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는 가능한가?

 

 

 

미리 몇 부분을 밝혀둡니다. 일단, 저는 저 빵가게 재습격님이 분류한 진영에서 '인신공격하지 않았으며, 개인적 이익을 공공의 이익과 정의의 이름으로 제시한다면 불편한 쪽' 으로 분류할 수 있겠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적립금을 둘러싼 논쟁에서 한 발 빼고 있었고, 사실은 '아무래도 좋다' 라는 입장이었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보면 저 또한 일종의 수혜자처럼 보일 수 있으리라고 여겨저서 좀 우습게 들릴 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주면 좋고 안줘도 어쩔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지금껏 글을 쓰면서 '이달의 당선작' 에 뽑히는 것이 명예다, 라고 여긴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사실 저는 당선작이라는 이름보다는 당선작에 따라오는 적립금이 더 좋았고, 좀 더 나아가서 적립금에 대해서도 받으면 좋고 없으면 그냥 없구나, 하고 여기고 있었거든요. 무관심하다면 무관심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가장 큰 이유는 여기 알라딘 서재가 제 첫 블로그는 아니라는 점, 즉 다른 곳에서 블로그를 운영해본 경험이 있어 커뮤니티에서 그 운영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바랄 수 있는가, 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회사도 회사 나름의 입장을 가지고 있는 '회사'다, 많은 것을 굳이 바랄 필요가 있겠는가? 였습니다.) 그런 제 눈에서 볼 때, 처음 문제제기를 하신 스텔라님의 글은 솔직히 그다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격앙된 어조로 알라딘에 대해서 비판을 하시고 군림을 하신다고 하셨지만, 솔직히 제 심정으로는 어디를 어떻게 보면 군림이 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지요. 알라딘 회사가 알라딘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글을 명예롭지 못하게 대하고 있다는 부분 또한 이해가 잘 안가는 부분이었습니다. 그 후에 글이 올라온 것이 한사람님의 글이었습니다. 스텔라님의 글 보다 약간 더 정제되어있고 몇 가지 대안을 내세우셨지만, 이 또한 저는 고개를 약간 갸웃거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고백하자면, 저는 사실 이웃분이 거의 없습니다. 저를 즐겨찾기하신 분도 많지 않으시지만 제가 즐겨찾기한 분은 손에 꼽을 정도이지요. 그래서 제 이웃인 한사람님에게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워하고(처음 서재를 만들었을때 말을 걸어주시고 때때로 덧글을 달아주셔서) 있지만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글에 다 동의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나름의 의도를 가지고 대안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글이라서 충분히 존중받을만하고, 저렇게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구나, 알라딘이라는 여기 이 공간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 분들이 많으시구나, 라고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네, 저 위의 두 글을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마음에는 와닿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이런 부분에 대해서 굳이 무엇이 잘못되었다, 혹은 옳다, 라고 말하는 것이 굳이 필요하다고는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뭐, 솔직히 말하면 사실 그 이후에 나온 아프락사스님의 글이 제 심경을 많이 대변해주기도 했었고 말입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붙이느라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이렇게 어찌되었든 일단락이 되었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빵가게재습격님이 글을 올리셨습니다. 최근 글 '대화는 가능한가' 가 바로 그 글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의 저 최근 글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대략 뒷부분의 내용은 '최근에 몇 몇 사건들이 연결되어있었고, 한사람님의 페이퍼는 본질적으로 나를 겨냥한 것이다' 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 글을 읽으며 솔직히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 한 두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분들의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서 친분관계를 언급하자면, 저는 빵가게재습격님이 타겟으로 삼은 '마녀고양이' 님이나 '한사람' 님 중에서 마녀고양이님은 위의 스텔라님처럼 아예 친분관계가 없으며, 한사람님의 서재에는 자주 들러서 글을 읽는 편입니다. 그리고 빵가게재습격님과는, 제 블로그에서는 빵가게재습격님이 댓글을 몇 번 달고 가신 것 외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습니다. 또한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을 아예 안읽은 것은 아니지만(한 때 서평단을 같이 했었고, '스피노자는 왜' 와 같은 흥미로운 도서를 올리셨던 적이 있었기에) 최근 서평단을 그만두시고는 거의 안들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저는 한사람님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 같다, 라는 말을 듣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을 듣게 되더라도 저는 여기서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 대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이 언급하신 첫 번째 사건, 마녀고양이님의 알라딘 서재레터 사건은 솔직히 제가 아는 것도 없고 제가 그때 제대로 활동을 하지도 않았기에 잘 모르겠지만, 두 번째 에릭호퍼에 관련된 사건에 대해서는 생생히[...] 현장을 지켜볼 수 있었지요. 자세한 이야기야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 적혀있으니 가서 참조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만, 빵가게재습격님은 그 글 중간에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한사람님이 '며칠 뒤 자신이 너무도 억울하고 비열한 인신공격' 을 당했다고 호소했다고 말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한사람님의 글은 하소연이라면 하소연이었지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호소한 적은 없는데 말입니다. (제 입장은 그다지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으니) 사람마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고, 사건의 두 당사자 중 한 분인 빵가게재습격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다고 기억을 하고 계시다면 어쩔 수 없는 이야기겠지요. 자, 그런데 이 부분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그럼 결론적으로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 을 하신걸까요? 이 부분은 글 전체에서 일부이지만 사실 중요한 부분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빵가게 재습격님의 글은 궁극적으로 '양 진영 간의 대화가 가능한 것인가?' 에 대한 글이니 말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올바르게 보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감정에 눈이 멀어 있다면 발전적인 대화가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여기서 몇 가지 가설을 세워봅시다. 이 외에 다른 가설들이 있을 수 있다면 이야기를 해주셔도 좋습니다.

 

1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고, 한사람님은 그에 따라서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호소했으며, 다시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호소했다고 적어두었다.

2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고, 한사람님은 글에서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호소하지는 않았는데 빵가게재습격님은 (자신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기 때문에 그게 기억에 남아서)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글에서 썼다고 기억한다.

3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안했고, 한사람님은 (별로 대단한 공격도 아니었는데)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받아들이고 글에서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말했다.

4번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께 비열한 인신공격을 안했고, 한사람님도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밝힌 적이 없으나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한사람님이 그때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말한 것 같아서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적었다고 언급했다. 

 

정말 복잡한 가설들입니다만, 대략 이 정도가 대개의 경우의 수를 포함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일단 마지막 부분에 빵가게재습격님이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이라고 호소했다, 라는 부분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깐요.(2*2니깐 모든 경우의 수라고 말해도 괜찮으려나요, 하하) 사실 앞서 제가 제기한 질문은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에게 비열한 인신공격을 했나? 였지만, 이렇게 가설들을 세워보는 것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답을 내리기 어렵네요. 그런데 이렇게 가설을 세우니 하나 분명해지는 것이 있습니다. 위 경우의 수들을 살펴보면 어쨌든 4번을 제외하고는 어떤 가설의 경우든 현재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이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여기고 있을 거라고 전제하고 있습니다. 4번의 경우에는 빵가게재습격님의 기억력의 문제가 될 터이니 여기서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일단 제외해보겠습니다. 사실 관계의 문제가 여기서 문제되기보다는 논리가 좀 더 문제가 될 듯 하니 말입니다.빵가게재습격님은 전체적으로 글에서 대화를 원하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빵가게재습격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다' 고 여기고 있는 한사람님(적어도 빵가게재습격님 입장에서는)과 과연 공정한 대화를 할 수있을까요? 방금 말씀드렸지요, 감정에 눈이 멀어있는 이상 대화는 힘들것이라고. 이는 빵가게재습격님이 하이드님의 댓글에 단 답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빵가게재습격님도 인지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적대의 위치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대화를 나누자고 말씀하시지만, 이는 사실 한사람님과 빵가게재습격님의 관계에서는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말이지요. 비열한 인신공격을 당했는데(적어도 당했다고 여겨지고 있는 상태인데) 적대의 위치로 가지 않을 수 있을까요. 한사람님이 모든 것을 용서하겠다, 등의 페이퍼를 쓴 것도 아니고(물론 빵가게재습격님은 내가 용서받을게 어디있는가, 하는 입장이실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저 한 문장을 가지고 너무 과장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줄이기 위해서 저렇게 쓴 것이 아니냐, 라고 반론을 제기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제 빵가게님과 한사람님의 논쟁(이라고 쓰기는 힘들지만 적절한 말이 없으니 그대로 쓰겠습니다.)의 시발점이 된 글을 살펴봅시다. 빵가게님은 에릭호퍼 책에 대한 한사람님의 리뷰에 대해서 첫머리에 혹평을 가합니다. (사실 여기서도 저는 개인적으로는 한사람님의 리뷰에 대해서 그리 동감하지는 못했지만ㅠㅠ 아하하, 죄송합니다.) 전문이야 http://blog.aladin.co.kr/bkinterface3/5176745 여기에 가보시면 누구나 읽으실 수 있을 터이고, 첫머리에서 빵가게재습격님은 한사람님의 리뷰를 '저주' 그리고 '악연' 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자신의 주장을 시작하시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사실 용납하기 어려운 부분이지만, 글을 쓰는 것이야 개인 나름대로 쓰는 것이고, 제가 당사자가 아니니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 부분을 보시면 설령 한사람님이 본인 스스로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여기신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에 대해서 저만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 후에는 '우아한 블로그에서 자뻑'이나 하라고 하는 글로 마무리짓지요. 이와 같은 일들을 저 한 문장으로 줄인 것입니다. '비열한 인신공격' 이라고 말이지요. 위와 같이 경우의 수를 나누어 각 부분을 생각해보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 수 없지요.

 

여기서 이렇게 생각해볼 수 도 있습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이때 한사람님과의 '대화'를 원했던 것이라고 말입니다. 대화를 요청했는데 대화를 거부하고 감상적인 페이퍼를 쓰니 화나서 '우아하게나 살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빵가게재습격님과의 '대화'는 분명 피가 튀고 칼이 튀는 논리의 대화일 것입니다. 울면서 나약하게 감성적인 길을 쓴다면 그저 단칼에 베어버릴 그런 대화만을 인정하시는 것이 되겠지요.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의 빵가게재습격님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대화'의 모습이 크게 달라졌으리라고는 생각이 안듭니다. (최근의 기억의 집님과의 '대화'를 미루어 짐작할 때) 하지만 그 논리적인 대화, 를 위해서는 먼저 전제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둘 다 냉정한 상태에서 시작되어야 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 빵가게재습격님이 다시금 대화를 요청하셨지만 동시에 빵가게재습격님은 다음과 같이 한사람님 그리고 마녀고양이님의 상태를 정의합니다. 분명히 상처받았으며, 상처를 내재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 그럼 빵가게재습격님의 상황을 다시금 살펴봅시다. 빵가게재습격님은 지금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다시금 대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논리의 대화를 말이지요.(빵가게재습격님의 원 글은 대화는 가능한가? 가 주제이지만 대화가 가능하다면 대화를 마다할 이유가 없으니, 그리고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대화의 가능성을 알아 볼 필요가 없으니 대화를 요청했다고 해도 무방하다고 여겨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런데 상처를 입은 사람이 과연 제대로 된 논리의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요? 방금도 이야기했다시피 먼저 둘 다 냉정한 상태에서 감정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논리의 귀결이 완전할 터인데(감정이 개입되면 왜 논리가 완벽해지지 않는가, 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상처를 입은 상태, 그리고 그 상처가 치유도 안된(빵가게재습격님의 말을 빌리자면 '내재된') 사람에게 그 상처를 '준' 사람이 아무런 화해의 모습이나 위로의 모습도 보이지 않고 대화를 건다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지요. 혹은 그때 일은 그냥 별 일 아니었으니 잊어버리고 새로운 대화를 하자, 라는 말씀이신걸까요? 혹은 상처를 입긴 했을텐데 그런 상처는 혼자서 삭히고 다시 대화를 하자, 라는 말씀이신걸까요. 또한 양 진영간의 대화를 원한다고 하셨는데, 첫 번째 진영(빵가게재습격님의 분류에 따르면)인 피해받고 부당하게 공격받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수장이라고 여겨도 무방할 분들(빵가게재습격님의 페이퍼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분들)인 한사람님과 마녀고양이님이 댓글을 다셨는데, 거기에 대해서 빵가게재습격님은 그저 다른 사람의 의견, 다른 사람의 의견만을 찾고 계십니다. 이는 빵가게재습격님의 답글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빵가게재습격님이 아침에 글 말미에 잠깐 썼다가 지우신 부분..으로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만 지우셨으니 굳이 언급을 하지는 않겠습니다. 새로고침을 하다가 우연히 볼 수 있었습니다.) 양 진영간의 대화를 하는데 도대체 다른 사람, 제 3자의 의견이 왜 필요한지도 의문이 남습니다. 3자의 조정을 원하시는 걸까요, 혹은 3자 중에서 얼마나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는가, 를 찾으시는 걸까요. 조정을 원하신다면 양 진영간의 제대로 된 '대화'(빵가게재습격님이 원하시는)가 선행되는게 옳을 듯 하며(3자의 조정에 모두 따를 수 있을 리 없으니) 제 3자의 공감하는 의견은 사실상 그냥 진영에 포함되는 것이니 따질 이유가 없구요. 혹은 빵가게재습격님은 덧글은 대화로 생각하지 않으시며, 오직 트랙백한 글만이 대화인 것이다, 라고 여기시는 것일까요.

 

빵가게재습격님과 기억의 집님과의 논쟁(인지 아닌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적절한 말이 없으니 논쟁으로 해두겠습니다.)이 이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자세한 부분은 다 기억이 나지 않으나 빵가게재습격님의 말씀 중에 기억의 집님이 자신의 글에, 언급한 내용이 있는 것도 아닌데 김용민을 욕하는 것 같으니 쪼르르 달려와서 덧글을 단다, 라는 내용의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아주머니', '아주머니' 라는 말을 써가시며 대화를 나누시는게 솔직히 감정적으로는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지만, 일단 이 부분의 논리관계를 떼서 지금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다가 옮겨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빵가게재습격님이 기억의 집님이 빵가게재습격님에게 한 행동을 그대로 한사람님에게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보여집니다. 한사람님이 한나 아렌트를 언급하실때 빵가게재습격님을 떠올린 분이 과연 몇 분이나 될까요? 냉철한 척, 잘난 척 논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많다고 할 때, 빵가게재습격님을 떠올린 분이 몇 분이나 될까요? 이런 의문을 던져볼 수 밖에 없지요. 저는 빵가게재습격님을 그 글과 도저히 연결시키지 못했으며, 사람은 자신의 입장에서 파악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적어두는 것입니다. 저로서는 다른 분들이 그 글을 읽고 아, 이건 빵가게재습격님을 겨냥한 것이다, 라고 생각을 하셨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제 입장에서 말씀드리건데 이는 기억의 집님에 대해서 빵가게재습격님이 '언급한 사실도 아닌데' 라시며 '자기모멸'이다, 라고 말씀하신것을 그대로 본인이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런 의문이 남습니다.

 

무엇보다도 빵가게재습격님의 글에서 고개를 젓게 만드는 부분은 자신을 '변태'라고 지칭하며, 늘 알라딘을 떠난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이번에 올린 글도 알라딘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비열한' 짓을 하고 떠날 뿐이라고 하십니다. 자, 단순하게 생각해봅시다. 왜 비열한 짓을 하고 떠나야 하는 건가요? 그것도 본인 스스로 비열한 짓, 이라고 인지하고 있는 부분인데 말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은 굳이 '비열한 짓' 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으셨거나, 혹은 비열하다고 스스로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저 '대화는 가능한가?' 라는 글을 쓰지 않으셔야 했지요. 비열한데 욕먹으려고 글을 쓰시는 것은 아닐테니 말입니다. 혹은 변태라서 나는 욕을 먹어도 좋다, 라고 여기시는 거라면 악플러때문에 알라딘을 떠날 필요도 없을테고 말입니다. 악플러들이 욕을 해도 괜찮다, 라고 충분히 여기실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라면(그리고 악플러들때문에 떠나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실제로도 아니실것이라고 보여지고) 빵가게재습격님은 그저 남들이 자신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비난하여 껍질을 둘러싼다고 여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남들이 욕하는 것보다 미리 자신이 이러한 사람이다, 라고 전제를 두고 들어간다면 논쟁에서 어떤 방식을 사용해도 크게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변태라고 스스로를 주장하는 사람과 과연 대화를 꼭 해야 되는가, 라는 의문이 꼬리를 연이어 생깁니다. 이미 타인이 할 비난을 본인이 스스로에게 하면서 두꺼운 껍질을 만들어 방어하시는 사람에게 굳이 논쟁을 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지요.

 

사실 저는 제 3자 입장이고, 굳이 따지자면 앞서도 밝혔다시피 한사람님에 더 가까운 입장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써내려온 위와 같은 이야기들을 모두 에이, 주관적이야, 라고 떠넘겨버리실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논쟁에 끼는 것을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서 (이전 커뮤니티가 이렇게 논쟁과 친목질로 더불어 멸망했던 모습을 지켜본지라...ㅜㅜ) 이번에도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했고, 될 수 있는대로 책에 관한 이야기만 쓰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좀 당황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이렇게 몇 자 끄적거렸습니다. 물론 적립금 논쟁에 있어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고 있다가 이번에 왜 끼어들었나? 라는 의문을 품으실 수도 있을 것이며, 페이퍼에서 한사람님을 끌어들여 이야기한다고 나서는 거냐, 라고 말씀을 하시는 분도 있으실지 모르기에 분명히 말씀드리면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적립금 논쟁에 있어서는 사실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아프락사스님의 글이 이미 나와있기에 굳이 제가 더 덧붙일 이유도 없거니와, 논쟁으로 인하여 커뮤니티가 패망[...] 하는 모습을 보았기때문에 나서기 싫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후에도 왠만한 일들이 벌어지더라도 여간하면 글을 굳이 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굳이 이렇게 몇 자 끄적거리는 이유는 '대화'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상대방과 논리를 나누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들이 갖추어져야 할까요?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저 또한 감정적인 이야기들보다는 논리를 더 좋아하는 사람입니다만, 그 논리가 발전적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분명 몇 가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몇 자 끄적거리는 것은 과연 이런 상태에서 발전적인 결론이 나올 것인가,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이 발전적인 대화를 위해서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는데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인가, 혹은 다른 것인가 라는 생각때문이지요. 대화를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한사람님의 글에 대해서 '악연'이나 '저주' 라고 말씀하셨던 것에 대해서 적절한 근거를 제시하시거나 혹은 서로 간에 쌓인 감정에 대해서 화해하려는 그런 몸짓이 먼저 선행되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시피 대화는, 특히나 빵가게재습격님이 원하는 논리적인, 그리고 발전적인 대화는 서로가 냉정한 상태에서 서로의 근거를 차분하게 검토할 수 있을때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빵가게재습격님께는 비판하는 글이 되어 죄송합니다. 그러나 대화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꼭 필요하며, 싫든 좋든 그 상대방에 대해서 배려를(감정적으로 안정적으로 만들든 어느 정도 논리를 인정하든) 해야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대해서 한 번 검토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는 저도 유의해야 할 부분이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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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4-19 20:48   좋아요 0 | URL
가연 님 말씀처럼,
'대화'를 하자면,
서로가 평등하고 평화로울 뿐 아니라,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마음을 주고받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이야기를
좋은 꿈을 담아 나눌 때에
알라딘서재이든 네이버블로그이든
또 진보이든 보수이든 이것이든 저것이든
서로 아름다운 길을 즐거이 찾는다고 생각해요.

가연 2012-04-19 21:02   좋아요 0 | URL
아, 된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저번에 아하하.. 폐를 끼쳤지요. 좋은 말씀감사합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ㅎ 저도 아직 모자라서ㅠ 잘 안되네요.

stella.K 2012-04-19 20:56   좋아요 0 | URL
공감이 안 가시면 그냥 모른 척 하시지 그러셨어요.
저도 가연님 관심없는데...
저는 그러거든요.
그냥 우연히 빵가게님 서재 들렸다 보게 되었습니다.

가연 2012-04-19 21:14   좋아요 0 | URL
그래서 한참 적립금 이야기로 달구어져 있을때는 모른 척을 했지요ㅠㅠ 아하하.. 그럼 지금와서 왜 언급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서두에 스텔라님과 한사람님의 글을 언급한 것은 거리를 떨어뜨림으로써 최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발악[..] 같은 거라고 해야 되려나요. 일단 글이 빵가게재습격님을 비판하는 쪽으로 흐르고 있으니깐.. 사실 이렇게 말씀하시면 더 할 말이ㅠㅠ 한사람님의 글은 자주 보니깐.. 트랙백 된 원문을 보게 되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모른 척 하라, 라는 말씀이 혹시 차라리 들르지 않았으면 되었던 것 아닌가, 라고 말씀하신 거라면 그건 좀 곤란했을 것 같네요. 그리고 저'도' 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스텔라님이 알라딘에 대해서 애정을 가지고 있으시다고 그때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죄송하지만.. 관심없다, 관심있다, 이렇게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네요.

2012-04-19 23: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20 07: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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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08: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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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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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02: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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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06:5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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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4: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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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7: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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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4: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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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0 1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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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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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만약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쳐서 우리의 두뇌를 일개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자네가 쓴 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 전혀 없다고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책은, 필요하다면 우리 스스로 쓸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그 분 생전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저 혼자만의 일방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지만, 우연히 고인의 무덤가에 찾아가본 적이 있습니다. 꼭 들러야겠다, 라고 찾아가본 것은 아니고, 사진을 찍으러 강화도 전등사에 들렀다가 고인의 장례식이 수목장으로 치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잠깐 들렀었지요. 시인의 마지막 시는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꼼꼼하게 적었던 4행시였고, 그 4행시의 마지막 행인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대로 시인은 전등사 어귀의 나무와 더불어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들렀던 때는 장례가 치러진 후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았던 때였기에 더욱더 저는 숙연한 기분에 휩싸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터벅터벅 전등사로 걸어온 저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인생무상’ 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 고인이 된 시인의 시 ‘프란츠 카프카’ 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오규원 시인의 시는 정말 특이합니다. 여러 학자들과 문학가들의 이름을 나열해두고 그들에게 가격을 매깁니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 와 함께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라는 이름이 붙은 커피를 마시지요. 사상가들은 비싼 가격(이라고 해도 1200원)이 붙어있었지만 여러 문학가들, 소설이나 시를 쓴 사람들은 싼 가격(800원)이 붙어있습니다. 아니, 카프카가 800원이라구? 전등사로 내려오면서 든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대체 왜 카프카를 800원으로 설정했는가, 였습니다. 사실 지금 와서는 별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야 할 주제는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 생각에 집착했었습니다. 문학가들이 폄하 받는 현실을 그린 것이다, 라는 해석에서부터 시인이 그냥 카프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 혹은 카프카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의지인건가, 등과 같은 해석에까지 말이지요.

 

  카프카라는 이름은 워낙 특이하기에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와 같은 작품을 보면서 저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자인을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의 뇌리에 바로 남도록 하기 위해서 저런 이름을 붙인 것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였지요. 이 카프카라는 이름은 ‘까마귀’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가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카프카의 이미지와 정말 잘 들어맞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왠지 혼자서 노는 것 같고, 왠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런 이미지 말입니다. 제가 읽은 그의 작품인 ‘변신’, ‘성’ 을 보면 정말 알 수 없는 불안과 뿌리 깊은 근원적인 고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들이 거의 다 미완이라는 점도 거들었지요. 그래서 제 속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는 항상 어딘가 도망치고, 불안해하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이 책 ‘카프카 평전’ 은 이런 카프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서입니다. 다른 평전들과 마찬가지로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서 말년에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고 있지만, 저자가 카프카를 서술하는 태도는 다른 평전들에 비하면 상당히 열정적입니다. 데리다 평전, 에서처럼 건조하지도 않고, 다윈 평전, 에서처럼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평전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책에 있어서는 저자의 카프카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가 매우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열정적이고 카프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습니다만 그의 애정은 모두 이유가 있으며, 책 내에서 자신이 카프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하나하나씩 논리를 펼쳐나가듯이 들고 있습니다. 근거가 있는 애정은 그 애정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저자가 그리는 책 속에서의 카프카는 어린 시절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그 마음의 상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도록 놓아두지는 않았던 사람입니다. 늘 자신보다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베풀고 친근하게 대했던 사람으로 그려지지요. 주변의 다른 작가들이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있을 때 혼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던 관찰자였으며 글 쓰는 것만이 그 자신의 구원이었던 세속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에 대해서 균형적인 시각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카프카는 스스로의 연애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고, 그로 인하여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모습을 편지와 서술을 통해서 가감 없이 밝히고 있지요. 그리고 카프카의 대표작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하여 그 내부에 주요 작품들의 서술배경과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장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런 장점들의 역할은 카프카의 모습을 좀 더 밝게 그려내어 독자들이 다가가기 쉽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쁜 연예인들이 드라마를 촬영할 때 그 연예인들의 얼굴 아래에 반사판을 대어서 더 화사하게 나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실물이 못생겨서 그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연예인들이 다리가 짧아서 포토샵으로 후보정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물론 예외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연예인들을 실제로 보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저런 책의 서술상의 장점들은 반사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프카 본인의 이야기는 저런 장점들과는 별개로 마치 무한한 심연을 쳐다보고 있듯이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아마 그 이유는 카프카의 생 자체가 우리 인간들이 번민하고 방황하는 그런 ‘실존’ 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인 헤르만은 매우 권위주의적이었고, 아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헤르만도 자신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비판에 쉽게 변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중산층으로나마 살아가려면, 독일과 체코 사이에 끼인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얕보여서는 안 되었다는 점 등을 내세울 수 있겠지요. 그런 헤르만의 눈에는 아들의 유약함이 유난히 돋보였을 거라는 것을 추측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 카프카에게는 그런 권위주의는 일종의 독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입기 시작한 상처는 김나지움을 거친 후, 이윽고 대학의 전공을 선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권위주의의 그림자만이 카프카를 괴롭힌 것은 아닙니다. 카프카의 생을 괴롭혔던 것은 어찌 보면 사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펠리스 바우어와는 2번이나 약혼하고 또 파혼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윽고 완전히 헤어져버렸고, 그 후에도 그의 사랑은 여정을 계속하여 율리 보리체크, 밀레나 폴락을 거쳐서 도라 디아만트를 마지막 종착역으로 삼습니다. 또한 건강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를 죽음에까지 몰아넣은 것은 결핵이었지요.

하지만 저 모든 어려움을 뒤로 하고, 카프카는 글을 써내려갑니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원고를 쓰는가 한편, 펠리스 바우어와의 사랑에 빠져있을때는 ‘실종자’ 나 ‘변신’ 과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깁니다. 그녀와 파혼했을때는 그 아픔을 극복하고 ‘소송’ 과 같은 작품을 남기지요. 그를 괴롭히던 모든 외재적인 상황들, 현실의 비통함은 그에게 투영되어지고, 그 투영된 상은 잘 갈무리되어 이윽고 글쓰기를 통하여 내부에 빛으로 집약됩니다. 실존을 인간 존재 개개인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정의한다면,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야말로 그 자신의 실존을 유지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외부에서부터 던져진 수많은 위기들을 극복해내고,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생생한 경험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오직 글쓰기뿐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는 앞서 조금 언급했었던 카프카의 연애에 있어서 우유부단한 면모와 같은 단점들에 대해서 면죄부를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으로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혼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고 오직 글쓰기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러한 시각을 통하여 면죄부뿐만 아니라 카프카가 그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있어주기에 행복하지만, 그 상대로서는 도저히 ‘글’로서의 카프카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그 상대에게 ‘글’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그 딜레마를 카프카 본인에 내재된 따뜻한 심성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윈 평전, 과 함께 이 카프카 평전, 을 함께 읽다보면 묘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결혼 부분이 대비가 되는데, 둘 다 결혼에 대해서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과연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했고 다윈은 과연 결혼 후에도 이렇게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지요. 그런데 이후의 대처는 완전히 다릅니다. 찰스는 정말 그답게도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열거해서는 끝내 결혼을 하자고 결론을 내리고는 그 후에는 그대로 그 결정을 밀고 나갑니다. 그런데 카프카는 다가설 듯 하다가도 다시금 뒤로 물러서고, 그랬다가도 다시금 상대방에게 한 발 내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말이지요. 아마 카프카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사랑과 안정성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글쓰기의 문제가 대립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카프카는 다윈처럼 저렇게 단칼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요? 장단점을 따져서 뭐가 더 중요한지를 깨달았으면 쉽게 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해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글쓰기였지만, 그렇다고 사랑과 결혼에서 부여되는 안정감 등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누구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카프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 자신’ 이기에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 자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면 남자가 왜 필요하고 여자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야말로 독생자라거나 제 1원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와 같은 실존적 불안을 떠안은 인간이었기에,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줄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전생애를 걸쳐서 어떻게든지 ‘그 자신’ 으로서의 글쓰기와 결혼을 조화시키려 했었고, 그렇기에 저렇게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앞서도 말했다시피 ‘글’ 로서의 자신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프카가 상대방들과 편지 교환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막상 만나면 수줍어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수줍음을 상대방들이 어색해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따뜻한 육체를 가진 존재를 앞에 두고는, 그 존재보다도 그 존재의 ‘글쓰기’ 를 바라보아달라니, 상대방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인데 말이지요. 그러면 똑같이 ‘글쓰기’ 가 존재 자체인 상대를 만나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카프카는 자신과 똑같은 상대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으며, 어쩌면 설령 그런 상대를 만나면 고독함이 두 배로 늘어날 뿐 전혀 행복하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카프카는 다윈과 달리 실존적인 고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운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정신분석을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분석가의 남는 시간에 잠깐 받은 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첫 면담(이자 마지막 면담이었기에)이라서 저 또한 방어기제 때문에 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거의 털어놓지 않아서 그다지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닐 것 같지만, 분석가가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가 제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일도 마치 제 3자의 일처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고 말이지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감정이 개입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말에 동의를 했었습니다. 감정이 개입되면 상대방을 바르게 보기가 힘들고 설령 상대가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분석가는 제가 ‘두려움’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감정들이 두렵기 때문에 감정에 휩쓸릴까봐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지요. 우습게도 그때 떠오른 생각도 바로 카프카의 생각이었습니다. 카프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라고. 내가 지금 안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계층적 불안들을 그저 두려움, 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냐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카프카의 ‘성’ 을 읽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내 마음을 오직 카프카만이 이해해줄 수 있다고 여긴 것 처럼 말이지요.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지, 와 같은 문제에서부터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안 들은 더 커졌으면 더 커졌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지요. 그리고 여전히 카프카를 꺼내 읽고 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에 생존 당시에는 그리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든 실존적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 나의 불안을 함께 하고 있구나, 내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커졌던 불안을 들어서 잠깐 옆에다가 놓아둡니다. 이 때 카프카의 글은 불안을 가지고 있던 ‘나’ 의 의식과 융합되어 이윽고 내가 카프카가 되기도 하고, 카프카가 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도,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지기를 원하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한아름씩 안고 살아갑니다. 등 뒤에 매달린 문제들은 사소한 것에서 부터 이번 선거 결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런 고통들이 과연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이 불안이 과연 모두 해소될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겠지요. 하지만 비록 이런 불안들은 카프카가 그의 소설들을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긴 것처럼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결국 제자리에 돌아오겠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이런 불안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지요. 그러니깐 적어도 그를 읽는 순간은, 그의 글들과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좋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 카프카 평전, 은 그런 카프카에 대한 사랑고백이며, 이 글은 그런 카프카를 좋아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글은 여러분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카프카를 좋아하세요? 혹은 나를, 좋아하세요?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지. 책이란 우리 마음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p. s. 회색 부분은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에서 인용.

        (불안과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카프카같은) 나를, (혹은 여러분을) 좋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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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3-08-17 01:07   좋아요 0 | URL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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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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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이 시가 있는 시집이 《한 잎의 여자》라고 하더군요 저한테 오규원 시인 시집이 한권 정도는 있겠지 했는데 없었습니다 시집을 한번 읽어본 것 같기도 한데... 도서관에서 빌려다 봤던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시집 조금 빌려다 본 적 있거든요


카프카 평전 옆에 쓰여 있는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라는 말 좋네요
읽어보고 싶어지는 마음... 도서관에 있나 찾아보니 있더군요
어떤 것은 없기도 했는데, 다 없는 것은 아니군요

편지쓰기에 대한 부분, 저와 비슷해요 저도 그렇거든요
중학교 때 처음으로 편지를 나눈 친구가 있는데, 편지로는 말을 잘해도
가까이 있으면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 친구는 그런 저를 어떻게 생각했을지...
만나지 말고 편지를 쓰면 안 될까 하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지금은 만날 수 있는 사람도 없군요)
예전에는 친구가 한번 보자고 했는데 바로 말 안 했더니 뭐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그 친구는 꽤 오랫동안 알고 지냈는데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는 덜했던 것 같은데 갈수록 사람을 피하는군요

이런 말 조금 우습기는 하지만 카프카는 카프카를 좋아해준 사람이 있었네요
부럽군요 저는...
아직 카프카 소설 한권도 안 읽어봤는데, 관심이 가는군요 언젠가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가장 처음 보면 좋을까요


희선

가연 2013-08-28 00:15   좋아요 0 | URL
ㅎㅎ 맞아요, 안그래도 댓글로 달아둔다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만 했는데. 그리고 시집도 한 잎의 여자, 맞아요. 잊을 수 없는 시집..이지요, 쿡.

글이 더 편한 사람도 분명 있을 겁니다. 카프카 소설은.. 저도 잘 몰라서...ㅎㅎㅎ 아마 변신, 과 같은 분량의 글부터 먼저 보시는게 좋을 듯 하네요. 그러다 이제 조금씩 본격적 소설로...
 

 

 

 

으아.. 이제 한 숨 돌리고 끄적거리네요, 풋.

 

 

 

너의 목소리가 들려.

워낙 이야기도 많이 들었구, 이상문학상도 탔겠다, 기대가 상당히 큰 책이었는데 다 읽은 후 보니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책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단순히 재미있다, 또 읽고 싶다 등의 그런 소설이 아니더군요. 읽으면서 당황스러웠던 것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다고 여기지도 않았는데 이 책을 잡고는 도저히 놓지 못하고 거의 30분만에 다 읽어내려갔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한 번 잡으면 도저히 놓을 수 없는 그런 이상한(정말 이상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힘이 이 소설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볼 수 밖에 없었고, 그 이상한 힘은.. 비유하자면, 가파른 벼랑에서 자전거를 타고, 핸들을 놓고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는 그런 힘처럼 느껴졌습니다. 너무 무서운데도 눈을 감지 못하는 그런.. 하지만 그런 감정은 놀이공원의 어트랙션 기구들로부터 느낄 수 있는 스릴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놀이공원의 어트랙션을 타고 스릴을 느끼지만, 결국엔 우리가 '살아서' 지상을 다시 밟을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떠한 안전장치도 없이 '죽음'을 그대로 맞닥뜨리게 만듭니다. 아마 그 묘한.. 위험을 마주보는 그런 경험이 이 책을 끝까지 읽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그런 묘한 '힘'을 소설에 구현해내기 위해서 작가가 희생한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제이와 동규이고, 그들은 소위 말하는 거리의 아이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제이가 주인공이겠지요. 소설은 동규의 눈을 빌려, 제이의 행적을 함께 밟아나갑니다. 소설 말미에서는 우리가 '동규의 눈' 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 동규로부터 제이의 이야기를 들은 '소설가의 눈'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실존하는 이 책을 쓴 '김영하'와 소설 속의 '소설가' 의 경계를 무너뜨리게 되며, 이는 어떤 뉴스나 매체보다도 더 이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혹은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확신시켜주는 장치로 작용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동규'의 눈을 빌려 쫓아왔던 '제이'의 성장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그 서사가 실제로는 '소설가'까지 거쳐서 들려온다는 점을 독자에게 일깨워주어, 제이의 작중 행동들(마치 거리의 아이들의 교주처럼 행동했던)이 그저 기벽에 지나지 않는다는 대화를 걸어오게 만듭니다. 즉, 작중에서 이 이야기(제이와 동규의 이야기)를 쓴 소설가로 인하여 현실의 소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는 현실성을 획득하면서도 동시에 자기를 부정하는 결말을 맞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이지요. 어쩌면 그런 자기 파괴적인 부분은, 희생한 부분이 아니라 이 책을 놓지 못하게 만드는 힘의 구성 요소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어쨌든 무슨 말을 덧붙이든지 이 책은 (적어도 저에게는) 재미있지는 않지만, 한 번 잡으면 놓을 수 없는 힘을 가진 것은 분명합니다. 이런 책에게 기대를 만족시켰다, 기대보다 못하다, 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요. 그런 부류의 이야기를 할 책이 아닌 것 같으니깐요. 그저 고개를 갸웃거리는 수 밖에, 하하. 하나만 더, 김영하작가는 요즘 '작가' 이야기를 쓰는데 재미가 붙은 모양입니다. 혹은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소재를 택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스노우맨.

두꺼운 책이긴 합니다만, 읽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성적인 묘사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크흠) 어쨌든 책에 집중하는데는 크게 무리가 없었고, 읽는 재미도 그럭저럭 있었습니다. 네.. 그럭저럭 있었습니다. 사실 요즘 추리 소설의 경향은 탐정 대 범인이 아니라 독자 대 범인이 되는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고 저는 여기고 있습니다. 독자를 직접 책에다가 끌여들여서 머리를 쓰게 만드는 거지요. 그렇게 만들면 책의 내용이 어떻든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데는 최고일테니깐요. 독자는 자신 나름대로 열심히 머리를 굴려가면서 탐정못지않게 추리합니다. 그러다가 독자의 뒤통수를 한 대 갈기고 싶으면 서술트릭을 묘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면 독자는 한 대 맞고 와우 이 책 대단한데, 라고 여기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서술트릭 등을 배제하고 완고하게 탐정 대 범인의 구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탐정이 아니라 경찰 해리 홀레겠지만요. 그래서 신선하다고까지 여겼습니다만, 한편으로는 중반 이후로는 흥미를 잃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중반이 되자 범인이 누구인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들 독자는 소설 안의 '해리 홀레'가 보지 못하는 부분까지 소설을 쓴 작가의 문체나 서술 방식 등으로 쉽게 '볼 수 있'으니깐요. 저자는 안간힘을 다해서 소설 내용의 흐름을 작중의 실제 범인으로부터 멀리 떨어뜨려놓으려고 합니다만 도리어 그 부분이 독자에게 어색하게 다가온다는 점을 생각했어야만 하지 않을까요. 뭐, 사실 개인적으로 범인을 확신하게 된 것은 수많은 다른 추리소설에서는 탐정이 숱하게 물어봤지만.. 이상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다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는 '어떤 것' 때문이었지만요.

 

 

 

어나더.

그런 의미에서 이 어나더, 는 철저하게 독자 대 범인 (이 책에서는 범인도 아니지만..) 의 구도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는 범인이라고 부를 만한 존재는 나오지 않습니다만 독자가 추리해내어야 할 대상은 존재하지요. 이 책의 장르를 분류하자면 호러미스테리 소설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추리할 대상만 있는게 아니라 귀신도 나옵니다. 이야기의 전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의 어느 중학교 3학년에는 학급이 세 개가 있는데, 3학년 3반이 저주 비슷한 것을 받아서 (소설에서는 죽음과 가까이 있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합니다만) 매년 귀신이 반에 함께 지내게 되고, 귀신이 그렇게 있는 1년 동안은 매달 한 명 이상이 죽어나가게 됩니다. 죽는 방식은 별의 별 방식으로 다 죽어나갑니다. 심지어 그 맞기 어려운 벼락을 맞아 죽은 학생도 있으니 말이지요. 그러나 귀신이 무슨 악의가 있어서 아이들을 죽이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웃긴 것은 그 귀신도 자신이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냥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공포에 떨면서 1년을 보낸다는 것이지요.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과 흡사합니다. 단순히 죽기 때문에, 혹은 잔인하게 죽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죽기로 예정된 사람은 죽음에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정말로 무서운 것이지요. 이는 심지어 보고 있는 독자들의 간담마저도 서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과유불급이라고 했던가요, 이번에는 앞서 스노우맨, 과는 달리 너무 독자들과 죽은 자, 의 구도로 맞추었기에 곰곰히 생각해보면 앞뒤가 안맞고 이해도 안되는 내용이 생기고 말았지요. 무엇보다도 주인공들의 모습은 아무리 중학교 3학년 학생이라지만 그다지 공감이 와닿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특히 결말은.. 고대 희극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깐 어떤 작품성으로는 부족한 소설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오락성은 뛰어나다고 봅니다. 읽는 중에는 이런 저런 단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수난.

저는 무슨 종교든 믿을 생각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어느 종교든 다 배척하면서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은 곧 책에서 특정 종교의 색이 강하다고 해서 그만읽는다거나 처음부터 바라보지도 않는다거나 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조금의 거부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솔직한 심정입니다. 사실 이 수난, 이라는 책의 원제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Christ, recrucified' 입니다. 그래서 읽을까, 말까 고민을 했는데 저자를 보니깐.. 그 유명한 그리스인 조르바, 의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였더군요. 어쩌면 저 recrucified가 너무 종교색이 강해서 수난, 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고, 더 엄밀히 원제를 쓰자면 'The greek passion : Christ, recrucified' 라서 수난, 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괜찮은 제목으로 여겨집니다. 만약 이전에 번역된 (지금은 절판된) 책처럼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다, 라고 적혀있었다면, 분명 좀 더 고민의 시간이 길어졌을테니깐요. 터키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의 어느 지방에 '수난곡' 을 7년마다 재연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예수가 어떻게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십자가에 매달렸는가, 를  재연하는 행사라고 합니다. 이 행사를 위해서 마을의 장로들은 예수, 요한, 베드로, 야곱, 막달라 마리아, 유다를 각각 선정합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정말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이 배역에 있습니다. 이전에 '우상의 눈물' 이라는 책을 소개한 적이 있었지요. 설령 악인이라도 사회가 강제적으로 어떤 역할을 부여하면 별 수 없이 그 역할에 따르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며 살게 된다, 라는 말이 아주 그르지는 않다는 이야기이지요. 장로들이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서, 혹은 별 생각없이 정한 배역은 그 배역을 맡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게 되고, 점차적으로 예수역의 마놀리오스와 유다역의 파나요타로스는 대립을 하게 되지요. 사실 제 개인적으로는 맘에 들었던 말은 마을의 터키 지배자 아그하의 말이었습니다. '당신네 예수와 우리네 알라가 술을 이렇게 한 잔씩 주고 받는다면 전쟁같은 것은 없을 텐데' 정말 그렇지 않을까요? 카라마조프가네 형제들, 의 대심문관 부분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p.s. 이 글을 쓰면서 위로가 되어준 에미넴 Stan (feat. 엘튼 존) 에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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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9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9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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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글을 쓸까, 하다가 결국 이 책을 골라서 끄적거리게 된다.

그러니깐 리뷰의 형식을 빌린 잡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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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요즘 본 애니메이션은 우주인이 나오는 애니메이션인데, 이 내용이 아주 기가 막힌다. 일단 여자주인공은 우주인이다. 이 여자주인공을 좋아하는 남자주인공이 있고, 남자주인공을 좋아하는 여자사람친구 1이 있다. 이번에는 이 여자사람친구의 소꿉친구인 남자사람친구가 있는데, 골때리는게 이 남자사람친구는 저 여자사람친구를 좋아하는거야. 소꿉친구였다가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되버린거지.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저 남자사람친구를 좋아하는 여자사람친구 2가 있다. 이 다섯 명에 부수적으로 여자주인공의 친구가 주인공 커플의 일종의 사랑에 메신저 역할을 한다. 뭐, 이를테면 오각관계라는 거다. 삼각관계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데 오각관계라니. 뭐, 사실 지금 나의 심정으로는 저런 오각관계에 한 번 빠져봤으면,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현실에는 저런 일 없지 않을까?

 

그런데 얼핏 보면 우리나라의 막장드라마의 뺨을 때릴만한 내용이지만, 그 중에도 정말 감명을 받게 만드는 장면이 있었다. 막장드라마는 계속 보면 정든다고 하던가, 하지만 그런 정드는 게 아니라 정말 가슴을 꽝 치는 것 처럼, 마음이 넘쳐흐르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설명하기 전에 잠깐 배경설명을 하자면, 여자주인공은 우주인이니깐 결국에는 다시 우주로 돌아가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남자주인공의 사랑을 거의 마지막까지 모른 척 하고 있었던 거지. 같이 우주로 가면 안되냐, 싶겠지만 애니메이션 설정 상으로 지구는 아직 개발 레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지 못해서 원래 접촉하면 안되는 곳이라던가, 어쨌든 그런 복잡한 사정으로 우주로도 못나가고 말이지. 어쨌든 그래서 계속 모른 척 하고 있던 여자주인공에게 여자사람친구 1이 도저히 못참고 결국 말해버린거야. 도대체 왜 자꾸 남자주인공의 마음을 모른 척 하냐구. 당신도 그를 사랑하면서.. 서로 사랑하면서,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만큼 멋진 일이 어디있겠냐면서. 그렇게 한참을 화를 내는 여자사람친구 1에게 여자주인공은 머뭇거리며 언젠가 자신은 떠나야 할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려는 찰나에.

 

"어쩔 수 있어"

 

"좋아한다고 말하면 돼."

 

"내가 아무리 원해도 손에 닿지 않는 일이 바로 앞에 있는데."

 

이렇게 여자사람친구1이 삼연타를 날린다. 그때서야 마음을 다잡은 여자주인공은 남자주인공을 찾아가서는 마주선 채로 쳐다보다가 남자주인공의 어깨에 허물어지듯 조용히 머리를 기대며 이렇게 말하는 거야.

 

"우주인이라도 괜찮나요?"

 

"나 같은 것이라도 괜찮나요?"

 

"고백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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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전반을 관통하는 이야기는 '나 같은 것이라도 괜찮나요' 다. 간단히 말하면 사랑이야기일 이 책은, 못생긴 여자와의 사랑으로 그 독특성을 드러낸다. 한창 젊을 때, 눈에 보이는 것만이 다라고 여겨질 때에는 못생긴 여자와, 혹은 못생긴 남자와 사귄다는 것은 정말 힘든일이겠지만, 이런 책에서는 그게 가능하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녀의 '못생김'이 책으로만 읽으면 잘 안와닿기 때문이겠지. 물론 그 '못생김'은 책 표지의 시녀의 그림으로 형상화된다. 책을 읽는 내내 저 못생긴 시녀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한다면 흥미로운 독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뭐, 나같은 경우에는 그렇게 한 번 읽으려다가 도저히 못하겠더라구. 적어도 상상만이라도 좀 예쁘고 김태희같은.. 그런 이미지를 그리게 되더라니깐. 뭐, 아무리 문맥에서 못생겼다고 하더라도 그냥 내 상상속에서는 괜스레 주인공들을 예쁘게 그려내게 되더라고 말이지. 나도 외모지상주의의 가해자인가, 라고 자문해보면 그건 또 아닌거 같다. 난 현실에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착한 마음씨가 가장 좋으리라는 것도 안다. 다만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애인은 안생겨요. 착한 아가씨들은 '남자'같은 사람을 또 찾더라고, 풋. 헉, 이야기가 다른데로 새어버렸지만, 어쨌든 나 자신도 한번에 다른 사람의 시선을 휘어잡을만큼 그리 외모가 뛰어난 편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니 그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한 편이다. 하지만 말야, 적어도 요런 책들에서만은 이상을 꿈꾸게 되는게 이상한 걸까?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그렇게 이미지를 덧씌우고 있으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나 같은 것이라도 괜찮나요' 를 전혀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아니, 그 정도 예쁘고 (내 상상속의 이미지를 덧씌운다면) 착하면 나로선 땡큐지!

 

사실 다시 생각해보면 이 책은 흔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람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 그리고 이별하는 것. 그런 건 외모가 어떻든 있을 수 있는 이야기일테니까. 그런데 굳이 이 파반느 위를 흐르는 사랑이야기가 특별할 수 있다면 끝끝내 말해지지 못한 자격지심, 그것때문이 아닐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격지심을 느끼고 스스로가 조그만하게 되는 경험은 누구나 느껴보았을 것이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만큼 자신은 이상하게 왜소하게 느껴지고, 그 왜소함을 감추기 위해서 위악을 부리기도 하고 과정과 허세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눈에는 자신의 허세가 낱낱이 보일 것 같아서, 혹시나 그 사람이 눈치 챌까, 싶으면 짜증과 화로 덮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스스로가 외모에 자신감이 없을때는 더 그런 일을 겪게 된다. 상대방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었을텐데..? 왜 나를 택했지? 그러다보면 합리화할만한 이유를 찾게 되고, 그 이유는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이윽고 불안에 빠지게 된다. 정말로, 정말로 나같은 사람이라도 괜찮나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의 마지막은 사실 정말 당황스럽게 끝난다. 작가의 장치겠지만, 마지막의 디렉터스 컷, 을 읽느냐 읽지 않느냐에 따라 엔딩이 분기가 되는 거야. 읽은 사람들 중에는 작가를 칭찬하는 사람도 있을테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텐데, 그 이유는 마지막 디렉터스 컷에서는 본편의 결말을 바로 부정해버리거든. 나는 비난하는 사람 쪽이다. 본편에서 그 많은 고생을 거쳐서 이제서야 '나라도 괜찮냐' 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려고 하는데 그걸 이런 식으로 마무리하다니. 물론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결말을 여기다가 끄적거리는 일은 삼가겠지만, 나로서는 비난이 스멀스멀 올라오려는 것을 겨우 꾹 눌러참았다. 하지만 한결 마음을 가라앉히고 보면 왜 그렇게 마무리했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실 그게 삶이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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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애니의 여주인공은 사실 예쁘고 스타일도 좋다. 남주인공은 그에 비하면 우엉에 비실비실거리는 녀석이다. 위급할때 정말로 도움이 되는 사람은 여주인공이다. 이런 관계는 마치 은하철도 999의 메텔과 철이와 살짝 비슷하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나같은 사람이라도 괜찮나요' 라는 질문은 여주인공이 아니라 남주인공이 말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데 사실은 외모만 연인들에게 서로 자격지심을 부여하는 조건은 아니다. 외모에 자신감이 없다면 그렇게 느낄 가능성은 더 커지겠지만, 설령 아무리 완벽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녀라도 서로에 대해서 부족함을 아예 안느낄 수는 없을 것이다. 남들이 볼때는 정말 괜찮아보이는데 서로는 서로에 대해서 항상 모자란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되는 것이지. 물론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한, 서로가 서로의 장식품이 되는 그런 관계라면 또 모르겠지만 정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결국에는 부족함을 깨닫고 더 나은 관계를 갈구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석하면 저 애니의 여주인공이 저렇게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박민규의 소설에서의 여주인공의 외모를 외모로만 해석하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부족함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금술에서는 남녀추니를 완전성의 상징으로 보던가? 남자와 여자는 원래 한몸이었다고 플라톤이 밝혔던가? 아무리 다가가도 우리는 한 몸이 될 수 없다. 아무리 포옹을 하더라도 너와 나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다. 나는 네가 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너를 사랑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너에게 내가 부족함을 느낀다. 내가 너라면 부족함도 넘침도 느낄 일이 없을텐데.

 

그런데 그런 나라도 괜찮나요?

 

대답은 예, 다. 애니든 소설이든..... 그리고 현실이든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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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4-04 11:37   좋아요 0 | URL
저는 말이죠, 가연님. 철저한 외모지상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나의 사랑을 받으려면 기본적으로 외모가 받쳐줘야지, 라고 생각을 했던거에요. 그런데 제가 사랑했던 남자들 중에는 딱히 잘 생긴 남자들이 없었어요...는 아니고 있기는 했구나. 그렇지만 그는 나를 사랑하지 않았죠..........라는 얘기는 하지 말걸 그랬나. 어쨌든,

처음 만났을 때는 우앗, 이렇게 못생겼다니, 라고 생각하고 남자로 느껴지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저는 어느틈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더란 말이죠. 만남이 반복되면서 그의 못생긴 외모따위는 사실 눈에 띄지 않더라구요. 못생겨도 괜찮아, 가 아니라 못생겼다는 인식 자체를 못하게 되는거에요. 내 눈에 익어서 그런건가, 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데, 그러니까 적어도 제가 한 남자를 사랑하는데 그의 외모는 방해요소가 되지는 않더란 말이죠. 실제로 그들 중 한 명은 볼 때마다 '우앗 지난번보다 더 못생겨졌네' 라는 생각이 들던 남자도 있었어요. 그것도 처음 몇 번만 그렇지, 나중엔 그 얼굴이 가장 보고싶은 얼굴이 되더라구요.


아우..근데...오늘은 이상하게 자꾸만 자꾸만 남자 생각해요. 내가 떠난 남자 나를 떠난 남자 미처 맺어지지 못한 남자 기타 등등........봄이...올라고 해서 그런가봐요. 하아-

가연 2012-04-05 01:27   좋아요 0 | URL
ㅋㅋ 누구나 사실 외모를 보기는 보죠, 첫 대면에 외모를 안 볼 수는 없으니.. 그런데 어느 웹툰에서 봤는데, 이런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모두 자신의 여자친구라던가 남자친구가 이왕이면 잘생기거나 이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구, 이왕이면 성격도 착하고, 돈도 많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사랑에 한 번 빠지게 되면 그런 모든 조건들이 다 상관없다, 고 여겨지게 된대요. 그러다보면 저번 보다 더 못생겨졌네! 라고 생각이 들던 남자도 어느 순간 가장 보고 싶은 얼굴이 되어버리구.. 그런 거 아닐까요?? ㅎㅎ 웹툰이 출처라서 좀 신빙성이 안간다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그나저나 '우앗 지난번보다 더 못생겨졌네' 라는 문장을 보고 풉, 하고 웃음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아, 정말 리얼한 심정 표현이신데요, 하하. 솔직히는 저 문장을 보고 괜스레 마음 한 편이 좀 찔려오는 것 같지만 무시하렵니다, 풋

희선 2013-08-03 00:10   좋아요 0 | URL
읽은 지 오래돼서 마지막이 어땠더라 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을 봤을 때는 조금이라도 써두어서 그것을 찾아서 봤습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써두지 않았더군요 잘됐다는 말은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어떤 사람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했는데, 그것도 있었고... 저도 못생긴 사람을 상상할 수 없다고 써두었더군요 책으로 읽으면 그냥 사랑이야기네가 되는 거죠 못생겼다는 기준은 뭔데, 하는 말도 있고...

처음에 봤을 때 얼굴이 별로여도 자주 보다 보면 그게 그렇게 안 보이게 되겠죠 이것은 당연한 말이군요 좋아하게 되면 그것보다는 다른 것을 볼 테니까

사람은 얼굴이 아니더라도 자신한테 모자란 점이 있으면 '이런 나라도 괜찮나요' 하겠군요 이런 생각은 누구나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는 애니메이션이나 소설에서는 '네' 라 해도 현실에서는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귀기는 해도 그다음은 알 수 없다는 거죠 그리고 사귈 때는 저런 말도 필요없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그 뒤는 상관없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군요


희선

가연 2013-08-05 13: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현실에서는 정말정말정말 어려울겁니다. 소설에서는 아무리 봐도 못생긴 사람을 상상할수가 없었습니다. 못생겼다는 기준은 뭔데...... 옳은 말이십니다. 기준이 뭔데......
 

 

 

 

25시.

다른 거의 대부분의 25시에 관한 글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쓰는 이 글도 25시의 의미에서부터 시작한다. 25시는 구세주가 왕림해도 구할 수 없는, 24시간 이후의 시간이다. 24시간까지는 빛이 있으라, 라고 외쳐서 세상을 창조한 신의 시간이라면, 그 최후의 최후까지 다다른 후에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은 절망과 적막의 시간 뿐이다. 저자 게오르규는 25시에 다다른 세상의 모습을 성경의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을 열거하듯 주인공을 내세워 그려나간다. 2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루마니아인인 주인공은 주인공의 아내를 탐낸 군대의 소장때문에 실제로는 유대인이 아닌데도 유대인이라고 규정지어져 강제 노동에 동원되게 되고, 그 후에 간신히 루마니아인의 신분을 회복했나 싶더니 이번에는 루마니아인이기때문에 수용소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공이 작중에서 보여주는 모습은 순박하다기보다는 멍청하며, 날래기보다는 둔하며, 현명하다기보다는 어리석다. 그저 주인공이 내세울 점은 순수하다는 점인데, 이미 현대에 이르러 순수하다는 말은 바보같다는 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하지만 이미 소돔과 고모라의 주민이 되어버린 우리가 어떻게 그가, 주인공인 요한 모리츠가, 멍청하다고 규정지을 수 있겠는가?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서양의 철학은 데이비드 흄에 의해서 그 극한까지 이르렀다가 칸트가 범주를 내세워 다시 반석 위로 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범주를 이용하는 방법이 인간들을 분류하는데 쓰이게 되기 시작하자 인간들은 그 자신들의 이성보다도 더 소중한 생명을 잃기 시작했다. 게오르규는 개개인의 특성을 무시하고 범주로, 사회적 관계로 사람들을 규정짓는 서양의 제도에 대해서 이렇게 진단한다 - 이대로 가다가는 문명때문에 인간은 절멸할 것이라고. 잠수함에서는 흰 토끼를 기른다고 한다. 잠수함이 위험심도에 이르면 흰 토끼가 산소부족으로 먼저 죽기 때문이라던가. 그런데 흰 토끼가 죽을 때가 되면 벌써 늦은 것이다. 우리 주변의 흰 토끼는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가?

 

 

 

독일인의 사랑.

정말 상투적이라는 말밖에 더 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읽어볼만한 책이다. 사실 저번에 은희경의 책에 대해서 끄적거리면서 '나왔을 당시에는 상투적이지 않았겠지' 라고 말끝을 흐린적이 있었는데, 분명 이 책도 나왔을 당시에는 상투적이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지금의 눈으로 볼때는 신분격차가 나는 두 남녀 사이의 사랑, 게다가 여자는 병약한 몸이라는 전개는 정말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게다가 결말까지.. 쉽게 예측할 수 있는 바로 그 결말 맞다. (아닌가?) 하지만 다른 부분은 다 그냥 접어둔다고 하더라도 이런 사랑은 좀 부럽다. 책에서 남자주인공은 이렇게 독백한다. 나는 그녀의 연인이라도 좋고, 그녀의 오빠라도 좋으며, 그녀의 아버지라도 좋다. 그 어떤 것이든 나는 그녀의 '무엇'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무엇'이 무엇인지 강제한다, 라고. 기억에 의존해서 쓰다보니 좀 달라졌을까? 하지만 저 마음이 나를 가슴아프게 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구입은 옛날에 했는데 이제 다 읽었다. 읽고 나서 소감은.. 제일 마지막에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개관, 이라는 부분만 읽으면 로마 제국이 왜 망했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 같다는 것 정도. 그렇게 여기고 나니깐 앞에 힘들여 읽은게 괜히 아쉬..워 졌달까. 물론 읽고 나니 개운하기도 하고, 기번이 글을 정말 잘 써서 읽기가 편했지만 (축약본인데도 말이지) 정말 급하게 로마 제국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마지막 장의 서로마 제국의 멸망의 개관만 읽어도 될 것 같다.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 이 책에서 다루고 있지 않은 것은 나로서는 딱히 아쉬울 것은 없었다. 사실 내 안에서의 로마에 대한 이미지도 거의 서로마제국 중심이라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야기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그 아내 테오도라의 이야기 정도, 그리고 불가르족의 손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니케포루스 황제 정도가 내가 기억하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역시 돈이 있다면.. 원본을 사서 읽는게 좋겠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해서,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읽었던 부분은 로마의 최전성기였던, 그리고 로마의 쇠망이 시작된 오현제 시대.

 

 

 

다산선생 지식 경영법.

정말 별의 별 책을 다 주워읽는 본인이지만, 그런 본인에게도 잘 안 읽는 부류의 책이 있으니 바로 자기계발서 부류다. 이는 절대 자기계발서 부류의 책이 다른 부류의 책에 비하여 뒤떨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본인의 취향에 맞지 않기 때문이겠지. 나는 그다지 책에 취향을 타는 사람은 아니고 여성잡지나 남성잡지에 만화책도 들여다보지만, 이상하게도 자기계발서들은 읽으면 자꾸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서 어느 순간부터 잘 읽지 않게 되더라. 이 책도 살짝 자기계발서 느낌을 풍기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은 별다른 거부감없이 계속 읽어나갈 수 있었다. 역사와 자기계발을 절묘하게 잘 섞은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정리해놓은 지식 경영법들을 보면, 당장 수업들으면서 사용할 수 있을 것 처럼 보인다. (나로서는 직접 시행해본적 없기에 정말 수업에 효과가 있을 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논문을 써야 할 일이 있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게 좋을 듯.

 

 

 

여덟 마리 새끼 돼지.

어느 서점에서 이 책을 에세이부분에 분류해놓은 바람에 찾기가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난 당연히 과학분야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뭐, 어쨌든 이 책을 끝까지 읽지는 못했고 앞부분을 좀 읽어봤는데 와우.. 역시 스티븐 제이 굴드다,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재미있는 글을 쓴다. 전혀 생물에 관심을 두지 않은 사람이라도 별 생각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그러면서도 그 내용은 간단한 내용이 아닌 그런 글이랄까. 그러고보면 스티븐 제이 굴드는 본문에서 본인을 에세이스트로 자처하는데, 이를 보면 에세이에 분류해놓은것이 잘못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가 가는 것은 인간 본성에 관하여 기술한 5장인데, 굴드의 다른 책들과 함께 읽으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요사이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이 몇 권 더 눈에 띄는데, '시간의 화살~' 이라는 제목을 가진 책도 출간되어있던데,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개념어 사전.

 최근에 많은 개념어 사전이 출간된 듯 한데, 다른 책들은 잘 모르겠지만 이 책을 조금 읽어본 결과, 개념어들을 이렇게 정리해서 책으로 내는 것도 분명 독서에 도움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사실 이런 책의 원류가 있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에 실린 '철학 용어 사전'일 것이다. 형이상학 5부에 실려있던가. 그런데 형이상학에 실린 철학 용어 사전은 철학 용어 사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논지를 펴기 위해서 개념들을 미리 정의하겠다는 성격이 강하다고 보이나 (그 후에 여러 후학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지를 따라가려고 노력했다는 점은 접어두고서라도) 이 책은 정말 개념어들의 풀이에 충실하기에 하나의 표지판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어보인다. 그리고 여러 철학자들의 저서에서 그 개념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도 예도 들고 있고 말이지.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막스 쉘러라던가, 독일 철학자인데, 그의 신앙심은 대단했지만 그의 사생활은 그렇지 않았다고 하더라구. 그래서 쉘러와 동시대에 살던 신앙심 깊은 어느 주교가 쉘러에게 이르길 '당신은 그렇게 많은 젊은이들을 하나님의 품에 인도해놓고는 왜 스스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가?' 라고 질문한거야. 그러자 쉘러의 대답이 걸작이었다지. '목적지까지 같이 가는 길안내인을 봤냐?' 이 책도 마찬가지다. 목적지까지 같이 가는 표지판은 없다. 

 

 

 

p. s. 게오르규의 '25시에서 영원까지' 도 읽는 재미가 있지요.

       '25시에서 영원한 시간에 이르기까지'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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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3-27 13:33   좋아요 0 | URL
앗 오늘 책들은 제가 흥미를 갖지 않는 부류의 책들이네요. [독일인의 사랑]은 저 아직 안읽어봤는데, 읽어봐야 겠어요. 읽어보지 않은채로 대체 독일인의 사랑은 어떤 내용일까, 하고 궁금해만 했거든요. 언급하신 부분중에 나는 그녀의 무엇이 되든 좋다, 하는 부분을 책에서 어떻게 표현했는지 궁금해요. 읽고나면 가슴이 아플지 애틋할지 아니면 고개를 젓게 될지, 그것도 궁금하구요.

가연 2012-03-28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다락방님의 페이퍼들을 잠깐 살펴보았는데, 그러고보면 여기다가 끄적거려놓은 책들이 다락방님께는 조금 구미가 당기지 않는 부류의 책들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렇게 댓글을 달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ㅎ 사실 제가 힘주어 추천하고 싶은 책은 25시라서, 젤 첨으로 올려놓았는데, 독일인의 사랑이 더 인기가 많다니, 하하하. 저자인 막스 뮐러는 평생에 소설책이라고는 저 책 한 권만 썼대요. 사실 동양학자인데. 그래서 그런지 좀 동양적인 분위기가 책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하구.. 하지만 사랑이야기로는 손색이 없어서 저는 저 부분이 참 찡했는데, 다락방님은 어떠실지 모르겠네요. 고개를 젓게 되시는 건 아닐지ㅎㅎ 책이 사실 길지는 않아서 빨리 읽으실 수 있을거에요. 생각나시면 한 번 읽어보시구.. 부디 실망하지 않으시길 바랍니다요.

2012-03-27 22:45   좋아요 0 | URL
아아, 세상은 넓고 책은 많고 읽을 시간은 적군요...

가연 2012-03-28 16:23   좋아요 0 | URL
정말 옳은 말씀입니다ㅠㅠ 저도 요즘 참 책이 많이 쏟아져 나온다, 라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네요. 정말 책이 많이 출간되고, 출간되었고..ㅠㅠㅠ

2012-03-29 10: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29 2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3-30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4-03 0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