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타적 유전자
매트 리들리 지음, 신좌섭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1년 8월
평점 :
품절


지난 주말 신문에서는 과학분야의 베스트셀러는 출간된 지 오래된 책들이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나라에는 1995년에 처음 번역 소개된 리처드 도킨스의 1976년 작 <이기적 유전자>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합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3145298). 저도 최근에 읽었으니 이런 경향에 일조를 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2583563>를 읽고 적지 않게 실망했던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출간하고서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책 내용을 전혀 수정하지 않고 2판을 내면서 달아둔 보주를 통해서 제기된 비판과 초판 이후의 학문적 성과 등을 보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점입니다. 두 번째는 도킨스교수가 제안한, 문화도 모방되고 복제되어 전파되고 전달될 수 있다는 개념을 담은 단어, 밈(meme)이라는 용어에 대한 생각입니다. 곡조, 사상, 표어, 의복의 유행, 단지 만드는 법 등을 밈의 예라고 한다면, “밈풀에서 펴져 나갈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 할 수 있는 과정을 거쳐 뇌에서 뇌로 건너다닌다.(리처드 도킨스 지음, 이기적 유전자, 을유문화사, 2010년, 323쪽)”는 도킨스교수의 설명이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생물이란 단지 ‘자기복제자’라고 명명한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기계에 불과하다는 도킨스교수의 주장에서는 생기로 넘치는 생물체를 피동적인 기계에 비유한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인가 하는 불편한 감정을 느낀 것은 지나친 자격지심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이런 느낌이 매트 리들리의 <이타적 유전자>를 읽어보게 했던 것 같습니다. 인류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예측한 <이성적 낙관주의자; http://blog.joinsmsn.com/yang412/11893963>를 통하여 매트 리들리의 특유의 논리적 글쓰기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이성적 낙관주의자>를 읽고 저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리뷰를 남겼습니다. “비관주의자들은 인류가 경제성장이라는 어리석은 목표를 포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저자는 ‘후퇴하라는 거짓 경보에 속지 말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는 스스로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풍요롭게 만드는 과업을 계속할 것이다. 간혹 후퇴하는 일도 있겠고, 설사 각 개인은 진화를 통해 획득한 불변의 본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말이다. 21세기는 살기에 아주 근사한 시대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거리낌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자.’라고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The Origins of Virtue’라는 원저의 제목을 <이타적 유전자>로 바꾼 것은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에서 힌트를 얻었거나,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의 인기를 고려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도킨스교수 역시 <이기적 유전자>의 제 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에서 이기주의와 이타주의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도록 진화한다”는 집단선택설에 근거하여 개체의 이타적 희생도 알고 보면 집단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 행동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기주의적 개체도 있기 마련이고 그런 개체가 잘 살아남게 된다는 설명에 더하여 이기주의적 개체만으로 구성된 생물계를 결국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으므로 이타주의적 개체들과 규형을 맞추게 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리들리는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철학자 표트르 크로포트킨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교도소를 탈주하는 장면으로 프롤로그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체와 개체 간의 투쟁만이 진화의 유일한 동인(動因)은 아니며, 개체 사이의 상호부조(相互扶助) 추구도 역시 진화의 동인이라는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근간으로 인간의 본성, 특히 경이로울 정도로 사회적인 본성에 관한 내용을 담으려는 생각인 것 같습니다. 최근 진화생물학 분야에서 쌓아올린 연구성과를 토대로 인간사회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1장 ‘이기적 유전자의 이타적 사회’가 이 책의 전체를 요약하는 총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도킨스교수가 정리한 ‘이기적 유전자’라는 개념은 1960년대 중반 조지 윌리엄스와 윌리엄 해밀턴이 주도한 생물학계의 혁명적 변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개체의 행동을 결정하는 일관된 기준은 그 소속 집단이나 가족의 이익이 아니며, 그 개체 자신의 이익도 아니라는 것이다. 개체는 오로지 유전자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어떤 개체이든 그 선조들의 행동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30쪽)”라는 내용이 혁명의 골자였던 것입니다.

 

저자나 도킨스교수가 인용하고 있는 개미와 꿀벌집단의 협동체계는 인간사회가 추구하는 목표, 즉 공동선과 조화를 지향하는 조화로운 사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군체(群體)를 생물체와 비교하여 개체 하나하나를 유전자라고 본다면 개체가 모인 군체는 유전자들이 모여 만든 염색체가 되어 생물체 전체를 이루게 만든다고 하겠습니다. 로마의 현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평민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인용했다는 인체 기관들에 관한 우화에서,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기관들이 서로 협동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치고 있는 것처럼 유전자 역시 서로 협동하는 것으로 최대의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시지구에서 처음 등장했던 유전자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결합하여 복합생물체로 진화해온 이유일 것입니다.

 

물론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하여 상호협동체계가 무너지는 상황을 맞기도 합니다만, 이런 돌연변이를 제어할 수 있는 대응체계가 발동하여 균형을 맞추는 것이 생명체의 오묘함이라 하겠습니다. 간혹 암과 같은 이기적 돌연변이 유전자가 이런 대응체계의 감시를 벗어나기도 하는데, 개체의 사망이라는 파국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체에 영향을 미치는 이기적 돌연변이는 영원히 살아남을 수 없는 것입니다.

 

리들리는 노동의 분업화를 통하여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집단 간의 협동체계로 흡혈박쥐들이 사냥해온 피를 서로 나누는 사례들을 인용하여 이타적 행위가 유전자의 이기적 목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설명하는 한편, 새롭게 등장하는 이타주의에 관한 가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뇌는 다른 동물의 뇌보다 뛰어나기도 하지만 전혀 다르게 작동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호혜주의를 구사하여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는 이점을 충분히 활용하는 특별한 재능입니다(185쪽). 인간의 호혜성을 이끌어내는 것은 감정(感情)인데 감정은 이타주의가 궁극적으로 이익이 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호혜주의에서 한걸음 발전한 이론이 헌신성 모델입니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가 <도덕감정론>에서 제안한 헌신성 모델에서는 인간의 감정은 합리적 계산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래의 비용을 현재의 시점으로 앞당겨 도입함으로써 호혜주의에서 기대하는 이타적 행동에 대한 이기적 반대급부의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한 프랭크의 헌신성모델에 대한 설명부분입니다. “헌신성 모델의 정직한 인간은 신뢰성 그 자체를 중요하게 여긴다. 신뢰성에 대해 물질적 대가를 받을 수 있는가는 그의 관심 밖이다. 행동이 감시받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가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이런 태도 때문이다. 신뢰성은 그것이 상대에게 인식될 수만 있다면, 인식되지 못할 경우에는 불가능한 매우 소중한 기회를 창출한다.(193쪽)” 눈앞의 이기적 반대급부를 기대하지 않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행은 우리의 도덕 감정에서 나오는 것으로, 예측할 수 없는 장래에 기회를 열어주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유전자의 이기적 측면을 강조해온 지금까지의 해석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 셈입니다.

 

리들리는 개체의 헌신성 모델로 이타성을 설명하면서 집단의 폭력성에 대하여 우려하고 있습니다. 특히 영장류인 침팬지와 인간이 집단의 협동을 통하여 다른 집단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죽고 죽이는 폭력까지도 일어난다는 것인데, 특히 침팬지와 달리 인간은 무기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더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동물들이 집단을 형성하는 것은 무리밖에 홀로 있는 것보다 안전하다는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주된 것입니다. 저자는 집단을 형성하지만 폐쇄성이 없는 암컷 코끼리 사회를 참조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집단의 폭력성은 부족주의적 사고방식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집단을 만들고 연합을 형성하며 폐쇄적으로 살아온 유인원의 진화적 유산으로, 특히 종교적 교리가 거의 예외 없이 집단 내부와 외부의 차별을 강조해온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가 부족으로 분할된 폭력적 사회에서의 배타적 숭배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인류학자 존 하퉁의 말입니다. “편협성은 대부분의 종교가 지닌 특징이다. 종교는 대부분 다른 집단과의 경쟁에서 이겨야만 생존할 수 있는 그런 집단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 그리고 그것이 품고 있는 배타적 도덕성은 그것을 잉태시킨 경쟁보다도 더 오랫동안 살아남는 경향이 있다.(267쪽)” 세월이 흐르면서 특정 집단만을 대상으로 하던 교리를 수정해온 것도 이교도들을 집단 내부로 끌어들여 타 종교와 경쟁에서 비교우위에 서려는 종교집단의 생존전략이라는 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자는 교역을 집단 이기주의의 이로운 측면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립과 경쟁관계에 있는 집단들 사이에 교역을 매개로 하여 협동이 가능해진다는 것입니다. 근대적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는 교역이 이미 석기시대에서도 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요크반도의 원주민 이르요론트족의 사례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노동의 분화의 결과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들어서 총성없는 교역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면 교역이 집단 이기주의의 이로운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홍적세 시기에 북아메리카로 이주한 인디언들의 조상이 짧은 기간에 대형 포유동물의 73%를 살육해 사라지게 했다거나, 근세 들어서도 마다가스카르섬, 하와이, 오스트레일리아대륙 등에서 자행된 살육을 통하여 무수한 생물들이 멸종에 이르게 된 것은 자연을 무절제하게 사용해온 인류의 탐욕 때문이라면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산다는 생각 자체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희망에 근거한 관념이라고 비판하고 있는 리들리가 이성적인 낙관을 하는 것은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실행에 옮길 때라는 금언대로 바로 지금 인류는 종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는 특별한 대책을 마련해낼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유전자의 이기성을 논하기 위하여 인용했던 죄수의 딜레마가 이기성이 인간됨의 원형이라는 결론 대신에 반복적으로 서로를 식별할 수 있는 조건에서 실행했을 때, 게임은 늘 선한 시민의 승리로 끝났음을 지적한 저자는 게임이론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이기적인 자연착취자들의 행위를 멈출 수 있게 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것은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인식에서 자원의 남용이 일어나게 되는데, 공동의 소유인 경우는 서로간의 견제를 통하여, 개인의 소유인 경우는 지속가능한 자원활용을 고려하기 때문에 자원의 보존이 가능해질 것이라는 저자는 공동소유의 것을 정부가 관리한다는 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비극의 주범이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타적 유전자>를 통하여 인간의 정신은 이기적 유전자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사회성과 협동성과 신뢰성을 지향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사회성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협동의 방식을 계발하고, 믿을 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고, 스스로 믿을 만한 사람임을 과시해 좋은 평판을 쌓고, 재화와 정보를 교류함으로써 노동분화를 이루는 것은 인간만이 가지는 능력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간의 도덕과 사회성은 유전자의 명령이다’라는 카피와 ‘<이기적 유전자>의 인간을 위한 제2권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이어야 한다.’는 도킨스교수의 추천사가 이해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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