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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
홍대선 지음 / 푸른숲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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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선이 쓴 '어떻게 휘둘리지 않는 개인이 되는가'는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헤겔, 쇼펜하우어, 니체 등 유명 철학자들의 사상을 삶을 중심으로 설명한 책이다. 삶을 강조하는 저자의 진의는 철학이란 개인의 경험에 붙인 각주라는 말을 통해 드러난다. 저자는 철학을 태도를 설정으로 작업으로도 정의한다.

 

본문에 소개된 철학자들은 대체로 몸이 약했다. 데카르트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걸핏하면 드러누웠다.(그의 이름 르네는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의 라틴어 레나투스의 프랑스어 버전이다. 데카르트는 생후 1년 여만에 결핵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났다.) 늦잠의 황제이자 "날씨가 추우면 생각을 할 수 없"었다는 데카르트는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초청을 받고 그 추운 나라에서 새벽부터 여왕에게 강의하다가 53세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스피노자는 규폐증에 의한 결핵으로 사망했다.(폐는 스피노자 집안의 아킬레스건이나 다름없었다.) 칸트는 늘 아플락 말락 했지만 한 번도 아픈 적이 없었다. 몸이 쇠약해 늘 골골했지만 섭생에 신경 써서 실제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 몸으로 칸트는 80세를 살았다.(백종현 지음 인간이란 무엇인가참고)

 

쇼펜하우어는 웅장하고 섬세한 사상을 가졌지만 진리를 향해 고행을 감내할 강인함이 없었다.(252 페이지) 어릴 때부터 뇌 속의 피가 원활히 돌아가지 않았던 니체는 스위스 바젤대학교 교수직을 보장받고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한 후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에 프로이센 용병으로 참전했으나 가슴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 데 이어 시도 때도 없이 두통과 안통으로 드러누웠다.(294 페이지)

 

니체는 45세때인 1889년 튜린 여행 중 길거리에서 마부에게 학대받는 말을 끌어안고 흐느끼다가 졸도한 뒤 깨어나 정신병자가 되었다.(310 페이지) 니체가 시적인 문장으로 철학적 분석을 대체한 데에는 건강문제도 있다. 니체는 금방 머리가 피로해졌다. 그럴수록 직관과 확신, 타고난 문학성으로 철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여섯 명의 철학자들의 독특한 여성관계도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데카르트는 평생 여성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졌다. 스피노자는 클라라라는 소녀와 연애를 했지만 기껏 지킨 재산권을 여동생에게 주고 빚쟁이가 되더니 치열한 법정 소송을 거쳐 겨우 렌즈 세공사로 먹고 살 미래를 남겨놓았다.(클라라는 노동의 삶을 선택한 스피노자에게서 재빨리 떠나 경영권을 물려줄 사업체가 있는 대학생과 결혼했다. 스피노자는 이를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스피노자는 클라라의 선택을 선악, 귀천 등으로 나누지 않았다.)

 

칸트는 한 여인의 청혼을 받고 생각좀 해볼 테니 기달려 달라고 한 뒤 사랑과 관련된 책을 모두 읽고 결혼을 해야 할 이유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정리했다. 칸트는 결혼을 해야 할 이유가 하지 말아야 할 이유보다 4개 더 많다는 결론을 내린 뒤 청혼을 한 여인을 찾아갔으나 이미 7년의 시간이 지난 뒤여서 그 여인은 이미 결혼해 자식까지 두었다.(174 페이지)

 

쇼펜하우어는 아버지가 자살(가업을 물려주려 했으나 쇼펜하우어가 거절하자 좌절감에 자살) 했는데 어머니가 너무 밝자 어머니를 의심한 데 이어 아버지의 죽음은 어머니의 이기심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쇼펜하우어는 어머니 뿐 아니라 모든 여자가 문제라고 생각했다. 쇼펜하우어가 여성을 혐오하면서도 침대에서는 원하자 여동생이 사랑을 하려면 똑바로 하라고 하자 언행일치를 위해 여성혐오를 계속하는 한 여자를 멀리해야 한다는 황당한 결론을 이끌어냈다.

 

니체의 여성혐오는 자기혐오와 맞닿아 있다. 니체는 몸이 아파 여성의 보살핌에 의존해야 하는 자신의 모습을 아름답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니체는 여성에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키웠다. 니체는 여성에게 의존적이지 않으려면 여성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에 프랑스 용병으로 참전한 것은 전쟁터에 가서 남성 어른임을 자각하려 한 결과이다.

 

그러면 여섯 철학자들의 사상은 어떤가. 데카르트는 영혼과 물질을 물과 기름처럼 나눈 철저한 심신이원론자였다. 데카르트에게 자아 즉 나 자신은 영혼이었다. 육체는 물질에 불과하며 영혼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기계였다. 데카르트의 논리대로라면 영혼은 자신의 육체와도 분리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신체를 조종하는 것일까? 데카르트는 고심 끝에 탈출구를 찾았다. 인간의 머릿속에 영혼과 육체가 연결되는 송과선이라는 통로가 있어서 이성이 물질을 움직인다는 논리였다.(50 페이지)

 

영국의 공주 엘리자베스는 데카르트에게 쓴 편지에서 "저는 비물질적인 존재가 육체를 움직이고 육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보다는 영혼이 질료와 연장을 가졌다는 것을 더 쉽게 용인할 수 있겠어요."란 말을 했다. 17세기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역사상 그 어떤 유대인들보다도 더 강력하게 유대교 외의 가치를 배척했다.

 

머리가 좋은 스피노자는 5세에 랍비로 낙점받았다. 스피노자는 히브리어 교본을 썼고 포르투갈어와 네덜란드어를 모국어로 썼고 글은 라틴어로 썼다. 스페인어와 프랑스어도 조금 했다. 그리스어 책을 읽을 줄도 알았다. 스피노자 가문의 고향은 스페인이었다.(스페인계 유대인)

 

근대가 시작되며 보수적인 스페인에서는 마녀사냥이 빈번했다. 스피노자 집안은 스페인에서 추방 명령을 받고 포르투갈로 갔다. 스피노자가 태어나기 140년 전(1492)의 일이다. 포르투갈은 자국내 유대인들에게 카톨릭 개종과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을 강요했다. 카톨릭으로 개종한 스피노자 가문은 속으로는 은밀하게 유대교를 믿었다.

 

스피노자 집안은 낭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프랑스로 갔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였지 유대교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추방 명령을 받은 스피노자 가족은 네덜란드로 갔다.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만큼은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자중하기로 암묵 합의했다. 하지만 자치권을 허락받자 급격히 우경화되어 유대교 외의 가치를 철저히 배격했다.

 

유럽과 아라비아의 유대인들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외지에 무일푼으로 추방당해도 먹고살 수 있도록 확고한 직업 하나를 연마하면서 성장하는 게 불문율이었다. 보통 서민층 유대인은 기능공이 되었고 상류층 유대인은 변호사나 의사가 되었다. 스피노자는 자신의 의지로 유리 세공을 배웠다. 스피노자에게 렌즈는 수학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도구였다.

 

스피노자는 아버지와 공동체 사이에서 분열했다. 아버지는 스피노자에게 경영수업을 시키려 했고 공동체는 랍비 수업을 시키려 했다. 클라라와의 이별 후 조금 고독해진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성찰'을 읽었다. 그는 진정한 해방(유대 공동체와의 결별)을 맛보기 위해 일전했다. 그는 자신의 뜻대로 철학적 진리를 추구할 수 있는 자신을 목표로 했다.

 

스피노자는 신이 왜 남성의 정체성을 지니며 인간사에 불공평하게 개입하며 이다지도 불완전한 세상을 내버려두고 애초에 세상을 불완전하게 창조한 인격신이어야 하느냐 생각했다.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스피노자는 낮에는 렌즈를 깎고 밤에는 철학을 했다. 스피노자의 렌즈 세공은 태양의 직사광선에 비춰야 렌즈의 정밀도를 확인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밤에는 새벽 3시까지 연구와 집필에 몰두했다. 체력 고갈, 안구 피로, 두통을 피할 수 없었다. 스피노자는 국가의 진정한 목적은 개인의 자유에 있고 철학의 궁극의 목적은 시민의 자유에 있다고 썼다. 1677년 사망한 스피노자는 교회에 안치되지만 시신이 도난당해 끝내 행방은 밝혀지지 않았다. 스피노자에게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신의 자랑스러운 피조물도 아닌 동물일 뿐이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인간은 능산(能産)이자 소산(所山)이다. 우리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에티카'의 결론은 시민사회다. 개인들이 되도록 좀 더 자유롭고 보다 덜 불편하기 위해 사회계약을 맺은 상태가 그가 생각하는 국가다. 즉 이기적인 개인들이 적당히 타협한 상태이다. 스피노자에게 충성을 강요하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은 이성의 한계와 기능을 명확히 판가름하자는 취지를 갖는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이성은 있다. 다만 합리론은 이성을 과대평가했고 경험론은 이성을 지나치게 평가절하했다. 칸트는 경험론이 말하는 후천적 경험과 합리론이 붙잡아온 선험적 이성 모두 인간의 지식과 판단을 구성한다고 설명하는데 성공했다. 내용 없는 사상은 공허하고 개념 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란 말은 순수이성비판의 핵심이다.

 

헤겔은 중국을 특히 혐오했다. 전족 풍습 따위를 전해들은 뒤 가진 생각이다. 그는 중국은 공간만 있고 시간은 없는 나라라 말했다. 최강의 모욕이다. 쇼펜하우어는 물자체(物自體)에 다가갈 수 없다는 칸트의 주장을 지지했다. 헤겔이 말한 자아의 팽창, 직감, 절대정신 따위는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그는 칸트가 남긴 근원적 외로움을 순순히 인정하기 위해 표상을 꺼내들었다.

 

표상은 인식에 맺히는 주관적 상이다. 인간은 자기 주관의 한계로 세계를 인식할 수 밖에 없다. 인간에게 세계는 의지와 표상으로서 다가온다. '비극의 탄생'은 니체의 첫 철학 저술이자 마지막 고전문헌학 저술이다. 그는 고전문헌학을 전공했다. 니체의 삶에서 루 살로메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수많은 남자에게 예술적 영감을 준 뮤즈이자 실연의 상처를 준 마성의 팜므파탈이었다.

 

니체는 그녀에게 첫 눈에 반한다. 그가 이성에 매료되고 사랑에 빠진 유일한 순간이었다. 니체의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를 독점하고 싶어 했다. 엘리자베스의 남편 베른하르트 푀스터는 반유대주의자이자 극우 독일민족주의자였고 훗날 나치즘에도 영향을 끼쳤다. 순수 아리안 혈통이니, 유대인은 독일의 기생충이니 하는 말은 이 사람의 작품이다.

 

니체는 알려진 것과는 달리 반유대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반유대주의자를 보면 총으로 쏴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차별주의를 경멸했다. 엘리자베스에 의해 니체는 나치 독일의 정신적 선배로 오인되었다. 엘리자베스는 남편에 의해 이식된 니체의 유고를 짜깁기해 '힘에의 의지'를 출간했다. 지금은 엘리자베스의 흔적을 지운 니체 전집 정본이 수립된 상태다. 유럽의 문헌학자들이 꽤나 고생해준 덕이다.(니체는 문헌학자들을 두더지라 경멸했지만 그들의 도움을 받았으니 아이러니하다.)

 

니체는 형이상학을 거부했다. 인간의 존재 근거는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 스스로다. 니체는 인간은 이성, 육체, 의지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때의 의지는 힘에의 의지다. 니체가 말한 힘에의 의지는 아리안 종족과 히틀러를 수식하는 데 쓰였다.(왜곡되었다.) 힘에의 의지는 그 자체로 옳거나 그르지 않다. 그저 존재하는 것이며 자각하고 활용할 것이지 추종할 것이 아니다.(318 페이지)

 

니체는 도덕을 부정하지도 않았고 도덕적으로 살면 안 된다고도 하지 않았다. 객관적이고 선험적인 도덕 원칙, 선 그 자체라는 허상을 지웠을 뿐이다. 니체는 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고 외쳤다. 디오니소스적 긍정이다.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인 자신에 대한 긍정이다. 그의 긍정은 조건부 긍정이 아니다. 저자는 니체의 철학은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놀랍도록 비슷하다고 말한다.(320 페이지)

 

스피노자는 에티카’ 4부 정리 50 주석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실재가 신의 본성의 필연성으로부터 따라 나오고 자연의 영원한 법칙과 규칙에 따라 일어난다는 것을 올바로 인식하는 사람은 미워하거나 조롱하거나 무시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연민을 느낄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음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대신 그는 인간의 덕이 허락하는 한 이른바 잘 행위하고 기뻐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스피노자의 윤리학과 놀랍도록 비슷하다는 말은 이런 비교를 통해 확인 가능하다. 이제 성부 베르그손, 성자 스피노자, 성령 니체란 말을 확인하는 데로 나아가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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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버린 나에게 - 나의 복잡한 심리를 이해하는 방어기제 수업
조지프 버고 지음, 이영아 옮김 / 더퀘스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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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 부정(否定), 전치(轉置), 반동형성, 분리, 투사(投射) 등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주요 방어기제들이다. 방어기제는 우리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생각이나 감정 등을 의식에서 몰아낼 때 사용하는 방식들을 의미한다. '마음의 문을 닫고 숨어버린 나에게'는 여러 방어기제들의 작용 원리를 설명함은 물론 우리가 어떤 방어기제를 사용하며 그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상세하게 풀어쓴 책이다.

 

심리치료사이자 정신분석자로 30년 이상 활동해오고 있는 저자가 말했듯 모든 방어기제를 없앨 필요도 없고 무의식 속의 모든 것과 꼭 대면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방어기제가 너무 단단하게 고착되어 인간관계를 심하게 방해할 경우 대책이 필요하다. 우리가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것은 마주하거나 인정하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상황이나 심리를 피하기 위해서이다. 심리적 방어기제는 생의 고통을 견디는 데 유용하지만 더 이상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오히려 고통이 될 때가 있다.

 

이때 심리학 책을 읽거나 상담을 할 필요가 있다. 저자는 유능한 상담가이자 정신분석학자이지만 40여년 전 우울증으로 심리치료를 받았다.(274 페이지) 물론 저자는 여전히 매일 똑같은 감정과 씨름한다고 자신을 소개한다.(260 페이지) 또한 특정 경험을 이상화하는 경향이 꽤 강했고 지금도 그럴 때가 있다고 말한다.(135 페이지)

 

저자는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스스로 개발한 여러 기법을 규칙적으로 연습하기에 힘든 도전을 감당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다 끝난 것은 아님을 강조한다. 저자는 심리치료사로서 새로운 내담자를 만날 때마다 제일 처음 마주치는 어려움 중 하나가 고통스러운 감정을 피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키는 일이라 말한다.(48 페이지)

 

저자는 감정은 일시적인 경험이어서 순식간에 사라지며 늘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사람은 없기에 행복의 성취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49 페이지) 같은 차원에서 저자는 어떤 감정에 휩쓸리면 그것이 영원할 거라 느끼지만 그것 역시 지나간다고 말한다.(255 페이지)

 

감정은 세분되거나 차별화된다. 가령 시기와 질투는 정상적인 감정이지만 거기에 수치심이 가세하면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저자는 기본적인 욕구에 지나치게 자립적인 것도 의존적인 것도 문제임을 암시한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상대에 지나치게 의존하거나 자립적인 것도 문제이다.

 

방어기제는 다양하게 범주화된다. 문제는 누구든 한 범주에 말끔하게 들어맞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진단범주에 자신을 끼워맞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성장 배경과 성격을 고려해야 한다. 모든 방어기제는 본질적으로 고통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68 페이지)

 

억압은 방어기제의 대표로 성적인 것에 국한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억압이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쏟아붓게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방어기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할 법하다. 나르시시즘, 경멸, 남 탓하기도 심리적 방어기제들이다.

 

화풀이는 전치(轉置)라 불린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 말 못하고 애꿎은 약자에게 화풀이하는 것이다. 저자는 양가감정이란 말을 색다르게 설명한다. 한 대상에게 미움과 사랑처럼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저자는 자기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상태 즉 우리의 욕구가 여러 방향으로 갈린다는 뜻이라 설명하는 것이다.(108 페이지)

 

저자를 찾은 내담자들 중에는 늘 상대를 이상화해서 그에게 있지도 않은 장점을 부여하고 그의 본색을 모른 체하다가 현실을 깨닫고 환멸에 빠져 관계를 끊고 우울증에 빠지는 악순환을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만 하면 행복해질 거라고 믿는 사람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 때문에 미래의 일을 이상화하게 된다. 어려움은 외부 문제이기도 하고 내면으로 인한 것이기도 하다.(135 페이지)

 

합리화(合理化) 즉 변명이 특정 사실에 대해 작동한다면 주지화(主知化)는 모든 불쾌한 감정에 대해 작동한다. 책에 소개된 모든 강정들 중 가장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것이 수치심이다. 저자는 우리가 방어기제를 인식한다 해도 그것이 그냥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말한다.(이치는 금방 깨우칠 수 있어도 습관은 쉽게 고치기 어렵다는 의미의 '이수돈오 사비돈제: 理雖頓悟 事非頓除'란 말이 생각난다.)

 

습관이 뇌 속 신경연결망과 경로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적당한 방어기제는 유용하지만 고착화되면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에 해결이 필요하다. 저자는 자신에게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평소 가동 중인 방어기제를 관찰하고 가능하면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부단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230 페이지)

 

저자가 권하는 또 하나의 기술은 불교의 마음챙김, 호흡 집중, 명상 등이다. 알아차림으로써 문제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 더 현명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힘겨운 감정에 더 건전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저자는 중요한 말을 한다.

 

변화를 위해 용기를 내야겠지만 자신을 너무 심하게 몰아붙이지 말고 한계 또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239 페이지) 저자는 의식하고 나면 방어기제가 예전만큼 강하게 우리를 휘두르지 못한다고 말한다.(263 페이지) 예컨대 아끼는 사람에게 화가 나면 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분노를 있는 그대로 다 터뜨리지 않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26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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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 케이스 - 국가상징에 대한 한 연구
이해영 지음 / 삼인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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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주권의 구현체인 국가(國家)와의 정서적 결속이자 충성의 서약인 국가(國歌)는 정치적이고 시민 종교적인 면을 강조할 수밖에 없으며 공동체의 합의된 가치인 애국을 담아야 한다.‘. 이는 한신대 이해영 교수가 안익태 케이스에서 제시한 핵심 주장이다.

 

현 안익태의 애국가에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묻는 것이다. 그간 안익태는 애국가의 작곡자이자 한국을 빛낸 세계적인 음악가로 알려졌다. 안익태가 애국가를 만든 건 1935년경이다. 그 후 2년여 만인 1937년 안익태는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향했다.

 

1938년 안익태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애국가가 포함된 코리아 판타지를 초연했다. 당시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이 조선의 새 애국가의 작곡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해영 교수에 의하면 당시 안익태의 애국가는 같은 가사에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을 빌려온 애국가 등 여러 애국가들 가운데 하나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열린 행사에서 부른 애국가도 안익태 작곡이 아닌 올드 랭 사인곡조의 애국가였다. ’애국가가 문제인 것은 단지 친일 부역자가 지은 곡이어서가 아니라 만주국 건국 10주년(1942) 경축 음악회를 위해 만주에서 유행하는 선율들을 활용해 만든 만주국 환상곡의 피날레 부분이라는 데에 있다.

 

잘 알고 있듯 만주국은 일본제국이 만주 사변 이후 세운 괴뢰 국가이다. 안익태 즉 에키타이 안은 1944년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며 친일 부역의 산물인 만주국 환상곡악보를 폐기한 데 이어 현재 악보와 음원이 전해지지 않는 1938년 더블린 판 코리아 판타지를 개작해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으로 만들었다.

 

독일과 일본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오자 꾀한 변신의 일환이다. 자작 애국가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애국으로 포장하면서 1938년부터 1944년에 이르는 친일 행적을 숨긴 것이다.

 

1965년 스페인에서 세상을 떠난 안익태의 시신은 현재 국립 현충원에 묻혀 있다.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정계와 문화계 인사 등이 주도하는 추모제가 열린다. 물론 그에게 문화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친일인명사전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올랐다.

 

안익태는 더블린에서의 코리아 판타지초연 이후 에키타이 안(Ekitai Ahn)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에하라 고이치(江原綱一)의 베를린 저택에 2년 반 가까이 머물렀다. 이해영 교수는 미 육군유럽사령부 정보국의 문건인 ‘2차대전 기간 전시 독일의 외교 및 군사 정보 활동 보고서를 참고, 에하라 고이치가 주 베를린 만주국 외교관으로 위장한 일본 정보기관 총책이었으며 다양한 분야에 있는 300여 명의 정보원을 관리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에키타이 안을 일본 정보기관의 특수 공작원이나 정보원이었다고 합리적으로 의심하기에 충분한 상황이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1959년 전통 아악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만들었다고 주장한 강천성악’(降天聲樂)이 일본 아악의 선율을 서양 악기로 편곡해 전시 유럽에서 선전용으로 연주한 에텐라쿠의 개작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다.

 

안익태가 친일부역행위를 했다 해도 애국가를 만들 당시엔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해영 교수는 국가(國歌)로서의 자격을 갖기 위해선 그 곡을 만든 이의 전 생애를 판단해 국민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흠결 없는 삶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양 출신의 안익태가 일본에 유학할 때 사용한 이름은 안에키타이(あんえきたい)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할 때는 에키타이 안(Eak-tai Ahn)이었다.

 

일본 도쿄의 사립 세이소쿠(正則) 중학교를 거쳐 도쿄 구니다치(國立) 고등음악학원(현재 구니다치 음악대학)에 입학해 첼로를 전공한 안익태가 미국에서 유학한 뒤 유럽으로 건너간 것은 1937년이었다.

 

19382월 더블린방송교향악단 객원으로 후에 '한국환상곡'으로 알려진 자작곡 '교향적 환상곡 조선의 초연을 지휘했다. 같은 해 '관현악을 위한 환상곡 '에텐라쿠(越天樂)를 발표했다. 1959년 이 작품은 '강천성악(降天聲樂)'으로 개작되었다.

 

19437월 안익태는 나치 정부의 제국음악원 정식 회원(회원번호 RKK A 115.)이 되었다. 이해영 교수는 안익태가 나치 시절 괴벨스가 주도한 '음악가 조직인 제국음악원에 입회할 수 있었던 것은 '외교관으로 포장한 베를린 지역의 첩보 총책' 에하라(江原) 덕분이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프랑스에서 독일이 패전하자 스페인으로 피신, 활동하던 그는 종전 뒤인 1946년 스페인 마요르카교향악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고, 같은 해 7월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했다. 안익태는 19553'이승만 대통령 탄신 제80회 기념음악회' 지휘차 귀국했고 4월에는 제1호 문화포장을 받았다.

 

그는 5년 뒤 이승만의 '탄신 85회 음악회' 지휘를 위해 다시 귀국한 바 있다. 1962년에는 박정희를 예방,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 정부의 이미지를 개선하고 '혁명'을 경축하기 위한 대한민국 국제음악제 개최를 협의했다.

 

1930년 조국을 떠난 안익태는 25년 동안 고국을 찾지 않았고 굳이 일본 국적을 가질 일도 없었고 일제의 강압에 시달리며 일제에 협력할 필요도 없었지만 일제가 원하는 음악을 만들었고 에하라(江原)의 지원을 받아 유럽 무대에서 지위를 굳혔다.

 

일본 제국주의에 이어 나치 파시즘에도 봉사한 것이다. 이해영 교수는 이제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 묻는다. "'국가'는 한 나라의 상징"인데 "법으로 공인된 '국가'가 아님에도 그냥 관습적으로 불러왔던" 애국가를 어찌할 것인가란 물음을 던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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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돕는다 -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르네상스 라이브러리 7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김영범 옮김 / 르네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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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의 기본 입자를 뜻하는 쿼크(quark)라는 용어와 자연선택이라는 진화론의 주요 개념은 문학작품에서 기원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쿼크가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서 비롯된 용어라면 자연선택에 대한 대중의 그릇된 인식은 알프레드 테니슨의 장시 ’In Memoriam‘에서 비롯되었다. 테니슨은 이 장시에서 이빨과 발톱을 피로 물들인 자연이라는 표현을 썼고 그로부터 9년 후에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되었다.

 

영국의 생화학자인 닉 레인(Nick Lane)에 의하면 자연에 대한 테니슨의 황량한 시각은 훗날 자연선택에 대한 느낌을 형성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그 표현은 모든 생명의 관계를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생생한 싸움으로 단순화시켰고 다윈이 일반적인 생존경쟁을 더욱 선호한 것처럼 여겨지게 했고 개체와 종 사이의 협동과 한 개체 안의 유전자들의 협동의 중요성을 경시하게 했고 공생의 중요성을 무시하게 했다.(’생명의 도약‘ 239, 240 페이지)

 

하나의 잘못된 시초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지를 우리는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의 생성과 유통 과정을 통해 알게 된다. 존 캐서디는 최근 나온 시장의 배반에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김수행, 자본론으로 한국경제를 말하다에 의하면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언급한 것은 단 한번이고 그나마 얼버무리는 식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체계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단 한번 얼버무리는 식으로 언급된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개념이 수백년 동안 주류 경제학의 모토로 기능해왔다는 사실이다.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 ~ 1921)만물은 서로 돕는다를 읽으며 다시 한번 잘못된 기원 또는 인식의 오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크로포트킨을 무정부주의자로만 간주하는 것은 일면적 인식에 불과하다. 귀족 출신 장군의 아들로 프랑스인 가정교사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사상을 지녔던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 극동 지역의 정치범 수용소를 목격한 뒤 갖게 된 혐오감을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는 꿈을 꾸었다.

 

크로포트킨은 1888년 다윈의 진화론을 옹호해 다윈의 불독이라 불렸던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헉슬리(1825 ~ 1895)의 논문에 자극받아 만물은 서로 돕는다(Mutual Aid)'라는 불후의 책을 썼다. 크로포트킨은 자연은 이기적인 생명체들이 벌이는 냉혹한 투쟁의 장이라는 헉슬리에 맞서 인간은 원래 선하고 자비롭게 태어났지만 사회 또는 문명에 의해 타락했다는 사상을 천명했다.(크로포트킨에 의하면 헉슬리는 다윈의 핵심적인 사상보다 용어 몇 개를 가져다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사상에 과학적인 외피를 입힌 사람이다.)

 

크로포트킨은 시베리아에서 다윈의 생각에 의심을 품게 되는 장면들을 목격한다. 동물들이 자연의 힘 앞에 혹독한 생존경쟁을 치르는 한편 수많은 개체들, 군체들 사이에서는 어김없이 상호부조와 상호지원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에게 그 모습은 생명의 유지와 종의 보존, 나아가 종의 진화에서 엄청난 중요성을 갖는 것으로 느껴졌다. 크로포트킨은 상호부조를 입중해주는 사례들이 너무나도 풍부하다는 사실에 놀란다.

 

크로포트킨의 주요 논지는 인간의 삶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니라 협동과 상호 도움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크로포트킨에 의하면 수많은 다윈 추종자들은 생존 경쟁이라는 개념을 가장 협소하게 제한했다. 동물 세계의 개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을 인간의 원리로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동물들 사이에서 격렬한 경쟁의 시기에는 종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착안했다. 크로포트킨은 동물, 야만인, 미개인, 중세의 도시인, 근대인등이 보인 다양한 상호 부조 사례를 예시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크로포트킨은 개별적인 투쟁을 최소화하면서 상호부조를 최고조로 발전시킨 동물 종들이야말로 늘 수적으로 가장 우세하며 가장 번성하고 앞으로도 더욱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런 예들은 인간 사회에서도 그대로 발견되었다고 크로포트킨은 주장한다. 상호부조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들이 전성기를 누리는 시기야말로 예술, 산업 그리고 과학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개미와 흰 개미는 홉스주의적 전쟁을 포기했다는 말을 했다. 이는 인간이 진화의 정점(定點)이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생물학자들을 중심으로 인간은 진화의 정점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을 보면 크로포트킨의 주장은 낯설거나 현실로부터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생물학자 프란츠 부케티츠는 진화과정이 고등한 형태가 오래된 원시적 형태를 단지 대체하는 것이라면 오늘날에는 고도로 진화한 종족 즉 몇몇 영장류만이 현존할 것이라는 말을 했다. 이는 진화가 진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주장이다.

 

반면 물리학자 한스 그라스만은, 진화는 발달을 포함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경험상 명백한 모순에 빠진다는 말을 했다. 내 경우 제레미 리프킨의 엔트로피를 읽고 진화를 보는 시각은 하나로 고정될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리프킨은 이 책에서 진화로 인해 에너지 흐름의 값이 더욱 커지고 이로 인해 환경 전체에 더 큰 무질서가 발생한다는 점을 예로 들어 진화가 진보가 아니라는 주장을 했다.

 

한스 그라스만이 말한 진보는 지력(知力), 언어 능력, 도구 사용 능력 등의 면에서 정점(定點)에 오른 인간의 위상을 말하고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는 리프킨의 말은 더 큰 무질서(더 큰 엔트로피 총량)에 착안(着眼)한 말이다. 자연에 되돌릴 수 없는 충격을 가하며 유용한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방향으로 삶을 이어나가는 현재의 행태는 진보와 발전은 무엇인가, 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갖게 한다.

 

루소가 자연에서 필사적인 싸움을 도외시했다면 헉슬리는 투쟁만을 보았다는 이유로 양자를 모두 비판하며 서로 도움을 주는 종이 싸움만 하는 종에 비해 적자(適者)라고 주장하는 크로포트킨은 다윈의 저작에서 경쟁에 대한 실제적 증거를 찾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다윈이 극심한 생존 경쟁을 주장한 것은 중간 변종의 절멸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따라서 절멸이라는 말은 은유적으로 사용되어야 하며 중간 형태의 절멸은 필연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크로포트킨은 경쟁하지 말라, 경쟁은 항상 그 종에 치명적이며, 경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많다는 주장을 펴며 인간들이 자연의 일반적인 법칙에서 예외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연을 상호 부조가 지배적인 세계로 보았음에도 그 법칙과 동떨어진 행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약육강식과 생존경쟁이 지배하는 정글로 보고 있기에 인간만이 자연 법칙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남으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지적해야겠다.

 

생물학자 매트 리들리는 홉스는 다윈의 직계 조상이라는 주장을 폈다. 홉스는 데이비드 흄을, 흄은 애덤 스미스를, 애덤 스미스는 맬서스를, 맬서스는 다윈을 낳았다.(‘이타적 유전자‘ 347 페이지) 한편 스미스는 밀턴 프리드먼을 낳았고(경제학), 다윈은 도킨스를 낳았다.(생물학) 리들리는 헉슬리의 능력주의에서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그 잔혹한 우생학이 도사리고 있다는 말을 한다.(리들리는 주목할 만한 생물학 이론가이다. 붉은 여왕 이론과 별개로 히틀러의 우생학은 다윈이나 스펜서가 아닌 마르크스에게서 배운 것일 수도 있다는 그의 주장은 새롭고 논쟁적이다. 다윈은 마르크스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저작에 그의 글을 많이 인용했다.)

 

리들리는 대의(大義)를 추구하는 본능은 북돋고 자기이익과 반사회적 행동을 추구하는 본능은 억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이기적(또는 이타적)이라는 선언이 사람들을 그렇게(이기적 또는 이타적으로) 몰고 갈 것이라는 전제하에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인간에게는 사리(私利) 추구를 향해 치닫는 천성이 있다는 진실을 숨기거나, 가능하다면 우리 내면에는 고상한 야만인이 존재한다는 환상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리들리는 침팬지와 달리 남녀 평등, 평화와 배려 등의 특징을 보이는 보노보가 우리에게 조금 더 일찍 알려졌다면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이 달라졌을 것(‘내 안의 유인원을 쓴 프란스 드 발 교수)이라는 보노보를 둘러싼 이슈를 생각하게 한다.

 

나는 보노보에 비해 폭력적인 침팬지가 인간 본성의 모델로 결정되었기에 인간들이 폭력적이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는 것이 아니듯 평화와 배려를 특징으로 하는 보노보가 인간 본성의 모델이 된다고 해서 인간들이 평화적으로 남을 배려하는 특성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왔지만 이타적 유전자를 말하는 리들리의 주장에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리들리는 크로포트킨이 희망했던 자유로운 개인들의 세계가 실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크로포트킨의 정의(定議)에도 불구하고 이타적 상생을 위한 길은 멀어 보인다. 더 많은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닉 레인의 책(‘미토콘드리아생명의 도약‘)과 린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을 정독하는 데 많은 시간을 써야 할 것 같다. 책을 선물해 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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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 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
계승범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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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승범 교수의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조선을 지배한 엘리트, 선비의 두 얼굴'을 부제로 한 책이다. 출간 8년이 넘은 책이다. 김용만 저자의 '조선이 가지 않은 길'의 문제의식과 공명하는 부분이 많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그간 선비를 지나치게 개인에 초점을 맞춰 보아왔다는 생각을 했다.

 

저자는 선비를 보는 세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1) 어떤 인물이 당시 자신이 속한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에 어느 정도 충실했고 더 나은 가치 창출을 위해 얼마나 주도적 역할을 했는지, 2) 그의 삶이 시공을 초월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떤 선의의 보편적, 표본적 의미를 지니는지, 3) 그 사람의 직책이나 지위에 부여된 기대(임무, 사명)에 얼마나 부응했는지 등이다.

 

저자가 비판하는 것은 선비들이 몸 담았던 사회의 모습과 그들이 주도했던 정치현실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선비정신만을 분리해 일방적으로 다루고 찬미하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식민사관과의 관계이다. 당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식민사관에 대항해 당쟁이 긍정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당쟁을 무조건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 당쟁을 그렇게 치열하고 극단적으로 했는지를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조선 선비들은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 두지 않은 채 자당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물고 뜯고 싸웠다.

 

당쟁 이야기가 주가 아니기에 넘어가고 진경문화론과 식민사관과의 관계를 논하자. 진경문화론 역시 당쟁론처럼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연구동향이다. 조선 선비들은 권리만 추구했고 의무나 책임은 나 몰라라 했다. 때로 공자나 맹자의 가르침도 자파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경우 무시했다.

 

조선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였다. 이는 조선 국왕을 중국 천자의 대리인으로 여긴 것과 관계있다. 자신들이 궁극적으로 충성을 바칠 대상은 중국 천자라 생각한 결과이다. 개인적으로 따뜻한 인품을 보인 선비들이 제도적으로는 전혀 다르게 행동했다. 노비에 개인적 인정을 보인 이황이 노비 해방을 반대한 것이 대표적이다.

 

상당히 거슬리는 표현이 안빈낙도(安貧樂道)이다. 조선 선비들은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재산가들이었다. 안빈낙도란 말은 가진 자의 유유자적, 음풍농월을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표현한 말이다.

 

저자는 정치를 담당할 학식과 교양을 갖춘 유일한 계층인 선비들이 정치가 타락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기만 깨끗하겠다고 은퇴해서는 제자나 후학들을 통해 중앙 정계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으로 개입하는 정치 행위를 비판한다.

 

저자에 의하면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라는 유교 이론은 검증된 적이 없다. 세자 책봉 과정에서 두 차례나 왕자의 난이 발생한 이성계 집안은 콩가루 집안인데 이성계가 수신, 제가를 잘 했다고 보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주희의 이론 적어도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 부분은 금과옥조로 받아들일 것이 결코 아니다.

 

덕치, 교화, 왕도(王道) 등은 정치 현실을 개선할 수 없다. 역사상 승자는 늘 패자(覇者)였다. 저자는 이상향의 효시인 요순시대는 실존이 확인되지 않은 상상 속 시대라 말한다. 계승범 교수의 책에는 개인적으로는 문제가 없으나 정치 현장에서는 문제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가령 옛 것만을 근본주의식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의 인식이 개인 차원이라면 문제가 없겠으나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권력구조라면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식이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조선 국왕이 두 차례나 반정으로 쫓겨난 것은 왕의 친위부대가 부재한 것과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자기 수신은 제대로 하지 않고 정쟁을 일삼으면서 왕에게만 수신(修身)을 강조한 이중적인 존재들이었다. 군자와 소인을 가른 공자의 생각은 현실성이 없는 관념적인 것이다. 아니 중세적 양단 논리이다. 조선 선비들은 노비 제도 등으로 귀천을 엄격하게 구별하는 것이 예의와 염치를 유지하는 근간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에 저자는 노비를 거느리지 않았던 공자와 맹자 등은 어떻게 예의와 염치를 실천했는지 묻는다. 대표적인 실학자 정약용은 1801년의 공노비 해방 조치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한 박지원도 노비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148 페이지)

 

조선 후기에 국내의 상공업 발전을 중시함으로써 비교적 가장 현실성 있는 국방강화책을 제시한 박제가도 양반의 군복무 필요성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176 페이지) 조선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다. 전체 파이를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주어진 농산물에만 의존했기 때문이다.

 

조선 선비들은 상업으로 이익을 남기는 행위를 소인배의 행동으로 간주했다. 혹자는 지금 기준으로 과거를 본다고 비판할지 모르지만 백성을 배불리 먹인 후에 예법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한 맹자를 생각해보라. 정치의 3대 요소를 경제, 군사, 백성으로부터 얻는 신뢰라고 언급한 공자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조선의 선비들은 공자가 말한 세 가지를 제대로 수행하려다가 시세를 잘못 만나 아쉽게 실패한 것이 아니라 시종일관 자기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한 일에만 몰두했기에 실패했다고 말한다.

 

나는 조선이 상공업을 천시해 가난의 길을 자초한 것을 비판하는 것은 조선 선비들이 숭상하는 맹자의 이론 즉 당시 기준으로 문제삼는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은 자신들은 실천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늘 왕을 가르치려고만 했고 천재지변의 책임도 왕에게만 전가했다.(117 페이지)

 

저자는 평소에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중국의 사례를 인용하면서도 서얼 허통의 경우에는 침묵한 이유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라 말한다.(139 페이지) 이 역시 당시 기준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중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언행일치, 높은 도덕성 등은 당시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이 높았다.

 

이런 이상한(선택적) 함구는 이황에 의해서도 자행되었다. 즉 나라의 근본을 굳게 해야 한다는 논리를 들어 서얼 차별을 정당화했지만 서얼을 차별하지 않은 중국이 어떻게 나라의 근본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굳게 함구한 것이다.(145 페이지)

 

대체로 제국이 보편성과 다양함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데 비해 제국을 추종하는 주변부 문명에서는 대개 제국으로부터 들어온 어떤 체제나 이념이 원형 그대로 남는 면이 강하고 특히 교조적으로 변형되어 권위의 원천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흔하다.(234 페이지)

 

조선의 유교화는 17세기부터 집중적으로 나타났으며 지나치게 교조적이고 배타적으로 진행되었다.(235 페이지) 저자는 동서고금의 인류사에서 타자의 지배하에서 자기 정체성을 지키는 가장 손쉽고도 보편적인 방법이 종교적(의례적) 율법들을 더욱 교조화해 지키는 것이라 말한다.(237 페이지)

 

조선의 지배층이 외교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청나라를 새 종주국으로 받아들였지만 국내에서는 그런 현실을 부정하고 이미 망한 명나라를 영원한 군부(君父)로 간주하며 더 철저하고도 애틋한 정을 보였다.(236 페이지) 타자란 청나라를 말하고 지배란 그들의 세력권하에 들어선 것을 말한다.

 

저자는 식민지로 전락한 나라는 정치적 주권을 완전히 상실해 정체성 위기를 맞을 경우 전통문화의 역사를 지키는 것이 정체성을 지키는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 말한다.(239 페이지)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 전통문화까지 포기해야 한다면 민족의 정체성이 거의 전부 사라지는 것이다.

 

식민지로 전락한 우리의 경우 사회풍속 차원에서는 오히려 유교적 가치를 고수함으로써 자본주의와 물질주의로 대표되는 일제의 침략에서 조선인의 정체성을 강하게 지키려 했다. 조선 선비들의 가장 큰 실수는 명, 청 교체기라는 새로운 국제질서의 변화를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명이 망한 지 200년이 지나도록 소중화를 외치며 자신들이 만든 상상 속의 명질서(明秩序) 속에서 정저지와(井底之蛙)식 정책과 사고방식을 고수한 것이다.(241 페이지)

 

저자는 한국문명의 쇠퇴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선비들이 애국자로 평가받게 된 현실을 비극으로 표현한다. 개화파들 중에서 직접 무기를 들고 나선 자가 거의 없는 현실과 극명하게 대조된 위정척사 운동으로 인한 것으로 결과적으로 그것은 국권 상실의 책임을 져야 할 유학자 선비들을 애국자로 변신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우리 사회는 타락한 유교문화와 부패한 양반통치 문화를 청산할 기회를 놓쳤다.(242 페이지)

 

우리는 일본의 식민사학자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그들은 조선 멸망의 원인을 명분론적 사대주의와, 민생을 외면한 당쟁이라 지적했다. 우리 스스로도 그런 점을 원인으로 결론낼 수 있는 상황인데 우리를 식민지배했던 일본이라는 외세의 식민사학자들이 지적했으니 더구나 악의적으로 했으니 그에 대한 반동 또는 반발로 사대주의는ᅵ 의리 있는 행동으로, 당쟁은 붕당정치로 미화한 것이다.

 

피해란 우리가 그들로부터 민족적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것이 아니라 그들에 대한 반동으로 청산해야 할 과거를 미화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당쟁이 없었던 나라는 없었다. 하지만 조선의 당쟁은 대를 이어가며 전국을 무대로 300년 이상 이어졌다는 점에서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바(187 페이지) 80퍼센트 이상의 사대부 집안이 정치에서 배제된 탓에 소멸되었지만 이는 긍정적인 종결이 아니다.

 

당쟁은 급기야는 국가경쟁력에 심각한 손상을 초래, 근대의 물결을 맞아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일본에 먹히는 결과를 낳았다.(185 페이지) 앞서 진경문화론이 식민사관에 의해 폄하된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차원에서 나온 연구동향이니 이는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말을 했는데 식민사관이 없었다면 진경문화론이 탄생했을까?

 

정선(鄭敾; 1676 - 1759)의 진경산수화에 대해 잠시 말해보자. 우리가 17, 18세기에 문화적 자주의식을 가졌는지 회의하는 학자도 있다.(한정희 지음 '한국과 중국의 회화' 217 페이지) 한정희 교수는 18세기 한국회화의 창의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의 회화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고 말한다.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한동안 팽배해 있는 와중에도 기본적으로 문화적인 모화사상(慕華思想)이 사라진 적은 없었다는 것이다. 한정희 교수는 금강산을 찾고 그린 것은 우리 것을 찾고자 하는 자아의식이나 국가의식의 발로라기보다 세속에서 잠시 떠나 초속(超俗)의 진리를 찾아보고자 하는 심진(尋眞)의 경지이며 각박한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 신선의 마음이 되어보려는 일종의 신선사상에서 나온 것이라는 논의를 소개한다.

 

우리의 문제는 선비정신과 유교문화 자체이지만 그 이상으로 그것을 식민사관에 대한 반발 차원에서일망정 미화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유교를 조선 망국의 원인으로 신랄하게 비판한 단재 신채호는 주목된다.

 

저자는 일제의 어용학자들이 유교의 폐해와 사대주의를 한국문명의 쇠퇴와 조선 멸망 원인으로 선전하기 시작하던 상황에서 그들의 해석과 같이 과감하게 유교의 폐해를, 특히 사대주의를 국운 쇠퇴의 주원인으로 지적한 신채호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라 말하며 자신의 목소리로 나름의 논리를 전개한 신채호야말로 식민사관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한국인 사학자가 아니었을까? 라고 말한다.(244 페이지)

 

필요한 것은 소신이고 부분이 아닌 전체성을 보는 것이고 냉철하고 객관적인 현실적 시각을 갖는 것이다. 늦었지만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를 적극 추천한다. 저자의 책을 읽으며 통쾌함을 느꼈다. 핵심을 너무도 정확히 논리적으로 지적했기 때문이다. 통쾌(痛快)라는 말을 생각한다. 통쾌의 통은 통할 통자가 아니라 아플 통자이다. 의미심장한 단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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