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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로누푸 섬의 여우
다카하시 히로유키 글 그림, 사람주나무 옮김 / 정인출판사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아빠가 퇴근해 들어오는데 일곱 살 아들 아이의 눈은 책 안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아빠의 섭섭해하는 목소리를 듣고도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가가 보니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중에서 뽑아 든 한 권이 바로 이 책이었다.
아직 한글도 제대로 떼지 못한 아이이기에 그림이나 보고 있겠지 했다. 그런데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하는 말. "진짜 슬픈 책이에요. 엄마도 읽어 보세요."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했다. 난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어느새 아이가 그 많은 글을 다 읽었단 말인가! 덜렁대기만 하는 아이가 책 한 권을 다 읽은 것도 기특하고, 자기가 느낀 슬픔이란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할 줄 아는 모습도 예뻤다.
일본의 북쪽 어느 섬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우 네 마리가 평화롭게 사는 작은 섬에 늙은 어부 부부가 찾아온다. 이 부부 앞에 길을 일은 꼬맹이 여우가 나타나 한동안 함께 살아간다. 추운 계절이 다가오자 부부는 여우를 처음 만났던 자리에 데려다놓고 섬을 떠난다.
그런데 이 평화로운 섬에까지 전쟁이 찾아온다. 결국 군인들의 총성에 오빠 여우가 죽고 만다. 안타깝게도 먹이를 찾아나선 꼬맹이 여우마저 군인들이 놓은 덫에 걸리고 만다. 군인들이 다가오자 아빠 여우는 군인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하다 결국 죽고, 엄마 여우만 남아 덫에 걸린 꼬맹이 여우에게 먹이를 잡아다 주며 겨울을 맞이한다. 아기 여우를 감싸안고 엄마 여우 위로 쉴새없이 눈이 쌓인다. 봄이 몇 번이나 지나갔지만 치로누푸 섬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전쟁이 다 끝나고 여러 해가 지난 후에야 늙은 어부 부부가 찾아왔다. 언덕 위에는 여우 벚꽃이 하얗게 피어난 채 이들 부부를 맞이했다. 몇 년 전 함께했던 아기 여우가 생각난 부부의 눈에 아주 예쁘게 피어난 두 무리의 여우 벚꽃이 보였다. 마치 엄마 여우가 아기 여우를 감싸안고 있는 듯한 모습 그대로 피어난 벚꽃. 작은 꽃 무리 옆에는 녹슨 쇠사슬과 그들 부부가 꼬맹이 여우에게 묶어준 리본과 똑같은 색깔의 빨간 꽃 한송이가 피어 있었다.
전쟁에 관한 이야기라곤 군인이 두 번 다녀간 것과 몇 번 들린 총성 외엔 아무런 표현도 없다. 하지만 총성 후에 돌아오지 않는 오빠 여우와 아빠 여우, 녹슨 채로 남아 있는 쇠사슬 앞에선 누구라도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정말 아이 말대로 눈물이 핑 돌았다. 흑백 그림 속에서 빛나는 붉은 빛깔의 여우 가족이 더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은 인간에게도 자연에도 두루두루 가슴 아픈 일을 남길 뿐이다.
어부 부부가 겨울을 넘기기 전에 한번쯤 치로누푸 섬에 찾아왔더라면 엄마 여우와 꼬맹이 여우는 목숨을 건졌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