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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베르그송 창조적 진화 서울대 선정 만화 인문고전 50선 16
윤원근 글, 이남고 그림 / 주니어김영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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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선정 인문고전 50선 가운데 한 권인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를 만화로 소개한 책이다. ‘창조적 진화를 읽으려면 먼저 기계론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기계론은 자연 현상과 사회현상을 기계처럼 돌아가는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려는 생각이다. 과거의 원인이 현재를 결정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세계를 변하지 않는 기본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가정한 뒤 모든 현상을 이 기본 요소들의 결합으로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기계론은 모든 현상에서 법칙을 발견하려고 한다. 기계론에서 시간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시간에 관계 없이 법칙은 적용되기 때문이다. 법칙이란 것은 언제나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시간은 생명의 지속(持續)을 의미한다.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에서 생명과 과학은 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생명은 창조하는 힘이고 과학은 단순한 모방이다. 변화의 가능성이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을 의미하는 창조적 진화가 나오게 된 배경은 스펜서의 진화론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스펜서는 다윈보다 먼저 적자생존, 생존경쟁 등의 개념을 사용한 학자다. 다윈은 생물 진화론자, 스펜서는 사회 진화론자다. 베르그송은 스펜서의 진화론이 갖는 문제를 이미 진화가 이루어진 것을 사후적으로 분석하고 설명한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보았다. 베르그송은 진정한 진화는 직접 그림을 그릴 때처럼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베르그송 철학을 이해하려면 생명과 생명체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이 구체적 형태를 갖기 위해 물질 속에 들어간 것이 생명체다. 생명체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하지만 생명의 참된 성질은 물질적 욕구를 넘어서는 데에 있다.

 

베르그송을 윌리엄 제임스와의 관련하에서 볼 필요가 있다. 인간 생활을 끊임 없는 적응 과정으로 파악한 제임스는 인간 의식도 하나의 과정이나 흐름으로 보았는데 이는 생명을 창조적 과정 속의 흐름으로 본 베르그송 사상과 흡사하다. 지속(持續)하는 것은 항상 전체성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흘러가는 물처럼 끊을 수 없다는 의미다. 물은 고정과 정주(定住)를 거부한다.

 

지속하는 시간은 생명의 시간이고 지속하지 않는 시간은 시계의 시간을 말한다. 진주 목걸이를 이어주는 줄이 지속하는 전체 시간에 비유될 수 있다. 과학은 시계의 시간으로 모든 계산을 한다. 지속과 변화는 같은 것의 다른 표현이다. 베르그송 철학에서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성숙해지는 것을 의미하고 창조를 의미한다.

 

과학에서는 설탕물을 농도, 밀도 등으로 나누어 분석하지만 설탕물이라는 전체 속에서 설탕과 물은 서로 뒤섞여 있다. 물질적 대상들도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연속적인 흐름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론 우리는 그런 점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생명은 지속의 특징을 매우 분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의 진화는 지속의 과정을 통한 창조적 진화라 할 수 있다. 과학은 반복 가능한 것만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다. 반복 가능한 것을 객관성이라 한다. 기계론과 같은 것이 목적론이다.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이 현재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계론의 과거가 목적론의 목적으로 바뀐 것이라 할 수 있다.

 

목적론도 기계론처럼 생명의 자유로운 창조능력을 부정한다. 기계론이나 목적론은 미래를 예측하려는 눈물 겨운 노력을 의미한다. 들뢰즈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신은 그 자신 안에, 그 자신의 본성 속에 그를 구성하는 속성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그는 아무것도 결여하고 있지 않기에 생산할 필요가 전혀 없다.”(’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참고)

 

진화를 적응 과정으로 보는 견해는 두 가지다. 정향 진화론과 다윈 진화론이다. 전자는 진화가 생존에 불리해도 한번 방향이 정해지면 계속 그 방향으로 나간다고 본다. 너무 긴 공작의 꼬리나 아일랜드 큰사슴의 큰 뿔이 대표적이다. 정향진화론은 외부 조건이 생명체의 변화를 직접 일으킨다는 직접적 적응을 주장한다. 후자는 외부 조건이 생존에 유리한 변이들을 선택하고 불리한 변화는 도태시킨다는 간접적 의미의 적응을 주장한다.

 

베르그송은 가리비조개 등의 연체동물의 눈과 척추동물의 눈을 설명한다. 두 동물은 전혀 다른 종인데 눈 구조가 아주 유사하다. 베르그송은 이런 유사성이 나타나는 것을 생물 종들이 동일한 근원을 가지며 이 근원이 하나의 폭발적 힘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고전의 유혹 3‘ 177, 178 페이지) 눈과 같은 기관에서는 두 가지 두드러진 점이 있다. 구조의 복잡성과 기능의 단순함이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엘랑 비탈이 진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철학이다. 베르그송은 생명의 약동하는 힘을 화약이 폭발하는 힘에, 그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을 화약의 폭발에 저항하는 탄피의 힘에 비유했다. 생명의 진화는 자기 안에 지닌 생명의 약동하는 힘과 그것에 저항하는 물질의 힘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결정된다. 베르그송은 동물과 식물을 명확히 구분해주는 기준은 없다고 보았다.

 

모든 생명체들은 초보적인 형태든 잠재적인 형태든 본질적인 특징들을 공유한다. 거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식물, 동물, 이성의 힘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비탈길을 따라 내려오는 것이 물질성을 지배하는 질서라면 올라가는 것은 생명의 질서다. 여기서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사선(斜線)을 거슬러 오르는 노력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온다. 나는 엘랑 비탈에서 석가모니 부처의 위대한 포기(great renunciation)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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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 - 스피노자와 함께 인생의 새 판 짜기
신승철 지음 / 사우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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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승철의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17세기 철학자 스피노자의 주저(主著) ‘에티카의 메시지로부터 비롯된 책이다. ‘기하학적 순서로 증명된 윤리학이란 부제를 가진 에티카는 자로 재고 칼로 자른 듯한 논리적 형식 속에 가장 비논리적인 영역의 정서, 사랑, 욕망의 자기 과정을 그려낸 책이란 것이 저자의 주지(主旨).

 

스피노자는 물론 신승철의 책들을 읽으려면 정동(情動)이란 개념을 알아야 한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감정과 정동을 날카롭게 가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체로 감정은 일시적이고 우발적인 기분 및 고립된 상태의 기분을 의미하고 정동(情動; affect)은 움직임과 관련된 생각, 삶과 관련된 것. 돌봄, 살림, 보살핌, 섬김 등과 관련된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기쁨, 슬픔, 욕망 등이 정동의 기본적 형태이며 여기서 우울, 희망, 공포, 연민, 호의, 후회, 겸손 등이 파생된다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기쁨, 슬픔 등의 정동은 아주 사소한 우발성에서 기인한다. 우발적인 것은 그저 돌발적이고 휘발적인 것이 아니라 정동의 자기원인이 되어 기쁨이 되기도 하고 슬픔이 되기도 한다.

 

물론 우발적인 것은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주어지지만 우리의 삶 내부에는 수동을 능동으로 바꿀 정동과 사랑의 능동적인 능력 즉 기쁨의 능력이 숨어 있다. 저자는 꽃은 한 뿌리에서 나와도 남성성이 강하면 수술을, 여성성이 강하면 암술을 만든다는 말을 하며 삶의 미세한 영역에서 사상을 발견하고 그것을 통해 더 지혜로워지는 것이 여성성의 역할이라는 점에서 자신은 자신 안에 잠재된 여성성의 영역을 더 계발할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 자주 등장하는 욕망이란 말은 갈애나 탐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의지로서의 욕망이자 더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라 설명한다. 스피노자는 그것을 코나투스(conatus: 자기보존욕구)라 불렀다.

 

천 개의 고원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사랑을 되기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며 남성 되기는 없다는 전제하에 사랑이 성립하려면 여성의 여성 되기와 남성의 여성 되기가 만나야 한다고 말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누구나 내면에 여성성을 가지고 있으며 여성 되기는 이미 자기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는 일이다. 살림의 지혜, 생태적 지혜를 공유해야 하는 것이다. ‘에티카의 출발점은 아주 작은 삶의 영역(국지적 영역)이다.

 

되기의 존재론은 존재의 존재론에 대한 의문에서 생겨난다. 나는 왜 나인가?, 나는 왜 바로 이렇게 존재할까?, 세계는 왜 꼭 그렇게 존재할까? 현실성보다 더 많은 존재, 실존하는 세계보다 더 큰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인 인간은 늘 이렇게 묻는다..현실과 가능이 꼭 들어맞도록 일치한다면, 있음과 있을 수 있음(그리고 있어야 함)이 구분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에는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기대도 후회도 없을 것이다...다른 삶으로의, 바깥으로의 이행을 들뢰즈, 가타리는 되기라 부른다.”(이정우 지음 천 하나의 고원’ 164, 165, 166 페이지)

 

저자는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해야한다는 당위나 의무가 아니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있다는 경우의 수를 제공하는 것이라 말한다. 저자는 되기는 사랑이라 말한다. 소수자 되기가 여성 되기, 노숙인 되기, 장애인 되기, 아이 되기, 동물 되기 등으로 나타나는 것이다.(51 페이지)

 

공동체가 전제되지 않은 내재성의 철학은 상상하기 어렵다. 스피노자의 삶은 렌즈 세공을 하는 작은 도제조합의 영토를 비롯해 친구들과의 교류와 우정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적인 관계망과 배치 위에서 이루어졌다.(내재성이란 초월성의 영역에 호소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철학은 프로이트의 동일시와 다르다. 프로이트는 상담자에 대한 내담자의 동일시를 전이(transference)라 부르면서 각별히 중요시했다.

 

스피노자의 내재성은 타자와의 동일시가 아니라 타자가 갖고 있는 생명과 활력으로서의 특이성을 자신의 내재성(타자화된 외부가 자신의 내부적인 삶과 마음, 생활에 자기원인으로 들어와 있다는 의미다.)으로 이해하면서 공통성을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차이를 이해하고 연대하는 과정이다.(67 페이지) 연대한다는 것은 다른 삶, 다른 생각, 다른 관계가 생산되고 환대받는 것을 의미한다.(68 페이지)

 

스피노자는 프로이트에 앞서 무의식이란 개념을 고안한 사람이다. 스피노자에게 무의식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관념이나 내면이 아닌 배치의 관계망에서 서식하는 마음이라 보았다. 스피노자는 우리의 삶에 순식간에 자리 잡는 욕망을 허구나 가상이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삶을 구성하는 원천이자 자기원인이라 생각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단순하고 소박하고 절제된, 어쩌면 촌스럽게 느껴지는 정서의 기하학을 담고 있는 책이다.(115 페이지) 스피노자에게 사랑은 신적 속성이자 신체변용이다.(123 페이지) 스피노자는 순수, 겸양, 소박을 초월적인 신의 것으로 두지 않고 삶의 내재적인 것으로 보았다. 스스로 가장 먼저 내재적인 신, 범신론적인 신에 입각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이는 개인도 수행하면 신이 될 수 있다는 영지주의와 거리가 멀다. 그렇게 생각하기 이전에 사물, 생명, 식물, 광물에도 신이 깃들어 있다는 것이 범신론이다. 그런 세계에서는 모두가 소중하고 유일무이하고 특이한 것으로 가득하다.(125 페이지)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신체, , 행동을 변화시켜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144 페이지)

 

스피노자는 욕망을,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성이라 정의했다.(149 페이지) 스피노자는 사랑과 욕망이 많아질수록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이는 평행론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평행론의 끝에는 사랑할수록 지혜로워진다는 결론이 있다. 지혜는 우리 안의 여성성을 어떻게 성숙시킬 것인가에 달려 있다.(153 페이지)

 

스피노자에게 앎이라는 문제는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수많은 진리를 내가 얼마나 많이 수용하고 취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와 밀접히 관련되어 있는 지혜를 나의 신체변용을 통해 얼마나 사랑하고 욕망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160 페이지) 저자는 스피노자가 추구한 생태적 지혜의 노선은 생명과 삶이 던지는 문제제기일 수 있다고 말한다.

 

물음표, 호기심, 문제의식, 질문이 많아질수록 더 지혜로워지기 때문이다. 적어도 세상을 뻔한 것으로 보지 않으려면 질문을 던져야 한다.(161 페이지) 전문가만이 문제의 핵심과 본질은 이것이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문제 제기는 답이 없을 수도 있고 여러 개일 수도 있다. 특히 삶, 사랑, 실존에 관한 질문이라면 더욱 그렇다.(162 페이지)

 

스피노자에게 정신은 신체변용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전개되거나 성숙하거나 발전할 수 없다.(164 페이지) 저자는 물론 모든 정동, 사랑, 욕망의 흐름이 과연 지적이고 이성적인 인과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고 말한다.(174 페이지) 저자는 중요한 말을 한다. 일시적으로 다가와 마음에서 공회전하는 생각이 감정이고 그 감정 중에서도 자기원인에 따라 움직이는 생각이 정동이라고.(182 페이지)

 

주자(朱子)와 스피노자의 삶을 비교하는 것도 흥미롭다. 주자는 황제에게 올릴 상소문을 쓴 후 주역으로 점괘를 보고 올릴지 말지를 결정했다. 스피노자는 유한 속에 내재된 잠재성을 통해 무한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스피노자의 이런 태도를 이론적으로 구현해낸 사람이 들뢰즈다. 그의 노마드는 제자리에서 여행하는 법인 국지적 절대성을 의미한다.

 

국지적 절대성의 과제는 국지적인 영역인 지금 여기 - 가까이에 무한한 잠재성이 내재한 삶과 신체가 있으며 이를 어떻게 하면 촉매하고 고무하여 색다름을 생산하고 창조할 것인가이다.(186, 187 페이지) 들뢰즈와 가타리의 소수자 되기라는 개념은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현대적으로 혁신한 개념이다.

 

정동의 흐름이 성공주의, 승리주의, 성장주의의 논리처럼 위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소수자에 대한 사랑을 통해 아래를 향해 내려간다는 점에서 그렇다.(190 페이지) ’에티카는 후반부에서 전반부와 전혀 다른 필체, 내용 등을 보여준다. 그를 후원하던 공화파 드 비트 형제가 잔인하게 피살당한 사건이 그런 변화를 초래했다.

 

스피노자는 3부 이후 당대의 증오, 예속을 영예로 여기던 상황, 맹목적 신앙에 빠진 상황을 정면 돌파하기 위해 고심했다. 스피노자는 입구와 출구의 불일치로 인해 발생한 에너지 소진을 이기지 못하고 에티카완성 2년 후인 167744세의 삶을 마쳤다.(195, 196 페이지)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영구적 사랑의 탈주선이었다.

 

스피노자는 혼자였지만 가상의 독자를 설정해 자유인의 해방전략 즉 사랑이 곧 혁명이라는 것을 일갈했고 민주사회와 다중에 대한 민주주의 전략을 이야기했으며 사랑, 욕망, 정동의 지도 그리기를 시행했다.(215 페이지) 노마드 이론에 최적화된 사람이 은둔자로 불렸던 스피노자일 것이다.(220 페이지) 문제는 현실을 뻔하고 비루하게 보는 데에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생명과 자연이라는 그 신기한 외부가 우리 내부에 잠재되어 있다고 말한다. 삶의 내재성은 곧 외부성이라는 점에서 엄청난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잠재성을 더 풍부하고 다양한 특이성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255 페이지) 저자는 스피노자를 탈근대의 예수로 정의한다. 답을 내놓는 철학이 아닌 아이처럼 호기심, 상상력, 질문을 던지는 탈근대의 상황으로 지평을 가로질러 주파했기 때문이다.(270, 271 페이지)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는 자기원인에 따르는 욕망 즉 정동의 개념이다.(285 페이지) 스피노자는 에티카를 완성하고 정치론과 민주주의에 대해 정리하던 중 폐결핵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 아무런 소유도 없었고 병마에 시달리려 가냘픈 몸만이 있었다.

 

그는 임종을 지켜준 로데빅 마이어와 친구들을 평생 투명한 렌즈를 응시했을 그 눈으로 바라보며 숨을 거두었다.(287 페이지)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신 즉 자연이 지닌 질서를 이해하는 사람은 신을 사랑할 수 있을 뿐 결코 복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결국 신은 우리 안의 보이지 않는 사랑, 욕망, 정동이다.(295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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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 - 수원화성 걸어본다 17
김남일 지음 / 난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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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수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60이 넘어서야 마침내 온전한 화성(華城) 일주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김남일 작가의 책이다. 난다 출판사의 걸어본다 시리즈 17번째 책이다. 강석경의 경주, 허수경의 뮌스터, 배수아의 알타이, 한은형의 베를린 등이 관심을 끄는 가운데 김남일 작가의 책을 고른 것은 수원 화성(華城)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책은 김남일 작가의 문학적 표현과 수원 화성과 정조(正租)에 대한 서술로 이루어졌다. 화성은 원래 수원성으로 불리던 곳이다. 화성에는 치()가 있다. 꿩처럼 몸을 숨긴 채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게 성곽 바깥에 철(: 볼록할 철)자 형태로 약간 돌출시켜 만든 구조물을 가리킨다.

 

저자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느낀 만큼 보인다는 말로 바꾸고 싶을 때가 있지만 어떻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의문의 일패를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나는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맞지만 정감이 생겨야 알려는 노력을 기울인다는 점에서는 느낀 만큼 알려 하고 그런 만큼 보인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라 생각한다.

 

성곽의 낮은 담을 여장(女墻) 또는 타(), 우리 말로는 성가퀴라 한다. 성가퀴에 세 개의 총 구멍이 있다. 가운데 구멍은 근총안, 양 옆 구멍은 원총안이다. 포루(砲樓)는 포를 쏘는 누각이다. 저자는 만일 카프카가 우리나라에 살았다면 다른 작품은 몰라도 결코 ()’ 만큼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한다. 이 땅 어디에도 저 멀리 고딕체 글씨처럼 우뚝 솟은 성을 발견할 수 없었을 테니까.

 

조선의 성은 높이가 아니라 둘레와 길이로 권위를 주장한다. 저자는 우리의 성은 우뚝 솟은 성채가 아니라 상실을 또 다른 기의로 갖는다며 인조(仁祖) 이야기를 한다. 곤룡포 대신 하급관리의 남색 옷을 걸치고 정문이 아닌 서문으로 나선 인조는 그들이 정한 법에 따라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만은 면할 수 있었다.” 몸이 묶이거나 관을 끄는 치욕이란 함벽여츤(銜璧如櫬)을 말한다. 손을 뒤로 묶이고 입에 구슬을 물고 관을 뒤집어 쓰는 치욕이다.

 

젊은 저자에게 성을 오르는 일은 폐허를 밟는 일이었다. 암문(暗門)은 벽돌로 쌓은 점이 특징이다. 포루(鋪樓)는 성가퀴를 앞으로 튀어나오게 쌓고 지붕을 덮은 부분이다. 치성(雉城)에 있는 군사를 보호할 목적으로 지은 것으로 포대를 설치하는 포루(砲壘)와 동음이의어다. 1795년 정조는 야간 훈련을 직접 참관했다. 야간 훈련시에는 매화(埋火) 즉 땅에 묻은 화약이 밤하늘에 치솟았다가 마치 매화꽃이 일시에 떨어지듯 떨어졌다.

 

화성의 남문은 팔달문, 북문은 장안문, 동문은 창용문, 서문은 화서문이다. 화홍문은 북쪽 수문이다. 화령전(華寧殿)은 순조가 정조의 어진을 봉안하고 제사 지내던 곳이다. 연무대는 병사들의 훈련장이다. 팔달산 정상의 화성장대를 서장대로 부르고 연무대를 동장대라 부른다. 정조가 장용영 군사들을 위해 만든 국영 농장인 둔전을 대유평 또는 대유둔이라 한다.

 

수원 사람들은 팔달산을 팔딱산이라 불렀다고 한다.(29 페이지) 그런 감각으로 저자는 서문은 늘 그렇게 서 있어 서문이라 말한다. 공심돈은 안이 비어 있는 돈()이다. 돈은 성곽 주변을 감시하는 망루다. 화성에는 공심돈이 셋이지만 서북공심돈을 대표로 꼽아 그저 공심돈이라는 대명사로 고유명사를 대신한다. 1797년 정월 정조는 공심돈 앞에서 우리 동국 역사상 최초의 건물이라. 마음껏 구경하라.”는 말을 했다.

 

동북각루로 지어진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성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예전 수원에서는 동문은 도망가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졌다고 말했다.(89 페이지) 정조는 북문인 장안문을 설계도와 다르게 200미터나 옮겨 쌓도록 했다. 화산(華山)에 있다가 사도세자의 묘를 천장할 때 이주해온 200여명의 백성들의 집을 피해 짓도록 한 것인데 이로 인해 화성은 성곽이 반듯하게 원호를 그리지 않고 군데군데 삐뚤빼뚤한 모양을 하고 있다.

 

반사(頒賜)는 임금이 물건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흰떡, 수육, 부채, 척서단(滌暑丹), 솜옷, 털모자 등을 나누어 주었다.(: 씻을 척) 당시에 귀마개, 털옷 등은 아무나 가질 수 없었다. 정조는 즉위년에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들이 왕의 침전이자 서재인 존현각(尊賢閣)에 난입하는 있어서는 안 될 일을 겪었다. 노론 영수 홍상범(洪相範)이 주도한 사건이었다. 홍상범에게 매수된 호위군관, 도성 무사들, 심지어 액정서(掖庭署) 소속들까지 가담했다.

 

후일 정조가 친위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홍상범은 책형(磔刑)으로 죽었다. 동북 공심돈은 서북공심돈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받지만 나선형 계단으로 인해 소라각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자는 사회 과목 성적도 제법 좋은 편이었지만 행궁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조차 잘 몰랐고 가르쳐주는 이도 없었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화성행궁을 둘러보는 일은 기억과 기록 사이를 걷는 줄타기와 같다. 이때 기댈 수 있는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 사도세자의 무덤은 수은묘에서 영우원으로,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격상되었고, 고종(1899)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함에 따라 융릉으로 격상되었다.

 

을묘년은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회갑을 맞은 해이다. 사도(思悼)는 영조가 내린 시호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긴 것은 1789년의 일이다. 정조는 현륭원 앞에서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애통해했다.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할 정도였다.

 

나혜석의 출생지는 화령전 인근 어디쯤이다. 저자는 나혜석의 단편 소설인 경희를 읽고 시대와 맞섰던 그녀의 당당한 불화에 감탄했다. ‘수원을 걷는 건 화성을 걷는 것이다는 독특한 책이다. 작가 개인의 기억과 문학적 표현들과 화성과 정조에 대한 사실(史實)들이 어우러진 책이기 때문이다. 시간 내서 책에 언급된 이탈로 칼비노, 나혜석, 발터 벤야민 등에 대한 책을 읽으면 좋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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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공부할 시간 - 인문학이 제안하는 일곱 가지 삶의 길
김선희 지음 / 풀빛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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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의 나를 공부할 시간은 사마천과 괴테, 디드로와 이규경, 브루노와 최제우,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와 정약용,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 페트라르카와 주희를 각기 다른 주제로 묶어 설명한 책이다. 사마천과 괴테는 여행하는 삶, 스피노자와 정약용은 유배당한 삶, 성호 이익과 레비나스는 공감하는 삶 등이다.

 

세창출판사에서 나온 프레너미 시리즈가 있다.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도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학문을 발달시켜온 둘 이상의 사상가를 비교, 대조하여 이해를 극대화시키는 시리즈라고 한다. 니체 vs 바그너, 하이데거 vs 레비나스, 사르트르 vs 메를로퐁티, 루터 vs 칼뱅 등의 책이 나와 있다. 궁금한 것은 정약용 vs 듀이란 책이다. 시대적으로 겹치지 않은 두 사람이 함께 묶였기 때문이다. 공명하는 부분과 대조적인 부분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좋을 것 같다.

 

나를 공부할 시간을 사게 된 가장 큰 요인은 동양철학 스케치 2‘를 통해 저자의 역량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나를 공부할 시간에서 큰 관심을 부르는 사람들은 로자 룩셈부르크, 스피노자, 주희(朱熹) 등이다. 특히 유대교로부터 파문(破門)당한 스피노자와 오랜 유배 생활을 한 정약용이 한데 묶여 설명된 것은 흥미마저 부른다.

 

물론 정약용과 주희를 한데 묶을 수도 있고 괴테와 성호 이익을 한데 묶을 수도 있다. 정약용과 주희는 신유학에 대한 입장 차이를 주제로, 괴테와 성호 이익은 박물지적 관심으로. 그러면 전자는 대립적인 면이, 후자는 공통점이 요점일 것이다.

 

사기(史記)’의 저자 사마천이 여행으로 큰 전환의 계기를 맞았다는 점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천문관측과 의례(儀禮)를 담당하는 태사령(太史令)이었다. 그러나 국가 제사인 봉선제에서 배제된 뒤 화병을 얻어 통한 속에서 아들에게 역사서 집필의 과제를 안기고 눈을 감았다.

 

사마천이 행한 여행이 사마천의 사기 집필에 큰 역할을 했다. 아예 저자는 사마천이 여행을 하지 않았다면 사기를 쓸 수 없었을 것이란 의미의 말을 한다. 사마천에게 여행을 권한 사람은 아버지 사마담이었다. ‘사기가운데 백이, 숙제 이야기도 있다. 그들이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은 것은 제후국인 주나라가 천자국인 은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사기의 특징은 인물과 사건 중심의 서술을 했다는 데 있다. 편년체가 아닌 기전체다. 편년체는 연도 중심의 서술 즉 왕조의 변천을 서술한 연대기란 위상을 갖는다. 괴테는 평생 수많은 곳을 여행했고 죽기 직전까지도 등산을 멈추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괴테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그의 이탈리아 여행을 든다. 괴테는 자신은 이탈리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말을 했다.

 

괴테의 여행이 남긴 가장 본질적인 흔적은 아마도 그의 주저 파우스트에 담겨 있을 것이다.”(39 페이지) 앎을 좇는 삶의 디드로와 이규경 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을 수집하고 분류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하는 것은 기존의 질서나 가치 체계에 대한 재평가와 재배치란 것이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비판 및 저항으로 연결된다.

 

이규경은 간서치(看書癡) 이덕무의 손자다. 이규경의 호는 오주(五洲). 그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는 백과전서다. 오주는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망과 그 지식을 길어올릴 수 있는 여행에 대한 동경을 담은 말이다. 연문(衍文)은 군더더기 문장이란 의미다. 장전(長箋)은 길게 쓴 주석이란 의미다. 산고(散稿)는 정리되지 않고 흩어져 있는 글이라는 의미다.

 

브루노와 최제우(1824 1864)는 꿈에 이끌린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두 사람 다 비범한 꿈을 꾸고 전혀 다른 삶을 산 사람이다. 최제우가 산 시대는 순조(재위: 1800 1834), 헌종(재위: 1834 1849), 철종(재위: 1849 1863)의 시대였다. 정순왕후 김씨(경주 김씨)의 수렴청정, 순조 비 순원왕후 김씨(안동 김씨), 순원왕후의 부친 김조순 등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극성을 부린 시대였다.

 

백성을 가혹하게 쥐어짠 세도정치로 파탄난 민생이 란()을 초래한 시대였다. 홍수전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변혁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혁명가란 이름은 실천의 결과에 관계 없이 부여되는 이름이다. 로자 룩셈부르크(1871 1919)는 폴란드 출신의 여성 혁명가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20세기 초 독일에서 혁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지만 거의 모든 국면에서 억압받고 차별받았던 소수자였다. 마르크스 이후의 최고의 이론가, 탁월한 연설가, 진정한 혁명가 로자는 독일 민병대원의 무자비한 폭력에 희생된 비운의 인물이다. 유대인이었고 차별받는 여성이었고 어려서 앓은 좌골 관절염으로 평생 다리를 절었던 장애인이었다.

 

스피노자가 살았던 17세기 네덜란드는 당시 유럽에서 일종의 종교적 중립지에 가까웠다. 유럽 곳곳에서 박해받던 종교 분파들이 종교의 자유와 관용을 보장한 신생 독립(스페인으로부터)국가 네덜란드로 몰려들었다. 스피노자는 예수회 출신의 반 덴 엔덴을 만나 장래 희망을 랍비에서 철학자로 바꾸었다. 가업을 잇거나 랍비가 되는 것 외에 생계를 이을 방법이 없었던 스물네 살의 스피노자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 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성장한 유대교 공동체에서 추방당한 뒤 그는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인 렌즈 깎는 일을 하며 독립적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스피노자가 렌즈만 연마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철학을 가르치기도 했고 친구들과 꾸준히 교제했다. 헨리 올덴부르크 같은 친구와 계속한 서신 교환은 학술적 토론장의 역할을 대신했다.

 

당시 스피노자를 충분히 비난하지 않는 사람들은 비판을 받았을 정도로 스피노자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유대 기독교적 세계관과 전통 신관을 전면 부장한 그의 행보 때문이었다. 스피노자는 이 세계가 초월적 세계와 현실적 세계로 이원화된 것이 아니라 일원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본 자연은 목적이나 의도 없이 무한히 생성 변화하는 이 세계 자체다. 현실 세계 외에 초월적 세계가 없다는 의미다. 이 세계는 신이라는 실체(다른 사물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존재와 그 특성이 그것 자체에 의해서만 설명되는 것)가 변용된 모습으로 이를 양태라 한다. 그에게 세계 자체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인격적이며 오로지 사유로만 존재하는 신 관념을 버리고 자연의 물질성까지 신의 속성으로 바라보았다.

 

인간을 포함한 자연 전체가 신의 양태며 따라서 모든 것이 신 안에 들어 있다. 신은 자연의 원인이지만 초월적 원인이 아니라 내재적 원인이다. 신이 만물의 내재적 원인이라는 말을 원인과 결과가 함께 하는 바다와 파도의 관계로 비유해 설명할 수 있다. 바다가 파도의 원인이지만 바다는 파도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다. 자연 역시 결과로 존재하지만 원인인 신 안에 존재한다.

 

이 자연 세계는 인격적 신의 초월적 계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과관계의 법칙으로 질서잡힌 합리적인 세계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우연적이며 유한하다. 그런 인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 욕망이다. 스피노자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사물은 자기를 지키려 하며 자기 안에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의해 존재한다고 보았다. 코나투스가 정신에 관계될 때 의지라 하고 정신과 육체 모두에 관계될 때는 충동이라 한다.

 

충동을 의식하면 욕망이 된다. 충동과 욕망을 구분할 줄 모르는 인간은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지만 이는 결국 자연의 필요성에 따른 행위다. 스피노자는 우리가 선을 행하는 것은 그것을 선이라고 판단해서 그것을 향해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노력하고 의지하고 욕망하기 때문에 그것을 선이라 판단한다고 보았다.

 

저자는 유배되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정약용을 스피노자와 유사한 사람으로 본다. 그가 산 시대는 정조, 순조, 헌종 시대였다. 정조와의 좋은 시절이 끝나고 순조, 헌종 시대에 그는 많은 고난을 겪었다. 정조는 정약용이 서른 아홉에 유배되기 직전까지 그의 최대 후원자였다. 정약용을 이해하려면 정조만큼이나 광암 이벽(정약용 형수의 남동생)을 알아야 한다. 이벽은 성호 이익의 제자 권철신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람이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였는가 여부는 아직도 논쟁거리다. 그에게 서학은 현대적 개념의 종교였다기보다 새로운 학문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유배 기간 내내 정약용은 가난과 병을 짊어져야 했다. 몸이 갇힌 만큼 정약용은 강렬한 의지로 자신의 학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그토록 많은 저술을 남긴 것은 유배 기간이 길어서만은 아니다.

 

강진에는 어머니 종친인 해남 윤씨들이 살았는데 처음에는 죄인으로 유배 온 정약용을 외면했지만 결국 그를 후원했고 정약용은 해남 윤씨 가문의 장서들을 연구에 활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남 윤씨 자제들이 제자로 들어와 정약용의 저술을 돕기도 했다. 정약용의 작업 중 상당 부분은 제자들과 공동 작업을 통해 이루어낸 것이다. 정약용은 제자들이 필사하고 분류하고 정리해 놓은 전거들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이는 방식으로 저술을 완성해 나갔다.

 

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다. 그 후 1836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정약용은 언젠가 자신의 학문이 세상에 쓰일 날을 기대하며 저술을 정리했다. 이 당시 그가 선호했던 호는 후대를 기약한다는 의미의 사암(俟菴)이었다.(: 기다릴 사)

 

그의 사상 전체가 시대와 불화했다거나 시대에 담을 수 없을 만큼 급진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정약용 철학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의 지배 학문이었던 주자학과 거리를 두었다는 점이다. 그가 젊어서 접한 천주교는 그의 정치적 생명을 끊었지만 그 안에 담긴 새로운 세계관은 정약용에게 유학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

 

]성호 이익에게 가난은 일상적인 삶의 조건이었다. 레비나스와 이익은 공감하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와 주희(朱熹)는 읽고 쓰는 삶으로 묶인 사람들이다. 페트라르카는 거의 중독에 가까울 만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읽고 또 썼다. 주희(朱熹)도 페트라르카처럼 평생 읽고 쓰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학자 중 하나다.

 

주희가 태어났을 때 송나라는 금나라의 침입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53세의 주희는 태주의 지사였던 당중우라는 인물을 집요하게 탄핵하다 직위도 잃고 사상적으로도 탄압받았다. 주희는 말년에 학문적 활동을 금지당하는 위학(僞學)의 금()을 겪기도 했다. 이런 불운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주희는 어떤 상황에서도 읽고 쓰는 삶에 헌신했다. 주희는 성리학의 집대성자다. 주희가 당한 위학지금은 죽을 때까지 풀리지 않았다. 물론 주희가 받은 모든 탄압과 불명예는 주희 사후에 대부분 풀렸다.

 

모든 삶의 가능성을 한쪽으로 기울여,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읽고 쓰게 하는 것일까. 무엇이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루하고 반복적인, 그토록 오랜 시간을 투자해도 성취를 보장할 수 없는, 노력에 성과가 비례하지 않는, 무엇보다 평생토록 끝나지 않을 일에 자신을 헌신하게 하는 것일까... 읽고 쓰는 삶을 택한 이들은 상당한 이상주의자일 가능성이 높다... 이들은 어쩌면 현시의 자기보다 더 큰 자기를 상상하는 몽상가들일지도 모른다”(246, 247 페이지)

 

진정한 의미에서 읽고 쓰는 삶을 택하는 사람들은 부박하고 과시적인 변화를 기대하지 않았고, 당장 생활을 바꿀 현실적인 힘과 영향력을 만드는 데 힘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페트라르카도 주희도 묵묵하게 긴 호흡으로, 담담하게 먼 시각으로 자기와 세계에 대한 실천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읽고 쓰는 과정을 통해 얻을 효과가 보다 일찍, 보다 분명한 형태로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엄밀히 말해 읽고 쓰는 삶이 아니라 성공하는 삶을 택한 것에 가깝다.(249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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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 : 조선 왕릉 편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1
이종호 글.사진 / 북카라반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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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왕조의 왕릉()이 거의 훼손되지 않고 남아 있는 경우는 세계적으로 조선이 유일하다. 지난 2009년 북한의 두 기를 제외한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북한의 두 기는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 정종과 정안왕후 김씨의 후릉이다.) 조선 왕릉의 공간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크게 2개로 나눌 수 있다. 제향 공간과 능침 공간이다.

 

정자각의 계단은 정면이 아닌 측면에 둔다. 참배자가 서쪽(왼쪽)을 바라보며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동쪽 계단은 신계(神階)와 어계(御階)2개이고 서쪽 계단은 1개다. 올라갈 때는 참배자가 왕의 영혼과 함께 하지만 내려올 때는 참배자만 내려온다는 의미로 왕의 영혼은 정자각 뒷문을 통해 봉분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신계는 기본적으로 3단이고 양옆에 구름무늬와 삼태극을 조각한 석고(石鼓)가 있다.

 

동계를 오를 때는 오른발을 먼저 내딛는다. 정자각 북서쪽에 제례를 끝내는 의미로 지방을 불사르고 예물을 묻는 예감(瘞坎)이 있다. 진시황 때는 천자의 무덤을 산이라 했고 한()에서는 능이라 했다. 조산(祖山)은 혈()에서 가장 멀리 있는 용의 봉우리를 말한다. 안산(案山)은 집터나 묘의 맞은편 산을 말한다.

 

가장 큰 문무인석은 철종의 예릉, 장경왕후의 희릉에 설치된 3미터 높이의 석상이다. 비교적 후대에 속하는 철종의 능 석물이 크게 만들어진 이유는 흥선대원군이 왕권 강화를 꿈꾸며 위엄 있게 만들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망주석은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로 세운 것으로 일반인의 묘소에도 세운다. 멀리서도 쉽게 알아보도록 하는 의미가 있다.

 

조선에서 가장 중요한 태조 이단(李旦)의 능은 구리 동구릉의 건원릉이다. 이성계가 조선을 창건하지 않았다면 조선 왕릉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건원릉은 고려 왕릉 가운데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의 현릉(玄陵)과 노국공주의 정릉(正陵)을 모델로 조성했다. 동구릉 중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건원릉은 능호가 유일하게 두 글자인 능이다.

 

건원릉에는 소전대(燒錢臺)가 있고 태종 이후에는 예감으로 대치되었다. 건원릉 봉분에는 특이하게도 잔디가 아닌 억새풀이 심어져 있다. 문종(文宗)과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의 능이 현릉(顯陵)이다. 문종이 세조와 연관된 의관 전순의에 의해 반하(半夏)를 즐겨 먹은 꿩고기로 독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꿩은 닭, 오리 등과 함께 기름이 과다한 고기로 종기가 났을 대 금기임에도 전순의는 문종에게 꿩고기를 계속 먹게 했다.

 

현릉의 석물들도 많이 퇴화되었다. 화강암으로 만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화강암은 강도가 7로 매우 단단하지만 장석, 운모, 석영 등으로 되어 있어 풍우에 퇴화하기 쉽다. 장석은 빗물에 오래 노출되면 녹아버린다. 이 까닭에 화강암은 기본적으로 내장재로 쓴다. 수많은 서양 건물이 수천 년이 넘었는데도 원형이 보존된 이유는 균질한 재질의 석회암이나 대리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 인목왕후(仁穆王后) 김씨의 능이 목릉(穆陵)이다. 선조는 41년을 재위했다. 광해군은 권정례(權停禮)로 세자가 되었다. 권정레는 약식(略式)을 의미한다. 의인왕후는 인종 비 인성왕후, 명종 비 인순왕후를 극진한 효성으로 모셨고 후궁 소생인 여러 아이에 대해서도 지극한 은애(恩愛)를 보이는 등 부덕을 갖추었지만 소생 없이 사망했다.

 

선조 능의 석인은 조선 시대 석인 중 가장 졸작이라는 평을 받는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608년에 장인(匠人)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랬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종(顯宗)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 숭릉(崇陵)이다. 현종은 봉림대군이 선양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태어났다.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조선 역대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 현종이다. 명성왕후 김씨의 사나운 성격 때문이라고 하지만 현종이 명성왕후를 사랑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는다. 현종 사후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왕이 사망하면 곧바로 실록 편찬 작업에 들어가는데 이 작업이 선대와는 달리 지지부진해 숙종의 독촉을 받고 비로소 숙종 3년에 완성된다.

 

1680년 서인이 (1674년 갑인예송으로 집권한) 남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자(경신환국) 서인 중심의 실록 개수청이 설치되었고 1683년에 현종개수실록 28권이 완성되었다. 선조실록과 경종실록은 수정 실록이고 현종은 유일한 개수 실록이다.(수정실록은 본래의 실록에서 일부 내용을 고치는 것, 개수실록은 처음부터 완전히 뜯어고치는 것이다.)

 

영조와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 원릉(元陵)이다. 영조는 정성왕후 서씨가 죽자 서오릉에 능지를 마련하고 봉분 두 자리를 만들어 우측을 비워두었지만 정조가 신하들의 적극 추천을 받아 동구릉 내에 영조의 능지를 마련했다. 원래 원릉 자리는 효종의 능침으로 한 번 썼던 자리였지만 풍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쓸 수 있었다.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 휘릉(徽陵)이다. 단의왕후(端懿王后) 심씨의 능이 혜릉(惠陵)이다. 동구릉 내에서 유일한 원()이다. 경종 즉위 후 단의빈에서 단의왕후로 추존되었다. 헌종(憲宗)과 효현왕후 김씨, 효정왕후 홍씨의 능이 경릉(景陵)이다. 문조(文祖)와 신정왕후 조씨의 능이 수릉(綏陵)이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능이 홍릉(洪陵)이다. 순종과 순명효왕후 민씨, 순정효왕후 윤씨(해평 윤씨)의 능이 유릉(裕陵)이다.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 남양주의 사릉(思陵)이다.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밤낮으로 공경함이 바르다는 뜻으로 능호를 사릉이라 했다. 조선 왕릉의 능침은 기본적으로 도래솔(소나무)이 둘러싸고 있다. 사신사(四神砂)의 현무(玄武)를 나타낸다. 현무는 소나무의 수피가 오래되면 검은색으로 변하고 두껍게 갈라져 거북 등 같은 모습이 되는 것에서 연유한다.(116 페이지)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 광릉(光陵)이다. 숙종과 인현왕후 민씨,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 명릉(明陵)이다. 숙종의 능과 인현왕후 능침 사이 양측에 문인석과 석마 한 쌍이 있다. 다른 능의 문인석과 달리 키가 실물 크기인 170센티미터 정도로 간소하게 만들라는 숙종의 명에 따라 조성된 것이다.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 경릉(敬陵)이다. 소혜왕후 한씨의 큰 고모가 명에 공녀로 갔다가 영락제의 후궁이 된 청주 한씨(한확의 여동생)로 영락제가 죽자 순장되었다고 하지만 처형과 다름 없는 자살이라는 말이 있다. 경릉은 조선 왕릉 중 봉분의 지름이 가장 크지만 봉분에 병풍석, 난간석, 망주석, 석수, 무인석이 없어 매우 간소하다.

 

예종과 안순왕후 한씨(한백륜의 딸)의 능이 창릉(昌陵)이다.(예종의 첫 번째 비가 한명회의 딸인 장순왕후 한씨다.) 창릉이 선정될 때 신하들은 위치가 나쁜 것을 알고도 방조했다. 정인지가 반대했지만 거부되었다. 원조(元祖)인 중국과 달리 우리 땅을 배경으로 우리가 만든 풍수를 자생풍수라 한다.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이 익릉(翼陵)이다. ‘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형인 김만기가 그의 아버지다. 익릉은 서오릉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 서씨의 능이 홍릉(弘陵)이다. 서삼릉은 상당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현재의 능역으로 조성되었다.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다.

 

원래 태종의 헌릉(獻陵) 옆으로 택지가 결정되었으나 권력 다툼으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졌고 이후 중종의 정릉이 자리잡았다가 강남구 삼성동의 선릉(宣陵)으로 옮겨갔고 아들인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孝陵)이 조성되었다. 이후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인 예릉(睿陵)이 조성되면서 서삼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효릉은 축협 관할 안에 있어 비공개라고 한다.)

 

예릉(睿陵), 희릉(禧陵), 효릉(孝陵)은 구역이 다르고 넓어 발품을 팔아야 한다. 예릉은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의 능이다. 강화도령으로 더 유명한 조선 25대 임금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아들이다. 은언군은 아들 상계군이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은언군은 강화도에서 사사됨. 철종이 태어난 곳은 한성부 경행방. 철종이 다른 가족들과 함게 강화도로 유배간 것은 14)

 

원범이라는 이름의 강화도령이 왕이 된 것은 그의 나이 19세 때로 23세의 헌종이 후사 없이 죽었기 때문이다. 원범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세도정치를 펴던 안동 김씨들이 원범을 자신들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철종은 14년간 재위했는데 3년은 대왕대비인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했고 그 이후로는 안동 김씨들의 세력에 눌려 허수아비 왕으로 살았다.

 

철인왕후 김씨는 21세에 원자를 낳았으나 6개월만에 사망했다.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였다. 그녀를 왕비로 천거한 사람이 순원왕후였다. 안동 김씨인 철인왕후도 안동 김씨 세력들을 위해 주청을 계속하는 바람에 철종으로부터 신의를 잃었다. 철종은 이후 철인왕후를 찾지 않았다. 철인왕후는 철종이 죽은 지 15년만에 후사 없이 사망했다.

 

예릉은 조선 왕조의 상설 제도를 따라 설치한 마지막 능이다. 고종과 순종의 능은 황제 능의 법식을 따라 설치했다. 예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으로 연결된 쌍릉이다. 무인석과 문인석이 한 단에 있는 것이 특징이다. 참도는 원래 2도였으나 고종이 대한제국 시절 태조, 장조, 정조, 순조, 문조를 추존한 뒤 진종, 헌종, 철종을 황제로 추존하며 3도로 만들었다.

 

조대비가 중종의 정릉(靖陵) 초장지에 매몰했다가 땅 밖으로 나온 석물을 재사용해 예릉을 만들었다. 예릉 좌측에는 문효세자(정조와 의빈 성씨의 아들)의 효창원과 장조(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의 의령원이 있다. 효창원은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 안에 있었고, 의령원은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있었는데 각각 1944, 1949년에 이장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 때 중종의 후궁 숙의(2)에 봉해졌다가 단경왕후의 신씨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역적으로 몰려 사사된 데 이어 단경왕후도 폐비되는 바람에 왕비가 된 행운의 인물이다. 장경왕후는 세자인 인종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경복궁 별전에서 사망했다.(빈은 정 1, 귀인은 종 1, 소의는 정 2, 숙의는 종 2, 소용은 정 3, 숙용은 종 3, 소원은 정 4, 소원은 종 4.)

 

장경왕후의 첫 능지는 태종의 헌인릉 옆의 산줄기였다. 장경왕후는 15153월에 사망했다. 왕과 왕비의 능 조성 방식에 따르면 5개월 장을 치러야 하는데 두 달만인 4월에 매장을 마쳤다. 5월에는 좋은 날이 없고 6월은 장마철이라 땅이 질 염려가 있고 장지로 갈 때 물이 불어나 건너기 어려울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장경왕후의 능 조성은 중종이 맡았다. 장삿날 한강에 500척으로 배다리를 만들어 한강을 건넜다.

 

장경왕후의 능은 중종 32년인 1537년 서삼릉 자리로 옮겨졌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딸 효혜공주(인종의 누나)와 김안로의 아들 희가 혼인을 했다. 김안로 즉 중종의 사위는 권력을 남용하다가 영의정 남곤 등에 의해 탄핵을 받고 유배갔다가 복귀해 장경왕후 국장 당시 책임자였던 남곤을 공격하기 위해 풍수지리상 돌이 광(구덩이) 밑에 깔리면 불길한데 희릉 광 밑에 큰 돌이 깔렸는데도 공사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천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처음 말이 듣지 않던 중종도 자신에게 나쁜 영향이 미칠 것이라는 말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김안로는 위세가 왕을 넘어설 정도였고 문정왕후의 폐위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를 제거할 때처럼 밀지를 내려 기습적으로 김안로를 잡아들였다. 김안로는 유배당한 뒤 곧 사사되었다.

 

희릉은 병풍석이 없고 12칸의 난간석만 둘렀지만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랐다. 효릉(孝陵)은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의 능이다. 인종은 희릉에 안장된 장경왕후의 맏아들이다. 태어난 지 7일만에 어머니를 잃었다. 인종은 재위에 오른 다음 해인 1545년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인종은 세자 시절 반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아버지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의 소생 복성군이 이미 장성한 상태였고 야심이 많은 문정왕후 등에 둘러싸여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세자를 저주하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경빈 박씨와 복성군이 사사되고 김안로가 집권함에 따라 세자의 지위는 안정되었다.

 

문정왕후가 아들을 낳자 위기감을 느낀 김안로가 중전 폐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사사되어 다시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24년의 세자 시절을 보낸 뒤 중종이 죽은 1544년 왕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상을 치르는 동안 거의 음식을 대지 않아 급격히 쇠약해져 병이 들었다. 병세가 심했음에도 극구 약을 먹지 않았다. 1546년 병세가 더욱 심해지자 중종과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후사 없이 재위 8개월만에 경복궁에서 사망했다. 경원대군이 명종이다.(예종: 13개월 재위)

 

인성왕후 박씨는 64세까지 살았다. 인종은 성품이 바르고 착했다. 인종이 동궁에 있을 때 한밤중에 불이 난 적이 있었다. 누군가가 여러 마리의 쥐 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으로 들여보냈기 때문이다. 인종은 계모 문정왕후의 소행임을 직감했지만 자신을 길러준 문정왕후의 뜻을 어기는 것도 불효라 생각하고 꼼짝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중종이 애타게 부르자 계모에게는 뜻을 따르는 것이 효이지만 아버지께는 불효라 생각하고 불길을 뛰쳐나왔다.

 

중종은 장경왕후 윤씨의 옆에 묻혔다. 명당 중의 명당이었는데 문정왕후가 남몰래 그곳에 며칠간 물을 붓게 했다. 능에서 물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자 마침내 명종 17년 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겨졌다. 승려 보우가 승려들을 동원해 중종의 왕릉을 옮겼다. 공사를 맡은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형이 엄청난 돈을 빼돌렸다.

 

1501년 생인 유명한 세 사람이 있다. 남명 조식, 퇴계 이황, 문정왕후(文定王后). 남명 조식은 시호가 문정(文貞)이다. 남명의 제자들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해 광해군 때 성세를 누리다가 인조반정과 더불어 죽거나 유배를 갔다. 조식은 수제자 정인홍이 광해군과 손잡고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위하는 바람에 오명을 썼다.

 

조식은 56세에 단성현감에 제수되자 사양하면서 문정왕후를 일게 과부로, 임금인 명종을 어린 고아라 불러 파문을 일으켰다. 문정왕후는 명종에게 자신 때문에 왕이 된 것을 감사하라고 하며 매를 들기도 했다. 인종의 장지가 서삼릉으로 정해진 것은 인종의 유언 때문이다. 인종은 내가 우연히 병을 얻어 부왕께 끝까지 효도를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망극한 심정을 어떻게 모두 말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부왕과 어머니 장경왕후가 계신 정릉 근처에 내 묘를 써라. 또한 내 장사는 소박하게 지내 백성들의 힘을 펴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물론 처음 중종은 장경왕후 옆에 묻혔는데 문정왕후가 중종을 지금의 삼성동으로 옮겼다. 문정왕후가 중종을 희릉에서 삼성동 정릉으로 옮긴 것은 자신이 그 옆에 묻힐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을 선릉(宣陵)이라 하고 중종의 능을 정릉(靖陵)이라 하는데 선정릉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기도 했다.

 

정릉은 특히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었다. 이에 명종이 어머니를 태릉에 안장해 결국 문정왕후의 뜻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중종은 단경왕후 신씨, 장경왕후 윤씨, 문정왕후 윤씨 등 그의 비 세 사람 가운데 어떤 사람과도 함께 있지 못했다. 중종은 삼성동 정릉, 단경왕후 신씨는 홀로 양주 온릉에, 장경왕후 윤씨는 홀로 서삼릉 희릉에 문정왕후 윤씨는 아들 명종과 함께 노원구 태강릉에 자리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종이 왕후들과 사방으로 흩어진 까닭에 직계자손이 끊어졌다고 한다. 실제로 중종 아들 명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왕위는 중종의 서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에게 돌아갔다. 명종이 중종의 서자인 덕흥군의 아들들을 불러 익선관을 써보라 했다. 하원군, 하릉군은 별 말 없이 익선관을 썼지만 셋째인 하성군은 왕이 쓰는 것을 함부로 쓸 수 없다고 거절해 명종의 마음에 들었다.

 

하성군이 선조다. 덕흥군은 사후 덕흥대원군이 되었다. 인성왕후가 사망하자 선조가 인종 곁에 인성왕후를 장사지내며 왕릉의 개수를 명해 병풍석을 둘렀다. 면석에는 십이지신상을, 우석에는 구름무늬를 조각했는데 수많은 왕릉 조각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선조의 아버지 덕흥군과 인종이 형제간이다.)

 

숙종 30년 효릉에 검은 담비가 나타나 수라간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자 종이 불을 지펴 연기를 내 잡으려다 불을 냈다, 불은 능상까지 번졌다. 불을 낸 사람은 사형당했고 가족, 관리자. 참봉 등은 천민으로 강등되어 귀양을 갔다. 이에 숙종은 3일간 업무를 중단하고 모든 관리들이 제사 때 입는 옷을 입었다. 효릉 인근에 연산군 어머니 폐비 윤씨의 묘가 있다.

 

원래 이 묘는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었으나 경희대 공사 때 희릉 옆으로 옮겼다. 연산군 어머니가 묻힌 곳은 회묘였다가 연산군이 즉위해 회릉으로 고쳤고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다시 회묘가 되었다. 파주 심릉은 공순영릉이다. 순릉(順陵)은 성종 비 공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공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넷째 딸이다. 공릉(恭陵)은 예종 비 장순왕후의 능이다.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셋째 딸이다.

 

장순왕후의 후임자가 청주 한씨 한백륜의 딸 안순왕후 한씨다.(세조비 정희왕후, 예종 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를 위해 지은 궁이 창경궁이다.) 영릉(永陵)은 진종(효장세자)과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온릉(溫陵)은 단경왕후 신씨의 능이다. 파주 장릉(長陵)은 인조와 인렬왕후 한씨의 능이다. 김포 장릉(章陵)은 원종(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의 능이다. 태릉(泰陵)은 문정왕후의 능이다. 강릉(康陵)은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의 능이다.

 

의릉(懿陵)은 경종과 선의왕후 어씨의 능이다. 헌릉(獻陵)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이다. 인릉(仁陵)은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선릉(宣陵)은 성종과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정릉(靖陵)은 중종의 능이다. 정릉(貞陵)은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영릉(英陵)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능이다. 영릉(寧陵)은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의 능이다. 장릉(莊陵)은 단종의 능이다. 융릉(隆陵)은 장조(사도세자)와 현경왕후(혜경궁 홍씨)의 능이다. 건릉(健陵)은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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