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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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신문에서는 과학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1995년에 처음 번역 소개된 리처드 도킨스의 1976년 작 <이기적 유전자>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5298). 저도 최근에 읽었으니 이런 경향에 일조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읽고 적지 않게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출간하고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책 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2판을 내면서 달아둔 보주를 통해서 제기된 비판과 초판 이후의 학문적 성과 등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도킨스교수가 제안한, 문화도 모방되고 복제되어 전파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을 담은 단어, 밈(meme)이라는 용어에 대한 생각입니다.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등을 밈의 예라고 한다면,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년, 323쪽)”는 도킨스교수의 설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물이란 단지 ‘자기복제자’라고 명명한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도킨스교수의 주장에서는 생기로 넘치는 생물체를 피동적인 기계에 비유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은 지나친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런 느낌이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를 읽어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한 <이성적 낙관주의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93963>를 통하여 매트 리들리의 특유의 논리적 글쓰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를 읽고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리뷰를 남겼습니다. “비관주의자들은 인류가 경제성장이라는 어리석은 목표를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후퇴하라는 거짓 경보에 속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스스로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만드는 과업을 계속할 것이다. 간혹 후퇴하는 일도 있겠고, 설사 각 개인은 진화를 통해 획득한 불변의 본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21세기는 살기에 아주 근사한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거리낌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자.’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The Origins of Virtue’라는 원저의 제목을 <이타적 유전자>로 바꾼 것은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에서 힌트를 얻었거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인기를 고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킨스교수 역시 <이기적 유전자>의 제 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에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한다”는 집단선택설에 근거하여 개체의 이타적 희생도 알고 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기주의적 개체도 있기 마련이고 그런 개체가 잘 살아남게 된다는 설명에 더하여 이기주의적 개체만으로 구성된 생물계를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타주의적 개체들과 규형을 맞추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리들리는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철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도소를 탈주하는 장면으로 프롤로그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체와 개체 간의 투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동인(動因)은 아니며, 개체 사이의 상호부조(相互扶助) 추구도 역시 진화의 동인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근간으로 인간의 본성, 특히 경이로울 정도로 사회적인 본성에 관한 내용을 담으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최근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쌓아올린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간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가 이 책의 전체를 요약하는 총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킨스교수가 정리한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1960년대 중반 조지 윌리엄스와 윌리엄 해밀턴이 주도한 생물학계의 혁명적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개체의 행동을 결정하는 일관된 기준은 그 소속 집단이나 가족의 이익이 아니며, 그 개체 자신의 이익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어떤 개체이든 그 선조들의 행동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30쪽)”라는 내용이 혁명의 골자였던 것입니다.

 

저자나 도킨스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개미와 꿀벌집단의 협동체계는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목표, 즉 공동선과 조화를 지향하는 조화로운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군체(群體)를 생물체와 비교하여 개체 하나하나를 유전자라고 본다면 개체가 모인 군체는 유전자들이 모여 만든 염색체가 되어 생물체 전체를 이루게 만든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현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평민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인용했다는 인체 기관들에 관한 우화에서,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기관들이 서로 협동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는 것처럼 유전자 역시 서로 협동하는 것으로 최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시지구에서 처음 등장했던 유전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결합하여 복합생물체로 진화해온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하여 상호협동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만, 이런 돌연변이를 제어할 수 있는 대응체계가 발동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생명체의 오묘함이라 하겠습니다. 간혹 암과 같은 이기적 돌연변이 유전자가 이런 대응체계의 감시를 벗어나기도 하는데, 개체의 사망이라는 파국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기적 돌연변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리들리는 노동의 분업화를 통하여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집단 간의 협동체계로 흡혈박쥐들이 사냥해온 피를 서로 나누는 사례들을 인용하여 이타적 행위가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하는 한편, 새롭게 등장하는 이타주의에 관한 가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보다 뛰어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호혜주의를 구사하여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특별한 재능입니다(185쪽). 인간의 호혜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감정(感情)인데 감정은 이타주의가 궁극적으로 이익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호혜주의에서 한걸음 발전한 이론이 헌신성 모델입니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도덕감정론>에서 제안한 헌신성 모델에서는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 계산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래의 비용을 현재의 시점으로 앞당겨 도입함으로써 호혜주의에서 기대하는 이타적 행동에 대한 이기적 반대급부의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한 프랭크의 헌신성모델에 대한 설명부분입니다. “헌신성 모델의 정직한 인간은 신뢰성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신뢰성에 대해 물질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가는 그의 관심 밖이다. 행동이 감시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신뢰성은 그것이 상대에게 인식될 수만 있다면, 인식되지 못할 경우에는 불가능한 매우 소중한 기회를 창출한다.(193쪽)” 눈앞의 이기적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은 우리의 도덕 감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예측할 수 없는 장래에 기회를 열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기적 측면을 강조해온 지금까지의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셈입니다.

 

리들리는 개체의 헌신성 모델로 이타성을 설명하면서 집단의 폭력성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장류인 침팬지와 인간이 집단의 협동을 통하여 다른 집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죽고 죽이는 폭력까지도 일어난다는 것인데, 특히 침팬지와 달리 인간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무리밖에 홀로 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주된 것입니다. 저자는 집단을 형성하지만 폐쇄성이 없는 암컷 코끼리 사회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집단의 폭력성은 부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집단을 만들고 연합을 형성하며 폐쇄적으로 살아온 유인원의 진화적 유산으로, 특히 종교적 교리가 거의 예외 없이 집단 내부와 외부의 차별을 강조해온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부족으로 분할된 폭력적 사회에서의 배타적 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인류학자 존 하퉁의 말입니다. “편협성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다. 종교는 대부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집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배타적 도덕성은 그것을 잉태시킨 경쟁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267쪽)” 세월이 흐르면서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하던 교리를 수정해온 것도 이교도들을 집단 내부로 끌어들여 타 종교와 경쟁에서 비교우위에 서려는 종교집단의 생존전략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교역을 집단 이기주의의 이로운 측면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립과 경쟁관계에 있는 집단들 사이에 교역을 매개로 하여 협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는 교역이 이미 석기시대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요크반도의 원주민 이르요론트족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의 분화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 총성없는 교역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교역이 집단 이기주의의 이로운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홍적세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인디언들의 조상이 짧은 기간에 대형 포유동물의 73%를 살육해 사라지게 했다거나, 근세 들어서도 마다가스카르섬,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대륙 등에서 자행된 살육을 통하여 무수한 생물들이 멸종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을 무절제하게 사용해온 인류의 탐욕 때문이라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생각 자체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근거한 관념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리들리가 이성적인 낙관을 하는 것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실행에 옮길 때라는 금언대로 바로 지금 인류는 종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해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전자의 이기성을 논하기 위하여 인용했던 죄수의 딜레마가 이기성이 인간됨의 원형이라는 결론 대신에 반복적으로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조건에서 실행했을 때, 게임은 늘 선한 시민의 승리로 끝났음을 지적한 저자는 게임이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이기적인 자연착취자들의 행위를 멈출 수 있게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인식에서 자원의 남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공동의 소유인 경우는 서로간의 견제를 통하여, 개인의 소유인 경우는 지속가능한 자원활용을 고려하기 때문에 자원의 보존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저자는 공동소유의 것을 정부가 관리한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비극의 주범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타적 유전자>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사회성과 협동성과 신뢰성을 지향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성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협동의 방식을 계발하고, 믿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고, 스스로 믿을 만한 사람임을 과시해 좋은 평판을 쌓고, 재화와 정보를 교류함으로써 노동분화를 이루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사회성은 유전자의 명령이다’라는 카피와 ‘<이기적 유전자>의 인간을 위한 제2권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어야 한다.’는 도킨스교수의 추천사가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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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우주 - 인간 삶의 깊은 곳에 관여하는 물리학의 모든 것
닐 투록 지음, 이강환 옮김 / 시공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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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소싯적에는 물리를 조금 한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입시험에서도 물리과목이 들어가는 대학에 응시했고, 예과 때도 물리학 시험만큼은 자신있게 치뤘는데,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성적은 생각했던 것보다 나오지 않아서 섭섭했더랬습니다. 하지만 요즈음 관심을 가지게 된 우주의 생성에 관한 책을 읽으려니 막막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예전에 배운 물리학이 우주를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거나 아니면 옛날 배운 것을 잊어버린 탓일 것입니다.

 

관심은 있지만 이해가 어려운 우주의 시원에 관하여 궁금한 과학적 사실을 아주 쉬운 말로 풀어준 책을 만났습니다. 바로 페리미터이론물리연구소 닐 투록소장이 쓴 <우리 안의 우주>입니다. 세계적으로 뛰어난 이론물리학자이며 스티븐 호킹과 함께 우주의 탄생을 설명하는 호킹-투록 인스탠탄 솔루션을 개발한 바 있고, 폴 스타인하르트와 함께 순환하는 우주 시나리오를 개발하고 그 내용을 설명하기 위하여 <우리 안의 우주>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을 이해하고 마음속에 우주를 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14쪽)”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능력은 가장 작은 원주구성입자에서부터 관측 가능한 모든 우주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아이디어들의 지속적인 원천이 되어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미래의 세대에 대하여 저자가 거는 기대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남아프리카공화국출신인 저자가 아프리카의 젊은이들에게 거는 기대가 남다르고, 그런 기대를 기대에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도록 아프리카수리과학연구소(AIMS)를 열어 젊은 인재들이 공부할 기회를 제공하는 노력을 보면 이 시대의 리더로서 귀감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먼저 자신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요약한 저자는 수학과 물리학에 관심을 갖게 된 배경을 설명하고 그리스의 수학자와 과학자들로부터 시작한 물리학이 현대물리학으로 발전해오는 과정에서 크게 기여한 사람들의 업적을 쉽게 이해할 있도록 요약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소크라테스, 파르메니데스와 같은 철학자들과 유클리드, 피타고라스, 히파티아 그리고 아낙시만드로스 등을 그린 라파엘의 그림 ‘아테네 학당’을 인용하여 설명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이디어들은 천년 이상 잠들어 있다가 15세기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시작한 르네상스의 바람을 타고 꽃피우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19세기 후반 무렵 물리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기술을 종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는데, 뉴턴의 역학법칙, 전기와 자기, 빛에 관한 멕스웰의 이론, 윌리엄 톰슨이 정립한 열에 관한 이론 등을 거쳐 20세기 초에 플랑크, 아인슈타인, 보어 등이 기여한 양자역학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이해수준을 획기적으로 높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주가 특이점에서 시작한 거대한 폭발을 통하여 시작되었다는 빅뱅이론이 확립되면서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우주가 끝없이 확산되어 가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이 바로 우주가 순환한다는 시나리오라고 합니다. 빅뱅이 시작되는 특이점을 한 번 통과할 수 있다면 계속 통과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가정을 바탕으로 빅뱅이 무수하게 반복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빅뱅 이후에 우주는 팽창했다가 수축하고, 또 순환할 때마다 우주의 크기는 커지고 점점 더 많은 물질과 복사를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나는 파장이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는 모습을 연상하시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겁의 개념과 그리고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이르는 알쏭달쏭한 말들이 바로 우주물리학이 밝혀낸 것들에 부합하고 있는 것이 우연일까 싶습니다.

 

특히 인류의 미래에 대한 저자의 낙관적인 인식을 담고 있는 마무리 글에서 오랫동안 눈길을 뗄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과학과 인간성을 서로 연결할 때가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양쪽 다 시야를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지적 능력과 마음을 연결시킬 수 있만 있다면 더 밝은 미래와 더 통합된 과학을 이용한 더 통합된 세상을 향한 문을 활짝 열려 있다.(3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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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국을 보았다 나는 천국을 보았다 1
이븐 알렉산더 지음, 고미라 옮김 / 김영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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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의대의 부속병원에서 신경외과교수로 근무했던 이븐 알렉산더박사가 7일 동안 뇌사상태에 빠져 있는 동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나는 천국을 보았다>에 담았습니다. “나는 죽었지만, 영혼은 살아있었다.”고 정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말하려는 핵심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뇌사상태에 빠져있는 동안 경험한 것들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증언하고 있는 임사체험이라고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입장입니다. 회의주의자 마이클 셔머는 <믿음의 탄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31601>에서 “영혼은 한 사람을 대표하는 독특한 정보패턴이다. 우리가 죽은 뒤에 개인 정보 패턴을 존속할 매개체가 없는 한, 영혼은 우리와 함께 죽는다.”는 일원론적 관점과 “의식을 가진 천상의 물질이 있어 생명체의 독특한 본질이 죽음 뒤에도 생존한다.”고 믿는 이원론적 관점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원론적 관점은 천상의 물질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한계가 남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셔머는 “과학은 초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것에서 작동한다. 사실 초자연적․초과학적인 것은 없다. 자연적인 것, 정상적인 것 그리고 자연적 원인으로 아직 설명하지 못한 미스터리가 있을 뿐이다.(256쪽) (…) 시공간의 외부에 존재하는 초자연적인 신은 과학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그는 자연계의 일부가 아니기 때문이다.(257쪽)”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렉산더박사는 특별한 상황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장균에 의한 뇌수막염으로 빠르게 의식을 잃고 뇌사상태에 빠져 7일간 생시의 갈림길에서 투병을 하다가 극적으로 생환하였는데, 그 사이에 자신은 임사체험자들이 말하는 그러한 경험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소리조차 없이 어둡고 젤리같이 끈적한 물질로 채워진 공간에 갇혀있는 느낌에서 황금색의 빛줄기가 나타나고, 그 빛이 나오는 구멍을 통하여 빠져나온 그는 밝게 빛나는 대지 위를 날아가다가 다시 캄캄하고 무한하게 어두운 빈공간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곳은 창조주이며 만물을 있게 한 근원 - 저자는 이 존재를 옴(Om)이라고 부릅니다 -의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다시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들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기존의 과학적 방법으로는 영혼과 사후세계, 환생, 신, 천상 등에 관한 질문에 답하기 어려워졌다.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제되기 때문이다. (…)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에 내가 이런 것들의 사실성을 의심했던 주된 이유는, 내가 제대로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의 단순한 과학적 세계관으로는 설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204쪽)”고 하는데, 단지 자신이 임사체험이라고 할 수 있는 정황을 경험하게 되었다는 이유 하나로 임사체험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게 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자가 뇌사상태에 빠져 있었다는 기간 동안에 저자의 뇌가 어떠한 활동을 보여주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있을 뿐 아니라 뇌의 활동이 전혀 기록되지 않는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현재의 뇌과학으로 기록할 수 있는 한계 이내에서 설명이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의료진이나 보호자와 전혀 의사교환이 불가능한 상태에 빠져 있던 환자가 아내에게 이제는 포기하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공포에 빠졌는데 다행히 아내가 의료진의 요구를 거부하는 바람에 오랜 투병 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현대의학으로도 아직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임사체험에 관한 내용은 <죽음, 그 후;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081>에서 확인할 수 있겠습니다. 알렉산더박사의 경우는 관심을 쏟지는 않았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환자들로부터 임사체험에 관한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의 임사체험과정에서 느낀 다중우주에 관한 내용들은 아마도 평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물리학 혹은 우주과학에 관한 글을 읽어 기억하고 있던 사항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영성주의자인 친구가 있다거나 열심히 나가지는 않았지만 목회자들과의 돈독한 관계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경험했다고 하는 임사체험은 아마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기억에 저장되어 있던 것들이 투병기간 동안에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인식하게 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이유로 힘든 투병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한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신비한 임사체험이나 영혼의 존재를 믿는 독자들에게는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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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밀리타스 - 위대한 리더십의 완성
존 딕슨 지음, 김명희 옮김 / 포이에마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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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모 단체장 선거캠페인을 하면서 “서번트 리더십”을 내세웠던 적이 있습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경영학자 그린리프(R. Greenleaf)가 1970년대 초에 처음 소개한 리더십 개념입니다. 그는 헤세의 <동방순례>에서 순례자들을 돌보는 서번트 레오(Leo)의 역할을 인용하여 개념을 설명하였는데, 위계적 구조의 조직에서 리더가 다른 구성원들에 대해 가부장적인 위치에서 모든 권한과 책임을 혼자 독점하는 전통적 리더십과는 달리 서번트 리더십은 수평적 동료관계에서 나타나는데, 서번트 리더는 구성원들이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권한과 책임을 위임하고 지원하는 역할에 그치는 차이가 있습니다. 권위적 리더십에 대한 회원들의 반발이 심할 때였는데도 회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해서 안타까운 결과를 얻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역사학자 존 딕슨이 겸손을 주제로 한 리더십의 개념을 설명하는 <후밀리타스>를 읽으면서 그때 실패한 서번트 리더십이라는 화두가 생각나서 적어 보았습니다.

 

<위대한 기업의 선택;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1512>으로 만났던 짐 콜린스의 전작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위대한 기업으로 성장한 11개 기업의 핵심성장요소로 ‘강철 같은 결단력과 겸손한 자세라는 두 가지 특성을 지닌 리더십’를 꼽고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딕슨은 겸손“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지위를 포기하거나,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거나,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고귀한 선택”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23쪽) 이 정의에는 “첫째, 겸손은 당신의 존엄성을 전제한다. 둘째, 겸손은 자발적인 마음이다. 셋째, 겸손은 사회적이다.”라는 세 가지 핵심 개념이 있다고 했습니다.

 

저자는 겸손이 리더십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설득력과 본보기는 성공하는 리더십의 핵심이다. 겸손은 설득력을 높여준다. 어떤 면에서 겸손은 리더들이 갖춘 중요한 성격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겸손은 리더십에 중요하다.(49쪽)”라는 삼단논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역사학자답게 고대 세계가 겸손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소개하고, 명예에 대한 사랑이라고 직역되는 필로티미아(Philotimia)라는 그리스어를 제시하고, 그리스인들이 명예를 아주 좋아했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즉 명예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에서는 겸손이 미덕이 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나라렛 예수가 겸손에 대한 서구의 개념에 미친 영향을 개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학자로서 예수에 대하여 중립적 위치를 견지하고 있다고 전제하고는 있지만, 글내용을 보면 호의적 입장인 것으로 읽힙니다. 예를 들면, 또한 예수의 말을 기록한 글 어디에도 겸손에 대한 명쾌한 가르침이 강력하게 드러나지 않는다고 하고는, “예수는 진정한 위대함은 자기희생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115쪽)”라고 적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공감하고 있는 리처드 도킨스나 마이클 셔머 등이 주장하는 바에 대하여 저자가 의구심을 가지는 이유가 단지 그들이 자신의 이론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겸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에 대하여 동의하기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우주의 역학에 대해 말하다가, 창조세계의 신비에 대한 설명으로 넘어가거나, 신의 존재를 믿으라는 부드러운 주장으로 향하려는 것이 아니다.(67쪽)”라고 전제하였을 뿐 아니라 창조론에 대한 적극적 동조를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독자로서 느끼는 감은 “그래서요?”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최근 발표되고 있는 다양한 연구결과와 역사적 인물들의 행적을 분석하여 얻은 결과를 토대로  “진정한 위대함은 겸손에서 나온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여섯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사랑하는 것에 다라 우리의 모습이 형성된다. 둘째, 겸손한 사람들의 삶을 숙고해보라. 셋째, 겸손을 함양하기 위해 ‘사고 실험’을 하라. 넷째, 겸손하게 핻동하라. 다섯째, 비판을 쳥하라. 그리고 여섯째, 겸손해지는 것에 대해 잊어버려라.”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것이 오히려 자신이 주목받는 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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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인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4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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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도전했던 오르한 파묵 전작읽기가 반환점을 돌면서 시나브로 중단되었습니다. 파묵의 작품세계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졌던 것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어떻든 최근에 나온 이난아교수의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http://blog.joinsmsn.com/yang412/13126504>를 읽게 된 것이 중단한 파묵 전작읽기를 다시 이어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살아있는 작가의 ‘전작읽기’가 적절한 용어가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파묵이 노벨상 수상자라서가 아니라 터키라고 하는 특수한 위치에서 지켜본 동서양문명의 충돌현상을 작품에 담고 있다는 점이 주목거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 책을 하나쯤은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우는 의과대학 신입생 때 읽었던 독일의 의사이며 작가인 한스 카로사의 <아름다운 유혹의 시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832807>을 꼽습니다. 유럽을 막연하게 동경하던 것도 있었지만, 특히 작가의 의과대학 신입생 시절의 행적을 적고 있었기 때문에 끌렸고 공감하는 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파묵의 다섯 번째 작품 <새로운 인생>에 등장하는 오스만과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습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새로운 인생>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느낌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 장에서부터 느껴진 책의 힘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 마치 내가 읽고 있던 책장들로부터 내 얼굴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그러한 강력한 힘 때문이었다.(9쪽)” 터키사람들이 평소에 과장이 심한 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과연 이런 책이 있을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중반부에 등장하는 나린박사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작가 역시 조심스러운 입장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의 세계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책, 그런 게 오늘날 자네 같은 청년들에게는 가능한 것인가? (…) 그렇게 강력한 마력이 오늘날에도 발휘될 수 있는건가?(177쪽)”

 

작가는 <새로운 인생>에 여러 개의 복선을 깔아두고 있기 때문에 헷갈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화자(話者)인 오스만은 젊은 여성 자난이 잠시 내려놓은 <새로운 인생>이라는 제목의 책을 중고서점에서 발견해서 구입하고 읽게 되는데. 그 결과가 오스만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게 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인생>은 파묵의 소설 제목이기도 하고, 소설의 주인공이 읽은 책의 제목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즐겨 먹는 캬레멜의 상표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인생>에는 두 가지의 여행이 있습니다. 하나는 오스만이 읽은 책에 담겨 있는 여행과 주인공이 새로운 삶을 찾아 따라가는 여행입니다. 책에 담겨진 여행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는 단서가 분명하지 않습니다만 그 책을 읽은 독자들 대부분이 빠져들어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서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내용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당국에서 배포를 금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하지 않은 경로를 통하여 흘러나온 몇 권의 책 속의 책들이 독자들의 손길을 따라서 건네지면서 그 영향을 받은 독자들이 늘게 됩니다. 이 책의 내용과 파급효과의 심각성을 우려한 나린박사는 대리점모임이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대책강구에 나서게 되는데, 책의 원작자를 살해하고, 그 독자도 경우에 따라서 제거하기를 불사한다는 미스터리한 면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파묵은 오스만이 읽은 <새로운 인생>의 내용을 시시콜콜하게 소개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얼핏 전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매혹적인 서구적 삶을 담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이를 추종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어 터키전통문화를 지켜야 한다는 나린박사의 사명감을 자극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책에 빠진 오스만이 이 책에 대한 힌트를 던진 자난을 대학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데, 두 번째 만남에서 자난은 오스만에게 키스를 해서 순진한 젊은 영혼을 혼란에 빠트리는 상황 역시 생뚱맞다 싶습니다. 자난은 이 책을 먼저 읽었다는 메흐메트를 오스만에게 소개하는데, 오스만이 자난에게 자신의 감정을 설명하려는 순간 메흐메트가 총격을 받는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당하는 오스만이나 읽는 독자나 당혹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종적을 감춘 자난을 뒤쫓은 오스만의 추적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보면 파묵의 작품에서 자주 만나게 되는 오브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인물이 사라지는 상황은 앞선 작품 <검은책>과 뒤에 나오는 <순수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검은책; http://blog.joinsmsn.com/yang412/13006277>은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아내 뤼야와 사촌형 제랄을 뒤쫓는 변호사 갈립이 진실을 찾아가는 미스터리 물입니다. 한편 <순수박물관; http://blog.joinsmsn.com/yang412/12932677>에서는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을 그려내고 있다고 요약하고 있으니, 어쩌면 <새로운 인생>에 나타난 실종과 다시 만남이라는 오브제가 한 단계 발전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새로운 인생>에서는 실종되었던 인물이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자난은 살아남을 뿐 아니라, 오스만이 메흐메트를 살해하는 것처럼 주인공이 실종된 인물의 죽음과 직접 관련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행도 중요한 오브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 파묵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소설에 등장하는 여행은 ‘모색으로서의 여행’입니다. 모색은 나의 라이프스타일이지요. 나는 현실에서는 ‘여행’을 하고 책 속에서는 상상의 글을 통해 ‘모색’을 합니다.(이난아 지음, 오르한 파묵 변방에서 중심으로, 95쪽)” <새로운 여행>에서의 여행은 이 작품에서 많은 비밀을 담고 있고, 작가가 배치한 많은 장치들을 풀어내기 위한 구체적 방법이기도 합니다. 결국은 새로운 인생을 찾는 여행을 마친 메흐메트는 <새로운 인생>에 나오는 새로운 삶의 정체를 깨닫고 한적한 곳에 숨어 사는 선택을 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박물관 역시 익숙한 부분입니다. 비밀결사를 운용하는 나린박사가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전통문화와 관련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거나, 아들 메흐메트에 관한 물건들을 보관하고 있는 것은 역시 퍼묵의 소설 <순수박물관>을 거쳐 이스탄블에 같은 이름의 박물관을 개관하여 작품세계에 등장했던 오브제를 구체화하기에 이르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에 등장하는 박물관이라는 개념은 <새로운 인생> 안에 등장하는 책 <새로운 인생>을 앞세운 비밀세력의 책과 글을 앞세운 거대한 공격에 대비한 전략으로 준비한 대응방안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보물’인 ‘기억’을 잃고 속수무책의 얼간이가 되지 않게 할 것이고, (…) ‘절멸의 위기에 놓인 우리 자신의 순수한 시간 그 역사를 통치할 주권’을 새로이 쟁취할 수 있게 할 것(178쪽)”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박물관이란 우리의 손때 묻은 일상의 물건들을 정지된 시간에 붙들어 매는 타임캡슐이라고 하겠습니다. 후세의 사람들은 타임캡슐에 담긴 앞선 시대의 물건들을 보면서 그들의 생각과 삶을 기억하고 이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소설과 박물관의 목적은, 우리의 기억을 진심으로 설명하여 우리의 행복을 다른 사람들의 행복으로 만드는 것(오르한 파묵 지음, 순수박물관 권2, 113쪽)”이라는 파묵의 설명은 다양한 형태와 목적의 박물관이 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나의 모든 소설은 이전에 발표한 소설 속에서 태어난다. <제브데트 씨와 아들들>에 나오는 젊은이들에서 <고요한 집>이 탄생했고, <고요한 집>에 나오는 파룩에게서 <하얀성>이 나왔다.”고 파묵이 말한 것처럼 <새로운 인생>에서도 이런 흔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확신한 오스만이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집을 나서기에 앞서 <밀리예트> 신문을 뒤적여 젤랄 살리크의 칼럼을 읽는다거나 오스만이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 역시 젤랄 살리크가 자살로 죽은 다음에도 누군가가 그의 이름으로 칼럼을 쓰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사실은 젤랄 살리크라는 이름이 거론되는 <검은책>에서 젤랄 살리크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칼럼과 관련하여 살해하겠다는 협박을 피하기 위하여 뤼야와 함께 잠행하는 동안 누군가의 저격을 받고 살해되는 것으로 나옵니다.)

 

흥미롭게도 책속의 책 <새로운 인생>을 읽은 독자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하여 여행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천사, 결국 너를 찾았어. 결국. 빗속에서. 그렇게 긴 여행 끝에. (…) 내가 항상 쫓아 왔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내 앞에서 나타났다간 사라지는. 사라졌기 때문에 찾게 만드는 시선은 너의 시선이었어. 너의 시선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길을 나섰어.(114-5쪽)”

 

그 천사는 바로 오스만이 여행 중에 찾아 같이 여행을 하고 있던 자난이었습니다. 하지만 자난과 같이 여행하고 있는 오스만이나 자난은 무슨 오해가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 였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여행하는 사람들이 찾는 것은 바로 천사였습니다. 그 이유는? 책을 읽은 사람들은 인간의 유한함을 깨닫게 되지만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빛이 닿는 사물이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게 된다고 믿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현 세계와 영원한 세계의 경계에 있는 출구가 의미하는 것은 바로 평온과 죽음 그리고 시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읽고 여행을 하는 사람들이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급행버스를 이용하는 것도 사고가 많은 급행버스를 타고 이동을 하다가 죽음을 만나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죽음에 대한 작가의 복선을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다만 깨달음을 얻은 자, 메흐메트는 나린박사의 아들 나히트이기도 하고, 비밀조직의 추적을 따돌리고 숨어살 때는 주인공 오스만의 이름을 빌고 있어 다중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구분이 무너지는 경계에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린박사는 자신의 아들이 오스만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들의 존재가 수상쩍어 보이기도 합니다.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전하는 진실은 이렇습니다. “책이 많은 사람을 탈선시키고,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망쳐 놓고, 모든 악의 원천이 된다고, 그리고 나린박사가 책에 대항해 벌이는 전쟁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외국 문명과 서구에서 유입된 새로운 문물에 대항하여 일으킨 전쟁이라는 것, 글에 대항한 투쟁이라는 것 등등..” 그렇다면 같은 깨달음을 얻은 메흐메트가 그를 사랑하는 자난을 떠나 비란바 마을에 숨어버린 이유가 단지 자신을 뒤쫓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서였을까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신의 아버지 나린박사가 보낸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을까요? 그렇다면 자난을 차지하기 위하여 오스만이 자신을 죽이러 온다는 것을 몰랐을까요? 자신의 이름으로 숨어살고 있는 메흐메트를 저격하는 순간 오스만은 “넌 나 같은 사람을 찾아서, 책을 주고 읽게 만들어. 그리고 인생을 망쳐버리게 만들지.(306쪽)”라고 말하려 합니다. 책속의 책이 주는 경지에 오르기 전에 나린박사를 만났기 때문에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무서운 진실을 깨닫게 된 것일까요?

 

파묵은 이 작품에 독특한 장치를 숨기고 있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읽는 독자들이 얼마나 집중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책의 모든 구석구석을 충분히 주의하면서 지능적으로 보았는가? (…) 내가 극장에서 메흐메트를 총으로 쏘았을 때, 그가 자난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챘는지 알고 있는가?(373쪽)” 마치 학과진도를 확인하기 위한 쪽지시험처럼 말입니다. 쪽지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시려면 집중해서 책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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