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딸아이가 경주로 2박 3일 수학 여행을 갔다. 남편은 서울에 있으니 아들과 단 둘. 아들과 좀 특별하게 보내고 싶었다.  

눈치 빠르고 야무진 누나에 비하면 융통성도 없고 고집 센 아들 녀석 덕분에 우리 집은 늘 시끌시끌하다. 엄마가 뭐라고 하면 한마디도 지지 않으니 아들과 엄마의 화딱지가 하늘을 찌르는 날이 많다. 거기다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엄마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사고를 일으킨다.  

3주쯤 전엔 놀이터에서 축구를 하다가 한 학년 형에게 눈치코치 없이 대들다가 한 대 맞은 것이 눈텡이가 밤텡이가 되고 얼굴 반쪽이 시커멓게 멍이 들어서 들어왔다. 병원으로 달려가서 눈검사하고 난리법석을 떤 생각을 하면 지금도 휴~  멍 덕분에 학교에서 스타가 됐다고 자랑하던 어이없는 울 아들...  

맨날 투닥거리는 이 아들이 난 그래도 참 예쁘다. 아들이 아니었다면 난 세상의 반쪽밖에 몰랐을 거라는 생각에 고맙기도 하다. 누나가 없는 동안 아들을 행복하게 해줘서 엄마는 누나만 예뻐한다는 생각을 고쳐주고 싶은 마음에 '누나 몰래'를 강조하며 데이트를 하자고 했더니 신이 나서 매달렸다.   

첫날 저녁은 박경리문학공원 산책하고 들어와서 한 이불 속에 누워 서로에게 그림책 한 권씩 읽어주기를 했다. 오랜만에 책을 읽어주니까 실감이 안 나게 읽는다는 아들의 지청구를 들어가며.

둘째날은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게 뭐냐고 물으니 피자도 치킨도 아닌 알탕~ 웬 알탕? 자기는 알탕을 좋아하는데 원주에 와서 한번도 못 먹었단다. 그래서 집 근처 일식집에 가서는 알탕을 시키니 엄청나게 큰 뚝배기에 한 가득. 난 먹다 먹다 남겼는데 아들은 그 많은 걸 배불러 소리도 안 하고 먹어서 신기~ 

밥을 먹고는 영화를 보러 가자고 했다. 방가? 방가! 영화 제목만 듣고 싫다더니 극장에 가서는 혼자 웃고 난리 치던 아들. 11세인 울 아들 12세 관람가인 이 영화를 보다가 좀 걸리는 장면, 즉 방가방가랑 장미가 분위기 좀 잡으려고 하면 어색했는지 "엄마, 졸려요." 요렇게 말하면서 눈 감는 센스를 보여주기도 하고~   

(이 영화 많은 사람들이 보았으면 좋겠다.)

영화를 보고 10시가 넘은 시간, 둘이 팔짱을 끼고는 신나게 떠들면서 왔다. 집에 돌아온 아들, 오늘 할 일을 하나도 안 했다 싶은지, "수학 공부할까요?" 하길래 "아니, 이젠 잘 시간이야." 그래서 아주 행복한 기분으로 잠든 아들. 

"아들아, 행복했니? 엄마도 행복했단다." 이렇게 행복하려고 생각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 걸 그동안 아들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 준 것이 미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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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10-22 0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아들이 한살만 더 먹었어도 저 영화 같이 보러가는건데...(제 아이는 방년 10살이라서요 ^^)
아들이 오늘 엄마를 독차지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을까요.

소나무집 2010-10-22 09:31   좋아요 0 | URL
좀 심한 욕 시리즈들이 나오긴 하는데 그닥 듣기 거북하진 않았어요. 울 아들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아이들도 부모네랑 와서 함께 보던걸요.

꿈꾸는섬 2010-10-22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 몰래...데이트...아드님이랑 소나무집님이랑 모두 행복하셨겠어요.
방가방가는 남자 아이들이 재미있어할 것 같아요.^^

소나무집 2010-10-25 08:55   좋아요 0 | URL
네, 행복했어요. 근데 아들 수련회 갔을 때는 딸이랑 비밀 데이트 같은 건 안 하게 되더라구요.

치유 2010-10-22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여운 아들램과 행복한 데이트, 눈에 그 모스들이 선하네요..
참 잘했어요.^^_

소나무집 2010-10-25 08:55   좋아요 0 | URL
뭐든지 잘 속아주는 순진한 울 아들 땜에 더 행복했답니다.

마녀고양이 2010-10-22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소나무님. 첨 뵙습니다.
아는 분 서재 타고 왔는데, 글을 읽다보니 11살 이라는 문구에 와닿았답니다.
저희 딸이 11살이거든요.
데이트 즐거우셨겠어요. 방가방가는 혼자 보려 했는데, 딸아이랑 봐도 될까요?

이쁜 서재 잘 구경합니다. 종종 놀러오겠습니다.

소나무집 2010-10-25 08:57   좋아요 0 | URL
아,네, 저도 반가워요.
열한 살 아들과 딸은 천지 차이랍니다. 딸이 11살일 때는 다 컸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들은 어림없어요. 방가방가는 따님이랑 봐도 괜찮아요. 욕이 좀 많이 나오지만 그냥 패스하면 됩니다.

순오기 2010-10-23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드님과의 몰래 데이트 즐거웠군요. 가끔은 이런 분위기도 연출하며 살아야 하는데...
방가방가 12세 관람가지만 부모가 동행하면 괜찮아요~ 영화보다 현실은 더하니까 외국인노동자의 현실을 아는 것도 좋아요. 모든이에게 강추합니다~

소나무집 2010-10-25 08:58   좋아요 0 | URL
그죠? 강추하고 싶은 영화죠? 제목만 좀더 근사하게 붙였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결코 가벼운 영화가 아닌데 넘 가벼워 보여서 땡기지 않게 만들어요.

프레이야 2010-10-23 1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들이랑 방가방가도 보고 알탕도 배불리 드시고 좋으시겠어요.^^
전 아들이 없어서 세상의 반밖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몰라요.
이성을 알아야 세상의 나머지 반도 아는 거라고 하던게 말에요.
전 아들 가진 부모 마음은 잘 모르겠지요. 아마?ㅎㅎ

소나무집 2010-10-25 09:06   좋아요 0 | URL
네, 오랜만에 좋았어요. 아들 녀석이랑은 맨날 투닥거리고 싸우거든요.
조용 조용히 커주는 딸에 비하면 아들은 질풍노도에, 천둥번개예요.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늘 가슴 졸인다니까요. ㅜㅜ

같은하늘 2010-11-02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나몰래 데이트한 아드님 마음이 정말 행복했겠지요.
전 동생만 이뻐한다고 생각하는 큰넘과 데이트를 한번 해주어야 할것 같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아요.^^

소나무집 2010-11-05 00:56   좋아요 0 | URL
울 아들 아직도 비밀 데이트 누나한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해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