해 행해졌다. 갑골은 황소, 물소, 돼지, 양의 견갑골이다. 죽은 조상에게 특정 질문을 던져 뼈가 갈라질 때까지 열을 가해 갈라진 패턴을 조상이 내려준 답으로 해석했다.(308 페이지)

 

현생 호모 사피엔스에게 지고신이 나타난 것으로 보이지만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었다는 결정적 증거는 문자 기록 이후에야 확인 가능하다. 6, 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에서 그 증거는 물의 신 엔키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사원의 형태로 존재했다.(314 페이지) 4, 300년 전 유신론적 호미닌으로서의 현생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이래 신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정의하는 특성 중 하나가 되었다.(315 페이지)

 

죽음의 딜레마는 사람의 뇌 진화의 필연적 결과다. 인간은 나머지 자연으로부터 위풍당당하게 우뚝 치솟은 자기 자신의 찬란한 독특성을 인식하지만 결국 땅속 몇 피트 밑으로 돌아가 앞 못 보고 말 못하는 채로 썩어서 영영 사라진다.(327 페이지) 뇌 진화 이론은 신들, 그리고 신들과 공식 결부되는 공식 종교가 인간 뇌 발달의 산물이라고 상정한다.(331 페이지)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357 페이지)

 

영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프레이저는 우리 생물종의 절대 다수는 인간의 허영심을 이토록 만족시키고 인간의 슬픔에 이토록 위안을 주는 믿음을 계속해서 묵종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말했다.(358 페이지) 새로운 신과 종교가 계속해서 태어나듯 기존의 종교들은 계속해서 죽어갈 것이다.(359 페이지) ‘뇌의 진화, 신의 출현은 뇌의 진화에 따라 신이 출현한 사태(?)를 서술한 인상적인 책이자 투사란 말이 인상적인 책이다. 데이비드 루이스 윌리엄스가 말한 샤먼 이야기도 눈길을 끈다.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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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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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도 행간의 의미를 헤아려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조작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광해군이 왕기가 서린다는 정원군의 집을 빼앗아 그 자리에 궁궐을 지었다는 이야기는 광해군 당대의 사초 등 원자료를 옮긴 실록 본문이 아닌 인조(정원군 아들)대에 편찬될 때 작은 글씨로 추가된 세주(細註)가 출처라는 점이 대표적이다.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통해 다시 광해군 일기는 반정 세력인 서인의 입장이 반영된 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광해군 일기는 사학사(史學史)적으로 단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유일하게 정서본(正書本)과 중초본(中草本)이 남겨진 것이 광해군 일기다.

 

실록은 새 임금이 즉위한 뒤 임시기구인 실록청을 통해 편찬된다. 방대한 사고를 바탕으로 빠른 시일 내에 작성한(휘갈겨 쓴) 초벌 원고를 초초본(初草本)이라 하고 수정작업을 거친 원고를 중초본(中草本)이라 한다. 이 역시 초서로 휘갈겨 쓴 원고다. 중초본 원고를 정서한 것이 정초본(正草本)이고 정초본을 대본으로 활자를 뽑아 조판 작업을 벌여 인쇄한 것이 완성된 실록이다.

 

초초본, 중초본, 정초본은 세초(洗草)한다. 종이 재활용 차원이고 완성된 실록과 다를 경우 생길 시비거리를 막기 위한 차원이기도 하다. 광해군 일기의 정서본과 중초본이 남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 부족과 청나라의 군사적 위협 때문이었다. 인쇄를 포기하고 정서한 두 벌을 강화 정족산과 무주 적상산 사고에 보관했고 중초본은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한 것이다.

 

광해군 일기 뿐 아니라 광해군도 기록의 주인공이다. 조선의 어느 임금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많은 곳을 노숙까지 하며 다닌 것이다. 분조(分朝)를 이끌고 왜와 맞서 싸웠기 때문이다. 분조란 위급한 때를 당하여 조정(朝廷)이 피란할 때 임금과 세자(世子)가 따로 피란하여 세자(世子)가 거느리는 조정(朝廷)을 말한다. 이 분조는 조선 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사실 왜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왜가 그렇게 빨리 밀고 올라오지 않았다면 선조가 광해군을 왕세자로 낙점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광해군이 쫓겨난 것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서다. 폐주(廢主) 즉 쫓겨난 임금, 혼군(昏君) 즉 어리석은 임금 등의 이름이 그에게 붙었었다. 폐주는 맞지만 혼군은 아니다.

 

광해군을 쫓아낸 사람들은 반정 13년만에 청나라군의 침략을 받아 인조가 태종(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항복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반정 세력은 광해군의 대() 후금 정책을 비판했지만 기본적으로 광해군의 정책을 답습했다.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였다.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려 바른 세상으로 돌이킨다는 의미의 발난세반제정(撥亂世反諸正)에서 유래한 반정(反正)이란 용어 자체가 광해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기인한 것이다. 어떻든 반정 세력이 내세운 명분은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 무리한 토목공사, 후금과 밀통함으로써 재조지은을 베푼 명을 배신한 것 등이다.

 

광해군의 부인 유씨가 반정 당일 창덕궁에 들이닥친 반정 주체들에게 한 말이 많은 것을 말해준다.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요,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요?” 반정 주체들은 몇 사람을 빼고는 벼슬이 없는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 있었다.

 

이 부분에서 상기할 말이 있다. “우암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 주류 학자들은 주자학 강화에 여념이 없었고,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이정우 지음 인간의 얼굴’ 161 페이지)는 말이다. 포의(布衣) 신분이었거나 정치적으로 불우했던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권력을 찬탈(簒奪)했고 우암 당시 정치에서 배제된 남인들은 실학적 작업에 몰두했다.

 

맞 비교는 무리인가? 그렇지 않으리라. 물론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인조반정에 대해 동조했던 남인들은 나라를 다시 세운 경사(재조지경: 再造之慶)라 극찬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의 저자 유몽인을 보자. ‘상부(孀婦)‘란 시를 통해 유몽인은 새 남편감(인조)이 훌륭하다 해도 본래의 지아비(광해군)를 배신할 수 없음을 밝혔다.

 

이 시로 인해 그는 반혁명 행위자로 몰려 처형당하고 말았다. 어우(於于)란 그의 호는 공자를 조롱하는 말이다. ’장자천지조에 나오는 말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於于以蓋衆)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獨弦哀歌以賣名聲於天下者乎)이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라고 조롱한 데서 나온 말이다.(이덕일 지음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269 페이지)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이고 어머니는 공빈 김씨다. 광해군이 태어난 해인 1575년은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난 해이다. 정랑(正郎)과 좌랑(佐郎)을 의미하는 전랑(銓郞)5, 6품에 불과한 직이지만 장관인 판서까지도 견제할 수 있는 핵심 요직이었다.

 

이 자리를 둘러싼 논쟁으로 사림은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했다. 김효원 후임으로 추천된 심충겸이 외척(명종 비 인순왕후의 동생)인 까닭으로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세력이 동인이었고 옥석을 가려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서인이었다. 광해군이 유년과 소년 시절을 보낸 1580년대는 중요 전환기였다. 척신정치가 끝나고 사림들이 대거 조정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한 정여립 처리 문제로 인한 기축옥사(己丑獄事: 1589) 과정에서 남명 문하의 수재였던 최영경의 죽음으로 수사 책임자인 송강 정철에 대해 불만을 품었던 남명 조식, 화담 서경덕 계열의 사람들이 북인이 되고, 이황의 제자들은 남인이 되는 동인의 분열이 일어났다.

 

()의 원병 파견은 자국이 전쟁터가 되지 않기 위해 택한 조치였다. 광해군에게 영특하고 총명하다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명은 광해군을 왕세자로 승인해달라는 조정의 요청을 광해군이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를 들어 번번이 거부했다. 이는 광해군의 반명(反明) 감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은 끝내 명의 승인을 얻지 못했고 선조의 급서로 왕의 자리에 올랐다.

 

어렵게 왕의 자리에 오른 광해군이 풀어야 할 과제는 산적한 것이었다. 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무너진 국가 기반을 세우고 후궁의 자식이자 둘째로 등극한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해야 했던 것이다. 붕당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인재를 적재적소에 써야 하는 과제도 빼놓을 수 없었다.

 

심약했던 광해군을 더욱 심약하게 한 것은 형 임해군의 역모 혐의와 그에 따른 교살이었다. 광해군 5년인 1613년 대북(大北)이 영창군 및 반대파 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광해군의 계모인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도 연루되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도 저주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역모 관련자로 치부되어 대북파의 공격을 받았다.

 

저주 행위란 선조가 죽은 것은 이미 죽은 선조의 첫 왕비인 의인왕후 탓이라는 소문을 듣고 인목대비가 의인왕후의 무덤에 사람을 보내 허수아비 등을 묻는 등 주술적인 행동을 한 것을 말한다. 폐모 논의는 이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무리한 토목공사는 광해군의 큰 실책이었다. 광해군은 단종과 연산군이 쫓겨난 창덕궁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당시 파주 교하(交河) 천도론이 있었으나 신료들의 반대에 막혔다. 이 좌절로 광해군이 서울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으로 방향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후금을 치는 데 필요한 원병을 보내라는 명의 요청도 광해군에는 어려운 문제였다. 조선을 살렸다는 명분을 내세운 명의 무리한 은() 수탈도 조정과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누르하치가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한 결정적 계기는 임진왜란이었다. 광해군은 명의 출병 요구를 거절하다가 결국 강홍립을 도원수로 하는 1만의 군대를 보냈다.

 

광해군은 신중하게 처신(관망)하라는 명을 내렸다. 조선군은 후금에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항복 사실만을 놓고 보면 강홍립은 비난받아야 하지만 그는 악조건 속에서 최선을 다했다. 관망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이미 전세가 기운 상황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서인들은 요동 전체를 후금에게 빼앗긴 것을 강홍립의 책임으로 돌렸다. 하지만 언급했듯 전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었음을 알아야 한다. 광해군은 강홍립의 항복을 고의적인 것으로 여기는 명의 의심을 희석하려 했다. 정묘호란 시 강홍립은 향도(嚮導)로 차출되었다.

 

1616년 해주목사 최기(崔沂)의 역모 사건에 연루되어 이천에 유배되었다가 1619년 풀려난 뒤 광해군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나아간 이귀란 자가 있다. 이귀 일당이 역모를 꾀한다는 투서가 들어가 광해군이 직접 이귀를 문초하고자 했으나 광해군을 주물렀던 개똥이가 이귀를 비호함으로써 결국 유야무야되고 말았고 이는 반정의 빌미가 되었다. 광해군의 외교는 내치에 의해 뒷받침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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