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간혹 내 자신도 감당 못할 만큼 깊은 ‘우울’이 찾아오는 날이 있다. 그렇다. 우울과 슬픔은 엄연히 다른, 이차원적 감정의 모델이다. ‘슬픔’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위로해 달라고, 나를 좀 일으켜 세워 달라고 투정도 부를 수 있는 반면, ‘우울’에는 약이 없다. 오로지 세상에 나 혼자 뿐이라는 절망과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음을 더욱 뼈저리게 만들어 버리는 공황의 늪인 우울에서 헤어 나올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모든 과거와 미래로 통하는 기억의 문을 닫고, 따뜻한 이부자리에 웅크려 책을 읽는 거다. 누구의 방해도 받고 싶지 않다는 듯 문을 걸어 잠그고, 휴대폰의 전원 버튼을 과감하게 누르고서 말이다.

  책 속에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현실 도피를 위한 가장 탁월한 처방전이다, 라는 말조차 진부할 만큼 책은 나에겐 절실하다. ‘책’이라는 존재가 주는 무한한 해방감은 오히려 부차적인 설명이 되어 버릴 만큼 말이다. 도저히 한 마디로 표현 할 수가 없다. 그저 책은 태곳적부터 그러했다는 듯 나에게 너무 절대적이고, 너무 절실할 뿐이다. 무조건적인 숭배대상에 대한 해석 불능의 상태가 책과 대면할 때마다 항상 발생하곤 한다. 묘하게 가슴 두근거리고, 흥분되는, 마치 연인과의 잠자리에 들 때 느껴지는 짜릿한, 이런 감정. 그래……. 책을 신봉하는 독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그런 감정의 일부분이다.

  아 - 이토록 사랑스럽고, 이토록 고귀하고, 이토록 무조건적인 믿음을 찬양케 하는 존재가 세상에 또 있을까. 책이 존재하는 한, 나에겐 그 흔한 애인조차 필요 없다. 지독한 외로움의 갈증은 더 없이 매력적인 주인공들로부터 채우면 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박학다식하고 수려한 외모의 그들로부터 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영원을 기약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세상과 내가 가보지 못한 세상의 지식들, 풍경들, 고지식한 상태로 머물러 있던 내 빈 가슴을 채워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나로 하여금 처절할 만치 숨 막힘을 경험케 했다. 언제나 책과 마주보면 가슴이 뛴다.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퇴근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 전 읽는 그 세계는, 총 천연색으로 빛나는 환상의 세계다. 그리고 나는 무작정 그 세계로 뛰어 든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단단히 부여잡고서.

  지금 행복하세요?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당연히 잘 모르겠다,라는 애매모호한 답변이 먼저 떠오른다. 내 행복의 깊이를 아직은 탐색해 본적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진지한 답변을 떠올리자면 먼저 숨이 막히는 경험부터 해야 할 것이다. 그런 내가 이상하게도 책을 읽을 때는 그저 막연히 참 행복하고 아늑하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다. 공중부양을 한 기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내 현실은 나의 목을 비틀지만, 허구의 세상에서 나는 비로소 내가 되어 살아가는 걸까? 아니면 그 반대일까? 그렇다면 「침대와 책」의 저자, 정혜윤 PD는 이 질문에 뭐라고 답변을 할까? 까닭 없는 행복함으로 하루가 충만할 것만 같은 그녀, 책과 현실의 경계조차 불분명한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말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 갈 것만 같은 그런 기분이 든다.

  상상을 해 본다. 지금까지 경험한 책 속의 세계가 너무도 다양해서 도저히 우울함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을 것만 같은 정혜윤 PD. 그렇게 다양한 책을 많이 읽었기에, 삶의 달콤함을 일찍 깨달아 고단할 틈이 없는 걸까. 내가 닮고 싶은 그대로의 자화상을 그녀를 통해 바라봤다. 언제 한번 만나서 우울한 날 소주 한 잔 걸치고, 그녀와 마주 앉아 많은 말 필요 없이, 주고받는 몇 마디만으로도 나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걸어 다니는 도서관이자 세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지식인으로 비춰지는, 나보다 몇 살 쯤 많은 언니일 멋진 정혜윤 PD님…….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을 바라본다는 건 정말 멋진 일이다. 우연히 클릭 했다가 도저히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던 YES24 <침대와 책> 칼럼의 주인공은 오늘도 잠들기 전 다양한 세상과의 조우에 눈을 반짝이고 있겠지? 그녀의 삶을 상상하면, 내가 왜 이 책을 읽으며 이토록 행복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내가 여전히 꿈꾸는, 내가 앞으로도 꿈꿀 삶이 그 속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하나 열거 할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지식 속에서, 그 수많은 책들과 함께 동침 하는 일상은 한 없이 달콤하기만 하다.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이만큼, 그 속에 묻어나는 그 다양한 사연을 책과 접목 시켜서 ‘너무나 재미있는’ 책으로 출간해준 모든 분들께 새삼 감사 드리고 싶다. 「침대와 책」를 통해서 나는 한층 더 성숙해진 기분으로, 내 방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시선이 닿는 그 작은 공간 속이 바로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또한 앞으로 얼마나 더 살아야 나는 그녀처럼 유쾌하고, 그녀처럼 따뜻하고, 그녀처럼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변모할 수 있을 런지, 라는 막연한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하나 확실 한 것은 이미 나는 서서히 여기가 아닌 다른 세상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내 80살의 생일엔 나의 침실로 지인들을 불러들일 것이다. (책을 읽다가 뭔가 하나씩 결심을 늘릴 때 마다, 나는 내가 대견하다.) 늙은 육신, 하얗게 바래진 머리카락, 꺼져 가는 목소리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레이스 잠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 그 주의 신간을 읽고 있겠다! 그러면 내 생일을 축하하는 지인들이 몰려와 가득한 책 선물과 함께 달콤한 치즈 케이크를 놓아두고, 두런두런 둘러 앉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해야지. 간혹 웃기도 하고, 간혹 울기도 하고, 책과 함께 늙어가는 이런 삶을 나는 바라고 또 바란다. 그래.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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