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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평점 :
가제본으로 책을 받아 보기는 오랜만이다. 민음사에서 책을 보내주시다니. 저번에 읽은 장 그르니에의 섬 이후 처음이다. 몇 년 전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영화를 보고 책으로도 만난 적 있는 조남주 님의 소설집이었다. 이 책 역시 여성들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었던 그 책과 느낌이 비슷한 여성들의 이야기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이를 키우는 전직 회사원 한 명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각 연령대의 여성들 어쩌면 이 책의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펜데믹을 맞은 초등학생의 이야기로부터 아이 엄마, 중년, 80이 넘은 노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첫 이야기 <매화나무 아래>는 금주, 은주, 그리고 말녀 세 자매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말녀는 이름을 동주로 고쳤고, 은주는 두 번의 암 끝에 세상을 떠났다. 금주는 남은 여생을 요양원에서 보내는데 자신도 나이가 많은 동주가 큰언니의 요양원을 찾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자주 생각지 않았던 노년의 삶을 그려볼 수 있었고, 오래전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겪었을 차별들을 상기했다.
<오기>라는 제목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은데 그 이유는 주인공이 마치 작가 자신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소설이라기보다 에세이 혹은 일기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이다.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는 소설을 쓰고 부정적인 댓글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마지막 작가의 말에 이 이야기 속 에피소드가 모두 자신의 경험담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지만 그 말을 통해 많은 부분이 겪은 내용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이야기 중 작가인 초아가 여고 시절 김혜원 선생님으로부터 은희경 작가의 <새의 선물>이라는 책을 선물 받고 고3인데도 스무 번이나 읽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아마도 조남주 작가 자신이 이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을 것이다. 그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 진다.
<가출>은 작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썼다고 한다. 가출한 아버지가 화자의 카드를 지닌 채로 어딘가에서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것을 문자로 받으며 화자는 아버지의 건재함을 느낀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신 아버지가 이렇게라도 곁에 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미스김은 알고 있다>라는 이야기는 한편 미스터리한 면도 있다. 일가친척들로 이루어진 병원 홍보 대행사에서 온갖 일들을 도맡아 하던 미스김이 부당해고를 당한 후 그녀의 존재감은 모두에게 깊숙이 남는다. 여성들의 사회생활 모습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다.
<현남 오빠에게>는 마지막 부분이 굉장히 통쾌했는데 그것을 위해 앞부분은 정말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한 남자의 그늘 아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된 한 여자가 그 남자의 청혼 이후 이렇게 당당해질 수 있다는 것은 조금은 억지스럽다고도 할 수 있다. 이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면 그때까지 그 남자 옆에 있지 않았을 것 같다. 아마도 우리 주변에 있을 이런 여성의 삶에 대해 알려주고 싶었나 보다. 단연코 내 주변에는 없지만 말이다.
<오로라의 밤>은 57세 수학교사 출신의 교감선생님 이야기이다.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오로라를 보고 싶다는 꿈을 마음에만 품은 채 아이를 키우고,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딸은 어느덧 엄마가 되어 있고, 아이 양육 문제로 화자는 딸과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던 중 오로라를 보러 가는 여행의 실현을 목전에 두고 그녀는 돌연 예상치 못한 동반자와 함께하게 된다. 고부간의 갈등은 옛날부터 있어 온 것이고 비단 우리나라의 이야기만이 아닐 정도로 보편적인 정서이나 이 이야기에서는 과감히 그 틀을 깬다. 그 중심에 있던 남편이자 아들이 교통사고로 돌연 사망한 것이다. 한 남자를 놓고 벌이던 신경전은 어느새 상실감을 가진 동지의식으로 바뀌었다. 오로라를 보기 위한 여정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졌다. 묘사가 디테일하고 실감 나서 여행을 실제로 다녀온 후에 쓴 거라고 생각했는데 작가의 말에 다큐멘터리나 책, 블로그를 참고해 썼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직접적인 경험도 중요하지만 책이나 영상 등의 자료를 이용한 간접 경험 만으로도 훌륭한 글을 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성희롱을 하는 반 남학생에 대처하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는 여학생들에 대한 이야기다. 요즘 군대에서 벌어지는 성추행이 큰 이슈가 되고 있는데 여성을 노리개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정말 크게 반성해야 할 것 같다. 학창 시절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들을 저지른다면 버릇을 고치기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 이야기인 <첫사랑 2020>은 5학년이 된 한 초등학생이 주인공이다. 4학년 종업식 날 고백을 받은 수줍은 한 소녀는 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 행복한 학교생활을 꿈꾸었지만 난데없는 코로나 사태를 맞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는 서연이 LTE 19의 기본 링을 소진하면서부터 삐걱대기 시작한다. 소박한 초등학생의 이야기를 읽으며 작년에 겪은 학교 상황을 어쩜 이렇게 잘 알고 있는 것인지 놀랐다.
여성이라면 공감하며 읽을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한편 남성 독자들이 이 책을 읽으면 어떤 생각을 할지 떠올려보기도 했다. 아마도 작가는 이 책 이후 또 악성 댓글에 시달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을 해 본다. 하지만 한 번 겪었던 일이므로 더 의연히 헤쳐 나갈 것이라 기대한다.
책에 실린 이야기들이 10년 동안 여기저기에 기고한 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부러 소설집을 만들려고 쓰지는 않았는데도 이렇게 하나의 주제로 엮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그만큼 여성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는 의미 이리라. 박막례 할머니의 영상을 보며 영감을 받아 활기찬 노년에 대한 이야기를 쓴 부분이 신 난다.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가 아닌 배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든 여성들에게 박수를.
--- 본문 내용 ---
- 집에 돌아오자마자 작업방으로 달려가 책상 위의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김혜원 선생님께’로 시작하는 메일을 쓴다. 죄송하다고, 그렇게 전화를 끊은 나 자신이 부끄럽다고. 소설의 내용은 대부분 내 경험이었고 우리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같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우리가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선생님과 밤새 나눴던 대화가 내 기억들을 불러온 것은 맞다고 쓴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항의는 타당했다고 쓴다. 막막하고 피곤하던 고3의 시간들과 무능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나까지 대학에 보낼 여유는 없다며 수능 날 아침 미역국을 끓여 주던 엄마를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은 『새의 선물』과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쓴다. 선생님이 있어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쓴다. 그때는 내 고통이 너무 커서 이런 고민조차 사치였던 또래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부끄럽다고 쓴다. 그러나 나는 내 경험과 사유의 영역 밖에도 치열한 삶들이 있음을 안다고, 내 소설의 독자들도 언제나 내가 쓴 것 이상을 읽어 주고 있다고 쓴다. 그러므로 이제 이 부끄러움도 그만하고 싶다고, 부끄러워 숙이고 숨고 점점 작게 말려 들어가는 것도 그만하고 싶다고, 그만하고 싶은 이 마음이 다시 부끄럽다고 쓴다. 선생님이 원망스럽다고 쓴다. 미안하고 고맙다고 쓴다.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쓴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쓴다. 하지만 보고 싶지 않다고 쓴다. 다시는 만나지 말자고 쓴다. 그래도 보고 싶을 거라고 쓴다. 결국 만나게 될 거라고 쓴다. (78-80쪽)
* 목소리 리뷰 *
https://www.podty.me/episode/15943034
* 위 글은 출판사로부터 무상으로 제공 받은 책을 읽고 솔직한 마음을 적은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집에 돌아오자마자 작업방으로 달려가 책상 위의 노트북을 열었다. 나는 ‘김혜원 선생님께’로 시작하는 메일을 쓴다. 죄송하다고, 그렇게 전화를 끊은 나 자신이 부끄럽다고. 소설의 내용은 대부분 내 경험이었고 우리가 비슷한 경험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같은 사람은 아닐 거라고, 우리가 같은 사람은 아니지만 선생님과 밤새 나눴던 대화가 내 기억들을 불러온 것은 맞다고 쓴다. 그러므로 선생님의 항의는 타당했다고 쓴다. 막막하고 피곤하던 고3의 시간들과 무능한 스스로에 대한 모멸감과 나까지 대학에 보낼 여유는 없다며 수능 날 아침 미역국을 끓여 주던 엄마를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은 『새의 선물』과 선생님 덕분이었다고 쓴다. 선생님이 있어서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 있다고 쓴다. 그때는 내 고통이 너무 커서 이런 고민조차 사치였던 또래들을 생각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그것이 부끄럽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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