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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연필을 씁니다 -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 예찬
태재 외 지음 / 자그마치북스 / 2019년 12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6학년 때 필통 안에 커터 칼을 넣어 다녔다. 연필을 깎기 위해서였다. 연필깎이가 있던 시절이지만 종이를 대고 연필을 깎는 그 재미가 너무 좋았다. 필통이 더러워지고, 심이 부러져도 또 깎으면 되지, 하는 마음으로 연필을 깎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에 들어가 검은색 제도 샤프에 눈을 뜨면서 연필을 멀리하게 되었다가 다시 연필을 사랑하게 된 건 아마도 바이올린 때문인 것 같다. 악보에 표시를 할 때 샤프로 하는 이는 거의 없다. 주로 지우개 달린 연필을 이용한다. 잘못 쓰면 지워야 하고, 활의 위아래 방향이 수시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볼펜으로 쓰면 낭패다. 지우개 있는 샤프도 있지만 언제 뚜껑 열고 지우나? 지우개 달린 연필이 최고다. 표시할 때는 부드럽고도 진하게 되는 것이 좋아 항상 2B 연필을 쓴다. 자주 잃어버려 12개 세트로 구입해 한 번에 잔뜩 깎아두고 쓴다. 연필에 이름을 그렇게 써 두어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둘 없어지고, 나중에는 귀한 물건이 된다.
또 하나, 연필에 대한 로망이 생긴 계기는 기억이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건축가인지 만화가인지 모를 한 사람의 인터뷰에 나온 잘 깎인 연필이 둥글게 잔뜩 꽂힌 연필꽂이를 보고서이다. 흉내 내어 보느라 연필을 한 다스 사서 다 깎아 연필꽂이에 꽂아 두었더니 보기만 해도 무언가 작가가 된 듯한 느낌이어서 잠시나마 행복했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이런 연필에 대한 추억 하나쯤 있지 않을까? 그런 발상에서 이 책이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젊은 창작자들의 연필 예찬이라. 나는 이 책에 실린 아홉 명의 창작자 중 둘을 안다. 최고요님은 책으로 만났고, 김겨울님은 유튜브로 접했다. 사실 얼마 전 알게 된 김겨울님의 채널을 쭉 보다가 책을 여러 권 낸 걸 알고 도서관에서 이름을 검색하여 나오는 다른 책들과 함께 이 책을 빌리게 되었다. 그가 나오는 부분은 일부이지만 영상으로나마 여러 번 보았던 분의 글이라 그런지 친숙한 느낌이었다. 이분도 무언가에 꽂히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향이 강한지 연필 종류에 대한 나열에 질릴 수밖에 없었지만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글이 마음에 들었다. 최고요님의 문장도 익히 접한 바대로 매력적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의 낯선 창작자들의 글도 재미있었다. 연필이라는 공통 주제를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들을 꺼내놓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연필을 좋아하는 이유도 다양한데 통상 생각하는 사각사각한 아날로그적인 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잃어버려도 아깝지 않은 합리적인 가격 때문이라고 솔직히 말하기도 한다. 사실 다 써서 버리기보다 잃어버리기 일쑤인 나로서는 무척이나 공감 가는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예술가나 창작활동을 하는 이들에게 연필은 어쩌면 일종의 상징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펜이나 디지털로는 표현할 수 없는 창조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연필은 젊은 창작자에게도 열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연필을 쓰면 창의력이 좋아질까 궁금하다. 이 책을 빌미로 우리반 아이들에게 연필을 권해 보련다. 고장난 샤프 고치느라 수업에 집중 못하는 아이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기도 하지만 왠지 꾹꾹 눌러 연필을 쓰면 더 바르게 자랄 것 같은 나만의 신념 때문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남편이 고집스럽게 연필을 깎아주던 때가 있었다. 연필을 깎으면서 아이들이 잘 되기를 기도하지 않았을까? 연필에는 간절한 바람과 열망과 창조적인 정신이 깃들어있는 것 같다. 나무향과 흑연의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결합처럼 말이다.
* 목소리 리뷰
https://www.youtube.com/watch?v=hoDmaFl2em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