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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평점 :
품절



데리다 평전.
 

 


1.


  몇 년 전 개정된 고등학교 수학 교과과정은 이런 저런 논란이 많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인문계열을 공부하는 사람은 더 이상 ‘미분과 적분’ 과정을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지요. 그 외에 소소한 변화들도 있었는데, 이름이 바뀐 것도 들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공통 수학’ 이라고 불리던 과목은 ‘수학 10-가, 수학 10-나’ 로 개정되었습니다. 중학교 교과 과정도 8학년, 9학년으로 바뀌었기에, 연속성을 중시하는 ‘수학’ 이라는 과목에게는 제법 적합한 변화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중학교 수학과 고등학교 수학이 별개가 아니고, 마치 계단과 같이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그런 과정이라고 주장하는 것 처럼 말입니다.

저 ‘수학 10-가’와 ‘수학 10-나’의 단원 중 특히 제 눈을 잡아끌었던 것은 바로 ‘자취의 방정식’ 이라는 단원이었습니다. 자취의 방정식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취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군요. 자취는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어떤 조건이 주어졌을 때 그 조건을 만족하는 점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자취의 방정식은 그 자취를 나타내는 식이 되겠습니다. 애초에 자취를 그려내는 저 ‘조건’을 식으로 표현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네요. 골치 아픈 단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자취의 방정식을 열심히 공부해두면 그 외에 다른 곡선들의 방정식을 기하학적으로 좌표 상에 그려내는데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여겨져서 공부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저는 그리 수리에 밝지 못해서 좋은 결과는 얻지 못했지만요.

이 ‘데리다 평전’에서 제가 계속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저 ‘자취의 방정식’ 이었습니다. 데리다 본인을 미지수 X로 두면 그 미지수 X의 조건은 주변 환경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데리다가 유대인이었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이었으며 정작 본인의 국가에게서는 환영을 받지 못했지만 그 외의 다른 국가들에게서 ‘해체’ 라는 신선한 개념을 퍼뜨린 사람이라는 것들 말입니다. 그리고 이 ‘데리다 평전’은 감히 말하건대 자취 그 자체와 같아서 저 환경들 각각에 대한 미지수 X의 점들의 궤적을 그려나갑니다.


2.

  데리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실 다른 책을 통해서였습니다. 정신분석학의 선구자인 프로이트를 다룬 책이었는데, 그 책에서는 프로이트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문학의 비판적 읽기에 대해서 설명하더니 데리다의 ‘산종(dissemination)’ 개념을 가지고 이론을 전개하였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당시의 저는 왜 저자가 데리다 이야기를 가져왔는지 전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그 책을 읽어도 쉽게 이해는 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덕분에 저는 데리다의 산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됬지요.

산종은 하나의 기호에 대해서 우리는 절대로 모든 의미를 알 수 없다는 절망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에서 그 의미가 시작합니다. 저 기호는 문자가 될 수도 있고 언어가 될 수도 있으며 몸짓도 될 수도 있겠으며 혹은 간단하게 언어학자인 소쉬르가 도입한 개념인 ‘기표’ 로 치환을 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표는 우리가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 쓰는 일종의 도구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기표를 어떤 속이 빈 실용적인 항아리라고 생각해봅시다. 감상을 위한 미술품으로서의 항아리를 제외하면 항아리의 역할은 내용물을 보존하거나, 옮기는데 있다고 할 때, 그 항아리의 내용물을 우리는 ‘기의’ 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우리가 항아리에 어떤 내용물을 집어넣을 때 이 항아리에는 반드시 이것만 집어넣어야 돼, 라고 생각하면서 집어넣지는 않지요. 다만 어떤 항아리에 생선을 넣었다면 그 항아리에 다른 내용물, 예를 들어서 과일을 넣지는 않을 겁니다. 물론 넣자면 넣을 수는 있지만 넣었다가 비린내 등이 과일에 묻게 될 테니깐 말이지요. 그래서 과일을 넣기 위해서는 다른 항아리를 가져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단어도 이런 빈 항아리와 내용물의 관계와 비슷해서 각각의 기표는 그 기의에 적합한 쪽으로 일종의 사회적 약속처럼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이 예를 조금 확장시켜서 단어가 아닌 문장으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문장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문장은 정말 명확한 ‘저건 연필이다’ 등과 같은 문장을 제외하고는 단지 하나의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독해법에 따라서 수많은 의미를 담을 수 있습니다. 그 문장이 단순히 단어들의 연쇄에 불과하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물론 각각의 문장에 가장 최적화된 의미가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비린내가 나는 과일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생선을 담은 항아리에 과일을 넣을 수도 있지요. 자신은 이렇게 읽었는데 이 의미가 정말 옳지 않느냐, 라고 묻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그르다고 감히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산종의 의미가 발현됩니다. 산종은 씨를 뿌린다, 라는 의미 그대로 하나의 기호에 대해서 수많은 해석 방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다양한 가능성을 통해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것이지요. 문학작품에 적용하자면 일부러 ‘낯설게 보기’ 를 통해서 그 작품의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는 행위를 포함하겠습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모든 해석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는 결국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결국엔 처음 극복하고자 했던 명제와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됩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하나 더 개념을 가져옵니다. 바로 대립이라는 개념입니다.


3.


  예를 들어서 어머니, 라는 단어가 있다면, 우리는 저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을까요? 데리다는 어머니와 대립하는 단어들을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대립이라는 개념은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며, 문맥상으로 혹은 환경적으로 마주 서는 개념입니다. 하나의 단어는 그 단어의 대립 쌍으로만 그 의미가 정립될 수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와 대립하는 단어는 아버지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그 아버지와 대립하는 단어는 자녀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또 그 자녀들과 대립하는 단어로 그 자녀들의 친구를 가져올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연쇄가 계속 반복됩니다. 그러나 그 의미가 끝나는 일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결국에는 원점으로 돌아와서 원환의 순환이 반복될 테니 말입니다. 이는 니체의 영원 회귀 사상과 유사합니다. 그러고 보면 데리다에게 큰 영향을 준 사상가들을 들라면 니체, 하이데거, 프로이트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니체나 하이데거, 프로이트의 사상을 답습하지는 않습니다. 비록 저 셋의 영향을 받아서 ‘기호는 오직 실종된 신, 부재하는 존재와 같은 비현전적인 중심 또는 기원만을 명명할 수 있다고’ 말하게 되었지만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부재하는 존재’는 항상 도래를 예기하지만 그 도래는 무한히 지연되며 기호의 의미는 그 기원에 무한히 접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데리다의 가장 중심적 사상인 차연(differ'a'nce)입니다.

차이와 지연의 합성어인 차연은 이런 이미지를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수학적인 개념 중 ‘점근선’ 이라는 개념이 있지요. 고등학교 때 쌍곡선의 방정식을 배우면서 점근선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이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한 곡선이 있고 그 곡선을 따라서 점이 무한히 뻗어나갈 때 그 점에서 한 직선과의 거리가 0에 한없이 가까워질 때 그 직선을 점근선이라고 부릅니다. 차연은 바로 그 곡선과 직선의 관계입니다. 차이가 있지만 그 차이는 한없이 0을 향하고, 그러나 그 차이는 영원히 좁혀지지 않습니다. 기원과 그 기원을 향한 몸부림에 이만큼 더 적절한 예를 찾기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이런 차연에 의하여 앞서 말했듯 우리의 기호는 그 중심 의미, 기원이 여기 있다, 고 알려주는 표지점이 되는 동시에 그 절대적 의미의 현전이 도래하기를 무한히 기다리는, 혹은 무한히 방해하는 ‘흔적’ 이 됩니다.


4.


  데리다의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은 아무래도 ‘그라마톨로지’ 가 되겠지요. 유일하게 제가 접한 데리다의 책도 바로 그라마톨로지입니다. 물론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얼마 읽지도 못하고 다른 책들을 보게 되었지만, 그때 처음 느꼈던 감정은 ‘생각보다 아주 어려운 책은 아니네’ 라는 감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제이슨 포웰의 이 ‘데리다 평전’ 을 읽었을 때는 그런 자신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이 책이 하는 일은 컨테이너 벨트에서 짐들이 차례로 내려지듯이 무심한 문장들을 차례로 우리 의식 속에 던져 넣는 일이었고 문장을 읽어도 이 문장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두세 번 읽어보아야만 했으며 인용한 사상가들은 어찌나 많은지 한숨이 나올 정도였습니다. 어쩌면 이 책은 여기서 인용한 사상가들을 당연히 다 알고 있을 만한 사람들을 위한, 거칠게 말하자면 그들만을 위한 책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들 정도였지요.

그러나 끝까지 읽어나가면서 하나 느끼게 된 것이 있습니다. 만약에 이 책이 일전에 나온 루소의 평전처럼 세세하게 인물의 행적을 밟아나가면서 우리가 관심을 가질만한 흥미로운 뒷이야기들을 기술하고 그의 사상을 정제된 언어로 기록한다면, 물론 그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 있고 재미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만, 결코 ‘데리다’ 라는 이름에 걸맞는 평전은 되지 못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앞에서 설명했다시피 데리다는 우리의 텍스트는 이윽고 ‘흔적’ 으로 남는다고 주장해왔습니다. 결국 그를 설명하려면 흔적 속에서만 오롯이 드러나게 기술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와 텍스트는 서로 상충되어버리겠지요. 그렇기 때문에 책은 전체적으로 무심하고 어쩌면 별로 친절하지도 않다고 여겨지지만, 도리어 그 태도는 데리다를 기술하는 데는 최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데리다 평전’ 은 그 의도를 충실히 따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흐름은 데리다의 시간을 쫓아갑니다. 데리다의 출생에서부터 고등사범학교를 다닐때, 그리고 구조주의에 맞서고 데리다가 열정적이었던 시기에서부터 노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그 순간순간에 데리다가 택한 좌표 값들을 마치 수학적으로 결과가 나오듯 보여줍니다. 그 좌표 값들이 모두 최적의 선택이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요. 사람이 인생을 살면서 최적의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언제나 후회로 점철된 인생을 살게 될 테니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좌표 값들이 자신의 선택으로만 결정된 것이 아니며, 아니 대부분의 좌표 값들이 주변 조건에 의해서 결정된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자면 데리다가 유대인으로 태어나고 그가 살던 시기의 중심 사상이 구조주의였다는 것 등은 주변의 환경이자 자취의 방정식을 그리기 위한 조건들이겠지요. 이윽고 데리다는 그가 살던 시기의 중심 사상인 구조주의를 해체하게 되고 정말 이 책의 부제에 걸맞게 해체 후 ‘순수함’ 을 열망하게 됩니다. 기존 서구의 중심적 사상이었던 로고스 중심주의로는 한계가 있다고 외치며 말입니다.


5.


  이 책 ‘데리다 평전’ 은 데리다 본인은 아니나 그에게 무한히 다가가며, 동시에 ‘데리다’ 의 현현을 무한히 지연시키는 대리보충물의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하지만 몇 가지 문제점도 있습니다. 먼저 너무 흔적에 치중한 나머지 글의 독해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책에 나오는 다른 사상가들과 그들의 개념은 너무 무책임하게 던져져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A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B를 보라, B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C를 보라, 등으로 일관되어있지요. 데리다를 불러내기 위해서는 이렇게밖에 불러낼 수 없을지라도 주석에서도 이런 무심한 태도가 연속된다는 것은 더욱 더 책의 독해를 쉽지 않게 만듭니다. 물론 저런 모습은 데리다의 개념 중 ‘대립’ 을 떠올리게 만들고, 이윽고 거대한 순환을 머릿속에 그려낼 수 있게 하겠지만 데리다의 생애나 그의 사상에 대한 대략적 이해를 위해서 집어든 독자들에게는 거리감을 주리라 여겨집니다. 어학을 배우기 위해서 초보반으로 짐작되는 클래스에 등록했는데 알고 보니 바로 응용에 들어가더라,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또 한 가지 ‘데리다 평전’에서 저를 약간 당황스럽게 만든 점이 있습니다. 데리다를 언급할 때 이 책에서는 상당한 애정을 가지고 언급합니다. ‘데리다를 해체의 선구자이자 탁월한 후기 구조주의자로 만들었다.’, ‘고급문화가 가진 위대함을 넘어서는 더 순수한 순수함을 찾고자 한다’ 등으로 말입니다. 당연히 평전을 쓰는데 그 평전의 인물에 대해서 애정이 없으면 안 되겠지요, 그러나 어떤 문맥에서는 그 애정이 지나쳐서 데리다가 비판하는 사상가의 철학이 불완전하다는 느낌마저 주게 됩니다. 어떤 사상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니며 실제로 데리다도 우열을 가르기 위해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발전을 지향하였겠지요. 그러나 무심하게 던져진 문장들은 비록 변증법적인 발전을 내포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읽는 독자들에게 저런 느낌을 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듯 합니다. 그리고 데리다가 살아오면서 그의 위상에 비해 ‘형편없이 초라한’ 직책만 정부가 맡겼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이것도 데리다의 삶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기에, 글에서 그에 대한 저자의 애정이 지나쳐 보이는 예라고 들 수 있겠습니다. 원래 데리다는 이런 직책이 아니라 훨씬 더 높은 직책을 맡아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인데(‘데리다가 해외에서 제안된 다른 수많은 일자리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꼭 언급해야겠다’) 외부에서 데리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프랑스 사회는 데리다의 접근법, 그의 이념들, 그의 글읽기 방식과 그의 엄청난 독창성, 말하자면 그의 에너지를 싫어했던 것 같다’) 초라한 직책만 맡게 되었다, 고 무심한 문장들은 우리의 의식으로 흘러내립니다.


6.


  양자역학의 대부로 불리는 하이젠베르크는 데리다의 스승이라면 스승이라고 볼 수 있는 하이데거와 친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이데거는 하이젠베르크에게서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겠지만 결국 과학은 사유하지 않으며 하나의 경계가 있다고 관점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데리다는 그의 스승과는 다른 길을 걷습니다. 과학과 사유는 하나의 경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경계는 깨어질 수 있다고 믿지요. 그러고 보면 제가 데리다의 사상을 언급하면서 ‘무한’ 이라는 말을 자주 쓴 듯 합니다. 이 무한, 이라는 개념이 엄밀하게 정립된 곳은 바로 수학입니다. 그의 해체는 과학과 맞서지 않습니다. 비록 그가 그의 다른 스승인 프로이트를 과학자가 아닌 철학자로 판단하여 읽어나갔더라도 말입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통일장 이론에 몰두했습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네 가지 힘을 하나로 묶어보려는 이 이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말들이 많으며, 끝내는 완성시키지 못하고 눈을 감았지만 그런 시도가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데리다가 그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더라면 혹시나 과학과 사유의 경계를 넘기 위해서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해체를 통하여 그가 추구하였던 순수성은 과학의 잘 제련된 순수성과 어쩌면 접점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이 평전을 따라 쫓아간 그의 생애를 자취의 방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수많은 조건들은 데리다와 함수 관계를 맺으며 책 전반에 걸쳐서 어떠한 곡선을 그려냅니다. 그 곡선은 잘 정리된 일대일 대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수식은 아니겠지만, 그러나 어쩔 수 없지요, 삶의 무한한 조건에 대해서 일대일 대응을 이루는 생애를 살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차연과 산종을 주장해온 데리다 본인도 그것을 원하지 않았을 테니.

  

 

 

 

p. s. 원래 글의 방향은 로고스 중심주의와 성경을 연관지어서.. 해체를 쓰려고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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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5 2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연 2011-08-16 20:52   좋아요 0 | URL
도입부를 어떻게 쓸까 한 일주일을 고민했더랬죠ㅎ 완전 흥미끌려고 노린거죠 큭.. 도입부만 멋드러지게 쓰고 내용은 별로ㅠㅠ 생각했던만큼 안나와서 스스로 실망했어요. 정말 감사해요.
 
[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불안의 시대.


1.


  사실 이 책을 처음 받아들 때, 아니 처음 추천할 때만 해도 저는 이 책이 자본주의시대의 불안의 심화, 그리고 미국의 슈퍼파워 약화로 인한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다룰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제법 건설적인 내용으로 마무리 지을 거라고 생각했었지요. 저자가 이 격변의 시대를 발로 뛰어다녔던 특파원 출신에 외교문제에 대한 칼럼니스트라는 사실이 그 생각을 뒷받침해주었습니다. 노골적으로 미국편에 서지도 않을 것이며 적어도 객관적으로 시대를 보려고 노력할거라고도 기대했지요. 하지만 기대는 빗나가고 책에 대한 생각은 정확히 반만 들어맞았습니다. 미국의 슈퍼파워 약화로 현대 시대를 불안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비록 동의를 못하는 의견이 몇 부분 있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짐작 가능했지만, 그 불안의 시대를 해소하는 방법은 완전히 제 예상을 빗나가버렸지요. 그것도 정말 당혹스러운 내용으로 말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에게 책을 추천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책의 저자와 책 표지, 그리고 제공되는 일부 내용만으로는 적절하게 책을 추천할 수 없을 가능성이 높다, 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원래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 한계를 실제로 마주친 느낌이었달까요. 무엇보다도 스스로가 추천한 책에 대해서는 적어도 스스로는 만족해야 되는데 그것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하니 더욱더 당황스러웠던 겁니다. 정말 거칠게 몇 문장 적겠습니다. 책 전체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정말 '불안의 시대, 미국의 힘을 다시 키우자.' 정도로 표현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책 전체의 느낌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꼭 아이언맨을 보는 느낌이었다.' 정도가 될까요.


2.


  미국의 만화계에서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업체는 바로 '마블 코믹스'와 'DC 코믹스' 일겁니다. 둘 다 히어로물을 그리고 있는데 그 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도 잘 아는 영웅들이 많습니다. DC 코믹스에서는 슈퍼맨, 배트맨, 원더우먼 등이 있고, 마블 코믹스에는 고스트 라이더부터, 미스터 판타스틱(영화 판타스틱 4의 고무인간), 스파이더맨, 아이언맨, 캡틴 아메리카 등이 있습니다. 아, 토르도 들 수 있겠습니다. 최근에 영화 '토르' 도 개봉했었지요. 왜 이렇게 미국에는 히어로물들이 많을까요? 거기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저는 이런 입장을 취하고 싶습니다. 미국은 역사가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종의 용광로라고 불릴 정도로 다민족 국가입니다. 역사가 그리 길지 않기에 미국은 그들의 영웅을 만들어내어야만 했고, 민족이 섞여있기에 그 어느 민족에도 섞이지 않은 형태의 영웅을 만들 수밖에 없었노라고 말입니다. 물론 대개의 경우 백인종의 영웅이 대부분이지만 그 백인종의 영웅이 실제 인물인가, 혹은 가상 인물인가는 그 영웅이 대표할 수 있는 계층의 한계성을 구분지어줄거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실제의 인물을 영웅화하기에는 문제점이 많습니다. 미국의 역사는 사실 다름을 인정해오는데서 생기는 다툼의 역사로 봐도 될 정도로 인종간의 다툼이 많았던 나라입니다. 흔히 아는 백인 - 흑인의 다툼뿐만 아니라 히스패닉계, 아시아계 등 여러 민족이 섞여서 다툼을 벌여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가상의 영웅은 어느 한 민족의 영웅을 벗어나 미국의 영웅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미국의 영웅으로 거듭났다는 이야기는 냉전시대로 그 역사적 배경을 거슬러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히어로들이 냉전시대에 태어난 경우도 있지요. 마치 소련에 대한 미국의 우위로서 말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이 영웅들은 계층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배트맨의 경우 모두가 다 아는 갑부입니다. 그리고 그는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스파이더맨의 경우에는 서민을 대표하겠지요. 스파이더맨 시리즈를 보면 그가 얼마나 불쌍한 인생을 사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뭐, 연재되는 만화에서야 'One above all' 마블세계관의 최고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에게 그나마 사랑받고 있다고 합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의 인생은 눈물로 점철되어있지요. 그리고 미스터 판타스틱은 과학자였습니다. 캡틴 아메리카는 그 이름에서 오해를 사기가 쉽지만 사실은 정말로 선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미국의 '이상' 을 그려낸다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여기에 그 이상에 반하여 현실적인 미국의 패권주의를 그려내는 영웅이 있습니다. 바로 아이언맨입니다.



3.


  2008년도에 아이언맨이 개봉했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대개의 사람들이 저 영화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무엇보다도 남자의 로망을 보여준 영화였었기 때문입니다. 기계로 수트를 만들어 입고 악의 무리를 무찌른다니. 어렸을 때 누구나 로봇 조종사가 되는 꿈을 한 번쯤 가졌었다면 저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아실 겁니다. 또한 영화가 지루하지 않고 볼거리가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호의적이 될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사실 조금만 더 잘 들여다보면 특이한 면모를 볼 수 있겠습니다.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원래 무기상인 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이 고초를 겪고 나서는 무기산업에서 손을 떼기는 했었지만 말이죠. 그리고 아이언맨 수츠는 그의 압도적인 기술력과 재력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배트맨도 압도적인 재력으로 배트맨 수츠를 만들기는 했습니다만 그는 배트맨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사실상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아이언맨처럼 외부로 그의 영향력을 뻗어나간다, 라는 느낌은 들지 않았지요. 자, 그러면 여기서 아이언맨을 무기상인이었고, 압도적인 기술력과 재력으로 평화에 기여하는 히어로라고 그려보겠습니다. 무언가 떠오르시나요? 우리가 아는 어느 나라와 거의 비슷한 것 같지 않습니까? 네, 미국과 거의 흡사합니다. 거칠게 미국이 패권을 쥐게 된 이유를 설명하자면 세계 대전때 무기를 팔아서 이윤을 남겼기 때문이지요. 세계 대전으로 인해서 세계대전의 승리국들도 미국의 채무국이 되어버렸습니다. 뭐, 패전국들이야 배상금 문제로 인해서 나라의 국운이 쇠하게 된 것은 더 말할 필요 없겠지요. 그러다 냉전을 겪게 되고,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가지고 무섭게 성장하는 소련에 맞서기 위해서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자처합니다.


4.


  이 책 ‘불안의 시대’ 는 시대를 덩샤오핑의 중국 개혁에서부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 시대로 구분을 합니다. 전환의 시대는 중국 개혁에서부터 걸프전까지를 가리키고, 낙관의 시대는 걸프전 이후에서부터 2008년 금융위기까지를 가리킵니다. 저자에게 있어서 그 이후로부터는 불안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구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너무나도 미국적인, 미국 중심적인 냄새가 풀풀 풍깁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미국은 외국에 파병을 해서 힘을 행사하는데 주저하게 되었지요. 그러던 미국이 세계의 경찰국가로 우뚝 솟을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걸프전이었습니다. 걸프전에서 주저 없는 무력사용으로 단 3일 만에 이라크 군대를 무찌른 미국은 자신들의 힘에 자신을 가지게 됩니다. 이때부터 저자가 주장하는 낙관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여기서 짚어보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미국에게는 분명 낙관의 시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에게는 그때 이후로 낙관의 시대가 찾아왔을까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부정적입니다. 과연 미국이 헤게모니를 잡고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시대가 다른 국가들에게도 모두 낙관적인 희망만 심어주었을까요? 저자가 낙관의 근거로 뒷받침하는 자료들은 시대 전체를 낙관의 시대로 규정하기에는 부족한 근거들입니다. 무의식중에 제 3세계를 배제시켜버렸지요. 여기서 배제된 제 3세계는 불안의 시대에 간간히 모습을 비춥니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저자가 가지고 있는 짙은 향수처럼 미국이 패권국가로 남는 게 정말로 옳은 일일까요? 미국은 항상 초법적 존재였으며 제국주의를 넘어선 제국이 되어버렸었습니다. 아무리 국제적으로 결의를 해도 미국은 언제나 그 결의를 따르지 않을 권리가 있어왔으며 지금도 여전히 그런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패권에 도전하는 국가들을 견제해왔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그런 작업들이 모두 자신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변하면서 마치 저 ‘아이언맨’ 처럼 버텨왔습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는 자본주의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개별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서술하면서도’ 마치 2인 3각 운동 경기를 하듯이 묶어버림으로써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저 둘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느낌을 받게 만들며, 이윽고 민주주의는 좋은 것이다, 라는 말과 자본주의는 발전해야만 한다, 라는 말을 동의어로 만들어버립니다. 현대 시대, 불안의 시대를 서술하는데 있어서도 저자는 똑같은 관점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책에서는 많은 사례를 끌어옵니다. 그러나 결론은 중국이나 러시아의 지나친 대두를 막아야 한다, 로 수렴됩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비판하는 근거는 책에서는 마뜩찮습니다. 사실 중국의 인권문제나 러시아의 그루지아 침공에 대해서 침묵해온 미국 입장에서는 대놓고 뭐라고 비판을 할 수는 없겠지요. 그리고 제로섬 게임이라는 용어를 가져오면서 중국과 미국은 제로섬 게임을 하지 말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제로섬 게임이라는 용어는 허구입니다. 예전에 미국이 모든 패권을 쥐고 있을 때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그냥 모노폴리였지요. 이제 중국을 무시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게 되어서 제로섬 게임이라는 용어를 쓰게 된 것은 끝끝내 패권을 놓을 수 없다는 심정의 발로로 여겨집니다. 절대 그들이 먼저 양보할 수는 없다는 속뜻이 책 전체에 가득 담겨있습니다. 너희가 계속 패권에 도전을 하면 너 죽고 나 죽고 둘 다 죽는다, 그러니깐 좋은 말 할 때 그만 놓아라, 정도의 내용으로밖에는 요약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책에 은근슬쩍 중국과 러시아는 국가주의로 기울었으며 사실상 독재국가다, 라는 말을 흘림으로써 독재국가나 국가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중국과 러시아에 덮어씌움으로써 자연스레 그 비판이 중국과 러시아로 향하도록 만들어놓았습니다. 중국이 패권을 쥐면, 혹은 러시아가 패권을 쥐면 독재국가가 패권을 쥐는 것이다, 즉 제로섬 게임에서 독재국가가 승리하는 것이다, 라는 냉전 수준의 논리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물론 중국과 러시아가 저 비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중국은 일당독재국가입니다. 개방이 어느 정도 되어서 우리가 크게 느끼지 못할 뿐, 중국 국민들 대부분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벌써 머릿속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민주주의라는 말은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수많은 인구들 중 어떻게든지 중산층 이상은 살고 싶다는 열망만 가지고 있을 뿐이며 공산당은 그 열망을 잘 이루어주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상황도 거의 비슷합니다. 블라미디르 푸틴 전 대통령은 반 농담으로 푸짜르, 라고 불릴 정도입니다. 짜르가 제정 러시아의 황제를 뜻한다는 것을 떠올리고 푸틴이 러시아 정계에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보면 단순한 농담만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지금 대통령은 삼선(三選)을 금지하는 러시아 헌법을 비껴가기 위한 징검다리 대통령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세간의 평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이 책의 비판 방식을 합리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아예 그냥 솔직하게 러시아와 중국은 정치 체제가 잘못되었다, 라고 당당하게 주장하는 것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저런 정치 체제보다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우리 미국이 낫다, 라고 드러내놓고 주장하는게 훨씬 더 보기가 편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렇게 드러내놓고 주장하게 되면 중국과 러시아 국민들의 체제에 대한 무자각적인 순응, 순응을 넘어선 체제에 대한 옹호(미국이라는 제국주의에 대한 대극적 위치로 자신들의 국가를 치켜세우는)를 설명할 길이 없어서 또 사면초가에 빠졌을 테지만 말입니다.


5.


  전체적으로 이 책은 미국적인, 너무나 미국적인 오디세이아입니다. 미국이라는 국가가 어떻게 모험을 겪고 어떻게 흘러나갈것인가, 에 대한 내용이지요. 오디세이아는 이렇게 끝맺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는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결국엔 페넬로페와 그의 아들에게 다시 돌아갑니다. 사실상 오디세우스에게 있어서는 해피엔딩이겠지요. 그렇다면 이 책의 미국적인 오디세이아는 어떻게 마무리 지어질까요? 저자는 전체적으로 미국의 해피엔딩을 원하는 듯 합니다. 오바마 행정부에게 ‘따뜻한’ 충고(오바마 정부는 국내 문제보다도 더 세계적 문제에 신경을 써야 하며 세계는 집권 첫해부터 오바마 정부에게 정치적 리더십을 기대했다는 내용)를 보내는 부분을 보면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이 책의 마지막 장의 제목은 ‘세계를 구원하라’입니다. 누가 세계를 구원할지는 아마 저자에게는 당연하겠지요. 그런 당혹감을 잠시 접어두고 저자의 주장을 잠시 가져와 보겠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면 미국식 해피엔딩이 된다고 합니다. 먼저 평정심을 유지하고, 국제관계가 국가 간의 라이벌 의식 때문에 규정된다는 생각을 버리며, 과거에도 미국이 쇠퇴과정을 겪은 적 있지만 그때마다 이겨내었다, 라는 믿음을 가져라는 겁니다. 어쩌면 이 책의 저자의 나라, 미국에서는 이 충고들이 정말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EU와 같은 국가공동체를 교묘하게 긍정하는 듯 하면서도 방향을 선회해 국가라는 틀로 방어를 탄탄히 하는 미국을 긍정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빛이 납니다. 일단 첫 번째와 세 번째 가이드라인은 거의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는 것과 저 가이드라인들이 책의 앞부분에서 세계의 흐름을 살펴본 결과로 도출된 내용으로는 너무나 평이하고 당연한 이야기들이라는 문제를 접어두고서라도, 미국은 도전을 받지만 결국엔 승리할 것이다, 로 일관하는 저 가이드라인은 아무래도 저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들입니다.
  사실 이렇게 제가 비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제가 미국인이 아니기 때문이겠지요. 어쩌면 이 책은 감히 말하건대 굳이 번역할 필요가 없는 책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 국가 내에서는 어쩌면 이런 책들이 잘 팔릴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꼭 예전 서평을 썼던 ‘언어의 감옥에서’에서 비판하였던 퇴락한 리버럴 세력의 책들 - 자신의 국가를 비판하는 듯 하면서도 이윽고 긍정하는 부류의 - 과 흡사한 느낌을 줍니다. 외부의 독자도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내부의 독자들에게 일종의 객관성이라는 면죄부를 쥐어주면서 정당화시키는 그런 책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책들이 불티나게 팔린다거나 한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걱정이 됩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나라는 미국 등의 강대국에 의존을 하는 경향이 적지 않으니 미국에서 재채기를 하면 우리나라는 감기가 걸려버리지요. 감기가 계속 걸린다면 우리는 면역력을 키워서 감기 바이러스를 막아야겠지요. 그런데 이런 식의 자본주의 혹은 America Almighty의 책이 널리 읽히는 형세는 면역력을 키울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 재채기를 얼굴 앞에서 하는 형세로 보입니다. 다시금 '아이언맨'이 그의 수트를 정비하고는 '팔라듐 리액터(아이언맨의 원동력)'를 새롭게 개발하여서 우리들 앞에 우뚝 설 것만 같은 기분에 불안해지네요.

 

p. s. 다음부터 책 추천할때는 꼭 서점에 가서 확인하고는 추천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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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 2011-07-23 21:57   좋아요 0 | URL
딱 적실한 제목이네요. 글 잘 읽고 갑니다. ^^

가연 2011-07-29 03:17   좋아요 0 | URL
답이 많이 늦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1. 스피노자는 왜 라이프니츠를 몰래 만났나. 

 개인적으로 이번에 가장 기대되는 신간입니다. 흔히 쓰는 말로 강추 신간이지요. 물론 이렇게 기대를 하고는 직접 보고 나서는 후회를 하는 경우도 생기겠지만 일단 기대를 해보렵니다. 최근에 읽었던 인지자본주의에서도 스피노자의 정동 개념을 끌여들어와 설명을 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막연하게 알고 있던 스피노자의 사상 등에 대해서 책을 찾아보았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스피노자는 정작 자신의 시대에는 이단으로 몰려서 파문까지 당했었고 끝내 인정받지 못한 사나이였습니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사실 미분과 적분의 발견자로서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두 사람이 이루는 하모니가 궁금합니다. 

 

 

 

2.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역사에 관련된 책을 읽다보면 역사가의 중요성이 특히 두드러집니다. 그 사람이 어떤 입장에 처해있었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기술을 할 수도 있고 자신의 생각을 조금 섞어서 이윽고 빗나가게 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렇기에 가장 이상적인 사람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겠지요. 이 책의 원저자 투퀴디데스는 20년동안 추방을 당했었습니다. 그런데 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던가요, 그 고련의 시간은 그에게 객관적으로 현실을 볼 수 있는 눈을 마련해주었고 이윽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라는 글을 쓸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그 대작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기회라 여겨지기에 이 책을 추천합니다. 

 

 

3. 극한의 우주. 

요즘 틈틈히 서점에 가서 책을 서서 읽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마다 제 눈을 잡아 끌었던 책이 이 '극한의 우주' 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러고보면 제가 최근 관심을 가지고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분은 테라포밍에 관한 부분입니다. 다른 행성을 우리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환경으로 바꾸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어떤 행성이 가장 적합할까, 와 같은 의문들 말이지요. 이 책은 우주의, 엄밀히 말하면 태양계의 행성들에 대한 일종의 백과사전입니다. 이 태양계에서의 가장 혹독한 곳은? 이라는 의문에서부터 과연 생명은 존재할것인가? 라는 의문까지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혹시 알까요, 이 책을 읽은 누군가가 여기서 영감을 받고 태양계 내의 테라포밍을 할 이상적인 방법을 알아낼지. 

 

4.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수정했습니다.)

 지난번의 추천도서인 '불안의 시대'가 선정되어서 받아읽고는 좀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내용과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적혀져 있어서 말이죠. 그래서 이번에는 책을 서점에서 미리 한 번 훑어보고 고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추천하게 된 책이 바로 이 책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 입니다. 책을 읽다가 보면 저자의 사상가들의 편력이 정말 꼼꼼하고 장대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을 구비해두고 틈틈히 읽어나간다면 일종의 체계가 잡히리라고 짐작되기에 추천합니다.  

저자의 유작이 되어버린 책입니다. 저자 최성일님의 명복을 빕니다.

 

 

5. TIME - 특별판. 

타임지에 실렸다, 타임지 올해의 인물에 뽑혔다, 라는 말은 여전히 권위를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전에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타임지를 원서로 한 권 얻어서 읽어보려고 노력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기했지만, 지금 떠올려보면 이 포기한 것이 결코 내용이 어려워서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당시 관심을 가졌던 것에서는 거리가 너무 멀었을 뿐이었지요. 타임지는 그만큼 쉽고 정확하게 지금껏 시대의 기록자이자 분석자로서 우뚝 서왔었습니다. 이 책은 특별판답게 다채로운 구성과 각종 사진으로 읽는 이를 매료시킬 것이라 여겨지기에 여기에 담아둡니다. 

 

 

 

 

 

p. s. 이건 여담인데, 알라딘 신간 평가단에서 페이퍼 추천하세요, 라고 문자가 왔었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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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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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원래 이런 글을 굳이 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남기지 않았었지만, 이 책에 대해서는 몇 마디 남기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먼저 쉽지 않은 책이었다는 말부터 하고 싶습니다. 저는 경제학이나 정치학에 관련되어서 기초도 별로 없고, 마르크스의 저작물들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저자가 문맥에서 쓰는 용어의 의미를 모두 제대로 포획했다고는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왜 이 말을 굳이 쓰냐면, 이 책 '인지자본주의'의 저자인 조정환씨는 본질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네그리의 영향을 받아서 자율주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꼭 붙여야 된다고 주장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이면에는 마르크스의 사상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그의 글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그 분석은 그가 평소 주장하던 것처럼 마르크스주의를 괄호 안에 넣고 문맥을 고려해서 그의 생각이 마르크스주의와 유착에 빠지지도 않게 하고 한편으로는 교조주의에 빠지는 것을 막아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낸 책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저작물들, 특히 ‘자본론’ 정도는 읽어보아야 그의 분석틀이 정말 옳은가 구분을 할 수 있겠지요. 이런 점에서 저는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을 놓고 멍하니 책만 쳐다보았다면 마치 모래알이 알알이 흩어지듯이 그의 텍스트들은 저에 이르러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나마 일부의 의미라도 파악하고자 다른 책들을 읽어보았습니다.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과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그리고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 가 바로 그것입니다. 사실 네그리의 ‘제국(*)’ 을 완전히 읽고 싶었지만 그 텍스트의 난해함에 이르러 중간 중간 벽에 막혀서 끝까지 읽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그것은 이런 저런 요약과 다른 분들의 생각에 의존하여 제국의 큰 모습을 그려보는데 만족해야만 하였습니다.
  제가 저렇게 읽은 책들을 나열하는 것은 나 이런 책들을 읽었어, 많이 읽었지, 라는 생각으로 나열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자본론’ 을 읽지 못했으며 결국 저자가 사용한 경제적 틀의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어서 아래의 서평에서 경제적인 담론을 어쩔 수 없이 배제시켰습니다. 그로 인하여 저자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어쩌면 한계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여기서 이렇게 글을 쓰는 두 번째 이유를 밝힙니다. 아래에 글을 전개해나가며 위의 책들을 자주 인용할 것 같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용어나 어려운 사유는 문맥 속에서 뜻을 먼저 밝히려 노력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의미가 엇갈리거나 불분명한 이야기를 하게 될 가능성도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근거는 저 위의 책들에서 가져왔으니 위의 책들을 참조해주시고, 그럼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신다면 제가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1.
  

 

  학문의 분야를 거칠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본다면 과학 계열과 인문 계열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사실 과학 분야에 발을 디디고 서 있습니다. 특히나 큰 틀에서 보면 생물학 분야이지요. 그래서 사실 ‘인지자본주의’ 라는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특히 관심을 가졌던 부분은 과연 ‘인지’ 라는 과학적 개념을 어떻게 인문학에다 접목시켰는가, 이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인문학자들 중에는 과학적 개념을 자기 마음대로 변용시켜서 마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수준으로 끼워 맞추는 행위를 하는 사람도 제법 있습니다. 물론 이는 인문학자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과학적 개념을 억지로 인문학에다 접목시키려는 과학자, 혹은 정신분석학자들도 적지 않지요. 잠깐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에 많이 알려진 정신과 의사 자크 라캉도 사실 이런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자가 과연 여기에 어떻게 대처를 할 것인가, 라는 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초미의 관심사였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적어도 저의 판단으로는 저자는 인지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책에서 언급하는 다른 과학적 개념들, 자기생성능력이나 조직 등의 개념을 책에 어느 정도 잘 녹여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그가 근거로 삼는 생물학자인 움베르토 마투라나나 프란시스코 바렐라가 주장하는 구성주의 생물학과 그 테제는 저자와 같은 자율주의 이론가들의 구미에 당길만한 이론이라는 점을 차지하고서라도 말이지요.
  저자가 말하는 인지 개념은 책에서 언급하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바렐라나 마투라나가 이야기하는, 그리고 일반적 생물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인지 개념과 거의 동일합니다. 말 그대로 생물체가 이해가고 느끼는 등의 정신적 과정을 의미합니다. 이 인지를 다른 말로 변용하자면 ‘앎’이 되겠습니다. 앎 또한 대상에 대해서 정신적 과정이 벌어지는 것을 의미할 테니 말이지요. 그런데 이 앎은 절대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오늘날 인지발달의 최전선을 달리는 과학이라는 필드에서는 오늘의 앎이 내일의 모름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굳이 최신 경향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를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시각으로 관찰하는 대상이 과연 진짜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저 위치에 있는가? 여러분들의 경우에는 이 글이 되겠지요. 과연 이 글을 내가 정말 보고 있을까? 한 쪽 눈을 감았다가 반대 편 눈을 감았다가 반복해보시면 이 글의, 이 화면의 위치는 좌우로 왔다 갔다 할 것입니다. 혹은 착시 현상과 그를 이용한 ‘옵티컬 아트’ 들을 예로 들어도 좋겠습니다. 시각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후각도, 우리의 말단 사지도 그런 속임수를 씁니다. 누가 사고로 다쳤습니다. 그런데 다친 부위를 정밀 검사를 해보니깐 어느 정도 운동능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우리 몸은 다친 부위를 쓰려고 할까요? 아닙니다. 설령 운동능이 남아있어도 움직이지를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운동능은 신경이 보존되고 근육도 여전히 움직일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운동잠재능이 있는 경우에도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 현상을 ‘Learned disuse' 라고 부릅니다. 예시가 길었네요, 사실 위의 말들을 짧게 줄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확실한 것은 없다’ 라고 말이지요. 우리의 인식은 절대 확실하지 않으며, 우리의 앎은 제한적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 뿐일지도 모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지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 발화가 일어난 ‘문맥’ 속에서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문맥은 환경이라는 말로 대체시킬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다시 정리해보면 환경과의 상호작용이 없다면 인지 능력을 가진 개체만 따로 떼어서 보는 것은 무의미하다, 겠지요. 저자가 그가 이 책에서 사용한 인지 개념을 프란시스코 바렐라나 움베르토 마투라나에게서 가져왔다면 그 의미는 바로 위와 같은 사유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다루기 위해서 먼저 인지에 관해서 시사점들을 밝혀놓습니다. 인지를 가진 개체는 그 자신의 인지적 행위에 의해서 세상을 조각해나가며 그 개체는 환경과 구조접속을 통해서 서로 상호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진화해나간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2. 
  

   

  지금까지 인지자본주의의 ‘인지’ 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인지와 결합한 이 인지자본주의에 대해서 생각을 전개해보겠습니다. 사실 이 책의 뒤에 저자와의 문답에서 저자가 밝혔듯 인지자본주의나 요즘 많이 들려오는 신자유주의나 모두 사유하는 대상은 동일합니다. 그러나 정확한 답을 얻어내려면 정확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두루뭉술하게 신자유주의의 이름으로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인지자본주의로 규정하였기에 거기에 대한 해결의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지요.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 에서 자기조절시장의 허상을 역사적으로 낱낱이 파헤치고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이 허구 상품이라는 개념은 실제로는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품으로 매겨서 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테면 사람은 상품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연도 크게 보면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화폐도 허구 상품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노동과 토지, 화폐 모두가 허구 상품인 셈입니다. 상품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상품으로 포장시켜서 우겨넣고 시장경제라는 허상에 경제 주체들이 그들을 억지로 맞춰가려니 병이 생기는 겁니다. 현대 사회의 병폐는 그런 것들에 기인한다고 칼 폴라니는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람을 상품화하는 사회에 대해서 조금 더 주목해봅시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상품화를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을 거칠게나마 큰 부분으로 둘로 나누면 육체와 정신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상품화는 육체에 관한 것과 정신에 관한 것으로 분화되겠지요. 먼저 육체를 상품화하는 그런 노동을 상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껏 이뤄진 자본주의하의 착취는 이 육체의 상품화로부터 유래되었습니다.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에서 중점적으로 따져본 것도 이 육체의 상품화였으리라 짐작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의 시대에서는 산업자본주의의 여명기였기에 육체의 노동 이외에는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현대로 접어들면서 정신의 노동에 점차 저울추가 기울기 시작합니다. 기존의 농업이나 공업이 과학 기술과 접목합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노동력을 집적해서 잉여 가치를 생산하는 방식으로는 한계에 다다른 것이지요.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노동력들은 남아돌게 됩니다. 이 남아도는 노동력을 가진 개인은 그들 자신의 자아를 찾아나가면 좋을 텐데 자본의 힘은 탐욕스러워서 그런 순진한 생각을 단숨에 부숴버립니다. 이는 비단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노동의 유연성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인간은 과학 기술을 통해서 해방되기는커녕 이제는 하루 24시간 내내 눈을 부릅뜨고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모든 부문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전에 상업자본주의나 산업자본주의가 상업과 산업으로만 구성된 자본주의가 아니듯, 지금 저자가 현대의 상으로 규정하는 인지자본주의도 이 인지에 관련된 노동으로만 구성된 자본주의는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순간 단순히 몸만 제공하던 노동을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지닌 노동이다, 라고 그 위상을 낮춰버린 것입니다. 이는 이해못할만한 변화는 아닙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그 과학 기술의 생산에 더욱 더 무게추가 실리게 되고,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라, 라는 격언이 힘을 얻게 됩니다. 참 돈벌기 쉽지요. 직접 해주는 것은 없으면서 방법을 이러쿵 저러쿵 떠들면 그것이 다 아이디어가 되고 돈이 되는 겁니다. 그러다보니 사회에서는 인지에 관련된 노동들을 높은 가치를 가진 것처럼 치부하며, 지금도 수많은 부모들은 이 이성적 측면의 인지에 관련된 노동을 자신들의 자녀가 택할 수 있도록 여러 학원을 전전하고 계시겠지요.
  인지의 또 다른 면인 감성적 측면도 부단히 수탈당하고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요즘은 무슨 직업에 종사를 해도 서비스가 좋아야 돼, 손님을 잘 맞이해야 돼, 등의 말이 오르내립니다. 조금만 불친절하게 굴면 인터넷에다가 글을 올리지요. 어디어디는 좋지 않더라, 등으로 말입니다. 스튜어디스의 예를 들 수도 있겠습니다. 항상 그들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이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인간이 어떻게 항상 웃는 얼굴로만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직장에서는 항상 웃는 얼굴이더라도 직장을 나서는 순간 항상 걱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오늘 사소한 다툼이 있었는데 그것이 크게 와전되지는 않을까, 이 직장을 얼마나 오래 다닐 수 있을까 등등 말이지요. 이는 자본주의가 우리의 정동적 측면에까지 침범하여서 긍정적 감정을 수탈해나가고 공황이나 두려움 등의 부정적 감정의 독을 퍼뜨린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3.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뭅니다. 바로 위의 글에서는 인지라는 말과 정신, 혹은 더 거칠게 과학 기술과 같은 이성적 측면과 감정과 같은 정동적 측면의 합을 거의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여 사유를 전개해나가는데 제일 처음 문단에서는 우리는 인지에 관해서 말할 때 그 환경을 배제시켜서는 안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정신은 인간에 내재된 것이고, 환경은 인간의 밖에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혀 상반된 이야기를 연속해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는 상반되지 않고 하나로 연결될 수 있는 길을 가집니다. 우리는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야 한다, 라는 표현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스킬라와 카리브디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들이지요. 저 표현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들은 정말 불가항력적인 괴물들인데, 그 괴물들이 좁은 항해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으르렁 거리는 상황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인식론에 이르러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 각각 재현주의와 유아주의라는 이름으로 말이지요.
  우리는 환경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되고 내적인 유아주의, 관념론에만 너무 집착해서도 안 됩니다. 이는 정말 그 오디세우스가 스킬라와 카리브디스 사이를 지나간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처음 문단의 마지막에 이르러 ‘환경과 구조접속을 통하여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 는 말을 한 것입니다. 환경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는 개체와 상호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인지가 정신과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쓰였지만 그 정신 외부의 환경을 끌어들여야 하겠습니다. 외부의 환경은 작게 보면 그 개체가 속하여 자라면서 그 정신을 형성한 가족이 있을 수 있겠고, 넓게 보면 시대 상황 전반을 가리킬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외부의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정신이 있다는 것을 긍정합니다. 내가 정신활동을 하는 만큼, 다른 사람도 정신활동을 할 수 있지요. 여기서 우리는 안토니오 네그리의 ‘다중’ 개념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
  이 ‘다중’ 이라는 개념은 이 책 ‘인지자본주의’ 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회적 차이가 내부적으로 다르게 남아있으면서도 그 이질성이 그들의 진보를 저해하지 않으며 서로 공동으로 소통하고 활동할 수 있는 집단이라고 말이지요. 앞서 해온 말들을 여기다 대입시킨다면 상호작용이 서로 열렬히 일어나는 집단으로 할 수 있겠습니다. 나 아닌 다른 외부의 사람과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고, 마찬가지로 환경과도 끊임없이 구조접속을 통한 상호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집단이지요. 우리의 몸으로 보자면 세포 하나하나가 모여져 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들이 모여서 일종의 계(순환계, 소화기계..)를 만드는 그런 그림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앞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인지능력, 거칠게 말하자면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삶에까지 노동을 끌고 들어오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의 예시는 쉽지요. 스마트폰을 통한 업무 보고는 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을 터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과학기술의 발달은 삶의 모든 시간에 대한 착취만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사람과의 접속을 더욱 쉽게 만듭니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마치 공장이 파업의 장소로 점거된 것과 같다고 비유합니다. 이것의 예시도 쉽게 들 수 있겠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으로 대표되는 SNS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언제 어느 때든지 쉽게 접속할 수 있고,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구조접속은 우리에게 정신과 정신이 직접 맞부딪히며 상대와 상호작용을 하도록 합니다. 기존의 얼굴과 얼굴을 맞대며 상호작용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현대의 이런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사용자 자신은 자각하고 있지 못하겠지만 온전히 각 개인의 이질성들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운영이 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인지자본주의 시대, 혹은 네그리가 말하는 ‘제국’ 의 대항마로서의(이 부분은 사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이렇게 썼지만 엄밀히 말씀드리면 ‘다중’ 의 대항마가 ‘제국’ 이라고 써야 옳습니다.) 주체인 다중이 대두되는 것이지요.

 

4. 
  


  그런데 이 ‘인지자본주의’에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있는 것은 과연 이 인지자본주의가 다중의 특이성을 어떻게 원동력으로 삼아서 착취하는가, 입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껏 밝혀왔다시피 인지자본주의는 기존의 상업이나 산업자본주의와는 궤를 달리하기 때문에 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자는 여러 시공간의 재구성을 통해서 밝히고 있습니다만 사실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간단한 예시를 통해서 이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글루스라는 블로그 서비스가 있습니다. 원래 이글루스는 성인 인증을 거쳐서 등록 가능하던 그런 서비스였습니다. 그리고 그 초창기 시절에는 상당히 뛰어난 자료를 올리던 블로거들도 많이 존재하였습니다. 사진이면 사진, 문학이면 문학, 애니메이션이면 애니메이션 등등.. 각자의 특이성들은 밸리라 규정된 테마에서 서로 존중받으며 서로 상호작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인만 이용 가능했다는 점이 어쩌면 한 몫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물론 그들만의 커뮤니티, 라는 비난도 동시에 받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 특이성이 대기업의 눈에 띄게 됩니다. 그 대기업의 이름은 SK 커뮤니케이션즈. 이 대기업은 어느 순간 그 이글루스를 덥석 집어삼키게 됩니다. 저 블로그 서비스 내의 특이성들을 흡수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저 특이성을 흡수하여서 잘 포장 후 외부에 노출시킨다, 라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는 최근에 네이트(SK 커뮤티케이션즈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의 메인에 이글루스의 글들이 종종 링크되는 현상으로 증명될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런 것이 자본주의(SK 커뮤니케이션즈)가 다중(이글루스의 기존 회원들)의 특이성을 흡수하는 사례입니다. 당연히 이런 반론도 있을 법 합니다. 사실 대기업에 의해서 저 회원들이 외부와 더 활발히 소통을 하게 된 것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사실 저때의 저 이글루스의 회원들을 다중이라고 규정하지는 못할 것 같다, 라고 말이지요.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옳지 않습니다. 물론 저때의 회원들을 다중이라고 확실히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정말 그들만의 커뮤니티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대기업이 인수를 함으로써 소통을 더 잘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사실과 다릅니다. 애초에 이들은 그런 목적으로 인수를 한 것도 아니며 현재는 각종 규제와 약관 변경을 통하여 회원들을 통제를 하고 있습니다. 내부에서 제대로 소통이 되지 않는데 외부와 제대로 소통을 한다는 말이 과연 얼마만큼 진정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저로서는 그들이 외부에 소통을 하는 것처럼 특이성들을 묶어서 일방적으로 포장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고 여겨집니다. 그렇게 특이성들이 소비되고는(메인 화면의 글 노출이나 주간지에 글을 싣는 등으로) 자본의 품으로 안기며(SK 커뮤니케이션즈의 이미지를 좋게 만든다거나 등의 반향을 통해서) 자본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5. 
    

 

  저자가 밝히는 다중의 힘은 경계를 넘고 가로지르는데 있습니다. 하나의 단일 목적으로 통일되었다면 그 집단에 다른 생각이 끼어들 여유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집단의 개개인 모두가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그 특이성들이 시너지 효과를 낸다면 아무리 네그리의 제국이 억압하더라도, 아무리 인지자본주의하에서 삶이 수탈당하더라도 그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정말 새로운 삶을 향하여 무한히 뻗어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른바 지금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이겠지요. 이를 네그리는 그의 저서 ‘다중’에서 ‘삶정치적 힘’ 이라고 명명합니다. 그러고 보면 저자가 쓴 이 ‘인지자본주의’ 는 수많은 경계를 뛰어넘으며 그 사유를 전개해나갑니다. 베르그송, 스피노자, 네그리, 바렐라, 마르크스 등등.. 이 책이야말로 정말 그가 말하는 ‘다중의 삶정치’ 를 일깨우는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저 영역들 중 가장 근본적으로 저자의 사유를 구성하는 부분은 역시나 안토니오 네그리의 사유들입니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만나게 되는 용어들은 삶정치나 삶권력 등 삶- 과 관련된 단어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다중을 설명하기 위해서 쓰이는 말로 네그리가 그의 저서에서 밝힌 단어들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미셸 푸코가 먼저 사용하기는 했지만 체계화시키고 이론화시킨 것은 네그리겠지요. 삶권력은 인지적인 사회적 삶 자체에 대한 제국의 직접적 통제력을 뜻하고 삶정치는 앞서도 밝혔다시피 삶권력에 대항하여서 다중들의 삶에 대한 욕망을 조직하는 것을 뜻합니다. 저자 조정환은 이를 그대로 인지자본주의에 반영하였고 그의 사유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가 아무런 비판 없이 그의 개념을 토대로 삼았기 때문에 만약에 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반론의 명백한 증거를 내밀면 그가 세운 탑은 속절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제기할 수 있는 의문은 그가 너무 삶정치, 삶권력 등의 개념에 묶여 있는 것은 아닌가, 입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중의 행동 양식 중 어떤 것은 저런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 또한 저런 개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저런 말들이 전부는 아니리라고 봅니다. 이 책 ‘인지자본주의’ 에서는 모든 것을 삶정치나 삶권력과 연관지어서 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다중의 힘을 강조하다시피 서술해놓으니 오래 지나지 않아서 세계가 다중의 혁명의 불길로 휩싸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지자본주의의 위기가 도래했다고 주장하면서 든 예시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입니다. 글에서 몇 번이고 서술하는 바로는 이때 인지자본주의의 위기의 정점을 찍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위기의 정점을 이미 예전에 찍었으니 지금은 위기일까요, 아니면 위기가 아닐까요? 혹은 위기는 위기이지만 2008년에 비해서는 완화된 위기일까요? 저자도 이런 반론을 염두에 뒀는지 이를 진자에 비교하면서 마치 진자가 왔다 갔다 하듯이 자본주의가 더 심화되는지, 아니면 완화되는지는 다중의 힘에 달렸다고 책에 서술합니다. 그러니깐 이 세상을 자본주의의 병폐에서 붙잡아두는 것은 이 다중의 삶정치적 활동에 달렸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면서 하나의 예를 더 듭니다. 바로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으로부터 촉발된 아랍권 혁명입니다. 그의 입장에서는 이들이 가장 삶정치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징됩니다. 저자는 기대합니다. 저 혁명이 점차 범위를 넓혀서 유럽으로 뻗어나가고 그 다음은 아시아로 뻗어나가며 이윽고 전세계를 장악할 거라고. 그러나 지금 그 혁명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리비아에서 발이 묶인 채 몇 달이고 교착상태에 빠져있습니다. 리비아 교민들은 급히 귀국을 했었지요. 현지인과 결혼을 했던 한 분은 이집트에 머물며 자신의 가족의 안위를 살피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책에서는 인터넷이 끊겨도 말을 텍스트로 옮기는 기계를 통해서 고립된 나라의 현재 상황을 널리 알릴 수 있다는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에게는 그런 것들은 허구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전화기란 인터넷에다 접속하여서 혁명의 기폭제로 작용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루 밤낮을 꼬박세우거나 혹은 겨우 두 시간을 자면서 어쩌다가 연결되는 부인이나 남편의 연락을 기다리게 하는 역할에 다름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에는 우리나라에서는 정체된 리비아의 상황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봅니다. 그것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이를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느새 혁명에 대한 관심이나 다중의 힘에 대한 생각은 이미 잊어버렸고 저자가 말한 대로 마치 강제로 점거되어 혁명의 장소로 이용된 컨베이어 벨트들은 다시금 본연의 역할로 특이성들을 소비시키고 있습니다. 왜 리비아에서는 다중의 삶정치적인 힘이 꺾이게 되었을까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다시금 다중들이 가십거리를 찾아 헤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전쟁,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폭력 때문입니다. 카다피는 맹렬히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사병들은 여전히 전쟁을 벌이고 있고 혁명을 막아서고 있습니다. 저런 폭력은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만듭니다. 지금도 리비아에서는 수많은 사상자들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무차별적인 폭력앞에서 삶정치와 같은 개념은 그저 배부른 소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면 흐지부지하게 결말을 짓지 못하고 오래 끌게 되며, 어느 순간 관심에서 벗어나버리게 되고 이윽고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은 요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국의 힘, 자본주의의 힘을 극복하려면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정말 삶정치적인 힘만으로 우리는 다중의 행동양식을 모두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삶의 욕망을 가지고 있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다중은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각각의 특이성을 지니고 있고 그 욕망도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한 개인이 여기서 어려워하고 힘들어하지만 다른 개인은 그래도 어디선가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래서 이 다중은 게릴라전에는 능하지만 그 삶정치적 힘을 모두 한 곳에 모으는 것이란 힘들 것이라 짐작됩니다. 인지자본주의를 극복하려면 삶정치적인 힘을 집적시켜야만 하는데 그 힘을 모아서 쓸 수가 없는 형세가 되어 버린 겁니다. 다시 리비아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아직 속단하기는 이릅니다만 현재의 리비아의 형세를 다중이 돌파해나가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겠습니다. 먼저 정말 모든 전 세계적인 다중의 연합이 일어나 그 삶정치적인 힘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어렵다는 전망을 도출해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방법은 기존의 제국의 힘을 빌리는 것입니다. 정말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UN, 혹은 그 제국의 주축을 이루는 나라의 군사력으로 힘을 제압하는 방법을 예시로 들 수 있겠습니다. 왜 저런 극단적인 예를 들게 되었냐면 민주주의의 파수꾼을 자처하는 기존 제국들이 경제적 제제나 성명 발표와 같은 방법으로 이미 나서고 있기는 합니다만 리비아가 국제 정세에 나서기 시작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 경제적 제제 수단이 마땅히 없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 방법은 폭력을 제압하기 위한 폭력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쓴다는 문제 이외에도 제국을 전복하기 위한 다중이 제국의 힘을 빌린다는 점에서 어폐가 있습니다. 그렇게 힘을 빌린 이후에 과연 다중이 다중으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요. 저는 그것에 부정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삶정치외의 다른 개념을 다중을 설명하고 그 힘을 사용하는데 도입할 필요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앞서의 두 가지 방법 이외의 다른 또 하나의 방법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는 삶정치적으로는 해석할 수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제국에 친화적이지 않은 그런 개념이겠지요. 그런 개념을 발견 못한다면 다시금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리고 제국에 대해서 어차피 벗어날 수 없어, 와 같은 냉소주의적 태도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지요. 물론 제 예상이 틀려서 다중이 그들의 힘으로 무사히 혁명을 완수해낸다면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6.
   

 

  움베르토 마투라나는 프란시스코 바렐라와 공저한 그의 저서 ‘앎의 나무’ 의 마지막 장에 대략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은 언어 안에서 존재하며, 그 언어는 항상 나와 다른 너를 향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언어가 너를 향하고 있는데 당연히 ‘나’ 또한 ‘너’ 를 향하고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행동은 관계를 맺기 위한 것이며 모두다 윤리적입니다. 이는 나와 너 사이에는 사랑이 존재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네그리가 그의 제자 하트와 공저한 저서 ‘다중’ 에서도 그 결론은 ‘사랑’ 으로 귀결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저 두 책의 영향을 받은 ‘인지자본주의’ 의 결론도 어디로 수렴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책 ‘인지자본주의’ 는 경제학적인 담론에서 정치적인 결론을 이끌어내는 책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만약에 그가 경제학적인 담론에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했다면 굳이 인지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그저 신자유주의라던가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사유를 펼쳐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 형태의 변화를 중심에 놓다보니깐 현대 사회의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로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고 새로운 시각으로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인지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두 측면을 가집니다. 이성으로서의 인지와 정동으로서의 인지입니다. 비록 낡고 고리타분한 개념 같지만 다시금 정동으로서의 인지, 즉 사랑의 개념을 끌어들여옴으로써 (물론 다중의 물리적 조직화도 같이 일어나야겠지만) 저자는 이 힘든 세상을 극복하려고 합니다. 지금껏 이성으로서의 인지가 자본주의와 결합하여 우리를 착취해왔고 정동으로서의 인지가 우리에게 지금껏 우울과 공황상태를 주입해왔다면 우리는 그 칼날을 반대로 돌려서 대항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지금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괴롭더라도 그것은 마치 거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억압이라는 뜻이며 곧 거대한 잠재력으로서의 작용이 존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 책은 인지자본주의사회가 아무리 너를 괴롭힐지라도 결국에는 극복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담은 찬가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이솝 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어떤 사람이 로두스 섬에서 멀리 뛰기를 잘했다면서 큰 소리를 치며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렇게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순간 한 섬에 도착했는데 알고 보니 그 섬이 로두스였던 겁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을 꽉 붙잡고는 이렇게 말했다지요.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그런데 이 말은 이런 거짓말쟁이를 혼내 줄때만 쓰는 말은 아닙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라, 머뭇거리지 말라, 와 같은 문맥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각각 넓어진 인지능력을 통하여 상대방과 구조접속을 할 수 있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동시에 특이성을 여전히 보존하고 있는 한 우리도 다중입니다. 이 다중은 인지자본주의의 폐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것을 자각하지 못하고 자본주의는 너무나 힘이 강력해, 어쩔 수 없어 등으로 일관해나갑니다. 그럴 경우에 우리는 우리들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주도록 합시다. 여기가 로두스니깐, 여기서 뛰어라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필드가 모두 인지적 능력의 로두스이기에 말이지요.

 



(*)서평자 주 : 제국은 초법적 권위를 가진 기구와 다국적 기업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일전의 제국주의가 그들 나라의 외부를 착취해가며 그들의 영토를 늘려갔다면 이 제국은 그 구성원인 다중을 끊임없이 외부화시키며 착취합니다.
 

 

 

p. s. 아.. 무슨 글을 써도 만족스럽지 못하네요... 제가 담으려했던 내용의 반에 반도 못담은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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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7:0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가연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가연 2011-09-03 09:48   좋아요 0 | URL
죄송해요. 아직 그런 곳에 글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내공이 쌓이지 않아서ㅎ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이번엔 과학 분야의 책이 한 권 되었으면 하는데... 가능하려나 모르겠네요. 

 

1. 데리다 평전. 

 데리다의 사상의 핵심인 해체에 대해서 들어보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저 또한 해체가 서구이성중심의 사회의 해체를 의미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 이상 심도있게 생각해보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들어본 적이 많아도 인간으로서의 데리다는 사실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이 책은 그의 철학적 토양이 되는 그의 삶을 조명함으로써 그의 철학에 더욱 쉽게 다가가게 하는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2.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해제. 

 과학철학자의 거의 사조에 가까운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해설서입니다. 요즘 철학적 사상의 큰 주류는 쿤, 칼 포퍼, 그리고 바슐라르로 이어지는 과학철학과 샤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양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사상의 주류 중 한 부분의 근원을 맛본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추천합니다. 사실 과학혁명의 구조는 원서가 더 쉬운 책이라고들 하지요. 번역본은 정말 어려웠고 그건 저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끝까지 읽어내지를 못하였습니다만 이 책이 좋은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 코끼리는 아프다. 

 책 소개에 코끼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과거이며 동시에 안타깝게도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있다, 라고 적혀있는데, 사실 이는 코끼리 뿐만이 아니라 지구상의 어느 생명체도 가능한 이야기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연구가 인간이 다른 자연과 얼마나 관련을 맺고 있는가, 라는 것을 다시금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한 의미가 있으리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뿐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도 그들 자신들만의 욕망을 가지고 행동하며 상처를 받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동물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해당이 되는 이야기이지요.

 

 

   

4. 불안의 시대 

   

 지난번 신간 추천도서였던 '인지자본주의'에서는 우리의 자본주의 양식이 인지자본주의로 넘어갔다고 주장합니다. 인지자본주의의 저자 조정환은 2008년 이후의 위기는 자본주의의 순환적 위기의 한 국면으로만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 책의 저자 기디언 래치먼도 똑같이 2008년 이후를 불안의 시대로 규정합니다. 같은 국면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 한 쪽은 자본주의에 대해서 논하고 한 쪽은 세계사적인 흐름에 따라서 논하고 있습니다. 매우 흥미로운 일이라 여겨지기에 추천합니다. 

 

 

 

5. 언어들의 죽음에 맞서라. 

 사실 이건 저 개인적인 관심에서 이렇게 적어두는 책입니다. 이렇게 페이퍼를 작성하는 것은 일차적인 목표는 책의 추천이겠지만, 이 책을 읽어보아야겠다, 라는 다짐을 굳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여겨지기 때문이지요. 이 책은 언어제국주의를 경계하고 사어나 쓰이지 않는 언어의 소멸을 내버려두지 말자고 주장합니다. 언어가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을 키운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합니다만 되살린 사어라던가 소멸 직전의 언어가 얼마나 쓰이게 될지는 또 의문입니다. 물론 책의 논지는 모든 언어가 소중하고 영어로 대표되는 커다란 언어의 압제를 막아내어야 한다는 것이겠습니다만 세계화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관점에서 볼때 과연 그렇게 함으로써 얻고 잃는 것이 어떻게 될지 궁금해집니다.

 

 

 인문 신간들 중에서 읽고 싶은 책들이 많네요.. 이번에도 과학 분야의 책은 멀리 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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